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이 또 녹아내렸다.
유선은 삭아 문드러진 소가죽 조각을 손끝으로 집어 올렸다. 증기가 스친 자리마다 검붉게 물러 터진 살점처럼 흐물거렸고, 손톱으로 누르자 젤리처럼 뭉개졌다. 통 밑둥 이음새에 물렸던 밀폐 가죽이었다. 반나절을 못 버텼다.
닷새 중 사흘이 갔다. 남은 것은 이틀.
"또 삭았습니까."
유득경이 등불을 들고 다가와 물었다. 유선은 대답 대신 가죽 조각을 그의 손바닥에 얹었다. 뭉개진 감촉에 유득경의 얼굴이 굳었다.
"청국 서책엔 서양이 무슨 짐승 가죽을 쓴다고 적혔는데… 여긴 그런 게 없질 않습니까. 무두질도 다르고, 기름도 다르고."
유선은 붓을 들었다. 손목이 세 번 미끄러졌다. 손등 물집은 이제 진물이 배어 나와 헝겊으로 동였는데도 붓대를 쥘 때마다 욱신거렸다. 겨우 종이 위에 글자를 눌러 새겼다.
—가죽이 삭는 것은 김이 살을 무르게 하고 기름을 빨아내기 때문.
유득경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을 수 없으면, 늦추면 된다.
"늦춘다니요."
유선은 대장간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홍만춘이 화덕 앞에 웅크려 시뻘건 무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쇠망치가 모루를 때릴 때마다 불티가 튀었다. 유선은 다시 붓을 눌렀다.
—한 겹이 삭는 데 반나절이면, 여러 겹을 겹치고 그 사이마다 들기름과 밀랍을 먹여 굳힌다. 바깥 겹이 삭는 동안 안쪽 겹이 버틴다. 삭기 전에 시연만 끝내면 된다.
유득경의 눈이 커졌다.
"영구히 못 막으면… 시연 한 판을 버틸 만큼만 버티게 한다는 겁니까."
유선은 처음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혀는 여전히 뿌리부터 굳어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붓끝은 확신에 차 있었다.
역산의 눈은 서양 물시계의 밀폐 구조를 완벽한 도면으로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도면이 조선 땅의 무엇으로도 그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답을 아는 것과 만드는 것은 지옥만큼 멀었다. 그러나 정답을 알기에, 어디까지 타협해도 되는지도 알았다.
"만춘 어른!"
유득경이 대장간으로 뛰어갔다. 유선도 절뚝이며 뒤를 따랐다.
홍만춘은 망치를 놓고 이마의 땀을 소맷자락으로 훔쳤다. 유선이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소가죽 다섯 겹, 그 사이마다 빗금—기름과 밀랍. 홍만춘이 쪼그려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다섯 겹을 어떻게 물려. 겹치면 두꺼워져서 이음새에 안 들어가."
유선이 가지 끝을 눌러 다시 그렸다. 겹가죽을 삶아 눌러 얇게 편 다음, 밀랍을 먹여 한 장처럼 붙인 그림이었다.
"…삶아서 눌러 붙인다? 갖풀칠 하듯이?"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만춘이 콧등을 문질렀다. 무두질한 소가죽을 잿물에 삶아 유연하게 만든 뒤, 여러 겹을 밀랍과 들기름으로 눌러 한 몸처럼 붙인다. 화성 장인들이 갑옷 미늘을 만들 때 쓰던 옛 수법과 닮은 데가 있었다.
"그거라면… 되겠구먼. 근데 기름 먹인 가죽은 물러. 압에 밀려나면 어쩔 텐가."
유선이 다시 그림을 그렸다. 가죽 겹 바깥에 놋쇠 판 한 겹. 홍만춘이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허, 접쇠 사이에 놋쇠 물리듯이 가죽 바깥도 놋쇠로 눌러 잡겠다? 압이 셀수록 놋쇠가 가죽을 통에 대고 눌러 붙인단 말이지. 그럼 새지도 않고 밀려나지도 않아."
압력이 셀수록 밀폐가 단단해지는 구조. 서양의 완벽한 강철 나사를 조선의 무른 무쇠와 무른 가죽으로 뒤집어 낸 답이었다. 유선은 삭는 가죽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삭는 성질을 인정하고, 그것이 삭기 전에 이기기로 했다.
밤새 잿물이 끓었다. 소가죽이 삶겨 나오고, 여인네들이 다듬이질하듯 눌러 폈다. 들기름 냄새와 밀랍 녹는 냄새가 공방에 자욱했다. 유득경이 밀랍을 데우다 손을 데고, 유선은 굳은 손으로 겹가죽을 눌러 붙이다 물집이 또 터졌다. 헝겊에 붉은 물이 번졌다.
동틀 무렵, 다섯 겹 겹가죽에 놋쇠 판을 물린 밀폐재가 완성됐다. 유선은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 무게를 가늠했다. 역산의 눈이 심상 속에서 통 밑둥의 압력 도면과 이 밀폐재를 겹쳐 보았다. 어긋남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정답의 도면과 조선의 손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맞물린 것은.
이제 몸통이었다.
"통 밑둥은 내가 맡지."
홍만춘이 팔을 걷었다. 화덕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폭발한 시제기의 통은 이음새가 세 겹뿐이라 압을 못 버티고 터졌다. 도면상 다섯 겹이어야 할 것을 김치복의 썩은 무쇠가 세 겹으로 줄여 놓았던 것이다.
"보통은 판을 겹쳐 리벳으로 박아. 근데 조선 무쇠는 물러서 리벳 구멍이 압에 찢어져."
홍만춘이 무쇠판 두 장을 겹쳐 들었다. 그의 눈이 화덕 불빛에 번들거렸다.
"우리 할아비가 대포 총신 만들던 접쇠 비법이 있어. 판을 겹쳐 박는 게 아니라, 시뻘겋게 달군 걸 겹쳐 접어서 두드려. 두드리면 두 쇠가 한 쇠가 돼. 이음새가 없으니 새지도, 찢어지지도 않지. 대신…"
홍만춘이 망치를 들었다.
"손목이 나가. 밤새 두드려야 하니까."
쇠망치가 모루를 때렸다. 규칙적인 타격이 공방을 울렸다. 시뻘건 무쇠가 접히고, 두드려지고, 다시 접혔다. 홍만춘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유선은 풀무를 밟았다. 굳은 혀로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발끝으로 바람을 보내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유득경은 물을 길어 나르고, 식은 쇠를 다시 화덕에 넣었다.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망치 소리와 풀무 소리와 물 끓는 소리가 대화를 대신했다.
동이 두 번 텄다. 접쇠로 이은 통 밑둥이 완성됐을 때, 홍만춘의 손목은 부어 있었다. 유선이 그 이음새에 손을 얹었다. 역산의 눈이 접힌 쇠의 결을 거슬러 읽었다. 겹겹이 접힌 무쇠가 서양 강철 못지않은 두께와 밀도로 통을 감싸고 있었다. 폭발한 세 겹의 실패가, 여덟 겹의 접쇠로 되살아났다.
"이름."
홍만춘이 불쑥 말했다. 유선이 그를 돌아보았다.
"성공하면 상량문에 홍만춘 석 자. 약조 잊지 마시게."
유선은 굳은 손으로 흙바닥에 썼다. 홍만춘. 딱 세 글자였지만, 그 획 하나하나에 힘을 실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자기 어미의 몫까지 실은 세 글자였다. 홍만춘이 그 글자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망치를 들었다.
밀폐재와 통 밑둥이 갖춰졌다. 남은 것은 조립. 피스톤과 밸브를 통에 물리고, 보일러와 이어 물을 퍼 올리는 관을 다는 일이었다. 시연 하루 전 저녁, 유선은 부품을 늘어놓고 순서를 짚었다.
그런데 밸브 축이 없었다.
유득경이 자재 궤를 뒤졌다. 없었다. 피스톤 봉을 잡아 주는 쇠고리도, 관 이음쇠 절반도 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여기 있었습니다. 분명히… 내 손으로 세어 넣었는데."
유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는 절뚝이며 자재 궤로 갔다. 손끝으로 궤 바닥을 훑었다. 나무 부스러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훔쳐 간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없던 것처럼, 흔적까지 지워 놓았다.
"김치복."
유득경이 이를 갈았다. "시연을 앞두고 급소만 골라 빼돌린 겁니다. 밸브 축, 쇠고리, 이음쇠… 이게 없으면 통은 있어도 움직이질 못하잖습니까!"
유선은 궤 옆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새 자재를 청구해 봐야 김치복의 손을 거쳐야 하고, 그가 순순히 내줄 리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방해였다. 만들 것을 다 만들어 놓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작은 부품들만 골라서 없앤 것이다.
홍만춘이 사라진 부품 자리를 들여다보다 낮게 물었다.
"이게 없으면 안 돌아가는 거요?"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붓을 집었다. 손이 떨려 첫 글자가 뭉개졌지만, 이를 악물고 눌러 썼다.
—없으면, 만든다.
역산의 눈이 다시 열렸다. 유선은 완성된 밸브의 형상—이미 통에 물려 본 그 축의 형태—를 심상 속에 떠올렸다. 사라진 부품도 한때 눈앞에 있던 것이었다. 그 치수, 그 오차, 그 물림새가 도면으로 펼쳐졌다. 대가는 알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굳은 혀가 더 깊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이 필요했다.
—밸브 축은 쇠막대를 깎아 대체. 쇠고리는 놋쇠 판을 접어 만든다. 이음쇠는 접쇠 자투리를 두드려 잇는다.
"밤을 새워야겠구먼."
홍만춘이 다시 화덕에 불을 지폈다.
그날 밤은 지옥이자 축제였다. 홍만춘이 쇠막대를 깎아 밸브 축을 벼렸다. 유득경이 놋쇠 판을 접어 쇠고리를 두드렸다. 유선은 흔들리는 손으로 치수를 짚고, 오차가 손톱만큼만 어긋나도 흙바닥에 다시 그렸다. 정답의 도면이 있었기에 급조한 부품도 어디를 깎고 어디를 남길지 알았다.
새벽닭이 울 무렵, 유득경이 관 이음쇠를 맞추다 손을 멈췄다.
"이상합니다."
그가 사라진 자재 궤 옆 흙바닥을 등불로 비췄다.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그중 한 켤레—신코가 뭉툭하고 뒤축이 닳은 자국이 자재 창고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건 김치복 겸인 발자국입니다. 잡물고 앞에서 본 그 신코예요. 부품만 빼돌린 게 아니라… 자재 창고에도 들어갔단 겁니다."
유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절뚝이며 자국을 따라갔다. 자재 창고 문 앞, 흙바닥에 붉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인주였다. 문서에 인장을 찍고 급히 나오다 흘린 자국.
—장부.
유선이 흙바닥에 썼다. 손이 떨려 획이 갈라졌지만 유득경은 알아보았다.
"김치복이 시연 직전에 자재 장부를 또 손봤다는 겁니까. 부품을 빼돌린 걸 덮으려고… 결손을 다시 지웠겠지요."
유선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붓을 들어 종이에 빠르게 써 내려갔다. 손끝이 떨리는데도 글자에 힘이 실렸다.
—덮을수록 자국이 남는다. 열흘 주기로 손본 장부에 오늘 자 인장이 또 찍혔다면, 도청 원본과 대조해 날짜만 맞춰 봐도 조작이 드러난다. 방납의 죄 위에 문서 위조가 겹친다.
유득경이 숨을 삼켰다.
"규례로 남을 치는 자가… 규례의 어긋남에 걸린다."
바로 그것이었다. 김치복은 시연을 망치려 부품을 빼돌렸지만, 그것을 덮으려 장부를 또 고침으로써 자기 목에 밧줄을 하나 더 걸었다. 심환지가 예법에 갇히듯, 김치복은 장부에 갇혔다. 유선은 그 붉은 인주 자국을 헝겊에 조심스레 찍어 갈무리했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급조한 부품들이 통에 물렸다. 유선이 마지막 밀폐재를 이음새에 끼우고, 놋쇠 판으로 눌러 잡았다. 홍만춘이 화덕 불을 보일러 아래로 옮겼다. 물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통 앞에 섰다. 물이 끓고, 김이 차오르고, 압이 밀리기 시작했다. 겹가죽이 놋쇠에 눌려 새지 않았다. 접쇠 이음새가 압을 받고도 터지지 않았다. 김이 밸브를 밀어 올렸다. 피스톤이 움직였다.
쿵. 쿵. 쿵.
관 끝에서 물이 뿜어 나왔다. 사람 손으로 두레박을 백 번 길어야 할 물이, 물을 끓인 힘만으로 콸콸 밀려 올라왔다. 유득경이 소리를 질렀고, 홍만춘은 부은 손목도 잊고 통을 부여잡았다. 유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굳은 혀로는 아무 소리도 못 냈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있었다. 정답의 도면과 조선의 손이, 마침내 물을 밀어 올렸다.
이름 없는 자들의 손이 물을 밀었다.
그러나 유선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공방 밖에서 부역꾼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시연 뜰… 시연 뜰 앞 물길이!"
홍만춘이 그를 붙들었다. "물길이 뭐가 어쨌다고!"
"막혔습니다! 밤새 누가 흙과 돌로 봇도랑을 틀어막아서… 시연장에 물이 한 방울도 안 들어옵니다! 물이 없으면… 퍼 올릴 물이 없질 않습니까!"
유선의 손에서 붓이 떨어졌다. 양수기는 완성됐다. 물을 밀어 올릴 힘도 갖췄다. 그러나 밀어 올릴 물 자체가 사라졌다. 김치복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기계를 못 부수니, 물을 없앴다.
먼동이 트는 하늘 아래, 텅 빈 봇도랑이 흙빛으로 갈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