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나루터의 포성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준호는 종로 뒷골목의 낡은 기와집 처마 아래에 선 채 하늘을 봤다. 손가락이 빛에 투명해 보였다. 아직 온전한 형태였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촛불이 녹아내리는 속도로.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비한 목소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가 손짓했다. 개혁파의 사람이었다. 이준호를 따라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첫 번째 것을 깨달았다.
방 안에는 다섯 명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그리고 이름 모를 두 명의 관료. 모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옷은 찢어졌고,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다. 서광범의 왼쪽 팔은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이준호 선생." 김옥균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확신이 없었다. "상황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강 나루터의 전투는 개혁파의 예상을 벗어났다. 처음 두 시간은 완벽했다. 이준호의 설계도로 만든 신식 포가 보수 세력의 진지를 파괴했다. 그들은 우위를 점했고, 명성황후의 근위대는 후퇴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보수 세력은 포성음이 울리자마자 동향의 향교에 모여 있던 양반 의병을 소집했다. 3,00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이지 않았지만, 수가 많았다. 신식 포는 강력했지만, 탄약이 제한적이었다. 이준호의 설계도는 포의 원리만 알려주었지, 어떻게 대량 생산할 것인지는 담지 않았다.
"포탄이 떨어졌어요." 서광범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세 시간 만에. 우리는 그걸 몰랐습니다. 기술자들이 더 빨리 만들 수 없다고 했는데..."
"민간인 거주지까지 포격이 떨어졌습니다." 박영효가 덧붙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최소 300명. 정확한 수는 모릅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투명해진 손가락이 흔들렸다.
300명.
그들은 한강 나루터의 집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상인의 가족, 노비, 어린아이들. 이준호가 설계도를 그릴 때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때 그는 전략만 생각했다. 개혁파가 어떻게 보수 세력을 이기는가. 어떻게 조선을 근대화하는가. 죽음은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지금 그것은 구체적이었다.
"그 다음엔 뭐 했습니까?" 이준호가 물었다.
"후퇴했습니다." 김옥균이 답했다. "명성황후가 직접 경복궁 근위대를 이끌고 나왔고, 보수 세력의 반격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우리를 소유하려고 했습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뭐라고 했습니까?" 김옥균이 물었다.
"당신들이 죽었을 때, 저는 뭘 생각했을까요." 이준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제 설계도를 건넬 때. 당신들이 그걸로 뭘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는 말을 멈췄다. 손가락을 봤다.
"제가 당신들의 미래를 소유하려고 했을까요."
박영효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선생님, 그건..."
"제가 당신들을 구원하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요." 이준호가 박영효를 봤다. "정말 조선을 걱정해서? 아니면 제 자신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박영효의 얼굴이 고통스러워졌다.
"당신들이 내 지식으로 성공하면, 저는 영웅이 되는 거예요. 조선을 구한 미래인. 당신들이 실패하면, 저는 비극의 증인이 되는 거고. 어느 쪽이든 제 이야기가 되는 거죠."
서광범이 일어났다. "그래도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이준호가 서광범을 봤다. 그의 팔의 붕대 아래로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네. 당신들은 싸우고 있네요. 제 기술 없이도. 그렇다면 제 기술이 뭘 한 걸까요."
"300명을 죽였습니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준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당신들을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박영효가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이준호는 투명한 손가락을 보며 놀랐다. 박영효의 손을 뚫고 자신의 팔이 반투명해 보였다. 박영효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조선은 당신이 없어도 변해야 했습니다." 박영효의 목소리는 낮고 확고했다. "우리는 당신의 설계도가 없어도 근대화의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더 길고, 더 어렵고,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럼 당신들이 질 수도 있다는 뜻 아닙니까?" 김옥균이 물었다.
이준호는 김옥균을 봤다. 그의 눈에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가득 차 있었다. 절망과 기아. 더 강한 무기를 원하는 기아.
"네." 이준호가 답했다. "당신들이 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당신들의 역사입니다."
김옥균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당신은 뭘 하려고 왔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준호는 앉았다. 방 바닥에 앉았다. 투명해지는 손을 보며 앉았다.
"저는 당신들의 미래를 정해주려고 했어요. 당신들이 이기도록. 당신들이 성공하도록. 하지만 당신들이 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시간의 균열이 울렸다.
방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준호는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뼈 안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시간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리.
"당신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신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방 안에서 온 것이었다. 아니, 이준호의 머리 안에서 온 것이었다.
"한 번 더 개입하여 당신의 욕심을 관철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시작한 것을 조선의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가. 그 선택이 당신을 1894년에 묶어둘 것인가, 아니면 해방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입니다."
박영효가 무릎을 꿇었다. 이준호 앞에.
"당신은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박영효가 말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이준호는 박영효를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박영효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또 다른 것도 있었다. 결의. 조선의 사람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결의.
그것은 이준호가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 스스로 찾아낸 것이었다.
"제 다음 설계도가 뭘까요?" 서광범이 물었다.
이준호는 서광범을 봤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이제 다른 것이었다. 이준호의 기술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있다는 희망. 자신들이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
"저는 더 이상 설계도를 줄 수 없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왜냐하면..."
그가 손을 펴자, 투명한 손을 통해 방 뒤의 벽이 보였다.
"저는 이미 떠나고 있거든요."
시간의 균열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더 크게. 더 절박하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당신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당신들의 선택입니다. 제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조선을 구하든, 조선을 망하게 하든, 그것은 당신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김옥균이 앞으로 나왔다. "당신이 없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이준호는 김옥균을 봤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들이 그 길을 스스로 걷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투명해진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이준호는 떠올랐다. 마치 물 위에 뜨는 종이처럼.
"제가 당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배운 것입니다."
박영효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은 이준호를 통과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이준호는 천장을 봤다. 천장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시간의 균열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그것은 이준호를 2024년으로 데려가는 울음이었다. 아니, 시간의 틈으로 데려가는 울음이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이준호가 사라지는 것을 봤다. 투명해진 몸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에 남은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당신들을 믿습니다. 조선을 ."
그 목소리도 사라졌다.
방에는 다섯 명만 남았다. 그리고 바닥에는 이준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박영효가 그것을 집어들었다. 하얀 종이였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완전히 빈 종이였다.
"그게 뭡니까?" 서광범이 물었다.
박영효는 종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당신들의 미래입니다."
종로 뒷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포성음은 한강 나루터에서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다. 마치 조선 전체가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처럼.
김옥균은 검을 집어들었다.
"우리가 나가야 합니다."
"네."
박영효도 일어섰다. 서광범도. 나머지 두 명도.
그들은 방을 나갔다. 종로의 어두운 골목으로 나갔다. 그리고 포성음이 울리는 한강 나루터로 향했다.
이제 그들의 선택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강 너머에서 또 다른 포성음이 울렸다. 보수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결과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미래는 더 이상 이준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것이었다.
# 8화 「구원자의 무너짐」
한강 나루터의 포성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준호가 사라진 지 사흘이 지났을 때, 그는 종로 뒷골목의 비밀 거처에 있었다. 아니, '있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불분명했다. 자신의 몸이 이 시간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펼쳤다. 투명해진 손가락들이 창밖의 빛을 통과시켰다. 손목도,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팔꿈치 위쪽만이 아직 반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천천히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마치 역사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박영효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며칠을 잠들지 않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개혁파가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준호는 창밖을 봤다. 한강 나루터의 연기가 여전히 피어올랐다.
"얼마나?"
"남대문 근처까지 밀렸습니다. 보수 세력이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시작했거든요. 우리의 신식 포는 초반에 효과적이었지만, 보수 세력도 적응했습니다. 이제는 수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박영효는 이준호 옆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회의가 흐르고 있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
"김옥균이 당신의 다음 설계도를 요청했습니다. 더 강한 무기, 더 빠른 통신. 그는 이제 당신의 기술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광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준 설계도를 마치 마지막 카드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이준호는 박영효를 돌아봤다.
"내가 없어도 된다고 말했는데?"
"말씀하셨죠. 하지만 말과 현실은 다릅니다. 당신이 준 기술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었고, 동시에 의존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 없이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박영효는 창밖의 연기를 바라봤다.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 자신의 의미 있는 삶을 만들려고 했던 것 아닐까요? 조선의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그 안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손가락이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박영효의 말이 자신을 더욱 빠르게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제가... 그런 사람이었나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에게 설계도를 줄 때, 당신의 눈에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기술로 조선을 바꾸는 것을 보고 싶다는 기대감 말입니다. 마치 당신이 시작한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박영효는 이준호를 다시 봤다.
"하지만 당신이 시작한 일이 성공한다는 것은, 사실 당신의 뜻이 조선에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원일까요? 아니면 지배일까요?"
이준호의 몸이 흔들렸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처럼.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가요?"
"아니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다만 그것은 당신이 원했던 방식이 아닐 뿐입니다."
박영효는 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멈춰 섰다.
"조선은 스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기술이 없어도 변할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이 더 길고 어려울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준호는 박영효의 등을 봤다. 그 등은 마치 산처럼 보였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뜻을 견지하는 산처럼.
"당신은 우리를 소유하려고 했어요. 당신의 지식으로, 당신의 기술로. 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것이어야 합니다."
박영효가 돌아섰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당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준호는 답할 수 없었다. 대신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팔이 빛을 통과시켰다.
"내 시간이 거의 다 됐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넌?"
박영효는 문 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계속 싸울 것입니다. 당신의 기술이 없어도. 당신의 도움이 없어도.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고,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춰 섰다.
"당신이 우리를 믿을 수 있습니까?"
이준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네."
박영효는 나갔다.
이준호는 혼자 남았다. 종로 뒷골목의 비밀 거처에서, 투명해진 팔을 들어 올린 채로. 창밖의 포성음을 들으면서.
시간의 균열이 울렸다. 이번엔 다르게 울렸다. 마치 문을 열 때의 '찰칵' 하는 소리처럼. 마치 무언가가 결정되었을 때의 소리처럼.
이준호는 벽에 기대섰다. 자신의 몸이 벽을 통과하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신이 벽을 통과하고 있었다. 천천히. 점점 더 빠르게. 마치 흡수되는 것처럼.
신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전과 달랐다.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았다. 마치 서글픔이 섞여 있는 것처럼.
"당신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준호는 벽 안에서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도 이제 투명해졌다.
"선택? 난 이미..."
"당신은 아직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도망친 것뿐입니다. 자신의 책임에서."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벽이 사라졌다. 대신 그곳은 한강 나루터였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시체들이 강가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얼굴들이 이준호를 향해 있었다.
"이들은 누구냐?"
"당신의 기술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시체들이 있었다. 그 옆에 또 다른 시체들. 그 옆에 또 다른 시체들. 끝없는 시체들.
"내가..."
"당신이 했습니다."
신비한 목소리는 더 이상 신비로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준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구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미래의 지식으로 조선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이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선택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의지를 무시하고, 당신의 계획만을 따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아니야. 난..."
"당신은 박영효가 한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신의 욕심을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한강 나루터가 사라졌다. 대신 이준호는 다시 종로 뒷골목의 거처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그리고 또 다른 개혁파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더 개입하겠습니까?"
신비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니면 당신이 시작한 것을 조선의 사람들에게 맡기겠습니까?"
"그... 그 선택이 뭐가 다른데?"
"첫 번째 선택을 하면, 당신은 1894년에 영구히 갇힐 것입니다. 당신의 욕심을 관철하기 위해, 당신의 영웅담을 완성하기 위해. 하지만 두 번째 선택을 하면, 당신은 해방될 것입니다."
"해방된다고?"
"네. 당신은 2024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남긴 것들은 조선에 남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 없이. 당신의 영광 없이. 오직 조선의 사람들의 선택으로만."
이준호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투명했다. 손목도, 팔뚝도.
"만약 내가 두 번째 선택을 하면... 난 잊혀질 거야."
"네."
"조선에서 내가 한 일도 잊혀질 거야."
"아니요. 당신이 한 일은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남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의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당신이 남긴 지식만 알 것입니다."
박영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당신은 우리를 믿습니까?"
이준호는 박영효를 봤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동시에 희망적이었다.
"네."
"그럼 우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팔이 창밖의 빛을 통과시켰다. 그 팔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의 균열이 울렸다. 이번엔 더 크게. 더 절박하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신비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의 욕심을 관철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자유를 믿을 것인가. 그 선택이 당신을 1894년에 묶어둘 것인가, 아니면 해방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 선택이 당신의 영웅담을 완성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이름을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것인가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준호의 몸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더욱 빠르게 투명해졌다. 이제 팔꿈치까지 투명해지고 있었다.
박영효가 손을 내밀었다.
"선택하십시오. 하지만 그 선택은 당신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준호는 박영효의 손을 봤다. 투명해진 자신의 손으로 그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은 통과했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신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조선에 맡기겠습니다."
시간의 균열이 폭발하듯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