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의 투명한 선택
경복궁의 감금된 방에서 깨어난 이준호는 자신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팔뚝까지 투명해져, 빛이 그 사이를 통과했다. 아침 햇살이 비치자 그의 팔은 유리처럼 반짝였다. 만지려 하면 손가락이 있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 같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 몇 시간?
문이 열렸다.
"따라오십시오."
근위대원이 말했다. 표정 없는 얼굴. 이준호는 일어섰다. 다리를 확인했다. 정상이었다. 팔과 달리 다리는 아직 실체가 있었다. 그것도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복도를 걸었다. 경복궁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건물에 도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한강의 모습이 달랐다. 남쪽에서 포성이 울렸다. 아직도.
명성황후는 화려한 방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금실로 수놓인 붉은 옷, 검은 머리에 고정된 구슬들. 그녀의 눈은 이준호를 바라봤지만, 그 시선은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뚫고 있었다.
"앉으십시오."
이준호는 그녀 앞의 낮은 좌석에 앉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준호입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준호는 잠깐 생각했다. 거짓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눈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그 설계도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도 먼 곳에서 나온 것입니다."
명성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따뜻한 미소가 아니었다.
"솔직함을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당신은 조선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의 말투, 행동, 그리고 그 팔—" 그녀가 손으로 이준호의 투명한 팔을 가리켰다. "—모두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이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 설계도로 인해 이 나라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충분히 많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한강 나루터의 전투만 해도 삼백 명이 넘습니다. 개혁파 군사들, 보수 진영의 군인들, 그리고—" 명성황후가 잠시 말을 멈췄다. "—민간인들입니다."
이준호의 목이 건조했다.
"그 기술을 김옥균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조선의 미래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아, 혹은 당신이 조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명성황후가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갔다.
"나는 이 나라의 왕비입니다. 이 나라의 왕과 왕자를 지켜야 합니다. 당신의 기술은 개혁파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수 진영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영준은 더욱 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개혁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명성황후가 돌아섰다.
"변화는 필요합니다. 조선이 이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변화가 왕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의 왕권이 약해지면, 이 나라는 더욱 약해집니다. 내가 원하는 개혁은 왕을 중심으로 한 개혁입니다. 왕권 아래에서의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옥균은 이제 경주로 도망쳤습니다. 박영효는 숨었습니다. 서광범은 체포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술은 그들에게 잠시의 힘을 주었지만, 결국 더욱 큰 혼란만을 낳았습니다."
이준호는 말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가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설계도를 주며 개혁파를 지원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을 근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죽음이었다. 혼란이었다. 그리고 보수 세력의 더욱 강경한 반격.
"당신은 조선을 구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명성황후가 이준호 앞에 다시 앉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선을 '우리의 조선'으로 만들려고 할 뿐입니다. 김옥균도, 박영효도, 그리고 나도. 당신의 기술은 그 모든 욕망을 증폭시켰습니다."
그 말이 이준호의 가슴을 관통했다.
"이제 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명성황후가 손을 들어올렸다. 근위대원이 나타났다. "개혁파의 급진적 개혁은 조선의 기초를 흔듭니다. 민영준과 보수 진영은 적어도 왕권을 존중합니다. 그들이 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조선은 계속됩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당신의 기술과 상관없이."
이준호의 투명한 팔이 떨렸다. 시간의 균열이 그의 주변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하지만 분명한 울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하겠습니다." 명성황후가 일어섰다. "당신의 기술로 우리 조선을 더 이상 흔들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당신이 정말 조선을 사랑한다면, 이제 손을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근위대원이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투명한 팔이었지만, 잡힐 수 있었다. 이준호는 저항하지 않았다. 경복궁의 복도로 나왔다.
궁궐을 나가는 길은 길었다. 창문을 통해 한강이 보였다. 여전히 포성이 울렸다. 아직도 누군가는 죽고 있었다. 그의 설계도로 만든 포가, 누군가의 가슴을 뚫고 있을 것이었다.
궁궐 밖으로 나왔을 때, 이준호는 한강 나루터로 향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루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투가 진행 중인 곳 너머로, 부상자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피가 묻은 손수건. 끊어진 팔. 눈을 감은 시체들.
이준호는 걸었다. 더 가까이. 시간의 균열이 그의 주변에서 점점 더 크게 울렸다.
그때 그는 본 것이다. 검은 옷의 아이.
아직 살아 있었다. 포탄이 떨어진 곳에서 기어 나오는 아이. 다리가 없었다. 피가 흙으로 변해 검게 묻어 있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손가락을 움직여 흙을 헤쳤다.
이준호의 팔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손가락도. 팔꿈치도. 어깨 아래가 모두 사라졌다.
신비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처럼, 물처럼, 시간처럼.
"한 번 더 개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거절하려고. 손을 거두려고. 하지만 그 순간, 박영효가 나타났다.
어두운 옷을 입은 박영효가. 그의 손에는 종이 다섯 장이 들려 있었다.
"이준호—" 박영효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마지막 설계도를 주십시오."
이준호는 박영효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결의가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 다른 것도 있었다. 박영효의 눈은 이준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영효가 계속했다. "하지만 조선은 변해야 합니다. 명성황후의 반격, 개혁파의 도망—모든 것이 예상된 것입니다."
"박영효, 그렇다면—"
"당신이 준 것들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증기기관의 원리, 통신의 가능성, 근대식 무기—이것들은 조선 사람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명성황후도, 민영준도 모르는 곳에서."
이준호는 박영효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에는 결의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다.
"마지막 설계도는 무엇입니까?" 박영효가 물었다.
이준호는 침묵했다. 신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결정하십시오."
시간의 균열이 이준호의 주변을 완전히 휘감았다. 한강 나루터의 전투음,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 그리고 그 검은 옷의 아이가 흙을 헤치는 소리. 모든 것이 섞여 울렸다.
이준호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인쇄 기술입니다."
박영효의 눈이 커졌다.
"당신들이 설계도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조선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고, 변화시켜야 합니다. 인쇄 기술이면 가능합니다. 한 장의 설계도가 백 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 어디서나 누군가 그것을 보고,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준호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활판 인쇄의 원리. 목판의 개선. 금속활자의 제작 방법. 모든 것이 그려져 있었다. 이전의 설계도들과 달리, 이 종이에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복제하는 방법'이 담겨 있었다. 한 번의 설계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도록.
박영효가 종이를 받았다. 손이 떨렸다.
"이것을 받으면, 당신은—" 박영효가 이준호의 투명해진 팔을 봤다.
"사라질 겁니다."
"당신은 조선을 사랑합니까?"
이준호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조선을 사랑한다. 그 말이 얼마나 거만한가. 그는 조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선을 구한다는 생각을 사랑했다. 자신의 지식으로 역사를 바꾼다는 생각을. 자신이 영웅이 되는 상상을.
"아니오. 나는 조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박영효가 설계도를 들고 조용히 움직였다.
이준호는 한강을 봤다. 여전히 포성이 울렸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조선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균열이 이준호의 발밑을 휘감았다. 한강 나루터의 땅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간의 틈인가. 아니면 다른 1894년인가.
그의 가슴이 떨렸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그 순간, 북쪽에서 말 발굽 소리가 울렸다. 근위대. 명성황후의 군대가 한강 나루터로 향하고 있었다.
박영효가 들고 있던 설계도를 보기 위해서 아니라, 누군가를 추격하기 위해.
아, 다섯 장의 종이. 박영효가 들고 있던 그 종이는 인쇄 기술의 설계도가 아니었다.
이준호의 눈이 커졌다.
박영효가 빈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박영효가 빈 종이를 받는 순간, 이준호가 건넨 인쇄 기술의 설계도는 사라졌다. 박영효의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그의 손에는 다섯 장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만 남아 있었다.
"당신이 준 설계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박영효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근위대의 말 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그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의 능력이 한 번만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이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가락들이 거의 완전히 투명해져 있었다. 팔뚝도 마찬가지였다. 곧 가슴까지 도달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준 모든 설계도도 한 번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종이로 나타났다가, 종이로 사라진다. 그것이 시간의 법칙입니다."
박영효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근위대는 이제 한강 나루터의 입구에 도착했다. 횃불의 불빛이 물 위에 흔들렸다.
"당신이 준 설계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증기기관, 포, 통신 기술—모두 한 번씩만 존재했습니다.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본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박영효가 이준호의 투명한 팔을 잡았다. 그것이 가능했다. 투명한 것도 여전히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설계도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심어 놓은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조선의 기술자들이 직접 만든 증기기관, 개혁파가 직접 고민해서 만든 포—모두 당신의 지식이 아니라 당신이 보여준 '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박영효—"
"당신은 자신이 조선을 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지식은 조선을 구하지 못합니다. 조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의 사람들뿐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준호가 입을 뗐다. "왜 당신은 나를 찾았습니까? 왜 설계도를 달라고 했습니까?"
박영효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고, 동시에 슬펐다.
"당신을 찾은 것은 내가 아닙니다. 시간 자체가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시험했습니다. 당신이 조선을 구원자의 손으로 집어쥘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손으로 조선을 지킬 것인지 선택하도록 말입니다."
근위대의 말 발굽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당신이 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그것은 조선의 현실에 충돌할 것입니다. 명성황후의 검은 그 위에 박힐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쓰지 않는다면—"
박영효가 종이를 허공에 던졌다.
종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한강의 바람에 실려 북쪽으로 날아갔다. 근위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종이 한 장이 아니라, 비어 있는 하늘뿐이었다.
"이제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박영효가 이준호를 봤다. 근위대의 병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칼을 빼는 소리가 울렸다.
"도망치십시오. 또는 명성황후를 만나십시오. 또는 김옥균에게 돌아가십시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십시오. 조선의 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일을."
근위대의 대장이 칼을 들어 올렸다.
"박영효, 물러나라!"
"아니오."
박영효는 칼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근위대는 이준호가 아니라 박영효를 노렸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개혁파의 지도자들을 제거하라는 명성황후의 명령뿐이었다.
칼이 박영효의 어깨에 내려졌다.
이준호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시간의 균열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투명해진 그의 입술에서는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박영효가 무릎을 꿇었다. 근위대는 그를 묶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입니다."
박영효가 끌려가면서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해졌지만, 그 어떤 것보다 명확했다.
"조선의 사람들을 믿으십시오."
이준호는 그것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더 이상 1894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발은 투명했고,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슴팍이 이제 시간의 균열로 변해 가고 있었다.
한강의 물이 그의 발을 통과했다. 그는 땅 위에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물 아래에 있었다.
근위대가 박영효를 끌고 사라졌다. 그들의 말 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제 한강 나루터에는 이준호 혼자만 남았다.
그의 가슴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보였다. 그것은 1894년의 심장이 아니라, 2024년의 심장이었다. 시간의 틈에서 뛰는 심장이었다.
신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슬픔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당신은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조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택했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시간 밖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직도 나왔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조선에 준 것은?"
"당신이 준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조선의 손에 남아 있는지, 아니면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는지는 조선의 선택입니다."
한강의 물이 이제 이준호의 가슴을 완전히 통과했다. 그는 물 속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젖지 않았다. 물이 그를 통과했을 뿐이었다.
근처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급한 발걸음이었다.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다. 김옥균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이준호!"
김옥균이 달려왔다.
"박영효가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준호는 김옥균의 얼굴을 봤다. 그 위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명성황후는 더 이상 개혁파와 협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민영준이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습니다. 서광범은 이미 체포되었고, 우리는—"
김옥균이 이준호의 투명한 몸을 봤다. 그의 말이 끝났다. 그의 검이 떨어졌다.
"당신은—"
"끝입니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한강 나루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틈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김옥균. 나는 조선을 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기회를 어떻게 쓸지는 당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설계도, 당신의 기술—"
"더 이상 나에게서 나올 것이 없습니다."
이준호의 머리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곧 그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었다. 1894년의 이준호는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강 남쪽에서 새로운 포성이 울렸다. 명성황후의 군대가 개혁파의 거점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포는 이준호의 설계도로 만든 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기술자들이 만든 포였다. 개혁파의 손에서 만들어진 포였다.
포성음 속에서, 이준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조선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이 자신의 설계도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사람들의 자발적 선택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조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손을 벗어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그 포성음을 들었다. 그것은 절망의 신호였을 수도, 저항의 신호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조선의 소리였다. 누군가의 선택이 담긴 소리였다.
"김옥균."
이준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그것이 결국 조선을 위하는 것입니다."
김옥균이 이준호의 투명한 얼굴을 봤다.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이준호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강 나루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포성음과 근위대의 말 발굽 소리, 그리고 조선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김옥균은 그 자리에 섰다. 검을 들고. 혼자.
포성음은 계속 울렸다. 그것은 명성황후의 포가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포였다. 박영효가 보여준 가능성에서 피어난 포였다. 서광범이 죽음 앞에서도 지키려던 신념의 포였다.
김옥균은 생각했다. 박영효의 체포. 서광범의 죽음. 그리고 이준호의 사라짐.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남겨진 것이 있었다. 증기기관의 원리를 이해한 기술자들. 포를 만들 수 있는 장인들. 그리고 조선을 바꾸고 싶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
이준호는 사라졌지만, 그가 심어 놓은 것들은 여전히 조선의 땅에 있었다.
김옥균은 검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의 때문이었다.
그는 도망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싸울 것이었다. 명성황후와 민영준을 상대로,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믿는 조선의 모습을 위해서.
한강의 물이 여전히 흘렀다. 포성음은 계속 울렸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조선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시간의 틈에서, 이준호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조선이 자신의 지식 없이도 변할 수 있기를. 조선의 사람들이 자신의 설계도 없이도 미래를 만들 수 있기를.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그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