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내 몸에 오염된 흙을 바르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재 구역에서 살아남으려면 방사능 수치가 높은 시궁창 진흙을 맨살에 덕지덕지 발라야 했다. 변이체 놈들이 깨끗한 살 냄새를 맡고 달려드니까. 손바닥으로 방공호 바닥의 축축한 흙을 퍼내려는데 유나가 내 팔뚝을 움켜잡았다.

"무슨 짓이에요."

"입 다물고 저기 구석에 쳐박혀 있어."

발소리다. 군화 밑창이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 세 명, 아니 네 명. 무기 끄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유나를 방공호 깊숙한 곳, 녹슨 환풍구 뒤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전에 내가 숨어 살던 곳이다. 그녀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손바닥으로 유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숨소리도 죽여. 들키면 너부터 죽어."

백골단 순찰대다. 가죽 방호복에 너덜거리는 방독면을 걸친 놈들이 방공호 입구를 막아섰다. 선두에 선 놈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철제 문을 두드렸다. 쾅, 쾅.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벽을 타고 방공호 전체로 번졌다.

"누구 있나."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방금 발랐던 진흙이 손바닥에서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방사능에 오염된 흙 특유의 퀴퀴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녹아내린 시체 썩는 냄새랑 비슷하다.

"재 구역 쥐새끼 한 마리군."

순찰대장이 내 턱을 군화 발끝으로 쳐올렸다. 방독면 너머로 노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변이체 초기 증상이다. 눈의 색소가 방사능에 녹아내린 거지.

"여기서 뭐 하는 놈이냐."

"죽지 않으려고요."

나는 목소리를 일부러 갈라지게 냈다. 오염된 폐로 숨 쉬는 놈 특유의 쇳소리.

"혼자냐."

"예."

순찰대장이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놈들이 방공호 안으로 들어와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자 몇 개 발로 차 넘어뜨리고, 내가 모아둔 고철 더미를 소총 총구로 헤집었다.

"뭐 찾는 거요?"

"입 닥쳐."

군화 발끝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갈비뼈에 금이 가는 느낌.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몸을 더 웅크렸다. 오염된 흙이 입술에 묻어들었다. 방사능 입자가 혀끝에서 따끔거렸지만 내 체질엔 아무 문제도 없다.

"대장, 아무것도 없습니다."

"쓰레기만 쌓여 있군요."

순찰대장이 내 머리 위에 침을 뱉었다. 끈적한 타액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령 님이 이 구역도 정리하라고 했어. 재 구역 쥐새끼들 전부 소탕하라고."

미령. 처음 듣는 이름이다.

"백골단 구역에 숨어 사는 놈들은 전부 처리하라는 명령이야. 하지만 이딴 오염된 쓰레기까지 총알 낭비할 필욘 없지. 이미 반쯤 썩은 놈이잖아."

순찰대장이 내 얼굴에 침을 한 번 더 뱉고는 등을 돌렸다.

"가자. 공기만 더러워졌군."

군화 발소리가 멀어졌다. 방공호 입구가 닫히고,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숨을 죽였다. 열까지 세었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나와."

환풍구 뒤에서 유나가 기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오염된 흙을 뒤집어쓴 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령이라고 했죠."

"백골단 간부야. 군수 창고 관리하는 여자."

유나는 내 팔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려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내 피부에 닿으면 방사능이 흡수될까 봐 두려운 거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 팔뚝에 억지로 갖다 댔다.

"말해 봐. 아는 거 전부."

"냉혹한 사람이에요. 거미가 가장 신뢰하는 간부고, 군수 물자 전부를 그녀가 관리해요. 변이된 왼팔이 무기고, 근접전 실력은 백골단 내에서도 최상위래요."

"거미는."

"동부 녹 구역 지배자요. 백골단 수장이고. 변이체 수준까지 오염이 진행된 괴물이에요. 등에 난 혹에서 방사능을 뿜어내고, 그걸로 사람을 천천히 죽이는 걸 즐기고."

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다. 분노다. 이 여자는 백골단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런 식이다. 뭔가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거미가 미령을 성적으로 소유하고 있어요. 그녀가 깨끗하니까. 오염도가 낮은 여자는 희소하니까. 미령은 그 굴욕을 감내하면서 군수 창고를 지키고 있어요."

나는 유나의 손목을 놓았다. 그녀가 내 팔뚝에 닿았던 손바닥을 자신의 옷자락에 문질렀다.

"군수 창고 위치는."

"녹 구역 3번지. 옛날 군부대 탄약고였어요. 방사능 수치가 높아서 일반인은 접근도 못 해요. 하지만 미령은 거길 자기 영토로 만들었어요."

내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아간다. 미령. 냉혹한 여전사. 거미의 성적 소유물. 굴욕을 감내하는 자. 복수심이 침전된 자.

"너 방금 내 팔 만졌을 때."

"예?"

"두려웠냐."

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사능에 녹아내렸다가 내 능력으로 회복된 그 눈동자다.

"무서웠어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나를 죽이진 않을 거란 것도 알아요. 지금은."

영리한 여자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쓸모를 아는 자는 좋다.

그때였다. 몸속에서 열이 치밀었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불덩이 같은 감각. 방사능을 흡수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찾아오는 증상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피부가 달아올랐다. 손끝이 저리고, 사타구니 쪽으로 피가 몰렸다.

"또."

유나가 내 상태를 눈치챘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섰다. 지난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거다.

"필요해."

내 목소리가 잠겼다. 방사능이 체내에서 요동친다. 무력화되지 않은 입자들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신경을 자극한다. 이걸 가라앉히려면 체액이 필요하다. 타인의 체액. 깨끗한 땀, 침, 질액.

"유나."

그녀가 도망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콘크리트 벽에 등이 부딪히는 소리. 유나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가만히 있어. 도망치면 더 아파."

이 말이 위협인지 경고인지 나도 몰랐다. 나는 유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피부에서 풍기는 냄새. 땀 냄새다.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땀. 혀를 내밀어 목덜미의 소금기를 핥았다.

유나의 몸이 경직됐다. 피부 위로 닭살이 돋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았다.

"숨 쉬어. 네 체취가 필요하니까."

내 혀가 그녀의 목선을 따라 쇄골 쪽으로 내려갔다. 땀방울이 맺힌 피부를 핥을 때마다 전류 같은 쾌감이 혀끝에서 퍼졌다. 방사능 입자가 체내에서 분해되는 감각. 열이 가라앉고, 대신 성적 흥분이 치밀었다.

유나의 땀은 짰다. 그리고 달았다. 체액에 섞인 방사능이 내 혀를 통해 흡수되면서 내 몸의 금단 증상이 조금씩 완화됐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더 필요해.

"입 벌려."

유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눈만 반짝이는 괴물 같은 얼굴.

"싫어요."

"싫다고 한 번만 더 말해 봐. 그럼 너 여기 두고 떠난다. 밖에는 백골단 순찰대가 돌아다니고 있어. 방금 내가 연기한 그 오염된 걸인 흉내를 네가 낼 수 있냐."

유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나는 그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유나의 구강 안은 뜨거웠다. 혀끝이 그녀의 잇몸을 스치고, 침샘을 자극했다.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침을 빨아들였다. 내 혀가 유나의 혀를 감싸고, 침과 침이 섞였다. 타액 속에 포함된 미량의 방사능이 내 몸으로 흡수됐다.

"으...응..."

유나의 목구멍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리. 나는 그녀의 입술을 빨고, 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침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오른손이 유나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의 옷자락을 끌어올려 맨살을 찾았다. 갈비뼈 위로 땀이 솟아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 땀을 훔치고, 손가락에 묻은 땀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소금기. 그리고 방사능. 두 가지 맛이 혀끝에서 폭발했다.

"더."

나는 유나의 옷을 찢었다. 단추가 떨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굴러다녔다. 그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유두가 차가운 공기에 반응해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그 위로 혀를 굴렸다.

"아...!"

유나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밀어내려다 멈칫했다. 밀어내면 죽는다는 걸 아는 거다. 대신 그녀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손톱이 피부를 찢었다.

나는 그녀의 유두를 입에 물고 강하게 빨았다. 침을 발라 혀로 감싸고, 살짝 깨물었다. 유나의 가슴에서 땀이 솟아올랐다. 그 땀을 핥아 삼켰다. 방사능이 분해되면서 뇌리에 쾌락이 번졌다.

"싫어... 진짜 싫어..."

유나가 울먹였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는 내 몸에 밀착됐다. 생존을 위한 반사 행동이다. 나를 적으로 만들면 죽는다는 걸 본능이 알고 있다.

"거짓말."

나는 그녀의 배꼽 아래로 혀를 움직였다. 땀방울이 배꼽 주름에 고여 있었다. 그걸 핥아내자 유나의 복근이 경련했다.

"네 몸은 나를 원해. 내 능력이 필요하니까."

"그건..."

"생존을 위한 거래야. 감정 따위 개입하지 마."

내가 유나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서 질액 냄새가 올라왔다. 진한 페로몬 냄새.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질액.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유나가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음모 사이로 질액이 번들거렸다.

"보기 싫어요."

"봐."

나는 혀를 길게 빼서 그녀의 음부를 핥았다. 질액이 혀끝에 닿는 순간, 뇌리에 번개가 치는 듯한 쾌감이 터졌다. 방사능 입자가 한꺼번에 분해되면서 금단 증상이 급속도로 완화됐다. 동시에 성적 흥분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으...으으..."

유나의 손이 내 머리를 붙잡았다. 밀어내려는 건지 끌어당기려는 건지 모를 힘. 나는 그녀의 질액을 더 긁어모아 혀로 핥았다. 질구 주변의 주름 사이사이를 혀끝으로 파고들었다. 음핵이 부풀어 오른 게 보였다. 거길 혀로 툭 치자 유나의 허리가 크게 경련했다.

"거기... 안 돼..."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정해."

나는 그녀의 음핵을 입에 물고 빨았다. 유나의 신음이 방공호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질에서 더 많은 액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걸 낭비하지 않고 전부 삼켰다.

체내의 열이 가라앉았다. 방사능이 완전히 무력화된 감각.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호흡이 안정됐다. 하지만 성적 충동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타구니가 터질 것처럼 단단해졌다.

나는 일어서서 바지를 내렸다. 발기된 성기가 튀어나왔다. 귀두가 붉게 충혈되어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파요."

"안 아프게 할게."

나는 그녀의 다리를 들어 내 허리에 감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나는 유나의 질구에 귀두를 댔다. 질액으로 충분히 젖어 있었다. 천천히 밀어 넣자 질벽이 내 성기를 조여왔다.

"아...!"

유나의 질 안은 뜨거웠다. 그리고 좁았다. 질벽이 내 성기를 압박하며 방사능을 흡수하려는 듯 수축했다. 나는 천천히 골반을 밀어붙여 더 깊이 삽입했다.

"다 들어갔어."

"크... 커요..."

유나의 질벽이 경련했다. 나는 허리를 빼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피스톤 운동이 시작됐다. 질액이 섞여 끈적이는 소리가 방공호 안에 울렸다. 내 성기가 그녀의 질벽을 마찰할 때마다 전기 충격 같은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너도 느끼고 있잖아."

"아니에요... 안 느껴..."

"거짓말. 네 질이 내 성기를 이렇게 조이고 있으면서."

나는 속도를 높였다. 골반이 유나의 허벅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콘크리트 벽에 그녀의 등이 부딪히는 소리도 섞였다. 차가운 콘크리트 가루가 그녀의 맨살에 묻어나고, 벽에 핀 곰팡이 냄새가 섹스 냄새와 뒤엉켰다.

유나의 질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오르가즘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그녀의 질벽이 내 성기를 더 강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 압박을 즈려밟듯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가... 가요...!"

"싸.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종이야."

유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질이 폭발하듯 수축했다. 따뜻한 액체가 내 귀두를 적셨다. 나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깊숙이 밀어 넣고 그녀의 질 안에 사정했다. 정액이 질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이 턱 막혔다. 쾌락이 뇌리를 하얗게 질렀다. 나는 잠시 그 자세로 멈춰 섰다. 유나의 질이 아직도 내 성기를 경련하듯 조여왔다.

"됐다."

나는 성기를 뽑았다. 질구에서 정액과 질액이 섞여 흘러내렸다. 유나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녀의 다리가 풀렸다.

"괜찮냐."

"어떻게... 괜찮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바지를 추스르며 유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고 있었다. 수치심인지 분노인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

"거래였어. 네 체액을 받고, 넌 오염도 낮추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죠."

"말로 하면 네가 응했을까."

유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며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벽을 짚었다.

"당신은..."

"뭐."

"사람을 믿지 않는군요."

"사람을 믿어서 살아남은 놈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방공호 구석에 쌓아둔 보따리에서 마른 천 조각을 꺼내 유나에게 던졌다. 그녀는 천으로 자신의 허벅지 사이를 닦았다. 천에 정액과 질액이 섞여 번졌다.

"이거."

유나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가리켰다. 작은 금속 조각. 나는 그걸 집어 들었다. 낡은 열쇠였다. 열쇠 손잡이 부분에 'C.Z-7'이라는 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네 거냐."

"가족 유품이에요. 죽은 가족."

유나가 내게서 열쇠를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이 닿지 않게 했다.

"C.Z-7. 클린존 구역 코드지."

유나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에요. 그냥 옛날 거예요. 핵전쟁 이전 물건이고."

"클린존 7구역은 정화위원회 고위 간부들만 사는 곳이야. 네 목걸이도 그렇고, 이 열쇠도 그렇고. 넌 재 구역 걸인이 아니야."

"주웠다고요. 그냥 폐허에서 주운 거예요."

나는 열쇠를 내 주머니에 넣었다. 유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돌려줘요."

"거짓말할 거면 더 잘해. 열쇠 손잡이에 방사능 오염 흔적이 전혀 없어. 이게 핵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거라면 미량이라도 오염이 묻어 있어야 정상이야. 클린존에서 깨끗하게 보관된 물건이거나."

유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분노인가, 두려움인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이 열쇠는 내가 보관한다."

"왜요."

"네가 나한테 거짓말할 때마다 이걸 떠올리게."

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더 이상 항의하지 않고 돌아섰다. 찢어진 옷을 추스르며 구석으로 걸어갔다.

"미령에게 접근할 방법이 필요해."

내 말에 유나가 발걸음을 멈췄다.

"백골단 군수 창고를 직접 찾아가면?"

"그 전에 내 능력에 대한 소문이 먼저 돌아야 해. 그래야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어."

"소문을 퍼뜨릴 사람이 필요하겠네요."

"너 아는 암시장 중개인 있냐."

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한 명 있어요. 술에 절어 살지만 정보 하나는 확실한 노인네."

"이름은."

"석호. 재 구역 12번지 폐병원 지하에 살아요. 클린존에서 쫓겨난 의사래요."

석호. 의사 출신이라면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있을 거다. 쓸모 있겠군.

"내일 그를 찾아간다. 너도 같이 와."

"싫다면요."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유나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지쳤다는 신호다. 나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방공호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이 방공호는 내가 발견했을 때부터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지하 1층은 옛날 대피소로 쓰였던 공간이고, 지하 2층은 군용 물자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하지만 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더 있었다. 철제 문으로 막혀 있고, 핵전쟁 이전 군용 봉인이 붙어 있었다.

나는 손전등을 켜고 그 계단을 내려갔다. 철제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문에 붙은 봉인 스티커를 떼어냈다. '방사능 의료 연구 시설 - 출입 제한'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손바닥으로 문을 밀자 굉음과 함께 열렸다.

문 너머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의료용 냉동고 수십 대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전원이 꺼져 있었지만, 가장 안쪽에 있는 냉동고 한 대만 희미한 녹색 불빛을 내뿜으며 작동 중이었다.

기계음이 울렸다. 냉각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다. 20년 넘게 버려진 방공호 지하에서, 아직도 작동하는 의료 장비라니.

나는 냉동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리문 너머로 시험관들이 보였다. 방사능 경고 마크가 붙은 금속 용기, 그리고 '클린존 정화위원회 소유 - 무단 접근 금지'라는 라벨.

냉동고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소리.

"태한 씨?"

유나의 목소리다. 나는 손전등을 껐다.

"여기 있었군요."

유나가 계단을 내려오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냉동고를 향했다.

"이게 뭐예요."

"몰라. 하지만 이 방공호는 단순한 대피소가 아니었어."

냉동고 안의 시험관들이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방사능 물질이 분해될 때 나오는 체렌코프 현상이다. 이 방공호는 핵전쟁 이전에 방사능 연구를 하던 비밀 시설이었던 거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물이 아직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뭘 찾으시는 거예요."

"답을 찾는 거지."

나는 냉동고를 열려다 멈췄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미령과의 접촉이 먼저다.

"위로 올라가자. 내일 석호를 찾아갈 거야."

방공호 1층으로 올라왔을 때, 철제 문 앞에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순찰대가 떨어뜨린 건가. 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거친 필체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군수 창고로 와라. 네 능력이 거짓이면 그 자리에서 목을 꺾는다.'

서명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미령.

소문을 퍼뜨리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나를 먼저 찾아낸 거다. 나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려움이 아니다. 기대다. 사냥감이 먼저 다가왔다.

"내일 일정 취소다. 바로 녹 구역 3번지로 간다."

유나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미령이에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모르지. 하지만 이쪽이 더 재미있어졌어."

나는 어둠 속에서 웃었다. 미령. 네 목을 꺾으러 온 자를, 내가 어떻게 꺾는지 똑똑히 지켜봐라.

밖에서는 방사능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방공호 전체에 울려 퍼졌다. 빗방울 하나하나에 죽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비를 맞아도 죽지 않는다.

이게 내 능력이고, 내 저주고, 내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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