기타
토법의 시행착오 — 재현이라는 이름의 창작
역산의 눈은 만능이 아니다. 서양 물시계를 역산해 톱니의 잇수와 배열을 알아내도, 그것을 조선의 재료·연장·장인의 손으로 다시 만드는 것은 별개의 지옥이다. 무쇠는 서양 강철만큼 단단하지 못해 압력에 터지고, 정교한 나사는 조선의 줄로 깎이지 않으며, 밀폐용 가죽은 증기에 삭는다. 채유선은 역산으로 얻은 '정답의 도면'과 조선 현실 사이의 간극을 토법으로 메워야 한다 — 청동 대신 놋쇠 합금 비율을 바꾸고, 나사를 쐐기와 편심으로 대체하고, 물시계의 원리를 자격루의 부표 구조와 결합한다. 이 시행착오 자체가 이야기의 볼거리다. 한 번의 성공 뒤엔 열 번의 폭발과 균열, 그리고 그때마다 대가로 앓아눕는 몸이 있다. 재주로 얻은 답을 손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채유선은 비로소 '역산으로 못 얻는 것'의 무게를 배운다.
세력
노론과 실학의 대치, 그리고 정조의 화성
조정은 실용을 배격하는 예법을 방패로 삼은 노론 벽파가 다수를 점한다. 이들에게 새 기술은 '오랑캐의 잔재주'요, 서얼이 재주로 위를 넘보는 것은 강상(綱常)을 무너뜨리는 죄악이다. 그러나 노론의 힘은 예법과 옛 규례를 완벽히 장악한 데서 온다 — 이것이 도리어 약점이다. 대동법의 시행 규례, 둔전 운영의 옛 법도, 공납의 절차. 이 법들은 원래 백성의 이익을 위해 세워졌기에, 정교하게 인용하면 노론이 세운 법도가 노론을 치는 칼이 된다. 반대편엔 정조가 있다. 왕은 규장각과 검서관들을 통해 실학을 은밀히 키우며, 화성 축조를 새 세상의 시험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왕조차 노론을 정면으로 꺾지 못해, 채유선 같은 이름 없는 자를 밀명으로 부린다. 성공하면 왕의 공, 실패하면 서얼 한 명의 죄로 끝날 판이다.
세계관
신분의 벽과 잡직의 자리
조선은 신분이 재주를 삼키는 나라다. 서얼은 아무리 뛰어나도 문과에 오르지 못하고, 규장각 검서관이라는 명예직 아래 잡직으로 밀려난다. 채유선은 어미가 노비였던 천출 서얼로, 손끝의 재주 하나로 겨우 현장 잡직에 올랐다. 그가 아무리 옳은 도면을 그려도, 그것을 상신하고 재가받는 것은 양반 관료의 몫이다. 재주는 아래에 있고 공은 위로 흐르는 구조다. 게다가 조정의 법도는 '누가 말했는가'를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앞세운다. 옳음의 증명만으로는 판을 뒤집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 이름 없는 자가 살아남는 길은 정답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법도의 틈을 읽어 상대의 규례로 상대를 옭아매는 것뿐이다. 채유선의 결벽 — 정답을 앞세우다 사람의 이해관계를 놓치는 버릇 — 은 바로 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다.
힘의체계
역산의 눈 — 결과에서 공정을 거슬러 읽는 감각
역산의 눈은 발명이 아니라 해독의 재주다. 완성된 기계·구조물·기물을 응시하면 그 최종 형태로부터 제작 공정을 거꾸로 되짚어, 필요한 재료의 성질·부품의 치수·조립 순서·허용 오차까지 심상의 도면으로 펼쳐낸다. 그러나 절대 규칙이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결과물'을 눈으로 보아야만 작동하며, 무에서 새 원리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청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물시계, 흠경각 자격루, 서양 총포의 파편 — 눈앞에 실물이나 정교한 그림이 있어야 비로소 역산이 시작된다. 대가는 잔혹하다. 역산할 때마다 심상 도면이 뇌리를 잠식해 하루이틀 넋을 놓거나 고열에 앓아눕고, 큰 구조물을 통째로 역산하면 며칠씩 말을 잃는 실어(失語)에 빠진다. 하필 조정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할 결정적 순간에, 채유선은 혀가 굳어 한마디도 못 하곤 한다. 재주가 큰 만큼 몸이 그 값을 치른다.
지역
화성 축조 현장 — 증기가 곧 이권이 되는 땅
수원 화성 축조 현장은 조선 기술의 총화가 모인 거대한 실험장이다. 거중기와 녹로가 돌을 들어올리고, 수천의 부역꾼과 장인, 감독관이 뒤엉킨다. 채유선은 이곳에서 증기기관 실용화라는 밀명을 수행한다. 문제는 증기가 곧 이권이라는 점이다. 물을 끓여 힘을 내는 기관이 완성되면 채석·운반·양수의 비용이 격변하고, 그 이익과 손실은 곧바로 자재 상인·부역 감독·둔전 관리·궁방의 주머니와 직결된다. 새 기술은 누군가의 밥그릇을 깨는 칼이다. 현장의 대장간과 임시 공방에서 채유선은 서양 물시계와 총포 파편을 역산해 밸브·피스톤·보일러의 토법(土法) 재현을 시도하지만, 무쇠의 강도·주물의 균열·연료의 화력 같은 현실의 벽에 번번이 막힌다. 화성의 성벽이 올라갈수록, 그 아래 이권의 암투도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