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바퀴째에서 톱니가 걸리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손끝을 저리게 했다.
유선은 흠집 난 잇을 손톱으로 훑으며 무쇠 한 근이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홍만춘의 대장간에 가면 흠집 난 톱니를 다시 벼릴 수 있었다. 그러나 무쇠는 김치복의 손을 거쳐야 현장에 들었고, 청구서엔 서명이 있어야 했으며, 앓아 서명을 못 하는 자의 청구는 규례상 성립하지 않았다.
막힌 곳을 노려보는 대신, 유선은 감독관청 마당에 쌓인 자재를 응시했다.
무쇠 더미. 소나무 각목. 삼줄 뭉치. 완성된 기물이 아니어도 눈은 저절로 되짚기 시작했다. 이 무쇠 덩이가 여기 오기까지 거친 공정 — 캐고, 녹이고, 옮기고, 장부에 적히고. 심상의 도면이 펼쳐지자 관자놀이가 뜨끔했다. 대가가 두려워 얼른 눈을 감았다.
그때 조 주부의 목소리가 튀었다.
"또 장부를 훔쳐보느냐? 잡직 주제에."
"수급이 맞지 않습니다."
"무엇이 맞지 않아."
유선은 마당의 무쇠 더미와 벽에 걸린 출입 장부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의 말은 여전히 더뎠고, 혀끝이 무거웠으나, 숫자를 짚는 손가락만은 떨림 없이 정확했다.
"이레 전 무쇠 삼백 근이 들었다 적혔습니다. 헌데 저 더미는 이백 근이 채 못 됩니다."
"쓰였으니 줄었지. 당연한 것을."
"쓰인 무쇠는 벼려져 형태가 남습니다. 거중기 축, 녹로 톱니, 정. 그 형태들의 무게를 다 합쳐도 백 근입니다. 나머지 백 근은 형태 없이 사라졌습니다."
조 주부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코웃음으로 풀렸다.
"장부 숫자 몇 개로 사람을 잡으려 드는구나. 재고 손실이라는 게 있다. 녹이다 흘리고, 부러져 버리고. 그걸 어찌 다 맞추누."
물러설 법도로 유선은 물러서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결함이었다.
밤새 유선은 잡물고에서 가져온 붓과 종이로 장부를 옮겨 적었다. 석 달치 자재 출입을 하나하나. 눈은 완성품을 역산하듯 장부의 숫자를 역산했다. 어떤 무쇠가 어떤 기물이 되었고, 되지 못한 무쇠는 어디로 흘렀는가.
새벽녘, 도면 한 장이 그의 앞에 완성됐다.
숫자의 오차는 규칙적이었다. 열흘마다 한 번, 들어온 것으로 적힌 무쇠가 실물보다 정확히 삼 할씩 많았다. 삼 할. 사람이 흘리거나 부러뜨려 사라질 수 있는 몫이 아니었다. 누군가 종이 위에서만 무쇠를 사들이고, 그 값을 궁방에 청구했다. 실물은 처음부터 삼 할이 없었다.
김치복은 백 근을 사서 칠십 근을 들이고, 백 근 값을 받았다.
"열흘 주기다."
유선은 굳은 혀로 중얼거렸다. 손끝이 종이 위 숫자들을 잇는 선을 그었다. 청국 물시계의 톱니 배열을 읽어냈던 그 눈이, 이번엔 사람의 탐욕이 남긴 공정을 거꾸로 읽고 있었다. 무에서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저질러진 결과 — 장부라는 완성품 — 을 되짚어 은폐된 구조를 재구성했을 뿐이다.
동틀 무렵, 유선은 도면 석 장을 품고 감독관청으로 향했다.
감독관은 정오가 되어서야 그를 들였다. 유선은 도면을 펼쳤다. 열흘 주기, 삼 할의 결손, 궁방에 청구된 값. 선과 숫자가 한 치의 빈틈 없이 맞물렸다.
"자재 조달에 농간이 있습니다. 백 근을 사서 칠십 근을 들이고, 백 근 값을 취했습니다. 석 달간 무쇠 백오십 근이 종이 위에서만 존재했습니다."
감독관은 도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붓대로 종이를 툭 쳤다.
"이 장부를 네가 어찌 옮겨 적었느냐."
"밤에 대조하여—"
"자재 장부는 감독관과 조달관의 소관이다. 잡직이 규례에 없이 열람하고, 필사하고, 조달관을 무고하였다. 이것이 월권이 아니면 무엇이냐."
유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숫자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고가 아니라—"
"숫자? 김 조달관이 어떤 분이시더냐. 궁방과 상단을 이십 년 잇대어 화성 자재를 대신 어른이다. 그 어른의 장부에 잡직 하나가 붓끝으로 재를 뿌렸다. 이 도면, 내가 압수한다. 물러가라. 다시 관청 문턱을 넘으면 규례에 따라 곤장을 물릴 것이다."
도면 석 장이 감독관의 소맷자락으로 사라졌다. 밤새 그린 정답이, 그를 잡을 죄목으로 뒤집혔다.
공방으로 돌아온 유선의 손이 떨렸다. 물집 잡힌 손등을 무릎에 대고 눌렀다.
"옳은 것을 보였는데."
유득경이 문지방에 기대 서 있었다. 규장각에서 급히 내려온 그의 두루마기 자락에 흙먼지가 앉아 있었다.
"자네가 옳지. 도면은 완벽했겠지. 나는 자네 도면을 의심한 적 없네."
"헌데 어찌—"
"어찌 졌느냐고?" 유득경이 방으로 들어와 유선 앞에 앉았다. "자네는 감독관에게 '진실'을 내밀었네. 감독관이 원한 건 진실이 아니야. 그자에게 김치복은 장부를 조작한 죄인이 아니라, 자기 밥줄을 쥔 어른일세. 자네가 그 도면을 내미는 순간, 감독관 앞엔 두 갈래 길이 놓였지. 김치복을 치거나, 자네를 치거나. 어느 쪽이 자기에게 이로운가. 그자는 계산했고, 자네를 쳤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숫자는 그렇지. 그러나 사람은 숫자를 보지 않아. 자기 이해를 보네." 유득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과 판을 이기는 것은 다른 일일세. 자네는 정답 도면을 그리면 세상이 그 앞에 무릎 꿇으리라 믿지. 헌데 조정은 '무엇이 옳은가'로 굴러가지 않아. '누가 말했는가'로 굴러가네. 자네는 잡직이야. 잡직이 든 도면은, 그 도면이 옳을수록 위험한 무기로 보이는 게야."
유선은 대꾸하지 못했다. 굳은 혀 탓만은 아니었다.
"자네가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게 아닐세." 유득경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김치복이 삼 할을 빼돌린 그 짓 말이야. 그게 단순한 도둑질이라 여기나? 아닐세. 화성 자재는 공납 규례로 조달돼. 대동법 이래 공물은 정한 절차와 정한 값으로 오가야 하네. 김치복이 값을 부풀린 건 도둑질이 아니라 공납 규례를 어긴 게야. 자네가 도면을 감독관에게 내밀 게 아니라, 그자가 어긴 '법도'를 짚었어야 했네. 노론이 세운 그 법도로."
"…법도로."
"그래. 정답이 아니라 법도. 상대가 세운 규례가 상대를 치게 만드는 게야." 유득경이 한숨을 쉬었다. "허나 오늘은 늦었어. 자네 도면은 이미 그자 손에 있고, 자네는 월권한 잡직으로 낙인찍혔지."
해가 기울 무렵, 대장간 뒷문이 삐걱였다.
홍만춘이 무쇠 덩이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어깨가 문틀에 닿을 만큼 넓은 사내가, 도둑처럼 주위를 살피는 꼴이 어색했다.
"이거."
투박한 손이 유선 앞에 무쇠를 내려놓았다. 겉은 멀쩡한 무쇠 덩이인데, 홍만춘이 정으로 반을 쪼개 보였다. 속이 검고 성글었다. 겉만 좋은 쇠로 싸고, 안은 부스러기 쇠를 뭉쳐 넣은 것이다.
"보이나. 겉은 삼십 근짜리 상등품인데, 속은 하등 부스러기여. 근수는 채웠어도 쇠가 아니여. 이런 게 열흘마다 한 무더기씩 들어와. 나 같은 놈이야 두드려보면 대번 알지. 소리가 다르거든. 헌디 장부엔 다 상등품으로 적혀."
유선의 눈이 커졌다. 장부의 삼 할은 종이 위에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겉과 속이 다른 무쇠로 채워져, 실물은 있으되 값어치가 없는 채 들어온 것이다.
"이걸 왜… 나에게."
홍만춘이 험한 얼굴을 긁었다.
"내 손으로 벼린 거중기가 이런 썩은 쇠로 서면, 언젠가 사람이 깔려 죽어. 나는 그 꼴을 못 봐. 헌디 나는 상놈이여. 상놈이 조달관 어른을 입에 올리면 그날로 곤장 맞고 쫓겨나. 자네는… 종이쪼가리 그림이나 그리는 줄 알았는디, 무쇠를 만질 줄 알더구먼. 자네가 이걸 써먹을 수 있으믄 써먹어. 나는 준 적 없어."
말을 마치자 홍만춘은 온 곳으로 사라졌다. 불이익을 무릅쓰고 건넨 실물 증거가 유선의 손안에 남았다.
유선은 쪼개진 무쇠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겉과 속. 장부와 실물. 유득경의 말이 되살아났다. 정답이 아니라 법도. 도둑질이 아니라 공납 규례 위반. 이 썩은 무쇠는 김치복이 규례를 어긴 물증이었다. 감독관에게 내밀 게 아니라, 규례를 관장하는 자리에 물어야 했다. 언젠가.
그날 밤, 김치복은 화성 밖 주막의 뒷방에 있었다.
맞은편에는 갓끈이 정갈한 노인의 겸인이 앉아 있었다. 심환지의 사람이었다.
"좌상 대감께서 그 서얼 잡직에 관심을 두신다 들었소." 김치복이 술잔을 밀었다. "규장각에서 흘러온 천출이, 오랑캐 기계를 만든답시고 현장을 휘젓고 다니니 나로선 성가시기 짝이 없소."
"대감께선 그자의 재주가 강상을 무너뜨릴 칼이라 보시오." 겸인은 잔을 받지 않았다. "재주 자체를 겁내진 않소. 그 재주가 신분을 넘어 위로 올라오는 길, 그것을 막으실 뿐이오."
"길을 막는 거야 나와 뜻이 같소. 그 기계가 서면 내 자재 이권이 무너지니." 김치복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는 실물을 쥐었고, 대감께선 법도를 쥐셨소. 실물과 법도가 손을 잡으면, 서얼 하나 짓누르는 거야."
겸인이 처음으로 입가를 올렸다.
"대감께서 이르시길 — 급히 치지 말라 하셨소. 예법으로 잡는 데엔 때가 있소. 그자가 스스로 무너질 자리를 만들 때까지, 그저 지켜보라. 다만."
그는 소매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놓았다. 낮에 감독관이 압수한, 유선이 그린 자재 장부 도면이었다.
"이런 것을 그리는 자라니. 재주가 과연 위험하오. 대감께 올리리다."
김치복의 얼굴이 굳었다. 유선의 도면이 심환지의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권과 예법은 더 이상 남남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유선은 공방에서 물시계 시제기를 손보고 있었다. 흠집 난 톱니 자리에 얇은 놋쇠 편을 덧대 물림을 맞추던 참이었다. 세 바퀴, 네 바퀴, 톱니가 처음으로 걸림 없이 돌았다. 유선의 입가에 오랜만에 힘이 풀렸다.
그때, 시제기 아래 물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톱니를 돌리려 물의 힘을 모으던 압력 통. 유선이 낮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누군가 이음새의 가죽을 손대었는지, 아니면 삭은 가죽이 오늘따라 한계에 이르렀는지. 통이 부르르 떨었다. 김이 새는 소리가 삐익 날카롭게 솟았다.
"물러—"
굳은 혀가 경고를 삼켰다.
굉음이 공방을 찢었다. 압력 통이 터지며 무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등잔이 넘어져 마른 대팻밥에 불이 옮겨붙었다. 유선은 뒤로 나동그라졌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스쳤다. 귀가 먹먹한 가운데, 밤새 그린 정답도, 홍만춘이 건넨 썩은 무쇠도, 겨우 돌기 시작한 톱니도 — 화염 속에서 붉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고발은 무위로 돌아갔고, 그날 밤, 그가 맡은 시제기가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연기가 목을 틀어막았다. 유선은 기침을 쏟으며 몸을 굴렸다. 손등의 물집이 터져 진물이 흘렀으나 아픔은 뒤늦게 왔다. 대팻밥을 삼킨 불길이 공방 벽을 타고 올라 서까래를 핥았다.
물통. 아직 반쯤 남은 물통이 문가에 있었다. 유선은 굳은 다리를 끌고 기어가 통째로 불길에 끼얹었다. 쉭, 흰 김이 솟구치며 불길이 한풀 꺾였다. 두 번, 세 번. 마지막 물을 붓고 나서야 유선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바깥이 소란했다. 불빛을 본 부역꾼들이 물지게를 지고 달려왔다. 홍만춘의 우람한 그림자가 앞장서 있었다. 사내들은 남은 불씨를 밟아 끄고, 무쇠 파편이 박힌 벽을 살폈다.
"살았나!"
홍만춘이 유선의 어깨를 붙들어 일으켰다. 유선은 대답 대신 그을린 손으로 터진 압력 통을 가리켰다. 이음새의 가죽. 그 삭은 가죽이 어떻게 오늘따라 한꺼번에 무너졌는지, 그것부터 되짚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모여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불이다! 오랑캐 기계가 불을 냈다!"
누가 먼저 외쳤는지 몰랐다. 소리는 순식간에 퍼졌다. 부역꾼 수백이 잠을 깨어 화성 축조장 곳곳에서 웅성거렸다. 마른 목재와 짚이 산더미로 쌓인 공역 현장에서, 불이란 단어는 곧 공포였다.
감독관청의 등불이 켜졌다. 조 주부가 횃불을 든 관노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 뒤로, 유선은 낯선 갓끈 하나를 보았다. 낮의 감독관보다 격이 높은, 화성 공역 전체를 총괄하는 도청(都廳)의 낭청이었다. 김치복이 그 곁에 바짝 붙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낭청이 폐허가 된 공방을 둘러보았다. 그을린 서까래, 튀어박힌 무쇠 파편, 반쯤 녹아내린 시제기. 그리고 그 한복판에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앉은 서얼 잡직 하나.
"이자인가. 임의로 오랑캐 기물을 지어 화성 공역에 불을 낸 자가."
김치복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소인이 여러 번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낭청 나리. 오늘 낮에도 감히 자재 장부를 훔쳐보고 조달관을 무고하더니, 밤에는 기어이 이 참사를 냈습니다. 하마터면 목재 창고까지 옮겨붙어 화성 전체를 태울 뻔하였습니다."
낮의 월권과 밤의 화재. 두 죄가 하나로 엮이는 것을, 유선은 굳은 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명하라."
낭청의 명이 떨어졌다. 유선은 입을 열었다. 압력 통의 가죽이, 이음새가, 누군가 손을 댔을지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이음새의… 가, 가죽이—"
혀가 굳었다. 밤새 장부를 역산하고, 낮에 자재 더미를 역산한 대가가 이제야 밀려왔다. 말이 흩어졌다. 소리는 났으나 뜻이 되지 못했다. 관노들의 횃불 아래, 서얼 하나가 입을 벙긋거리며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꼴만 남았다.
"보십시오. 낭청 나리." 김치복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죄를 짓고도 변명 한마디 못 하는 자입니다. 벙어리 흉내로 넘길 셈이지요."
유득경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섰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 변호하기도 전에, 유선은 알아차렸다. 유득경이 나서는 순간, 이 일은 규장각 검서관이 서얼을 비호하는 일이 되고, 낮의 장부 도면과 엮여 규장각 전체가 자재 농간에 관여했다는 그림이 된다. 김치복과 심환지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선은 굳은 혀로, 손을 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유득경의 입이 다물렸다.
"내일 도청에서 이 일을 문초하겠다. 자재 무고와 실화(失火), 두 죄를 함께 다스릴 것이다." 낭청이 돌아섰다. "저자를 잡물고에 가두라. 도면과 필사한 장부, 남김없이 압수하라."
관노들이 유선의 팔을 붙잡았다. 그때 홍만춘이 한 걸음 나서려 했다. 소매 안, 겉과 속이 다른 그 썩은 무쇠 반쪽이 만져지는 듯 사내의 손이 움찔했다. 유선은 그 눈을 붙들었다. 지금은 아니다. 상놈이 도청 낭청 앞에서 조달관을 고하면, 그 물증은 증거가 아니라 홍만춘의 곤장이 될 뿐이었다.
끌려가는 유선의 등 뒤로, 김치복의 목소리가 나직이 따라붙었다.
"수고롭게 됐네. 헌데 어쩌겠나. 종이 위에서만 사는 정답이란 게, 원래 불에 제일 잘 타는 법이지."
잡물고의 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 유선은 굳은 혀를 깨물었다. 밤새 그린 정답도, 홍만춘이 목숨 걸고 건넨 물증도, 이제 그의 손에 없었다. 남은 것은 내일 아침 도청의 문초, 그리고 무고와 실화라는 두 죄목뿐이었다.
가죽 이음새를 누가 손댔는가. 삭은 것인가, 삭게 만든 것인가. 그 답을 아는 유일한 자의 혀가, 하필 지금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