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체계
감각의 채무자와 공감각 계약
공감각 계약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마법의 대가를 전가하는 금단의 의식이다. 채무자는 대신 지불한 감각의 양만큼 '빚'을 지게 되고, 채권자는 채무자의 감각을 빌려 느낄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계약은 총 5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는 촉각 공유, 2단계는 감정의 잔향이 전달되며, 3단계는 신체 감각이 완전히 동조되고, 4단계는 상대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5단계는 두 영혼의 경계가 붕괴된다. 대가로는 감각을 나눌 때마다 상대의 가장 은밀한 욕망과 기억이 침입하며, 계약을 강제로 끊으면 양측 모두 영구적 감각 상실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채무자의 빚이 완전히 탕감되는 순간, 계약은 소멸하고 모든 연결이 단절된다. 이 계약의 핵심 역설은, 채무자가 감각을 지불할수록 채권자가 오히려 감각적으로 종속되어 간다는 권력의 역전에 있다.
기타
감각의 빚과 기억의 전염
공감각 계약의 가장 치명적 부작용은 '기억의 전염' 현상이다. 감각을 나눌 때마다 상대의 가장 은밀한 기억이 통제 불가능하게 침투해 온다. 이는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그 순간의 체온·심장 박동·내장의 경련까지 완벽하게 재현되는 전인적 경험이다. 카이우스의 경우, 그가 과거에 겪었던 고문과 배신의 기억이 엘리제에게 촉각으로 직접 전달된다. 엘리제는 그의 상처를 자신의 피부로 느끼며, 그가 누군가에게 느꼈던 욕망과 증오까지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카이우스는 엘리제의 감정 기억—특히 촉각을 잃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타인의 체온에 대한 절박한 갈망—을 주입받는다. 이 기억의 전염은 두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간다.
힘의체계
대가의 법칙: 감각 화폐
이 세계의 모든 마법은 '감각'을 대가로 지불해야 발현된다. 단순한 점화 주문에는 일시적 후각 마비가, 치유 마법에는 수일간의 미각 상실이 따르는 식이다. 마법사들은 마치 화폐처럼 자신의 감각을 저울질하며, 고위 마법일수록 영구적 감각 상실의 위험을 감수한다. 감각을 잃은 마법사는 사회적 불구로 간주되며, 촉각을 잃은 자는 특히나 인간적 교감 능력을 상실한 '차가운 자'로 낙인찍힌다. 이 냉혹한 등가교환의 법칙에 균열을 내는 것이 바로 '공감각 계약'이다. 금지된 이 마법은 타인을 '감각의 채무자'로 지정하여, 마법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게 하는 대신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감각적 종속 관계를 형성한다. 계약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감각은 동조되고, 쾌락과 고통마저 공유하게 된다.
지역
침묵의 탑: 엘리제의 영지
신정국의 변방에 위치한 '침묵의 탑'은 촉각을 잃은 마법사 엘리제의 영지이자 유폐지다. 7년 전 대형 마법 사고로 촉각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가 사회와의 접촉을 끊고 은둔한 곳으로, 탑 내부는 모든 것이 차갑고 부드러운 재질로 덮여 있다. 벽면은 감촉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마법 처리된 유리로, 가구는 모서리 없는 디자인이다. 탑의 지하 서고에는 금지된 마법서들이 봉인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엘리제는 카이우스를 소환한다. 탑은 계약이 진행될수록 변화하는데, 카이우스의 감각이 스며들면서 벽면에 온기가 돌고, 둘의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유리 표면에 기억의 잔상이 비친다. 이 공간은 그들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세력
감각 신정국과 마법 길드
대륙을 지배하는 '감각 신정국'은 마법의 대가를 신성한 질서로 숭배하며, 감각을 온전히 보존한 마법사를 '순수자'로 추앙한다. 이들은 '공감각 계약'을 가장 타락한 금지 마법으로 규정하고, 계약자들을 적발 즉시 감각을 영구히 박탈하는 '공허형'에 처한다. 신정국 산하 '감각 심의회'는 마법사들의 감각 상태를 감시하고 등급을 매기며, 촉각을 완전히 잃은 엘리제 같은 이들은 '마법 도구' 취급을 받는다. 한편 지하에는 '채무자들의 네트워크'라는 비밀 조직이 존재한다. 이들은 공감각 계약의 윤리적 재정립을 주장하며, 감각의 빚을 거래 가능한 자원으로 보는 급진적 철학을 퍼뜨린다. 이 조직은 카이우스의 정체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기타
감각 윤리와 사회적 금기
이 사회에서 감각은 단순한 신체 기능이 아니라 도덕적 지위를 결정짓는 척도다. 감각을 많이 보유할수록 '인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며, 감각 상실자는 '타락한 자'로 낙인찍힌다. 특히 타인의 감각을 빌리는 행위는 '감각 강간'으로 비유될 만큼 극단적 금기다. 그럼에도 이 사회에는 은밀한 감각 매매 시장이 존재한다. 부유한 마법사들은 마법의 부작용을 가난한 자들에게 전가하는 불법 계약을 맺고, '감각 매춘부'라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감각을 담보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 세계의 성적 규범 역시 감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완전한 감각 보유자 간의 접촉만이 '순수한 사랑'으로 인정받고, 감각 상실자나 채무자와의 관계는 '변태적 욕망'으로 치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