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밤, 유선을 부른 곳은 잡물고가 아니었다.
밀사는 말 한마디 없이 앞장섰다. 규장각 뒤편 담을 끼고 돌아 어둠에 잠긴 문루를 지나자, 등불 하나 없는 좁은 방이 나왔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유선은 다리가 떨려 주저앉을 뻔했다. 방 안쪽, 낮은 상 앞에 곤룡포 아닌 평복 차림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유선은 그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가, 밀사가 무릎을 꿇는 각도가,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혀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사흘 전 자명종을 역산하며 앓은 열병의 잔재가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유선은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관비 어미에게서 난 천출이, 임금과 한 방에 있다.
"고개를 들라."
목소리는 낮고 마른 편이었다. 유선이 얼굴을 드니, 임금은 상 위에 펼쳐진 종이 석 장을 손끝으로 짚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자명종 도면이었다.
"이 톱니의 잇수를, 이 축의 굵기를, 네가 물건만 보고 알아냈다지."
"…소인은 그저, 만들어진 것을 거꾸로 읽었을 뿐이옵니다."
말이 더뎠다. 임금은 그 더딤을 놓치지 않고 유선을 바라보았다. 재주를 아끼는 눈빛과, 그 재주가 언제든 버려질 수 있음을 아는 눈빛이 한 얼굴에 겹쳐 있었다.
"거꾸로 읽는다. 좋은 말이다. 나는 지금 조선이 거꾸로 가고 있다 여긴다."
임금은 도면을 밀어 유선 쪽으로 보냈다.
"청국을 거쳐 서양의 것들이 들어온다. 물을 끓여 힘을 내는 기관이 있다더구나. 사람 백 명이 하는 일을 무쇠 한 덩이가 한다고. 나는 그것을 화성에서 보고 싶다."
유선의 손끝이 도면 위에서 멎었다. 물을 끓여 힘을 낸다—그 원리를 들은 순간, 뇌리에 흐릿한 심상이 스쳤다. 실물을 보지 못한 상은 잡히지 않고 흩어졌다. 역산의 눈은 눈앞의 결과물이 있어야만 열린다. 지금 그의 앞에는 종이 석 장뿐이었다.
"화성 축조 현장으로 내려가라. 거중기와 녹로가 돌을 든다만, 돌을 캐고 나르고 물을 퍼올리는 데 사람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 일을 증기가 대신하게 하라. 나는 그 물건이 실제로 도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림이 아니라."
"…소인은 천출이옵니다."
이 말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선은 그 이유를 스스로 알았다. 옳은 물건을 만들어도, 상신하고 재가받는 것은 양반의 몫이었다. 재주는 아래에 있고 공은 위로 흐른다. 어미가 그렇게 죽었다.
임금은 웃지 않았다.
"안다.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양반 관료에게 맡기면, 그자는 제 공을 세우고자 될 일도 그르치고, 안 될 일도 된다 아뢴다. 나는 물건이 실제로 도는 것이 필요하지, 도는 척하는 상소가 필요한 게 아니다."
한 호흡을 두고, 임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있다."
유선은 숨을 죽였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 화성의 증기 일은 곧 누군가의 밥그릇을 깬다. 자재를 대는 상인, 부역을 부리는 감독, 물길을 쥔 궁방—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노론 벽파는 이것을 강상을 무너뜨리는 요망한 잔재주라 부를 게다. 서얼이 재주로 위를 넘본다고."
"…"
"그때 나는 너를 도울 수 없다. 왕이 서얼 하나를 감싸려 노론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크다. 그러니 너는 조정의 법도 안에서 살아남아라. 저들이 예법으로 너를 치거든, 예법으로 막아라. 규례로 옭거든 규례로 풀어라. 나는 네가 옳다고 편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법도 안에서 옳음을 증명하면, 그때 비로소 나서겠다."
유선은 그 말의 무게를 뒤늦게 짚었다. 지켜준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혼자 살아남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도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졌다. 임금이, 이 나라의 왕이, 관비의 자식에게 직접 일을 맡기고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재주를 보고.
"…소인, 만들겠나이다."
혀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이 한마디만은 또렷하게 나왔다.
임금은 도면을 유선의 품에 밀어넣었다. 그것이 방을 나가라는 뜻이었다.
*
규장각 서고는 등잔 하나로 겨우 밝았다. 유득경은 먼지 앉은 책갑을 뒤지다가, 유선이 들어서자 대뜸 책 한 권을 흔들어 보였다.
"내려간다며. 화성으로. 밀사가 다 일러주더군. 자네 표정을 보니 임금을 뵌 게 맞고."
유득경은 말이 빨랐다. 흥분하면 문장이 겹쳐 나왔다.
"증기라, 증기. 청국 서책에서 봤네. 화기(火機)라 하더군. 물을 끓여 나는 김으로 통 속의 막대를 밀고—아, 자네 그 눈으로 보면 단박에 읽어낼 텐데. 실물만 있으면. 실물이 문제지."
"실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읽습니다. 저는 발명하는 재주가 아니라 읽는 재주라."
"알아, 알아. 그래서 내가 이걸 찾았지."
유득경이 내민 것은 낡은 등록(謄錄)이었다. 대동법과 둔전 운영의 옛 규례를 베껴 모은 것이었다.
"자네가 화성에서 부딪칠 벽은 무쇠가 아니야. 사람이지. 자재를 쥔 자, 부역을 쥔 자, 그리고 조당의 노론. 저들은 예법과 규례로 자네 목을 조를 걸세. 헌데 말이야."
유득경이 등록의 한 대목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 규례들, 원래 누굴 위해 만든 건 줄 아나? 대동법은 방납의 폐를 없애 백성이 억울하게 두 번 내지 않게 하려던 법일세. 둔전 규례는 부역꾼을 함부로 굶기고 부리지 못하게 절차를 박아둔 것이고. 다 백성 이익을 지키자고 세운 절차야. 노론이 그걸 방패로 삼고 있지만, 방패는 뒤집으면 칼이 되네."
유선이 눈을 들었다.
"…법도로 저를 치거든, 그 법도의 본뜻으로 되받으라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걸세. 자네는 옳은 도면을 그리면 세상이 알아줄 거라 믿지. 아냐. 이 나라는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누가 말했는가를 앞세워. 천출이 옳다 외쳐봐야 소용없어. 헌데 저들이 세운 규례가, 저들을 향해 옳다 외치게 만들면—그건 다르지."
유선은 등록을 받아 품에 넣었다. 지금은 그 뜻을 반쯤밖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종이가 무쇠보다 요긴할 날이 오리라는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
화성 축조 현장은 소문보다 컸다.
수천의 부역꾼이 흙먼지 속에서 돌을 지고 날랐다. 거중기가 밧줄을 감아 석재를 허공으로 들어올렸고, 녹로가 삐걱대며 돌아갔다. 감독관들의 고함, 망치질 소리, 소달구지의 바퀴 소리가 뒤엉켜 귀를 먹먹하게 했다. 유선은 봇짐 하나를 지고 그 한복판에 섰다. 조선 기술의 총화가 모인 실험장이었다. 그리고 임금의 말대로, 이권의 전장이었다.
"자네가 그 서얼인가."
돌아보니 비단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가 부채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얼굴에 웃음을 걸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뒤로 창고지기와 서리 몇이 따랐다.
"김치복이라 하네. 이 현장의 자재와 운반을 맡고 있지. 무쇠도 나무도 밧줄도, 다 내 손을 거쳐야 들어와."
부채가 딱, 소리를 내며 접혔다.
"자네가 화기인지 뭔지를 만든다고? 물을 끓여 돌을 나른다? 허허."
김치복은 유선의 위아래를 훑었다. 봇짐과 해진 옷자락, 굳은살 박인 손을.
"관비 소생이 규장각 잡물고에서 십 년 걸레질했다는 그 채유선이 맞구먼. 임금께서 무슨 바람이 드셨는지. 이보게, 여기가 어떤 덴 줄 아나? 양반 감독관도 나한테 밉보이면 무쇠 한 근 못 받아가. 헌데 자네 같은 천출이 무쇠를 달라 하면, 내가 웃으며 줘야 하나?"
주위의 서리들이 킬킬거렸다. 유선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말을 고르는 게 아니라, 김치복의 말속에서 하나를 붙들었다—무쇠도 나무도 밧줄도 이자 손을 거친다. 그렇다면 증기가 완성되어 채석과 운반이 뒤집히는 날, 가장 크게 잃는 자가 바로 이자였다. 후원자를 자처하며 다가온 웃음 뒤에, 그 계산이 이미 서 있었다.
"…자재는 규례대로 청구하겠습니다."
유선이 겨우 뱉은 말에, 김치복의 웃음이 잠깐 굳었다가 도로 벌어졌다.
"규례대로. 좋지. 그래, 규례대로 하게. 규례가 얼마나 촘촘한지 곧 알게 될 게야."
부채가 다시 펼쳐졌다. 김치복은 유선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후원자의 손길처럼 다정한, 그러나 목을 재는 손이었다.
*
그 광경을 언덕 위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노회한 노인은 화성을 둘러본다는 명목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곁의 젊은 관원이 조심스레 아뢰었다.
"대감, 저 아래 소란은—임금께서 내려보내셨다는 잡직인 듯하옵니다."
"채유선이라 했지."
심환지는 웃는 낯이었다.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소매에서 작은 수첩과 붓을 꺼내, 천천히 세 글자를 적었다. 蔡有先.
"임금이 화성에 물 끓이는 기관을 두려 하신다는 말은 들었네. 재주가 요망하면 강상을 흔들지. 사람 백 명이 할 일을 무쇠가 하면, 그 백 명은 어디로 가겠나. 그 자리에 무엇이 서겠나."
붓을 거두며 심환지가 나직이 덧붙였다.
"급히 칠 것 없다. 저런 것은 제 손으로 무너지게 두면 되네. 다만 이름은 적어두어야지. 언제 어느 예법에 걸리는지, 지켜보다가—."
수첩이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언덕 아래 유선은 그 시선을 알지 못했다.
*
김치복이 배정해준 임시 공방은 현장 끝, 물길 가까운 낡은 창고였다.
"저 안에 앞서 손댔던 것들이 있을 게야. 잘 살펴보게, 채 잡직."
창고지기가 이죽거리며 열쇠를 던졌다. 유선은 자물쇠를 풀었다. 앞선 이가 있었다니, 그렇다면 실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실물만 있으면 그의 눈이 열린다. 손끝이 떨렸다. 어쩌면 이미 만들다 만 기관이, 그 결과물이 안에 있을지 몰랐다.
문이 삐걱, 열렸다. 창고 안으로 흙먼지 섞인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유선은 그 자리에 굳었다.
기관은 없었다. 도는 물건도, 통도, 막대도 없었다. 바닥에는 압력을 못 이겨 안쪽으로 터져 벌어진 무쇠 덩이들이 파편처럼 나뒹굴었다. 이음새마다 새까맣게 그을린 자국. 그 옆에는 증기에 삭아 흐물흐물 문드러진 가죽 뭉치가 무더기로 쌓여, 시큼한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누군가 이미 시도했고, 이미 처참하게 실패한 흔적이었다.
유선의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열병 탓이 아니었다.
터진 무쇠 조각 하나를 집어들었을 때, 그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역산의 눈은 도는 기관을 보아야 열린다. 그러나 이건 완성품이 아니라 부서진 잔해였다. 그런데도 파편의 벌어진 결을, 그을린 이음새의 무늬를, 삭은 가죽의 문드러진 결을 응시하는 순간—뇌리에 흐릿한 심상이 번졌다. 완성되지 못한 물건이라도, 만들려 한 흔적은 남아 있었다. 이음새가 어디서 어긋났는지, 어느 두께가 압력을 못 견뎠는지, 가죽이 어느 자리에서 삭아 김이 새어 폭발로 이어졌는지—역산이 그 실패의 공정을 거꾸로 훑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조여왔다. 익숙한 고통이었다. 자명종 때처럼, 심상의 도면이 눈앞의 현실을 밀어내며 뇌리를 잠식했다.
무쇠의 결이 말했다. 이 무쇠는 서양 강철이 아니다. 조선의 무쇠는 무르다. 안에서 물이 끓어 김이 힘을 내면, 그 힘을 담을 통이 먼저 터진다. 이음새를 아무리 두껍게 해도, 두꺼운 곳과 얇은 곳이 함께 늘고 줄지 못해 그 경계에서 벌어진다. 앞선 이는 이음새만 자꾸 덧대다 통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가죽이 말했다. 밀폐를 위해 이음마다 가죽을 대었으나, 뜨거운 김에 가죽은 삭는다. 하루면 문드러지고, 문드러진 틈으로 김이 새면 압력이 한쪽으로 쏠려—.
"채 잡직! 뭐 하나, 거기서!"
창고지기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유선은 대답하려 했으나 혀가 굳어 있었다. 입술이 달싹였을 뿐 소리가 되지 않았다. 손에 쥔 무쇠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앞의 창고가 기울고, 삭은 가죽의 시큼한 냄새가 아득해졌다.
*
정신이 든 것은 이틀 뒤였다.
거적 위였다. 목이 타들어갔고, 온몸이 매질을 당한 듯 쑤셨다. 곁에 낯선 사내가 팔짱을 끼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가 두껍고 손등에 화상 자국이 얼룩진, 대장장이의 손이었다.
"깨어났나."
사내는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이틀을 헛소리도 못 하고 앓았어. 창고에서 파편 하나 붙들고 넋을 놓기에, 미친놈인가 했지. 나는 홍만춘이다. 이 현장 대장간을 맡고 있어."
유선은 일어나려 했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을 하려 했지만—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자명종 때보다 무거웠다. 부서진 기관까지 역산한 대가였다.
"말은 안 나오고?"
홍만춘이 코웃음을 쳤다.
"임금이 보냈다는 그 잡직이, 창고 열자마자 이틀을 자빠져 벙어리가 됐다. 소문이 벌써 현장에 쫙 퍼졌어. 김치복이 좋아하겠구먼. 손 하나 안 대고 자네가 무너지게 생겼으니."
유선은 이를 악물었다. 심상 속에는 실패의 도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이 터졌고 왜 삭았는지,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전부 보였다. 그런데 그것을 말할 혀가 없었다. 보이는데 말할 수 없다. 이 재주의 진짜 지옥이 그것이었다.
홍만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유선의 손에 아직 쥐여 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이틀을 앓으면서도 놓지 않은—그 터진 무쇠 파편이었다.
"…그건 왜 안 놓고 있어."
유선은 대답 대신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편의 벌어진 이음새를 짚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흙바닥에 무언가를 그었다. 삐뚤빼뚤한 선이었으나, 이음새를 어떻게 겹쳐 늘고 줄게 해야 터지지 않는지를 그린 것이었다.
홍만춘의 눈이 좁아졌다. 대장장이의 눈이 바닥의 그림을 읽었다. 평생 무쇠를 두드린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이 이음새를, 이렇게 접어 물린다고? 누가 이런 걸—."
그때 창고 쪽에서 발소리가 몰려왔다. 김치복의 서리 둘이었다.
"채 잡직, 자재 청구를 규례대로 하겠다 했겠다?"
서리가 종이 한 장을 유선의 거적 앞에 던졌다.
"여기 화성 자재 청구 규례일세. 무쇠를 받으려면 감독관 셋의 연서와 자재색의 확인 도장, 그리고—앓아 벙어리 된 자는 문서에 서명을 못 하니, 청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군. 규례대로 말이야."
서리가 이죽거렸다. 유선은 종이를 노려보았다. 혀가 굳어 반박도 못 하는 지금, 그가 딛고 서겠다던 '법도'가 가장 먼저 그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