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는 어전 바닥에 펼쳐진 채 접히지 않았다.
붓끝이 가리킨 이름 석 자, 채유선. 그 위로 심환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화색도 노기도 없이, 다만 오래 벼려 온 칼을 마침내 쓰는 자의 고요함만이 있었다.
"강상의 문란이옵니다, 전하. 국문으로 다스리소서."
정조는 상소를 내려다보았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편전의 향불이 곧게 타올랐고, 좌우로 늘어선 노론 대신들의 눈이 왕의 입술을 향해 모였다. 김치복의 무쇠 부정이 감영으로 넘어간 지 사흘, 채유선이 누명을 벗었다 여긴 그 자리에서 벽 뒤의 진짜 벽이 걸어 나온 것이다.
"경의 뜻은 알겠소." 왕은 상소를 도로 심환지 쪽으로 밀지 않았다. 거두지도 않았다. "허나 자재의 부정과 규례의 문란은 갈래가 다르니, 사헌부가 절차대로 캐어 아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심환지가 물러났다. 그 뒷모습에 승기의 그림자가 어렸다. 절차대로 캐라 함은, 절차 밖에서 왕이 채유선을 감싸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
*
그날 저녁, 규장각 뒤편 검서청.
유득경이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섰을 때, 그의 손에는 겉봉도 없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채유선은 붕대 감은 오른손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 화상의 진물이 아직 마르지 않아, 손을 펴면 붕대 안쪽이 당겼다.
"전하께서." 유득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늘 서책 이야기에 들뜨던 그가, 오늘은 문틈부터 살폈다. "은밀히 말을 넣으셨네."
"뭐라 하셨습니까."
"짐이 나설 순 없다." 유득경이 종이를 접었다. 태우려는 듯 화로 쪽으로 손을 뻗다 멈췄다. "규례로 걸었으니, 규례로 풀라."
채유선의 붕대 감은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그게…… 전하의 하교입니까." 목이 잠겼다. "국문 상소가 어전에 올랐는데, 왕께서 그저 규례로 풀라 하십니까. 저 하나 감싸주지 못하십니까."
"감싸주면 어찌 되겠나." 유득경이 마주 앉았다. 그의 눈이 서늘했다. "전하께서 서얼 잡직 하나를 두둔하시는 순간, 심환지는 상소를 백 장으로 늘리네. 강상을 어긴 자를 왕이 비호한다고. 그럼 자네 목이 아니라 화성이 통째로 넘어가. 밀명도, 김의 기관도, 다 끝나는 게야."
향불 냄새가 방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규례로 걸었으니 규례로 풀라." 유득경이 그 말을 다시 뇌었다. 이번엔 채유선을 향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전하께선 우리에게 길을 주신 걸세. 나서지 않는 것이 곧 나서는 것이지. 심환지가 휘두른 그 규례집 안에, 자네를 살릴 조항이 반드시 있다는 뜻이야."
"제 눈으로 봐도 없으면요."
"그럼 자네 눈 말고 내 눈으로 찾겠네." 유득경이 처음으로 웃었다. "청국 서책을 밤새 읽어 눈이 짓무른 이 검서관의 눈이, 이럴 때 쓰는 게 아니면 어디 쓰겠나."
*
이틀 밤을 검서청에서 지새웠다.
유득경은 축조 규례집의 낱장을 벽에 붙여 가며 읽었다. 대동법 시행 규례, 둔전 운영의 옛 법도, 공납 절차, 어영청 군기 제조의 조례까지. 노론이 완벽히 장악한 법도의 숲을, 그 숲을 심은 자들의 손으로 되짚어 걸어 들어갔다.
채유선은 그 곁에서 다른 것과 씨름했다.
무릎에 자개 물시계 함을 올려놓고, 성한 왼손 손가락 끝으로 톱니를 하나하나 짚었다. 정조가 밀명과 함께 건넨 물건. 이것을 되짚어 힘을 내는 기관으로 만들라 하셨다. 넉 달 전 어전에서 이 함을 끌어안았을 때는, 톱니가 그저 시각을 나누는 장치로만 보였다.
지금은 달랐다.
큰 톱니가 한 바퀴 돌 때 작은 톱니는 다섯 바퀴를 돈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빠른 힘을 느린 힘으로, 사나운 힘을 다스린 힘으로 바꾸는 원리. 김의 힘이 실린더를 밀어붙이는 그 사나움이, 바로 통을 터뜨린 화근이었다. 압을 한 번에 받으니 무쇠가 견디지 못했다.
채유선의 눈앞에, 붉지 않은 심상의 선이 처음으로 그려졌다.
"이걸…… 사이에 넣으면."
큰 톱니와 작은 톱니를 짝지어, 피스톤이 미는 힘을 여러 번으로 나눠 받는 감속의 굴레. 한꺼번에 통을 때리던 압이 톱니를 타고 흩어진다. 물시계가 물의 무게를 톱니로 나눠 시각을 재듯, 김의 압을 톱니로 나눠 힘을 잰다.
채유선은 붕대 감은 오른손을 무시하고 왼손만으로 숯을 쥐었다. 종이 위에 실린더를 그렸다. 그 옆에 물시계의 톱니 배열을 옮겨 그렸다. 잇수를 세고, 지름의 비를 계산하고, 축이 걸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완성된 도면을 응시했다.
붉은 선을 찾았다. 응력이 몰릴 이음새, 갈라질 자리, 터질 압력점. 눈이 저리도록 노려보았다.
……없었다.
바늘 끝만 한 티도 없었다. 감속 굴레가 압을 나눠 받는 그 도면 위에, 붉은 균열이 어리지 않았다. 폭발로 사람 둘을 상하게 했던 그 사나운 힘이, 톱니를 타고 얌전해져 있었다.
"유 검서." 채유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봤습니다. 아니, 안 봤습니다. 붉은 게…… 없습니다."
유득경이 벽에서 돌아보았다.
"물시계입니다." 채유선이 물시계 함을 들어 보였다. 붕대 사이로 손가락이 떨렸다. "전하께서 주신 이 물건이, 통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줬습니다. 톱니로 힘을 나누면, 무쇠가 안 터집니다. 이번엔…… 눈이 붉지 않습니다."
*
유득경은 그 도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물시계 톱니와 실린더가 나란히 그려진 종이. 그의 손끝이 톱니의 잇수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론에 밝은 자였다. 청국 기술서에서 톱니의 배열을 백 번 읽었으나, 그
것을 조선의 무쇠로 재현한 물건은 본 적이 없었다.
"이걸 자네가……." 유득경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서책의 열기가 되살아났다. "넉 달을 씨름한 게 이거였나. 물시계를 되짚어 김의 힘을 다스린다."
"되짚었다는 말." 채유선이 붕대 감은 손을 도면 위에 얹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저는 이 원리를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주신 물건에서 캐낸 겁니다."
유득경의 손이 멈췄다. 벽에 붙인 규례집 낱장들을 향해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방금 뭐라 했나. 다시."
"제가 새로 지어낸 게 아니라, 하사받은 물건을 되짚었다고—"
유득경이 벌떡 일어섰다. 앉았던 방석이 미끄러졌다. 그는 벽으로 달려가 낱장 하나를 뜯어내듯 떼어 냈다. 어영청 군기 제조의 조례가 아니었다. 그 옆, 이틀 내내 눈이 스쳐 지나갔던 낡은 조항이었다.
"어사물(御賜物)." 유득경이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 여기 있네. 규례집 축조 잡례(雜例) 안에. '무릇 어사물을 되짚어 만든 기물의 시험은 내탕 감동(內帑監董)의 소관으로 하며, 유사(有司)의 상신을 요하지 아니한다.'"
채유선의 왼손이 물시계 함의 모서리를 쥐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뜻이라니!" 유득경이 종이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이 붉었다. "심환지가 자네를 건 죄목이 무엇인가. 상신 없이 사사로이 기관을 걸었다는 것. 잡직이 유사의 상신 없이 주물을 했다는 것. 헌데 이 조항이 뭐라 하나. 어사물을 되짚어 만든 기물은 상신을 요하지 않는다 하지 않나!"
향불이 흔들렸다.
"자네가 만든 김의 기관은." 유득경의 손끝이 물시계 함을 가리켰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이 물시계를 되짚어 만든 기물이야. 곧 어사물의 소산이지. 어사물을 되짚은 기물의 시험은 내탕 감동 소관이요, 상신을 요하지 않는다. 심환지가 걸어 온 그 규례가, 바로 이 규례집 안에서 자네를 풀어 주고 있네!"
채유선은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물시계를 보았다. 넉 달 전, 어전에서 이 함을 끌어안고 홀로 남았을 때는 몰랐다. 이것이 힘을 내는 기관의 씨앗이라는 것만 알았지, 훗날 자기 목을 살릴 명분이 되리라고는.
정조는 이 물건을 건넬 때 이미 알았던 것일까. '규례로 걸었으니 규례로 풀라'는 하교가, 이 조항을 가리킨 것이었을까.
"허나." 채유선의 목소리가 다시 잠겼다. 붕대 감은 손이 무릎으로 내려갔다. "이걸 누가 조당에서 말합니까."
유득경이 종이를 든 채 돌아보았다.
"저는 말을 못 합니다." 채유선이 도면을 밀어냈다. "지난번 김치복의 무쇠를 지적할 때도, 저는 증좌 없이 감영 장부를 거짓이라 외쳤다가 무고죄로 몰렸습니다. 저는 사람의 체면을 모르고, 조당의 법도를 모릅니다. 제가 이 조항을 읽으면, 심환지는 또 다른 트집을 잡을 겁니다. 서얼이 규례를 함부로 인용해 위를 능멸했다고. 저는…… 조당에서 말로는 못 이깁니다. 물러나겠습니다. 검서께서 이 조항만 조 감동관께 넘겨 주시면—"
"채유선."
유득경이 그의 말을 잘랐다. 늘 물러 보이던 검서관의 목소리가, 이번엔 단단했다.
"자네가 물러나면, 이 조항은 죽은 글자야." 그가 도면과 규례집 낱장을 나란히 들었다. 한 손엔 물시계를 되짚은 도면, 한 손엔 어사물 조항. "생각해 보게. 이 조항이 살아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 자네가 만든 기관이 정말로 어사물을 되짚은 것이라는 증거. 그 증거가 곧 이 도면이고, 이 물시계고, 자네 눈일세. 말은 내가 하지. 나는 청국 서책을 밤새 읽어 눈이 짓무른 검서관이야. 조당의 법도도, 규례의 갈래도 안다. 허나 이 도면을 그린 건 나일 수 없어. 물시계 톱니가 어떻게 김의 압을 나누는지, 그걸 되짚은 건 자네 손이고 자네 눈이니까."
유득경이 도면을 채유선의 앞으로 다시 밀었다.
"자네 재주가 곧 증좌일세. 말은 내가 해. 자네는 물건으로만 답하게. 그게 우리 몫을 나누는 길이야."
채유선은 밀려온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손가락 끝이, 물시계 톱니를 옮겨 그린 선 위에 얹혔다. 어미가 천출로 죽어 가던 그 방에서, 아무도 어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재주는 아래에 있고 공은 위로 흐르는 나라. 홍만춘의 이름 석 자를 장부에 올리겠다던 약속이, 지금은 제 이름 하나 지키는 일과 뒤엉켜 있었다.
"……물건으로 답하겠습니다." 채유선이 고개를 들었다. "말은 검서께서."
*
대질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유득경은 어사물 조항을 필사해 조 감동관에게 넘길 초안을 매만졌고, 채유선은 새 실린더의 감속 굴레 도면을 다듬었다. 톱니의 잇수를 다시 세고, 축이 걸릴 자리를 옻으로 봉할지 무쇠로 물릴지를 놓고 밤이 깊도록 붓을 놀렸다.
자정 무렵, 유득경이 규례집을 덮었다. 두꺼운 표지가 둔탁하게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걸로 절차는 뒤집는다." 그가 규례집 위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승기의 빛이 없었다. "어사물 조항이면 심환지의 상신 규례를 정면으로 되받아. 그자도 이 조항을 부정하진 못해. 제 손으로 장악한 규례집 안의 글자니까."
채유선이 붓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허나." 유득경의 손이 규례집 표지를 천천히 쓸었다. "심환지가 그 정도로 물러날 자였다면, 애초에 상소를 올리지도 않았겠지. 그자는 규례로 걸었다가 규례로 막히면, 마지막엔 반드시 한 가지를 요구할 게야."
"무엇을 말입니까."
"실물." 유득경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사물을 되짚어 만든 기물이 진짜 힘을 내는지, 눈앞에서 돌려 보이라 할 걸세. 조항이 아무리 옳아도, 자네 도면이 아무리 붉지 않아도, 조당에서 통이 돌지 않으면—"
유득경이 규례집 위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 소용없네. 물건이 돌지 않으면, 조항도 도면도 자네 눈도, 전부 서얼의 헛소리가 돼."
향불이 사그라들었다. 채유선의 붕대 감은 오른손이, 다듬다 만 도면 위에서 굳었다. 감속 굴레는 종이 위에선 붉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조선의 무쇠로, 홍만춘의 손으로, 하루 안에 세워 돌려 보이는 것은 — 전혀 다른 지옥이었다.
터질 자리는 보여도, 세우는 법은 눈이 알려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