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우범의 태블릿 화면 속에서 내 은신처가 무너지고 있었다.

민 사장이 내 침대 매트리스를 칼로 찢었다. 스펀지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내 낡은 재킷. 채령이 몇 년 전 내 어깨에 걸쳐줬던 그 재킷. 민 사장이 칼끝으로 천을 찢으며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이 손, 잘라버릴 거야."

찢긴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화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턱 근육이 경련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났다. 내 은신처는 3년 동안 유일한 거점이었다. 채령의 사진 한 장, 동묘 시절 메모들, 그리고 폐공장에서 가져온 물질 샘플이 보관된 작은 유리병. 민 사장의 부하가 그 유리병을 집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투명한 액체가 검은 콘크리트 위로 번졌다.

그 순간 내 손끝이 미세하게 저렸다. 마치 그 액체가 내 신경과 연결된 것처럼.

우범은 태블릿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소파에 기대 앉았다. 도박장 VIP룸. 벽면 가득한 모니터들이 주식 시세와 실시간 경마 중계를 띄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민 사장의 부하들이 내 서랍을 뒤엎고, 내 책상 위 메모들을 바닥에 버리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네가 민 사장을 망가뜨린 방식. 꽤 인상적이더군." 우범이 싱글몰트를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가 복수를 원해도 이해할 만하지."

"그 물질, 네가 유출시킨 거지."

우범의 눈썹이 올라갔다. "한수진에게 들었나? 그 여자, 생각보다 입이 가볍군."

"사실이잖아."

"물론 사실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우범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위스키가 잔 안에서 잔잔하게 흔들렸다.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내 실험체로서 매우 성공적이라는 거다. 4개월째. 보통 피험자들은 2주를 못 버텨. 신경이 타버리거든. 그런데 너는... 점점 강해지고 있어."

내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4개월.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내가 이 도시에 온 지, 능력을 얻은 지 이제 겨우 며칠 아닌가. 그런데 4개월이라니. 기억이 접힌 건지, 시간 자체가 뒤틀린 건지. 혼란 속에서도 나는 입을 열었다.

"제안하지." 우범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채령을 포기해. 대신 내 밑으로 들어와. 네 능력은 연구 가치가 충분해. 네 기억 소실 속도를 늦추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고."

채령을 포기하라고. 그 말이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 이름만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남아있는지, 무엇을 되찾으려 하는지, 그 모든 이유가 그 이름에 붙어 있었다. 그녀를 포기한다는 건, 내가 나를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절하면."

우범이 손가락을 튕겼다. VIP룸의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부하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최소 열 명. 모두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구두 밑창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나를 포위했다.

"거절하면... 민 사장에게 네 손을 선물로 보내주지. 살아있는 상태로."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폐가 찬 공기로 가득 찼다. 바닥을 보았다. 조금 전 유리병이 깨지면서 생긴 파편들이 대리석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 중 하나를 집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살짝 베었다. 피가 스며나왔다.

"그 손, 진짜 잘라버리기 전에 내려놔." 우범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나는 대답 대신 유리 조각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피가 유리 표면을 적셨다. 내 신경이 그 혈액을 통해 유리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유리가 바닥의 다른 파편들과 맞닿아 있었다. 신경 신호가 유리 조각들을 매개로 퍼져나갔다. 마치 거미줄처럼.

부하들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들의 구두 밑창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능력을 개방했다.

유리 파편이 전달하는 촉각 신호를 완전히 왜곡했다.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감촉 대신, 내가 직접 누군가의 클리토리스를 애무할 때의 감각을 증폭시켜 그들의 발바닥으로 쏘아보냈다. 열 배, 아니 백 배로. 젖은 손끝으로 음핵을 감싸 쥐고, 꽃봉오리처럼 굴리며, 귀두가 스치듯 마찰하는 그 순간의 전율을 그대로.

첫 번째 부하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이 아니었다. 신음이었다.

"으, 으아아악...!"

그의 무릎이 먼저 바닥에 꺾였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하나둘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놈은 바지를 붙잡고 발버둥쳤다. 어떤 놈은 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신음했다. 그들의 사타구니가 하나같이 부풀어 올랐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쾌락이 척수를 타고 올라가 성기로 집중되고 있었다. 우범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보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자신의 병사들이 쾌락에 오물거리며 변기처럼 흘러내리는 굴욕의 현장이었다.

"이, 이게 무슨..."

우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태블릿 화면에서 민 사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부 일어나! 뭘 하는 거야!"

하지만 부하들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과의 접촉 면적이 변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쾌락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한 부하가 권총을 빼내려다 손이 미끄러졌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이 천장을 뚫었다. 석고 가루가 우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내 발걸음이 유리 파편을 밟을 때마다 부하들의 신음이 더 커졌다. 마치 내가 그들의 신경줄을 직접 밟고 있는 듯했다. 한 놈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입가에는 침이 흘렀다.

"살... 살려..."

나는 그를 발로 밀어냈다.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더 큰 쾌락에 휩싸였다.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바지 앞쪽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사정한 거였다. 발바닥 쾌락만으로.

우범이 뒷걸음질 쳤다. 그의 손이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비상 버튼을 찾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손목을 잡았다. 내 손가락이 그의 맥박에 닿았다.

"네 심장 박동수. 지금 분당 140회야." 나는 그의 손목을 비틀며 말했다. "공포인지 흥분인지 구분이 안 되지? 내가 구분해줄까."

우범의 눈이 커졌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VIP룸의 창문이 박살났다.

검은 SUV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차량 지붕이 대리석 바닥을 갈며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유라였다.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그녀가 한 손으로 핸들을 조종하고 다른 한 손으로 기관단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우범의 뒤에 서 있던 부하 두 명이 가슴에 총탄을 맞고 나뒹굴었다.

"타!"

유라가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붕대 사이로 붉은색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눈은 살아 있었다. 내가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무언가에 홀린 듯한 광기 어린 빛이었다.

나는 우범의 손목을 놓고 SUV 조수석으로 뛰어들었다. 유라가 기어를 후진에 넣었다. 타이어가 대리석 위에서 연기를 뿜으며 미끄러졌다. 부서진 창문을 통해 우리는 다시 밤거리로 튀어나왔다.

"채령의 명령인가?"

내 물음에 유라는 짧게 웃었다. 피가 섞인 웃음이었다.

"내 명령이야."

그녀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차량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뒤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우범의 추격 차량들이었다. 세 대. 검은 세단들이 우리를 따라 골목으로 밀고 들어왔다.

"숙여!"

유라가 외치며 기관단총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반동이 그녀의 어깨를 강타했다. 붕대가 더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총알이 선두 차량의 타이어를 찢었다. 세단이 통제를 잃고 가로등을 들이받았다. 불꽃이 밤하늘로 치솟았다.

나머지 두 대가 더 거세게 추격해왔다. 그들의 총탄이 SUV의 트렁크를 강타했다.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 뒷유리가 박살났다. 유리 파편들이 내 목덜미에 박혔다.

"좌회전!"

내가 소리쳤다. 유라가 핸들을 돌렸다. 차체가 기울며 좁은 골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이드미러가 벽에 긁히며 불꽃을 튀겼다. 추격 차량 한 대가 진입 각도를 놓쳐 건물 모서리에 측면을 받았다. 두 번째 충돌음.

마지막 한 대가 여전히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의 헤드라이트가 백미러를 통해 내 눈을 찔렀다.

"총알 다 썼어."

유라가 빈 탄창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하얗게 경직되었다.

"트렁크 안에 예비 탄창..."

"없어. 한 번 더 맞으면 이 차도 끝이야."

뒤차가 다시 총격을 가했다. 총알이 조수석 문을 관통했다. 내 허벅지 옆을 스치며 시트에 박혔다. 뜨거운 금속 냄새가 차 안에 가득 찼다.

그때 유라가 갑자기 웃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피 냄새와 화약 냄새 사이로, 그녀의 웃음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맑았다.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을 줄 몰랐어."

핸들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공포가 아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맥박, 그녀의 체온. 모든 감각이 내 손바닥에 닿는 듯 전달되고 있었다.

"너..."

"응. 너 때문이야."

유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동공이 확장되어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붕대 사이로 흐르는 피가 그녀의 왼쪽 팔을 타고 핸들로 흘러내렸다.

"그날 이후로 계속 느껴져. 네 손길이. 네가 여기 없는데도, 내 피부가 너를 기억해. 마치 네가 내 신경을 다시 써버린 것 같아."

뒤차가 다시 추격해왔다. 이번에는 더 가까이. 범퍼가 우리 차량 뒷부분을 들이받았다. 충격에 유라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붕대가 완전히 찢어졌다. 상처가 드러났다. 총알이 박힌 구멍. 검붉은 살점 사이로 하얀 뼈가 희미하게 보였다.

"으윽...!"

유라가 신음하며 핸들을 놓칠 뻔했다.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튀었다. 나는 재빨리 핸들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등 위로 내 손을 포갰다.

접촉.

그 순간 유라의 전신이 경련했다.

내 능력이 그녀의 신경계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솟구치는 통증 신호를 내가 가로챘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내 손바닥을 통해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 신경이 불타는 듯한 작열감.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그 신호를 뒤집었다.

통증을 쾌락으로. 고통을 절정으로. 그녀의 신경계 전체를 재프로그래밍하듯, 통증 신호가 지나는 모든 경로를 쾌락 회로로 덮어씌웠다.

"아아아아악...!"

유라의 비명이 신음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발작적으로 오그라들었다. 차량이 다시 골목으로 쏠렸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신경 신호를 왜곡했다. 총알이 박힌 상처 부위에 직접 손을 대고,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통증을 순수한 쾌감으로 전환시켰다. 그녀의 신경 말단 하나하나가 내 손끝에 반응하며 영구적으로 다시 배선되고 있었다.

"더... 더 해줘..."

유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입가에 침이 흐르고, 동공이 완전히 풀린 채로.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줘... 네 손가락으로... 내 안을..."

내 손가락이 그녀의 상처 속으로 파고들었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쳤다. 따뜻하고 끈적한 감촉. 나는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찢어진 근육을 더듬었다. 총알이 박힌 부위. 금속 파편이 내 손끝에 닿았다. 나는 손가락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찢어진 근육 섬유 사이로 손끝을 비집자, 그녀의 신경 다발이 내 손가락을 빨아들이듯 경련했다. 젖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손가락 마디를 조여왔다. 나는 그 속에서 손끝을 구부려, 상처 깊은 곳에 뭉쳐진 신경 다발을 직접 훑었다. 마치 현악기의 줄을 퉁기듯.

유라의 전신이 폭발했다.

"아, 아, 안 돼, 안 돼, 가, 가버려...!"

그녀의 질이 격렬하게 수축했다. 애액이 좌석을 적셨다. 그녀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핸들에서 손을 놓친 그녀의 팔이 허공에서 경련했다. 차량이 길가의 쓰레기통을 들이받았다. 충격이 차체를 흔들었지만 유라는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오로지 내 손가락이 주는 쾌락 속에서만 살아 있었다. 내 손가락이 상처 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질 안쪽이 반응하며 끈적한 액체를 토해냈다. 그녀의 신경계 전체가 이제 통증을 쾌락으로만 인식하도록 완전히 재편되고 있었다.

"가... 가고 있어... 또... 또 가..."

두 번째 오르가즘이 그녀를 덮쳤다. 이번에는 더 격렬했다. 그녀의 질 근육이 내 손가락을 물어뜯듯 조여들었다. 애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허리가 시트에서 떠올랐다. 목이 뒤로 젖혀졌다. 목젖이 떨리며 터져 나오는 소리.

"이게... 살아있다는 거구나..."

그녀가 속삭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총알이 어깨에 박힌 채,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며 처음으로 이 능력을 후회하지 않았다.

뒤차가 다시 총격을 가했다. 총알이 뒷좌석을 관통했다. 나는 유라의 상처에서 손을 빼내며 기어를 후진으로 밀어넣었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SUV가 뒤로 튀어나가며 추격 차량의 전면부를 들이받았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굉음. 상대 차량의 라디에이터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다시 기어를 전진으로 바꾸고 액셀을 밟았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물어뜯으며 차량을 앞으로 쏘아보냈다. 유라는 조수석에 쓰러진 채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허벅지 위를 더듬었다.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잠들기 직전처럼 흐릿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피로 미끄러운 그녀의 손가락을 깍지 꼈다.

"아직 죽지 마."

"응... 아직은..."

차량은 어둠 속을 달렸다. 뒤에서는 더 이상 추격하는 차량이 없었다. 나는 한수진이 알려준 임시 아지트의 좌표를 떠올렸다. 도시 외곽의 폐빌딩. 그녀가 미리 확보해둔 은신처였다.

30분 후, 나는 유라를 들쳐 업고 폐빌딩의 계단을 올랐다. 그녀의 피가 내 등에 흘러내렸다. 계단 구석마다 쥐들이 도망쳤다. 3층 문을 열자 수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 처치 키트는 침대 옆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하지만 그녀가 테이블 위에 펼쳐둔 서류 더미를 보았다. 폐공장 물질 유출 사건 보고서. 피험자 명단. 그리고 내 이름이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문서.

"그 물질, 사실은 우범이 고의로 유출시킨 거야." 수진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리고 최초 감염자가 너라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너는... 실험체였던 거야."

나는 유라를 침대에 눕히며 대답하지 않았다. 응급 처치 키트를 열었다. 소독약과 핀셋, 붕대.

"네 반응이 재미있네." 수진이 연기를 내뿜었다. "분노하지 않는 거야?"

"분노는 나중에."

나는 핀셋으로 유라의 상처 속에서 총알 파편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신음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내 손가락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수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네 기억 소실 속도. 점점 빨라지고 있어. 오늘 밤만 해도 능력을 몇 번이나 썼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셀 수 없었다. 도박장에서 유리 파편을 매개로 부하들 열 명을 제압했고, 우범의 맥박에 접촉했고, 차 안에서 유라의 통증을 쾌락으로 반전시켰다.

"지금 당장 거울을 봐."

수진이 벽에 걸린 깨진 거울을 가리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귀밑까지 자라 있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짙었다.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이 낯설었다.

내 얼굴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마치 오래 전에 본 영화 속 배우의 얼굴처럼, 기억 저편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오늘이 며칠이지?"

내 물음에 수진이 짧게 대답했다.

"11월 17일."

11월. 그 단어가 혀끝에서 쇳물처럼 식어갔다. 내가 이 도시에 온 계절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내 인생 전체가 빗물에 번진 신문지처럼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여기 남아있는 거지.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되찾으려고 했는데.

"그 여자 이름만은 아직 남아있어."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채령."

그 이름이 내 입술에서 떨어지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그녀를 처음 만났는지, 그녀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그녀를 되찾으려 했는지. 모든 게 안개 속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만은.

그 이름만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유라의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바늘이 그녀의 살을 뚫고 들어갈 때마다, 그녀의 신경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의식 없이도 내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강현..."

잠꼬대였다. 나는 바늘을 계속 움직였다. 실이 상처를 한 땀 한 땀 조여갔다.

수진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어. 우범의 조직이 도시 전체를 뒤질 거야. 하지만 이 건물은 명의가 가짜로 되어 있어서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어."

"그 후엔."

"그 후엔..." 수진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결정해야 해. 계속 싸울지, 아니면 도망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의 상처를 감고 붕대를 고정시켰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어 갔다.

밤이 깊었다. 수진은 소파에서 잠들었고, 나는 창가에 서서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네온사인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저 불빛들 아래서 우범의 부하들이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 거다. 민 사장이 내 손을 자르겠다며 칼을 갈고 있을 거다.

나는 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 묻은 손가락. 이 손이 기억을 대가로 능력을 발휘한다. 이 손이 유라에게 쾌락을 주고, 부하들을 무릎 꿇렸다. 이 손이 채령을 되찾을 유일한 무기였다.

하지만 채령이 누군지도, 왜 그녀를 되찾아야 하는지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꿈을 꾸었다.

폐공장 지하. 깨진 유리병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감쌌다.

"잊지 마, 이건 네가 선택한 거야."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려 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 가려진 형체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뭘 선택했는데."

내 물음에 그녀가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나를 구원하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

"너 자신을 잃는 것."

나는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창문으로 희뿌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 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나를 옮겨준 거였다.

그리고 침대 옆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채령.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멎지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끝이 저리고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검은 드레스. 진주 목걸이. 완벽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그녀는 마치 장례식에 온 것처럼 단정하게 차려입고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여전히 오래된 자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 기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흉터.

"왜..."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채령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눈가에 얇은 눈물막이 번들거렸다.

"수진에게 연락 왔어. 그리고 유라가 나에게 위치를 알려줬지."

"우범은."

"오늘 아침 해외로 도피했어. 네가 그의 핵심 부하들을 전부 무력화시켰으니까.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더 큰 병력을 이끌고."

채령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차가웠다. 나는 그 접촉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다. 기억의 파편. 감정의 잔재.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손길은 그저 낯선 여자의 손길일 뿐이었다.

"강현... 이제 그만 싸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이미 네가 알던 그 여자가 아니야."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맥박에 닿았다. 분당 120회.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기대. 갈망.

"네 손길만은... 아직도 기억나."

채령이 내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피부는 매끄러웠다. 그녀의 체온이 내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것만은 진짜야. 나를... 다시 나로 만들어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끝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의 신경계가 열려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기억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내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 결, 그녀의 체온, 그녀가 내 손길에 반응하는 방식. 모든 것을.

그녀의 손목을 잡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장면. 피투성이가 된 채령이 내 품에서 속삭인다. "나를 구원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구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꺼지고, 첫 지하철이 선로를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채령의 목덜미를 감싸쥔 채, 그녀의 신경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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