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을 치우게. 오늘 안으로."
부제학 신광우는 문지방을 넘지도 않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였다. 규장각 서편, 창고나 다름없는 잡물고. 먼지가 창살 빛을 타고 떠다니는 그 방 안쪽 탁자 위에, 청국 사행이 들여온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예."
채유선은 허리를 굽혔다. 굽히는 각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서얼 잡직이 부제학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각도란 정해져 있고, 그는 그 각도를 한 치도 어긴 적이 없었다.
"저 오랑캐 물건들 중에 쓸 만한 게 있거든 목록을 만들어 올리고, 나머지는 태우든 묻든 알아서 하게. 검서관 나리들 손 갈 일 아니니 자네가 하라는 걸세."
신광우의 목소리에 '자네'라는 말이 유독 미끄러졌다. 검서관도 아닌 것이, 라는 뒷말이 생략된 자리였다. 유선은 그 생략을 알아들었다. 알아듣는 것이 이 방에서 십 년을 버틴 재주였다.
문이 닫히자 먼지만 남았다.
유선은 탁자로 다가갔다. 놋대야만 한 크기의 나무 상자, 그 안에 든 것은 서양의 자명종(自鳴鐘) 물시계였다. 청국 흠천감을 거쳐 온 물건이라 했다. 사행에 따라갔던 역관이 값을 치르고 들여왔으나, 조정의 누구도 이것이 어떻게 시각을 알리고 스스로 종을 치는지 알지 못했다. 태엽이 풀렸는지 바늘은 죽어 있었다.
"쓸 만한 게 있거든이라."
그는 혼잣말을 뱉으며 뚜껑을 열었다.
황동 판이 드러났다. 그 아래로 톱니가 물려 있었다. 크고 작은 바퀴들이 겹겹이, 축을 공유하며 맞물린 구조. 조선의 자격루는 물의 무게와 부표로 시각을 재지만, 이 물건은 감긴 태엽의 힘을 톱니로 잘게 나누어 흘려보냈다. 원리는 짐작이 갔다. 다만 짐작과 이해는 하늘과 땅이었다.
유선은 등잔을 당겨 불을 밝히고, 톱니 하나에 눈을 붙였다.
세었다. 하나, 둘, 셋… 큰 바퀴의 잇수를. 눈이 아렸다. 다시 세었다. 이가 촘촘한 작은 바퀴로 옮겨가자 숫자가 뭉개졌다. 조선의 어떤 시계장이도 이 배열을 그대로 베끼지 못하리라는 걸, 그는 첫눈에 알았다. 여기 물린 바퀴가 여덟 개, 아니 아홉 개. 그중 하나는 톱니의 방향이 반대다. 왜 반대인가. 힘의 방향을 되돌리려는 것인가—
그때였다.
시야 안쪽이 저릿했다. 등잔불이 번지듯 흐려지더니, 톱니의 형상이 눈꺼풀 뒤로 넘어왔다. 눈을 감아도 보였다. 감을수록 선명했다.
바퀴 아홉 개가 허공에 떠올랐다. 저 혼자 분해되었다. 축에서 빠지고, 잇수가 하나하나 세어지고, 톱니의 골과 마루가 자로 잰 듯 늘어섰다. 큰 바퀴 육십 잇, 다음 바퀴 팔 잇, 물림비 일 대 칠하고도 조금—그 조금이 오차였다. 톱니 마루가 닳아 반 푼쯤 어긋난 자리. 서양 장인이 줄로 갈 때 손이 미끄러진 흔적. 유선의 머릿속에서 그 흔적을 만든 손짓까지 거꾸로 되짚어졌다. 이 톱니는 이렇게 깎였다. 이 축은 이 순서로 끼워졌다. 밀폐를 위해 축 끝에 바른 것은 짐승 기름이다—
숨이 멎었다.
그는 이 물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들고 있었다. 거꾸로. 완성된 결과에서 첫 망치질까지, 공정 전체가 물처럼 뒤로 흘렀다.
"허."
손이 저절로 붓을 찾았다. 벼루에 물도 붓지 않고 마른 먹을 긁어 종이에 그었다. 톱니 하나. 잇수 육십. 곁에 팔. 물림비. 축의 간격. 오차 반 푼. 손이 눈보다 빨랐다. 붓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방 안에 사각사각 찼다. 눈은 여전히 상자 안 톱니에 박혀 있는데, 손은 눈이 보내는 도면을 옮겨 적기 바빴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살 빛이 옮겨 가 있었다.
유선은 붓을 놓았다. 종이 석 장이 톱니의 배열로 빼곡했다. 잇수, 물림 순서, 조립 차례, 밀폐에 쓴 재료의 성질까지. 조선의 어느 도화서 화원도 이렇게는 못 그린다. 이건 그림이 아니라 설계였다.
손끝이 떨렸다. 처음엔 흥분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떨림이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흔들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방 안이 갑자기 삼복더위처럼 후끈했다. 눈꺼풀 뒤로 넘어온 톱니 도면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아홉 개의 바퀴가 계속 돌았다. 물러가지 않았다. 뇌리에 눌러앉아 다른 생각의 자리를 밀어냈다.
"어……"
말을 하려 했다. 혀가 굳었다. 이름 하나 부르려는데 소리가 목에서 걸렸다.
무릎이 꺾였다.
그가 탁자 모서리를 붙들고 주저앉는데, 흐려지는 방 안으로 오래된 것 하나가 떠올랐다.
어미의 등이었다.
노비였던 어미. 관비의 몸으로 그를 낳았고, 서얼의 자식은 서얼이라 그 역시 반쪽짜리로 태어났다. 어미는 손이 좋았다. 물레를 돌리고 베를 짜고, 부러진 물건은 무엇이든 고쳤다. 어미가 고친 자명등(自鳴燈)을 보고 상전이 무릎을 쳤던 날, 어린 유선은 어미의 재주가 자랑스러웠다.
그 재주가 어미를 죽였다.
솜씨 좋은 관비는 값이 나갔다. 이 집 저 집으로 팔려 다니다, 어느 겨울 삯바느질을 밤새 하고 열병에 스러졌다. 재주가 어미의 것이었으나, 어미의 손이 만든 것은 모두 위로 흘러갔다. 어미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관비 아무개. 그뿐이었다.
'재주가 아래에 있고 공은 위로 흐른다.'
유선의 굳은 혀 안쪽에서 그 말이 맴돌았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뜨거운 것이 명치에서 치받았다. 이 눈이, 지금 이 눈이 본 것을, 상신하는 것은 검서관의 몫이고 재가하는 것은 부제학의 몫이며, 그 아래 도면을 그린 자의 이름은—
없다.
또 없을 것이다.
없지 않게 하겠다. 굳은 혀로 그는 그 말을 삼켰다. 어미처럼은 안 된다. 이름 없이 스러지는 재주가 나 하나로 끝나야 한다. 손끝의 재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세상. 천출이라는 이유로 죽지 않는 세상. 그것을 세우기 전엔—
의식이 끊겼다.
*
"채가야. 채유선이."
멀리서 누가 불렀다. 유선은 그 소리를 물속에서 듣는 듯했다.
몸이 불덩이였다. 누군가 그를 잡물고 구석의 거적 위에 뉘어 놓았다. 이마에 젖은 천이 얹혀 있었다. 그 천을 갈아 대는 손이 있었다.
"정신이 드는가? 아이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유득경이었다. 규장각 검서관. 청국 기술서라면 밥도 거르고 파고드는 사내. 서얼 잡직인 유선을 사람 취급 해주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
유선은 입을 열려 했다. 검서관 나리, 언제부터 여기 계셨습니까—그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혀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입술만 벙긋거렸다.
"말을 못 하는가?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득경의 눈이 유선의 얼굴에서 탁자로 옮겨 갔다. 그리고 멈췄다.
거기, 종이 석 장이 흩어져 있었다.
유득경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등잔 심지를 돋우고 눈을 붙였다. 처음엔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그 얼굴이 굳었다.
"이게……"
그는 종이를 뒤집었다. 다시 앞으로 돌렸다. 손가락으로 톱니 하나를 짚고, 곁에 적힌 잇수를 읽고, 물림비를 읽고, 조립 차례를 따라갔다.
"자네가 이걸 그렸나?"
유선은 대답할 수 없었다. 열에 들뜬 눈으로 검서관을 볼 뿐이었다.
유득경은 상자 안의 물시계로 다가갔다. 뚜껑을 열고 톱니를 들여다보았다. 종이의 도면과 실물을 번갈아 보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 그가 낮게 신음을 뱉었다.
"큰 바퀴 육십 잇… 맞아. 다음이 여덟… 이것도 맞아. 이 축은… 이렇게 물렸군. 그런데……"
유득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오차. 여기 반 푼 어긋난 걸 적어 놨어. 톱니 마루가 닳은 자리. 이건 도면을 베낀 게 아니야. 실물을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고. 이건… 만든 순서를 거꾸로 읽어 놓은 걸세."
그가 유선을 돌아보았다.
"내가 청국서 들여온 시계 도해(圖解)를 열 권은 봤네. 흠천감 서양인이 그린 것까지. 그런데 그것들도 이 정도는 못 그려. 이건 시계장이가 평생 만지고 나서야 아는 걸, 자네가 하루 만에……"
유선의 흐린 눈에 검서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얼굴에 서린 것은 놀람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자네, 이 눈으로 뭘 본 겐가."
유선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소리는 안 났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조금 전 톱니를 되짚던 순간, 그의 눈은 완성된 결과에서 공정을 거슬러 올랐다. 무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을 거꾸로 읽었을 뿐. 물건이 눈앞에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리라는 것도, 이 열병이 대가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았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름을 남길 재주인가, 이름을 앗아갈 재주인가.
굳은 혀 뒤로 그 물음이 맴도는데, 유득경이 도면 석 장을 소맷자락에 쓸어 넣었다.
"이건 아무도 못 보게 해야겠어. 아직은. 자네, 몸부터 추스르게. 이 얘긴 나중에……"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유득경이 입을 다물었다. 발소리는 하나. 조심스럽고, 그러나 망설임이 없었다. 잡물고 앞에서 멈추더니 문고리를 잡았다.
"검서관 유득경 나리십니까."
낮고 정중한 목소리. 유득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뉘시오. 이 시각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들어선 자는 관복도 아니고 사복도 아닌, 어중간한 옷차림의 사내였다. 얼굴은 낯설었다. 규장각에 드나드는 자가 아니었다. 그가 방 안을 한 번 훑고, 거적 위에 누운 유선에게 시선을 멈췄다.
"어의를 물렸습니다. 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유득경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어의를 물렸다는 말.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궁궐 안에 몇 되지 않았다.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반쯤 내보였다. 유득경의 무릎이 저절로 꺾이려 했다.
"채유선을 뵈러 왔습니다."
열에 들뜬 유선의 귀에, 그 한마디가 물속을 뚫고 또렷이 박혔다. 그를 찾아온 것은 어의를 물린 채 홀로 방에 든, 임금의 밀사였다.
유득경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무릎을 굽히려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밀……"
밀사, 라는 말을 다 내뱉지 못하고 유득경은 입을 다물었다. 사내가 품 안의 것을 다시 갈무리했다. 반쯤 드러났던 그것—붉은 인끈과 그 아래 어떤 표신(標信)의 귀퉁이—이 옷 속으로 사라지자, 방 안에는 등잔의 그을음 냄새와 유선의 가쁜 숨소리만 남았다.
"검서관께서는 잠시 문밖을 지켜 주십시오."
사내의 어조는 청이었으나 청이 아니었다. 유득경은 소맷자락 속 도면 석 장을 무의식중에 눌러 쥐었다. 그 손짓을 사내가 보았다.
"그 종이."
사내의 눈이 유득경의 소매로 내려앉았다.
"저 아이가 그린 것입니까."
유득경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물렸다. 거짓을 고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의 본능이 알았다. 어의를 물린 자 앞에서. 그러나 이 도면이 무엇을 부를지도 그는 알았다. 서얼 잡직이 양반 관료도 풀지 못한 서양 기물을 하루 만에 해부했다는 사실. 그것이 규장각 담을 넘는 순간 벌어질 일들. 강상이니 참월이니 하는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제가… 그렸습니다."
유득경이 도면을 소매에서 꺼내려는데, 거적 위에서 소리가 났다.
"아……닙……"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렸다.
유선이었다. 굳었던 혀가, 열에 짓눌린 목이, 겨우 한 음절을 밀어냈다. 그는 팔꿈치로 몸을 반쯤 일으키려다 다시 무너졌다. 이마의 젖은 천이 흘러내렸다. 그 흐린 눈이 유득경을 향했다. 원망도 애원도 아닌, 다만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려는 눈이었다.
거짓은 안 됩니다.
혀가 굳어 그 말을 소리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선의 손이 움직였다. 거적을 짚은 손가락이, 제 가슴을 향해 힘겹게 접혔다. 내가 그렸다. 검서관이 아니라 내가.
옳음을 감추는 것을 그의 몸은 견디지 못했다. 열에 들뜬 채로도 그러했다. 유득경이 자신을 감싸려 거짓을 고하는 순간, 그 거짓이 뒤에 무엇을 지킬지 헤아리기도 전에, 그는 손끝으로 진실을 가리켰다.
유득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우직한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사내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유선의 손짓을, 유득경의 낭패한 낯을. 그러더니 거적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접고 앉았다. 유선의 눈높이에 얼굴을 맞추었다. 가까이서 본 사내의 눈은 뜻밖에 서늘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재고 있는 눈이었다.
"열이 심하군. 말을 아끼게."
사내가 손을 뻗어 흘러내린 천을 유선의 이마에 다시 얹었다. 뜻밖의 손길이었다.
"자네가 그렸다는 것은 알겠네. 저 검서관의 낯이 이미 다 말해 주었어."
유득경이 숨을 삼켰다.
사내는 몸을 일으켜 탁자로 갔다. 물시계 상자를 들여다보더니, 유득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면을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유득경은 잠시 망설이다 석 장을 건넸다. 사내가 도면과 실물을 번갈아 짚었다. 검서관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검서관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온 자처럼 보였다.
"오차 반 푼까지 적었군."
사내가 도면 한 귀퉁이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눈이 필요한 자리가 있네. 규장각 잡물고보다 훨씬."
그가 도면을 접어 유득경에게 돌려주지 않고, 제 품에 넣었다. 유득경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나섰다.
"그건……"
"검서관."
사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게를 실었다.
"오늘 밤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은, 오늘 밤 이 방에 없었던 일일세. 저 물건도, 저 종이도, 저 아이가 앓아누운 것도. 부제학께는 물시계가 쓸 것 없어 태웠다 고하시게. 아시겠는가."
유득경의 목이 마르게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다시 거적 곁으로 돌아왔다. 유선을 내려다보는 눈에, 이번에는 재는 기색이 걷혀 있었다.
"채유선. 몸을 추스르게. 사흘 뒤 자네를 부르는 이가 있을 것이야. 그때는 이 잡물고가 아닌 곳에서."
유선은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열에 뿌예진 시야 속에서, 사내의 어깨 너머로 창살에 스민 새벽빛이 흔들렸다. 사흘 뒤. 부르는 이. 굳은 혀 뒤로 수십 개의 물음이 엉겼으나 하나도 소리가 되지 못했다.
사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왔던 것처럼 소리 없이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기 전, 그가 잠시 멈춰 유득경을 돌아보았다.
"검서관도 함께 오시게 될 걸세. 이 눈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곁에 필요할 테니."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어의를 물렸다던 그 정적이 다시 방을 채웠다.
유득경이 거적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 남은 것은 도면이 아니라, 방금 그것을 쥐었던 감촉의 여운뿐이었다. 그가 유선을 내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채가야. 자네… 자네가 무엇에 발을 들인 건지 아나."
유선은 대답할 수 없었다. 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뇌리에는 아직도 아홉 개의 바퀴가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흐린 정신의 밑바닥에서, 무언가 또렷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사내가 품에 넣어 간 도면. 그 안에 적힌 톱니 육십 잇과 물림비와 오차 반 푼. 그것이 이제 잡물고를 떠나, 자신이 상상도 못 한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재주는 아래에 있고 공은 위로 흐른다.
어미의 것이 위로 흘렀듯, 이번에도.
유선은 눈을 감았다. 감아도 톱니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번엔 그 도면 위로, 낯선 사내가 두드리던 손톱 자국이 겹쳐 보였다. 이 눈이 필요한 자리가 있네—그 말이 열병의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밀려갔다.
사흘.
사흘 뒤 자신을 부르는 이가 어의를 물릴 수 있는 자라면, 이 나라에서 그런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 이름을 혀 안쪽에서 굴려 보려는 순간, 유선의 의식이 다시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