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궐 뜰의 박석은 밤새 내린 서리로 허옇게 얼어 있었다.
유선은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손등의 물집이 얼어붙은 돌에 눌려 터질 듯 화끈거렸다. 화성에서 한양까지 사흘 길을 죄인으로 끌려왔고, 그 사흘 동안 혀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잔해를 역산한 대가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입안에서 말이 진흙처럼 뭉개졌다.
"채유선. 규장각 잡직 채유선이렷다."
전상(殿上)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노기 하나 없이, 봄볕처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유선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좌의정 심환지. 화조차 웃음으로 짓는 자라 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심환지가 옥좌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임금은 발 뒤에서 미동도 없었다.
"이자는 천출 서얼이옵니다. 어미가 관비였고, 규장각의 검서 명목 아래 잡직으로 겨우 몸을 붙인 자이옵지요. 헌데 이자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오랑캐의 잔재주를 익혀, 화성 공역의 부역꾼을 상하게 하고, 불을 내어 나라의 자재를 태웠사옵니다."
"…"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불이 아니옵니다. 재주가 제 자리를 넘은 것이옵니다. 아랫것이 위의 일을 논하고, 천한 손이 나라의 그릇을 빚으려 드는 것—이것이야말로 강상(綱常)을 무너뜨리는 일이옵니다. 물이 위로 흐르면 나라가 뒤집히옵니다."
전각 안이 물을 뿌린 듯 잠잠했다. 유선은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아니다. 불은 내가 낸 것이 아니다. 통 밑둥 이음새가 다섯 겹이어야 했는데 들어온 무쇠는 세 겹뿐이었다. 압을 못 버텨 터진 것이다. 장부에 그 결손이 다 적혀 있다—*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혀가 그것을 뱉지 못했다. 유선은 입술을 달싹였다. 바람 새는 소리만 났다.
"소인은—"
"소인이라."
심환지가 말끝을 잘랐다. 잔잔하게.
"전하 앞에서 아뢰는 격식조차 모르는 자로군. 잡직의 신분으로 친국에 임하면 먼저 예방(禮房)의 인도를 받아 석차에 따라 대령해야 하거늘. 저 자는 지금 누구의 허락으로 입을 여는가."
병조참판 하나가 냉큼 받았다.
"좌상 대감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잡직이 조당에서 스스로 소명함은 규례에 없는 일이옵니다."
"규례에 없다."
심환지가 그 말을 곱씹었다. 마치 귀한 다완을 매만지듯.
"규례에 없는 일을 하는 자는, 규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요. 규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강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옵니다. 보십시오, 전하. 죄의 뿌리가 여기 있사옵니다."
유선은 이를 악물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가 화성에서 밤을 새워 그린 도면, 무쇠의 겹수와 김의 압력과 톱니의 잇수까지 한 치 오차 없이 계산해낸 그 정답이 지금 심환지의 소맷자락 어딘가에 접혀 있을 터였다. 압수당한 도면. 그것이 지금 자신을 겨누는 칼이 되어 있었다.
전각 서편 반열 끝에서 유득경이 반보 앞으로 나섰다.
"아뢰옵니다. 저 채유선은 규장각의 명을 받아 화성 공역에 소용되는 자재의 실상을 밝히던 중이었사옵니다. 장부에 기록된 무쇠와 실제로 들어온 무쇠가—"
"검서관."
심환지가 이번에도 웃었다.
"검서관은 서책을 정리하는 자리요. 언제부터 공역의 자재를 논하는 자리가 되었소? 그대 또한 석차를 벗어나고 있소이다. 물러서시오."
유득경의 입이 다물렸다. 반열의 관료
들이 하나둘 유득경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 시선의 냉기가 유선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옳은 말을 한 자가 도리어 격식을 어긴 죄인이 되는 자리. 여기서는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말했느냐, 어느 자리에서 말했느냐가 모든 것이었다.
유선은 얼어붙은 박석에 손바닥을 짚었다. 물집이 눌려 진물이 배어나왔다. 그 통증을 지렛대 삼아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자재… 장부에… 결손이…"
혀가 다시 뭉개졌다. 세 마디를 잇기도 전에 말이 진흙 속으로 가라앉았다. 잔해를 역산한 대가는 이토록 잔혹했다. 하필 지금, 온 조정이 그의 말을 기다리는—아니, 그의 침묵을 기다리는 이 순간에.
"들으셨사옵니까, 전하."
심환지가 나직이 아뢰었다.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옅은 만족이 스몄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자가 어찌 나라의 그릇을 빚었다 하겠사옵니까. 저 어눌함이야말로 하늘이 신분을 나눈 이치이옵니다. 재주가 있다 한들 그것이 제 자리를 넘으면, 보십시오, 저렇게 말문이 막히고 손이 떨리는 법이옵니다."
병조참판이 다시 거들었다.
"강상을 어지럽힌 죄, 실화의 죄, 그리고 조당의 격식을 범한 죄. 세 죄를 물어 마땅히 국문하고 도배(徒配)에 처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전상에서 마침내 임금의 음성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선이 기다린 감싸안음이 아니었다.
"좌상의 말에 이치가 있다."
유선은 숨이 멎었다. 발 뒤의 그림자, 자신에게 화성의 밀명을 내린 그 임금이, 지금은 얼음처럼 물러서 있었다. *법도 안에서 스스로 살아남으라.* 화성에서 들은 그 말이 이제야 뼈에 사무쳤다. 왕은 노론과 정면으로 부딪지 않는다. 부딪을 수 없다. 그러니 이 뜰에서 유선을 지켜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허나."
임금이 말을 이었다.
"실화와 자재의 일은 화성 도청의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죄의 경중은 그 회신을 받아 다시 논하라. 오늘은 물러들 가라."
즉결을 면한 것뿐이었다. 임금은 유선을 구한 것이 아니라, 판을 뒤로 미룬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심환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다시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려(聖慮)가 깊으시옵니다. 다만 그때까지 저 자를 규장각의 잡직에서 물리시고, 화성 공방의 출입을 봉하심이 규례에 합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죄가 정해지기 전이라도, 강상을 범한 혐의가 있는 자에게 나라의 연장을 쥐어둘 수는 없는 까닭이옵니다."
*또 규례다.* 유선은 얼어붙은 돌바닥을 응시했다. 심환지는 화도 내지 않고, 목청도 높이지 않았다. 그저 규례, 규례, 규례. 격식과 절차와 강상의 법도. 그 자는 마치 규례라는 촘촘한 그물을 짜서 유선의 목을 조르는 어부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유선의 뇌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심환지는 규례를 무기로 쓴다. 하나 무기로 쓰려면, 규례를 완벽히 알아야 한다. 자신이 세운 법도의 한 조항이라도 어긋나면, 그것은 곧 자기모순이 된다. 방금도 그렇지 않았던가—'죄가 정해지기 전이라도'라고 그는 말했다. 죄가 정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처분을 청했다. 규례에 그토록 밝은 자가, 규례의 어느 조항으로 그 처분을 청했는가?
유선은 고개를 아주 조금 들었다. 심환지의 소맷자락, 접힌 도면이 있을 그 자리를 보았다. 저 자는 남의 법을 빌려 나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남의 법이 아니라, 저 자가 딛고 선 법 자체에 금이 있다면.
*저 자는 규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죄인이라 했다. 그렇다면 규례를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규례로 남을 치는 자다. 그 자야말로 규례 한 조항 어긋남에 스스로 목이 걸린다.*
말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유선은 이 얼어붙은 뜰에서 도면이 아닌 다른 것을 보았다. 무쇠의 겹수도, 톱니의 잇수도 아닌—사람이 세운 법도의 이음새. 그 이음새에도 다섯 겹이 세 겹으로 줄어든 허점이 어딘가 있을 터였다.
친국은 파했다. 유선은 나졸에게 이끌려 대궐 문 밖으로 물러났다. 굳은 혀와 떨리는 손과 봉인된 잡직만을 안고서.
문 밖 회화나무 그늘에서 유득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당에서 물러설 때의 굴욕이 아직 그 얼굴에 남아 있었으나, 눈만은 이상하리만치 반짝였다. 그는 좌우를 살피더니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좀먹고 누렇게 바랜, 표지조차 떨어져 나간 낡은 책자였다.
"밤새 규장각 서고를 뒤졌습니다."
유득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대동사목(大同事目)』과 둔전 운영의 옛 규례를 모아 엮은 것입니다. 아무도 들추지 않아 먼지가 손가락 두께로 쌓여 있더군요."
그가 유선의 굳은 손에 그 책자를 쥐여주며, 회화나무 잎이 스치는 소리보다도 낮게 속삭였다.
"보십시오, 유선. 이 법들은 원래 백성의 이익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자재의 값을 속이고, 상등품을 청구하며, 결손을 감추는 일—그것이야말로 이 규례가 금한 죄입니다. 심환지가 규례로 그대를 쳤다면… 노론의 법으로, 노론을 칠 수 있습니다."
유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책자를 쥔 손끝에 처음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그때, 대궐 담장 모퉁이에서 낯익은 그림자 하나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치복의 겸인이었다.
겸인은 두 사람이 마주 선 것을 확인하고는 소리 없이 담장 뒤로 몸을 감췄다. 유득경은 그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유선은 굳은 목을 억지로 틀어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보였구나.*
혀는 여전히 진흙 속이었다. 유선은 책자를 쥔 손을 유득경의 소매 안으로 밀어넣었다. 지금 이 낡은 규례집을 제 품에 지녔다가는, 봉인된 잡직의 몸으로 규장각 서책을 사사로이 빼돌린 죄가 하나 더 얹힐 것이었다. 심환지의 규례 그물은 그런 것까지 촘촘히 옭아맬 터였다. 유득경이 뜻을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녀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유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짚었다가, 유득경을 가리켰다.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대가 말하라. 그 뜻이었다.
유득경의 얼굴이 흐려졌다. 조당에서 물러설 때의 굴욕이 다시 떠오른 모양이었다.
"허나 나 역시 검서관에 불과합니다. 좌상이 방금 뭐라 했는지 들으셨지 않습니까. 서책이나 정리하는 자가 자재를 논하느냐고… 나 또한 석차에 갇힌 몸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유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정면으로는 안 된다. 심환지가 세운 그물을, 심환지의 실로 되짚어야 한다. 유득경이 검서관이라 자재를 논할 자격이 없다면—자재를 논할 자격을 가진 자를 앞세우면 될 일이었다. 화성 도청. 임금이 방금 회신을 기다리라 명한 그 도청. 자재의 실상을 조사할 권한이 이미 규례로 그들에게 있었다.
유선은 얼어붙은 땅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었다.
道廳.
유득경이 몸을 숙여 그 두 글자를 읽었다. 그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도청… 그렇군요. 임금께서 도청의 회신을 기다리라 하셨으니, 도청이 자재의 결손을 밝히면 그것은 규례에 따른 정당한 조사가 됩니다. 검서관이 아뢰는 것도, 잡직이 소명하는 것도 아닌—규례가 정한 조사관의 손으로."
유선은 다시 흙바닥을 그었다.
大同事目.
"이 법으로 도청이 조사하게 만든다는 말씀이시군요."
유득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곧 그 떨림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좀처럼 억누르기 힘든 흥분이었다.
"이 안에 있습니다. 대동의 사목에는 관에 들이는 물종의 값과 질을 감관(監官)이 검험(檢驗)토록 한 조항이 있습니다. 값을 속이거나 하품을 상품으로 청구하면 그 죄를 감관과 색리에게 함께 물었지요. 백성이 억울하게 값을 물지 않도록 세운 법입니다. 김치복이 삼 할 썩은 무쇠를 상등품 값으로 궁방에 청구했다면—"
유득경이 말을 멈췄다. 스스로 그 결론에 도달하고는 침을 삼켰다.
"그것은 강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동의 사목을 어긴 것입니다. 심환지가 강상으로 그대를 쳤으나, 정작 그의 편에 선 김치복은 노론이 지키자는 그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바람이 회화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마른 잎이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 얼어붙은 땅에 그어진 글자를 덮었다. 유선은 그 잎을 손으로 쓸어내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문제는 도청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였다. 봉인된 잡직도, 석차에 갇힌 검서관도 도청을 움직일 수 없었다. 도청은 도청의 규례로만 움직인다. 누군가 정당한 자격으로 검험을 청해야 했다. 그리고 그 청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김치복이 아니라 김치복의 장부를 겨눠야 했다—압수당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를, 삼 할의 결손이 적힌 그 자재 장부를.
유선은 다시 입을 열려 했다. 이번에도 혀는 뭉개졌다.
"장… 부…"
유득경이 그 한 마디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흥분이 급격히 가셨다.
"장부라면… 유선. 그 장부는 감독관이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압수한 도면이 심환지에게 넘어갔듯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굳이 말을 잇지 않아도 같은 곳에 이르렀다. 결손이 적힌 장부야말로 김치복의 죄를 밝힐 증좌인 동시에, 김치복을 무너뜨릴 칼이었다. 그것이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가. 김치복과 결탁한 자들의 손이었다. 그들이 그 장부를 순순히 남겨둘 리 없었다.
바로 그때, 대궐 문 안쪽에서 나졸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달려나왔다. 그가 유선 앞에 멈춰 서더니,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 인장이 찍힌 도청의 첩지였다.
"화성 도청에서 온 회신이오. 조사가 벌써 끝났다 하오."
유득경이 먼저 받아 폈다. 그의 눈이 문장을 좇아 내려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딱 멎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이럴 수가."
유선은 굳은 손으로 첩지를 넘겨받았다. 얼어붙은 눈으로 글자를 읽었다.
*자재 장부를 검험한 결과, 들어온 무쇠는 모두 상등품이며 결손이 없음. 압력통의 파열은 오로지 채유선이 임의로 통의 겹수를 줄여 벼린 탓이니, 실화의 죄가 명백함—*
장부가 이미 고쳐져 있었다. 삼 할의 결손은 지워지고, 그 자리엔 유선이 제 손으로 무쇠를 축냈다는 거짓이 적혀 있었다. 도청의 붉은 인장까지 찍힌 채로.
유선의 굳은 혀 밑에서, 나오지 못한 말이 얼음처럼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