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날이 밝기 전, 채유선은 도면을 접었다.

붕대 감은 오른손이 종이를 다 여미지 못해, 왼손등의 진물 앉은 자리가 함께 쓰라렸다. 유득경은 규례집을 옆구리에 끼고 갓끈을 매만졌다. 어젯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절차는 뒤집는다. 허나 심환지는 마지막에 반드시 실물을 요구할 게야. 물건이 돌지 않으면, 다 소용없다.

"검서 어른."

채유선이 접은 도면을 품에 넣으며 물었다.

"만약 오늘, 그자가 실물을 요구하면. 어찌 답합니까."

유득경의 손이 갓끈에서 멎었다.

"오늘은 답하지 않아. 오늘은 절차만 되받는다. 실물은—"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실물은 자네가 세워 돌린 뒤에 답할 말이야.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그 세울 기회를 저자의 손에서 뺏어 오는 것뿐일세."

채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검서가. 나는 물건으로만.

*

조당에 든 것은 진시(辰時)였다.

어전의 대청은 서늘했다. 좌우로 늘어선 대신들의 관복이 아침 빛에 짙푸르게 가라앉았고, 옥좌 위의 정조는 무표정했다. 채유선은 뜰 아래 하급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붕대 감은 손을 무릎에 얹으니 그 하얀 것이 유독 도드라져, 몇몇 유생의 눈이 그리로 쏠렸다. 서얼 잡직 하나가 어전 뜰에 꿇은 것을 두고, 낮은 수군거림이 관복 사이를 흘렀다.

좌의정 심환지가 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화를 낼 자가 아니었다. 웃음기조차 없는 담담한 얼굴로, 그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화성 축조 규례에 이르기를, 잡직이 사사로이 기물을 지어 공역에 쓰고자 하면 반드시 유사의 상신을 거쳐 재가를 받게 되어 있사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고르게 방바닥을 기었다.

"헌데 저 서얼 채유선은 상신을 거치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쇠를 부어 통을 지었고, 그 통이 터져 부역꾼 둘이 크게 상하였사옵니다. 이는 강상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요, 아래가 위를 넘본 죄이옵니다. 규례가 곧 나라의 뼈대이거늘, 뼈대를 무너뜨린 자를 어찌 국문하지 아니하겠나이까."

대신들 사이에서 옅은 동조의 기침 소리가 났다. 채유선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사로이. 상신 없이. 그 두 마디가 넉 달 전 처음 이 조당에 상소로 오른 이래, 심환지가 붓끝으로 갈아 온 칼이었다. 무쇠 비리가 감영으로 넘어가 제 죄가 벗겨지자, 그자는 초점을 통이 아니라 절차로 옮겼다. 어떤 무쇠를 썼든 상관없었다. 상신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면, 서얼의 목을 조르는 데 충분했으니까.

옥좌가 침묵했다. 정조는 채유선을 감싸지 않았다. 규례로 걸었으니 규례로 풀라 — 그 한마디를 유득경을 통해 전한 뒤로, 왕의 얼굴엔 어떤 편도 실려 있지 않았다.

유득경이 반열에서 한 걸음 나섰다.

"전하, 검서 유득경 아뢰옵니다."

심환지가 그를 보았다. 눈꺼풀이 아주 살짝 처졌다.

"좌상 대감의 말씀, 규례를 정히 짚으셨나이다. 하오나—" 유득경이 옆구리의 규례집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 규례집을, 소신이 대감과 함께 펼쳐 보고자 하옵니다. 대감께서 인용하신 상신 조항은 축조 규례 제사(第四) 조이옵니다. 헌데 같은 규례집, 제육(第六) 조에 이르기를—"

그가 표지를 열고, 미리 접어 둔 자리를 짚었다. 손가락이 글자 위에 얹혔다.

"'어사물(御賜物)을 되짚어 지은 기물의 시험은 내탕 감동의 소관이니, 유사의 상신을 요하지 아니한다.'"

방 안의 공기가 한 박자 멎었다.

"채유선이 부어 지은 통은, 사사로운 창작이 아니옵니다." 유득경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자개 물시계의 톱니 얼개를 되짚어, 그 감속의 이치를 쇠로 옮긴 어사물의 역제(逆製)이옵니다. 어사물을 되짚은 기물의 시험은, 규례가 명백히 상신을 요하지 아니한다 적었사옵니다. 이는 소신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유득경이 규례집을 두 손으로 받쳐 심환지 쪽으로 반쯤 돌렸다.

"대감께서 손수 장악하신, 이 규례집 안의 글자이옵니다."

심환지의 홀을 쥔 손이 멈추었다.

정적이 길었다. 대신 하나가 목을 축이려다 헛기침을 삼켰다. 채유선은 고개를 조금 들어 심환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자의 표정에는 여전히 노기가 없었다. 다만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가, 다시 펴졌다. 제가 넉 달을 갈아 온 칼이, 같은 칼집 안의 다른 칼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소리를 그자만이 들은 듯했다.

"어사물의 역제라." 심환지가 천천히 홀을 고쳐 쥐었다. "검서는 저 통이 어사물을 되짚어 지은 것이라 어찌 증명하겠소. 서얼의 말 한마디로?"

"말이 아니옵니다." 유득경이 물러서지 않았다. "물건이옵니다."

그가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무릎 앞에 폈다. 채유선이 지난밤 다듬은, 물시계 톱니를 옮긴 감속 굴레의 도면이었다.

"이 톱니의 잇수와 배열은, 전하께서 하사하신 물시계의 그것과 하나도 어긋남이 없사옵니다. 통 안에 물린 굴레를 꺼내어 물시계와 나란히 맞추어 보소서. 이가 맞으면 역제요, 어긋나면 창작이옵니다. 이는 사람이 다투어 판별할 일이 아니라, 쇠와 쇠가 맞물려 판별할 일이옵니다."

쇠와 쇠가 맞물려. 채유선의 몫이 거기 있었다. 말은 검서가, 판별은 물건이. 그는 도면 위에 얹힌 유득경의 손끝을 보며, 붕대 아래 손가락을 아주 미미하게 오므렸다.

*

심환지가 물러선 자리를, 다른 이가 메우려 했다.

"전하, 자재 감독 김치복 아뢰옵니다."

반열 끝에서 김치복이 나섰다. 낯빛이 붉었다. 그는 채유선을 대할 때의 능글맞은 후원자 노릇을 벗고, 조당의 관복 앞에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검서의 말이 옳든 그르든, 저 통이 터져 사람이 상한 것은 사실이옵니다. 어사물이든 무엇이든, 애초에 쓰인 쇠가 부실하였으니 통이 갈라진 것이 아니겠나이까. 소신이 대준 자재는 감영 인장을 받은 상급이옵고—"

"바로 그 말씀을 기다렸소이다."

유득경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부드럽지 않은 잘림이었다. 채유선은 놀라 유득경을 보았다. 어젯밤까지도 이 패는 감영에 넘겨 두자 했던 유득경이었다.

"김 감독은 감영 인장을 받은 상급을 대었다 하셨소. 그렇다면 이것을 어찌 설명하시겠소."

유득경이 품에서 두 권의 장부를 꺼냈다. 하나는 감영에 올린 정본, 하나는 겁 많은 서기가 넘긴 원장부. 그는 두 장부를 조당 바닥에 나란히 폈다.

"같은 날, 같은 무쇠. 감영에 올린 장부엔 상급 값으로 적혔고, 감독의 손에 남은 원장부엔 하급 값 절반으로 적혔소. 그 차액이 열두 달, 얼마인지는 여기 먹으로 셈해 있소이다."

김치복의 낯빛이 붉은 데서 잿빛으로 갔다.

"그, 그것은 위조요! 서얼이 제 죄를 덮으려 꾸민—"

"위조라." 유득경이 원장부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여기 감독의 수결(手決)이 있소. 위조라면, 감독의 수결까지 서얼이 흉내 내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감독의 수결을 다시 써 보이시구려. 붓과 먹은 여기 있소."

김치복은 붓을 잡지 않았다. 붉었던 낯이 이제 창백하게 식어, 관복 깃이 유난히 짙어 보였다. 그의 눈이 심환지 쪽을 향했다. 좌의정은 그를 보지 않았다. 옥좌를 향해 홀을 세운 채, 아예 시선을 거두었다. 제 편이 침몰하는 배에서, 발을 먼저 뺀 것이었다.

김치복은 그 시선의 부재를 읽었다.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다.

"소신은…… 자재의 셈에 어두워, 아랫것의 농간을 미처 살피지 못하였을 뿐이옵니다. 이 일은 감영이 밝힐 것이오니, 소신은 물러가……."

그는 말끝을 흐리며 반열 뒤로 물러났다. 강상이니 절차니를 앞세워 채유선의 목을 조르던 두 손 중 하나가, 제 발로 판에서 내려간 순간이었다. 채유선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통쾌함보다 서늘함이 앞섰다. 이권 앞에서 사람은 저리 쉽게 편을 바꾸었다. 저자를 붙잡아 세우던 것은 이익뿐이었고, 이익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김치복이 물러서자, 조당의 눈이 다시 심환지에게 모였다.

절차는 되받쳐졌다. 자재는 무너졌다. 그를 옭던 두 겹의 그물이 함께 풀렸으니, 좌중은 이제 좌의정이 물러서리라 여겼다. 채유선의 붕대 감은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풀렸다.

그러나 심환지는 홀을 내리지 않았다.

"검서의 규례, 정히 옳소." 그가 담담히 말했다. 물러서는 자의 어조가 아니었다. "어사물의 역제는 상신을 요하지 않는다. 나도 그 조항을 부정하진 않겠소. 내가 장악한 규례집의 글자이니, 내가 부정하면 내 규례가 무너지는 것이라."

그가 옥좌를 향해 한 걸음 나섰다.

"허나 전하. 규례엔 이런 조항도 있사옵니다. '어사물의 역제로 지은 기물은, 그것이 나라의

쓰임에 실히 이로움을 보인 뒤에야 공역에 든다.' 되짚어 지었다 하여, 그 이로움이 저절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심환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아주 조금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노기가 아니라, 오래 벼려 둔 마지막 칼을 뽑는 자의 차분함이었다.

"저 서얼은 통을 지었으나, 그 통은 터졌사옵니다. 사람이 상하였사옵니다. 되짚어 지었다 한들, 나라에 이로움을 보이지 못한 기물을 어찌 공역에 들이겠나이까. 검서가 규례로 절차를 되받았으니, 소신도 규례로 아뢰옵니다. 저 잔재주가 참으로 나라의 대들보가 될 수 있다면—"

그가 홀 끝을 채유선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기울였다.

"눈앞에서 보이라 하소서. 그 통이 진짜 힘을 내어, 사람의 힘 아닌 김의 힘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것을. 규례가 이르는 '실히 이로움'을, 말이 아니라 물건으로."

채유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어젯밤 유득경이 예언한 그대로였다. 절차로 걸었다가 절차로 막히면, 그자는 마지막에 반드시 실물을 요구할 것이라던 말. 그러나 심환지는 그것을 협박이 아니라 규례의 조항으로 감쌌다. 되받을 틈조차 규례집 안에 없도록, 제 손으로 장악한 글자로 판을 다시 짰다.

대신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옳은 요구였다. 규례가 그리 적었다면, 서얼도 물러설 명분이 없었다.

유득경이 잠시 규례집을 내려다보았다. 그 조항은 그도 어젯밤 읽었을 것이다. 되받을 조항이 없다는 것도. 그의 갓 그림자 아래, 턱 근육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채유선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침묵을 들었다. 여기서 검서가 말을 못 찾으면, 서얼이 대신 입을 열면, 그것이야말로 심환지가 바라는 그림이었다. 아래가 위를 넘는 강상 문란. 말주변 없는 서얼이 어전에서 제 재주를 떠벌리다 탄핵의 빌미를 주는 것. 채유선은 무릎 위 붕대 감은 손을 꾹 눌렀다. 말은 검서가. 나는 물건으로만. 지금은 물건조차 없었다. 오직 침묵으로 답할 수밖에.

그러나 유득경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심환지 쪽으로 반 발 더 나섰다.

"좌상 대감의 말씀, 규례를 정히 짚으셨나이다." 그가 심환지의 아까 어조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실히 이로움을 보인 뒤에 공역에 든다.' 옳사옵니다. 하여 소신, 그 이로움을 물건으로 보이겠나이다. 사흘을 청하옵니다."

방 안이 술렁였다. 심환지의 눈매가 다시 좁아졌다.

"사흘 뒤, 화성 해자 앞에서." 유득경이 좌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물러서지 않는 못박음이었다. "채유선이 지은 김의 기관을 세워, 사람의 손 아닌 김의 힘으로 해자에 물을 끌어올려 보이겠사옵니다. 규례가 이르는 '실히 이로움'을, 그날 그 물이 답할 것이옵니다. 좌상 대감께서도 친히 와 보소서. 물이 오르면 규례대로 공역에 들이고, 물이 오르지 않으면—"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채유선은 검서의 옆얼굴을 보았다. 이 말은 어젯밤 나누지 않은 말이었다. 유득경이 판을 스스로 키우고 있었다.

"오르지 않으면, 소신도 채유선과 함께 규례의 벌을 받겠나이다."

정조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주 잠시 유득경에게 머물렀다. 옥좌는 여전히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유득경의 기일 못박음을 물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재가였다.

"사흘." 심환지가 홀을 천천히 내렸다. 되받쳐진 절차, 자멸한 자재, 그 모든 것을 넘어, 그는 마침내 제가 바라던 판을 얻은 자의 얼굴이 되었다. 서늘한 웃음이 그 담담한 낯에 처음으로 아주 옅게 번졌다.

"좋소. 사흘을 주리다."

그가 반열로 물러서며, 채유선을 처음으로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사흘 뒤, 저 서얼의 기관이 화성 해자에 물을 끌어올리지 못하면. 이 조당에서 되받쳐진 규례며 벗겨진 죄며 자재의 셈이며—"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모든 것은 도로 내 것이 되오. 검서까지 함께 벌을 청하였으니, 그날 무너지는 것은 서얼 하나가 아니라 규장각의 재주 전부일 것이오."

채유선은 고개를 들어 그자를 마주 보았다. 되받은 것이 아니었다. 되받은 자리에 더 큰 판이 세워졌을 뿐이었다. 사흘 안에, 홍만춘의 손으로, 조선의 무쇠로, 종이 위에선 붉지 않던 그 감속 굴레를 세워 돌려야 했다.

*

조당을 나선 것은 사시(巳時)가 기울 무렵이었다.

유득경은 규례집을 옆구리에 낀 채 말이 없었다. 뜰을 벗어나 궐문에 이르러서야, 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벌을 함께 받겠다는 말은, 자네와 상의하지 않았어."

채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없었다면 심환지가 기일을 사흘로 짧게 잘라 아예 세울 틈을 주지 않았으리란 걸, 그는 알았다. 검서가 제 몸을 걸어 판돈을 키운 덕에, 도리어 사흘이라는 시간을 얻었다.

"세우면 됩니다." 채유선이 말했다. "물건으로 답하기로 했으니."

"세울 수 있겠나." 유득경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하루도 아니고 사흘이라 하나, 무쇠를 정련하고 굴레를 물리고 이음새를 봉하는 데—"

채유선은 대답 대신 품에서 접은 도면을 꺼내 펼쳤다. 어젯밤 다듬은 감속 굴레. 종이 위에선 붉지 않던 그 선들. 그는 그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등줄기가 굳었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리는 자리, 축이 실린더 벽으로 물려 들어가는 그 이음매 한 곳에 — 어젯밤 붓을 놓을 때만 해도 없던 옅은 붉은 기가,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도면은 어제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제 이것을 사흘 안에 무쇠로 세워야 한다는 것. 그 무쇠의 한계를, 홍만춘의 줄이 깎아낼 수 있는 정밀의 한계를, 그의 눈이 미리 읽어 낸 것이었다.

붕대 감은 손끝이 그 붉은 실오라기 위에 얹혔다. 터질 자리는 보였다. 세우는 법은, 이번에도 눈이 알려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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