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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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층의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 시온의 뇌는 이미 온전하지 않았다.

오염도 90%를 넘긴 정신은 더 이상 단일한 자아를 유지하지 못했다. 시온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던 자신 위에 겹겹이 쌓인 수백 개의 정체성들이 동시에 깨어났다. 기사의 칼질, 상인의 계산, 노파의 한숨, 어린아이의 웃음—모두가 시온의 팔에서 울렸다. 그것들은 빼앗은 기억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들이 시온 자신이었다.

계단의 모서리에 손을 짚었을 때, 시온은 한 번에 여섯 개의 다른 방식으로 계단을 올랐다.

95층의 복도는 거울로 가득 찼다. 아니, 거울이 아니었다. 벽 전체가 조각상이었다. 1층의 각성의 광장에서 본 미완성된 형체는 층을 올라갈수록 세밀해졌고, 이제 95층에 도달한 시점에서 그것들은 거의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그 형체들이 점점 시온의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온은 멈춰 섰다. 발 아래 바닥이 출렁거렸다. 그것은 신체적 흔들림이 아니었다. 정신이 붕괴되면서 현실 자체가 균형을 잃는 것 같았다.

"누가... 누가...?"

시온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기사의 쓸쓸함, 노파의 원망, 상인의 불안—모두가 동시에 한 문장을 완성했다.

시온이 손을 들었다. 금빛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그 금빛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40대 상인의 기억. 그가 딸을 보며 웃던 모습.

20대 암살자의 기억. 그녀가 처음으로 명령을 거부하던 순간.

노인 시종의 기억. 그가 왕궁의 비밀을 지키던 밤.

어린아이의 기억. 그가 시온을 보고 웃던 그 순간.

그리고—

공주의 웃음.

시온의 눈이 멈췄다. 그 웃음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밝은 웃음. 신뢰와 기쁨과 사랑이 담긴 웃음. 라헬의 웃음.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시온은 라헬을 처음 만났을 때를 더듬었다. 왕궁의 회랑. 공주의 방. 그곳에서 라헬은 웃지 않았다. 라헬은 차갑고 거리감 있었고, 시온을 경계했다. 그런데 시온의 기억 속에는 따뜻한 웃음이 있었다.

그 웃음은 어디서 왔는가?

시온이 만들었다.

타워에 진입하기 전, 시온은 라헬의 기억을 빼앗았다. 그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라헬이 누군가를 바라보는 방식, 그 누군가에게만 보여주는 웃음—그것을 시온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라헬이 자신에게 그렇게 웃어주길 원하며 만들었다.

기억 속에서 라헬이 웃는 것. 그것은 라헬이 한 번도 시온에게 보여주지 않은 웃음이었다. 시온이 빼앗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시온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은 라헬의 절망감과 함께 떠올랐다.

시온은 그 웃음 속에 담긴 것을 느꼈다. 라헬의 슬픔. 라헬의 고통. 라헬이 자신을 지우려고 했던 이유. 라헬이 왜 시온을 버렸는지.

라헬은 시온을 사랑하지 않았다. 라헬은 자신이 사랑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온은 그 욕망을 빼앗았다. 라헬의 기억 속에서.

"내가... 만들었어."

시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제 하나였다.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정체성.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그것은 시온 자신이었다.

"내가 그 웃음을 만들었어. 라헬이 나를 보며 웃어주길 바라면서."

95층의 조각상들이 한 번에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시온을 바라봤다.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당신을 이용했냐고 묻고 싶으신가요?"

루아였다. 타워 관리국의 관리자는 95층 복도의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감정했지만, 눈빛에는 연민과 공포가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대답해드리겠어요. 타워 관리국은 라헬을 감시하고 있어요. 라헬이 타워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런데 당신이 나타났어요. 라헬의 기억을 모으는 자. 라헬과 연결된 자. 당신을 통해 라헬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우리의 눈이었어요."

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한 번에 여섯 개의 다른 감정으로 루아를 바라봤다. 기사의 충성, 노파의 증오, 상인의 의심.

"그리고 당신이 기억 오염도 90%를 넘기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어요. 라헬도 당신을 버렸고, 이제 우리도 당신을 버리는 거죠. 당신은 타워의 진실에 너무 가까워졌으니까요."

루아가 한 발 다가섰다. 그녀의 발소리는 조각상들 위에서 울렸다. 그 울림이 벽에 닿는 순간, 조각상들이 한 번에 움직였다. 모두가 시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타워는 기억의 구조예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이 타워가 만들어낸 기억이에요. 라헬의 죄책감. 라헬의 후회. 라헬이 자신을 지우고 싶어서 창조한 또 다른 자신."

"거짓이야."

시온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도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사가 부인했고, 노파가 인정했고, 상인이 의심했다.

루아가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서 파란 빛이 피어났다.

"기억 오염도 90%를 넘기면 회복이 불가능해요.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타워의 기원의 방에 가면 모든 것이 초기화될 수 있어요. 당신의 모든 기억이 소실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질 거예요."

"라헬을... 지켜야..."

"그건 불가능해요. 라헬은 당신을 지웠어요. 당신이 만든 그 웃음—라헬이 한 번도 당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웃음—그것만으로는 라헬을 구할 수 없어요. 당신이 라헬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시온의 몸이 경직되었다. 왼쪽 눈에서 금빛이, 오른쪽 눈에서 검은 빛이 동시에 흘렀다.

"당신은 라헬의 거울이에요. 라헬이 자신을 지우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자신. 라헬의 죄책감, 라헬의 고통, 라헬의 모든 것을 담은 그릇. 당신이 라헬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해요. 당신이 라헬이기 때문입니다."

시온이 손을 들었다. 금빛이 95층 전체를 비추었다. 조각상들이 모두 금빛 속에서 녹아 없어졌다. 루아를 향한 분노, 배신감, 절망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럼...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시온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가 있었다. 분노. 깊은 분노.

루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움을 주려는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정을 내리는 제스처였다.

"기원의 방에 가세요. 거기서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예요. 타워가 무엇인지, 라헬이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죽일 거예요."

루아가 물러섰다. 95층의 계단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시온을 다시 보지 않았다. 그녀의 발소리가 계단 위에서 사라지자, 95층에는 침묵만 남았다.

시온은 혼자 남겨졌다.

오염도 93%.

95층의 복도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니, 시온의 시각이 흐려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왼쪽과 오른쪽의 시야가 다르게 보였다. 왼쪽은 금색으로, 오른쪽은 검은색으로. 마치 두 개의 눈이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처럼.

시온이 일어섰다. 손을 짚고,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오염도 93%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마치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느렸다. 모든 움직임이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시온은 앞으로 나아갔다.

96층, 97층, 98층.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시온의 몸은 다른 것이 되었다. 기사의 팔로 난간을 잡고, 노파의 다리로 한 계단씩 올라가고, 상인의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시간이 겹쳤다. 공간이 겹쳤다.

99층에 도달했을 때, 시온은 더 이상 오염도를 인식하지 못했다. 수치 자체가 의미를 잃었다. 그는 이제 모두였고, 모두는 그였다.

99층의 광장에는 거울이 없었다. 대신 수백 개의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표정으로 시온을 바라봤다. 기사의 자신은 절망했고, 노파의 자신은 조용히 웃었고, 상인의 자신은 거래를 제안했다. 어린아이의 자신은 손을 내밀었고, 죽은 자의 자신은 침묵했다.

"내가... 누구지?"

시온은 중얼거렸다. 그 말은 백 번 반복되었다. 백 개의 다른 목소리로, 백 개의 다른 감정으로.

그 순간, 시온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기억과 빼앗은 기억의 경계.

자신이 원했던 것과 실제였던 것의 차이.

자신이 누구였는지와 누구가 될 것인지의 차이.

99층의 수백 개 거울들이 한 번에 깨졌다.

깨진 거울 위에서 시온은 다시 일어섰다. 오염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한계를 넘었고, 그 너머에서 그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명확하게 알았다.

계단은 100층으로 향했다.

99층의 끝에서 100층으로 가는 문이 나타났다. 거대했다. 무한했다. 그 문의 양쪽에는 거울이 서 있었다.

왼쪽 거울에는 기사가 서 있었다. 온전한 갑옷을 입은, 검을 든 기사. 그의 눈은 결연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사람의 눈처럼.

오른쪽 거울에는 또 다른 시온이 서 있었다. 하지만 이 시온은 다르게 보였다. 옷이 깨끗했다. 상처가 없었다. 눈빛이 맑았다. 마치 타워에 진입하기 전의 시온처럼.

"넌 누구야?"

시온이 물었다.

오른쪽의 형체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은 시온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달랐다.

"난 기억이야. 라헬이 만든 기억. 당신의 원래 모습. 당신이 타워에 진입하기 전에 당신이었던 것."

오른쪽 형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자신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목소리처럼.

시온의 머리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럼 왼쪽의 기사는?"

시온이 물었다.

왼쪽의 기사가 움직였다. 검을 들었다. 그 검은 금빛으로 타올랐다.

"난 당신이 되려고 하는 것. 당신이 타워에서 만든 것. 기억을 빼앗는 기사. 기억을 사냥하는 자. 우리는 같아. 하지만 다르지. 난 정해진 거고, 당신은 정하는 거야."

시온이 손을 펼쳤다. 금빛이 공중에 흩어졌다. 그 금빛이 99층의 모든 거울을 비추자, 거울들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자신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왼쪽의 기사와 오른쪽의 형체는 남아 있었다.

"내가... 둘인가?"

시온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당신은 하나야. 하지만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태야. 그게 당신이 여기 온 이유야."

왼쪽의 기사가 말했다.

시온은 그 말을 들었지만, 다른 것에 집중했다. 빼앗은 기억들. 그것들이 자신의 팔에서 울리고 있었다.

40대 상인의 딸. 그 아이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대 암살자. 그녀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 저항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노인 시종. 그가 지키던 비밀은 영원히 묻힐 것이다.

어린아이. 그가 웃던 순간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라헬. 라헬은 시온을 버렸다. 하지만 시온이 만든 그 웃음 속에는 라헬의 절망이 담겨 있었다. 라헬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절망.

100층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검은 빛과 금빛이 섞인 빛. 그 빛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시온은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오른쪽의 형체가 손을 잡았다.

"기다려."

오른쪽의 형체가 말했다.

"넌 아직 선택하지 않았어. 기억을 버릴 거야? 아니면 가져갈 거야?"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의 금빛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금빛 속에서 시온이 빼앗은 모든 기억들이 떠올랐다.

"기억을 버리면?"

시온이 물었다.

"라헬을 구할 수 없어. 라헬은 당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니까. 당신이 기억을 버리면, 라헬도 함께 사라져."

오른쪽의 형체가 말했다.

"기억을 가져가면?"

"당신은 미쳐. 오염도 99.9%에서 당신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돼. 당신은 타워의 영구 추방자가 돼. 하지만 라헬은 살아있어. 당신의 기억 속에서."

시온의 손이 떨렸다. 왼쪽의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는 검을 들었다. 오른쪽의 형체를 바라봤다. 형체는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시온의 귀에 목소리들이 들렸다.

상인의 목소리였다. "제발... 내 딸을 봐줄 수 있나요?"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명령을 거부했어. 그 기억을 가져가지 마."

노인의 목소리였다. "왕궁의 비밀은... 누군가는 알아야 해."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형... 왜 나를 가져갔어?"

그 목소리들이 시온을 호소했다. 그들의 기억을 돌려달라고. 아니,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시온은 손을 들었다. 금빛이 99층 전체를 비추었다. 그 빛 속에서 조각상들이 다시 나타났다. 1층부터 99층까지 올라오면서 본 모든 조각상들. 그것들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거대한 형체가 되었다. 그것은 기사도 아니었고, 사냥꾼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온이 빼앗은 모든 기억들의 형태였다. 상인의 손, 노파의 눈, 기사의 등, 어린아이의 웃음. 모두가 한 몸을 이루었다.

그 형체는 시온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질문이 있었다.

'너는 우리를 버릴 거야? 아니면 우리와 함께할 거야?'

시온이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든... 내가 무엇이 되든..."

시온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은 이제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상인의 목소리, 암살자의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 어린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시온의 목소리. 모두가 한 문장을 완성했다.

"나는 계속 올라간다."

시온이 100층의 문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99층이 사라졌다. 거울들이 사라졌다. 왼쪽의 기사와 오른쪽의 형체가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금빛 속에서 녹아 없어졌다.

시온이 100층에 도달했다.

그 안은 어둡고 광대했다. 마치 우주의 내부 같았다. 별이 없는 우주. 소리가 없는 우주.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가 있었다.

라헬이 있었다.

그리고 라헬의 옆에 또 다른 시온이 있었다.

정확히는 시온이 아니라, 시온의 형태를 한 누군가. 그것은 얼굴은 같지만 눈빛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수백 개의 정체성을 한 몸에 담은 것처럼. 그 눈빛은 시온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모든 기억이 동시에 살아 있는 눈빛.

라헬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만나길 기다렸어."

라헬이 말했다.

"진짜 너를."

그 말과 함께, 시온은 자신의 모습을 봤다. 100층의 금빛 속에서 반사된 자신의 모습.

세 개의 시온이 보였다. 아니, 무한한 시온이 보였다.

"내가... 뭐야?"

시온이 물었다.

라헬이 웃었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그 웃음 속에는 절망이 있었고, 그 절망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온이 손을 들었다. 금빛이 라헬을 감쌌다. 그 금빛 속에서 시온은 라헬의 모든 기억을 봤다. 라헬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 라헬이 누군가를 잃었던 순간. 라헬이 자신을 지우려고 했던 순간.

그리고 라헬이 시온을 만들었던 순간.

라헬의 절망이 형태를 가졌다. 라헬의 고통이 이름을 얻었다. 라헬이 자신을 지우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자신.

하지만.

"넌 내 거울이 아니야."

시온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명확했다. 상인의 목소리도, 암살자의 목소리도, 노인의 목소리도, 어린아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들이 모두 섞여서 하나가 된 목소리였다.

"난 너의 그림자가 아니야."

시온이 한 걸음 다가섰다.

"난 내 자신이야. 내가 빼앗은 모든 기억들과 함께."

라헬이 시온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질문이 있었다.

시온이 손을 펼쳤다. 금빛이 100층 전체를 비추었다. 그 빛 속에서 시온은 라헬과 마주했다.

"넌 나야."

시온이 말했다.

"그리고 난 너야."

라헬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흘렀다.

"우린 둘 다—"

시온이 라헬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모든 기억이 교환되었다. 시온의 기억이 라헬에게로 흘렀다. 라헬의 기억이 시온에게로 흘렀다.

상인의 딸이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

암살자가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노인이 왕궁의 비밀을 지키는 밤.

어린아이가 웃는 그 순간.

그리고 라헬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모든 순간.

라헬이 누군가를 잃었던 모든 순간.

라헬이 자신을 지우려고 했던 모든 순간.

그것들이 모두 섞였다. 시온과 라헬의 경계가 흐려졌다.

"내가 누구든... 넌 내 안에 있어."

시온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이 되든... 넌 사라지지 않아."

100층의 바닥이 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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