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대면

90층의 계단 마지막 디딤돌에 발을 디딘 순간, 세상이 울렸다.

금빛과 검은빛이 충돌하는 곳마다 공간 자체가 흔들렸다. 시온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개의 의지가 한 방향으로 모여 이룬 광선이었고, 시온 자신도 그 광선의 일부일 뿐이었다. 오염도 계기판은 이미 85%를 넘어섰다. 뇌는 수백 개의 정체성을 동시에 처리하려 했고, 매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 남았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그것이 시온을 움직였다.

90층의 문을 밀어내자,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은 끝없는 허공이었다. 발 아래는 없었고, 위도 없었고, 옆도 없었다. 오직 중앙에 한 점의 빛이 있을 뿐이었다. 그 빛이 천천히 윤곽을 드러내면서 인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라헬이었다.

그녀는 90층의 정중앙에 서 있었다. 검은 장식이 된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타워의 모든 층을 담은 듯한 빛나는 수정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시온이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공주의 우아함과 관리자의 냉정함이, 동시에 절망과 슬픔이 한 얼굴에 중첩되어 있었다.

"시온. 당신이 왔군요."

라헬의 목소리는 여러 음역대가 함께 울리는 듯했다. 시온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기억 속 목소리를 들었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인데 다른 감정으로 울렸다. 공주의 목소리로, 동료의 목소리로, 배신자의 목소리로.

시온은 한 발 내딛었다. 허공은 발을 받아주었다. 마치 처음부터 바닥이 있었던 것처럼.

"라헬."

시온의 목소리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사냥꾼의 목소리가 섞여 울렸다. 자신도 그것을 자각했다. 이 정도의 오염도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라헬은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시온을 처음 보는 것처럼, 혹은 이미 수백 번 본 것처럼.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 나는 여기까지 왔다. 당신을 찾기 위해."

시온은 또 한 발 내딛었다. 라헬과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이 허공은 거리 자체를 거부하는 듯했다.

"당신은 왜 나를 지웠어? 왜 나를 타워에 보냈어?"

라헬의 표정이 흔들렸다. 검은빛이 그녀 주변을 소용돌이쳤다.

"당신을 지운 건 나가 아니에요."

라헬이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은 내가 만든 기억이니까."

시온이 멈췄다.

"뭐... 뭐라고?"

라헬의 눈이 시온을 바라봤다. 그 눈은 슬펐다.

"당신은 타워 진입 전에 내 기억을 빼앗으려 했어요. 강제로. 당신은 내 기억 속의 진실을 원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어요. 당신의 손가락이 내 뇌를 헤집고 다닐 때의 고통을, 당신이 내 가장 깊은 비밀까지 꺼내려 할 때의 절망을."

라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진동은 허공 전체를 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지웠어요. 당신의 모든 기억을. 당신이 나를 잊고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당신은 내 죄책감의 결정화야. 내 후회의 화신이야. 내가 지키려고 했던 누군가의 형태를 한 내 자신의 일부야."

시온의 뇌에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억의 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타워의 각 층에서 빼앗은 기억들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기억들이었다.

왕궁의 돌계단. 손을 잡고 내려가는 공주의 뒷모습. 그 공주의 손이 자신의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리고 검은빛. 자신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검은빛이 아니라, 라헬의 손에서 나오는 검은빛이 시온을 휩싸는 장면.

"당신은 내 기억을 빼앗으려 했어요. 내 모든 것을. 그래서 나는 당신의 기억을 빼앗았어요. 당신의 현재를, 당신의 정체를, 당신이 누구였는지를."

라헬이 손을 들었다. 수정에서 빛이 퍼져 나왔고, 그 빛 속에서 또 다른 시온들이 나타났다.

수백 개의 시온. 각각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상처를 가진 시온들이었다. 어떤 시온은 왕궁의 기사였고, 어떤 시온은 반란군이었고, 어떤 시온은 죄수였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달랐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들의 얼굴은 모두 시온의 얼굴이었다. 단지 다른 감정으로 뒤틀린 시온의 얼굴이었다.

"당신은 여러 시간이었어요. 여러 정체성으로 살아왔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을 하나의 시온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이 타워에서. 이 골든핑거 능력으로."

시온의 목이 조여왔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뇌 전체가 폭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이 아니라 얼음이 흘렀다. 기억의 편린들이 충돌하면서 서로를 태워버렸다. 공주였던 기억이 기사의 기억과 만나면서 비명을 질렀다.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 지켜질 수 없다는 절망과 만나면서 부서졌다.

그 와중에 시온은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로 지키려던 것이 무엇인지를.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정말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시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수백 개의 기억으로 분열된 뇌에서, 오직 하나의 감정만 남았다. 슬픔이었다. 그것은 형용사가 아니라 신체 반응이었다.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갔고, 가슴은 아래위로 떨렸고, 목구멍에서 신음이 나왔다. 시온은 무릎을 꿇었다. 허공 위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당신이 내 기억을 빼앗으려 했던 이유를 아세요? 당신이 정말로 지키려던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라헬의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시온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지키려고 했어요. 당신의 죄책감을. 당신의 선택을. 당신이 저질렀던 모든 것을."

시온이 입을 열었다. 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비명이 아니라, 오직 시온 자신의 비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헬이 내려왔다. 검은 드레스의 자락이 허공을 그으며 시온 앞에 섰다.

"당신이 찾던 진실은 위에 있어요. 100층에. 하지만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라헬의 손이 시온의 가슴에 닿았다. 검은빛이 흘렀다.

시온은 밀려났다. 손이 검은빛을 밀어내려고 움직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몸 전체가 뒤로 던져졌다.

허공을 통과하면서 시온은 90층의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89층, 88층, 87층. 계단마다 충격이 울렸다. 뼈가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뭔가 더 깊은 곳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86층에서 시온은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90층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시온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사라졌다. 대신 검은빛이 피어올랐다. 그것도 자신의 검은빛이 아니라 라헬의 검은빛이었다. 라헬이 남긴 흔적이었다.

"라헬, 당신이 정말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인가?"

시온의 외침이 타워 전체에 울렸다. 라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온의 발 아래 계단이 형태를 잃기 시작했다. 계단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변했다. 그것은 사닥다리였다. 아니, 나선형 길이었다. 아니, 무한히 이어지는 미로였다.

그 중앙에서 시온은 자신의 모습을 봤다. 수백 개의 모습이 한 점으로 수렴하는 모습을. 그 수렴의 끝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손은 누구의 손인가. 시온은 알 수 없었다.

시온은 다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86층 계단의 돌 표면이 시온의 손가락 아래에서 부서져 내렸다. 오염도 85%. 뇌의 85%가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었다. 남은 15%의 자아가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시온은 일어섰다.

무릎이 꺾였다. 다시 일어섰다. 이번엔 팔꿈치가 나가려 했다. 그것도 견뎠다. 타워는 물리적 고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정신적 고통을 줬다. 각 층마다 누군가의 절망이, 누군가의 후회가, 누군가의 분노가 시온의 뇌에 스며들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발을 디딜 때마다 시온은 누군가의 기억을 밟고 지나갔다. 그 기억들이 비명을 질렀다. 시온의 귀에만 들렸다. 타워는 조용했다. 오직 시온의 숨소리만 들렸다.

87층에 도달했을 때, 시온은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은 시온의 얼굴이 아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의 얼굴이었다. 왕궁의 기사. 자신을 지키지 못한 기사의 얼굴.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을 놓쳤어."

거울 속의 기사가 말했다. 목소리는 시온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실패했어."

"알아."

시온이 대답했다.

"그래도 올라가야 해?"

"올라가야 해."

거울이 부서졌다. 시온의 주먹이 아니라 거울 자체가 부서졌다. 라헬의 검은빛이 거울을 태워버렸다.

88층은 도서관이었다.

책장이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고, 책들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두 다른 목소리로.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책은 시온이 공주를 배신했다고 말하고, 다른 책은 공주가 시온을 배신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책은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했다.

시온은 책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무게를 느꼈다. 책의 무게는 기억의 무게였다. 누군가의 인생 전체가 이 페이지들에 박혀 있었다.

시온은 책을 내려놨다.

"난 모르겠어. 뭐가 진실인지."

타워가 울렸다. 그것은 응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89층에 도달했을 때, 시온의 발은 이미 피로로 떨리고 있었다. 오염도는 86%로 올라가 있었다. 계단이 이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목소리들이 겹쳐 울렸다. 남은 기간은 14층. 아니, 14%.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시온은 계속 올라갔다.

89층의 벽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정체성을 포기한 자만이 정체성을 얻는다.'

시온은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백 개의 입에서 수백 개의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비명이 웃음처럼 들렸다.

"포기해.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살 수 있어."

라헬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이번엔 라헬의 육체가 아니라 순수한 목소리였다. 타워 자체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당신을 지울 거야. 당신의 모든 기억을 지울 거야. 그러면 편할 거야."

"지금도 이미 지워지고 있잖아."

시온의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있어. 나는 이미 아무도 아니야. 그럼 뭘 더 잃을 게 있어?"

침묵이 내려왔다.

시온은 90층의 계단을 다시 밟았다.

이번엔 라헬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90층의 방이 열렸다. 그것은 지난번과 다른 방이었다. 이번엔 조각상이 없었다. 이번엔 거울도 없었다.

이번엔 문만 있었다.

100층으로 가는 문.

'기원의 방'이라고 새겨진 문.

시온의 손이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인이었다. 손가락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확인.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라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이번엔 거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다.

"위에 있는 건 당신이 원하던 답이 아닐 거야. 당신이 원하던 건 용서야. 하지만 위에 있는 건 책임이야."

시온은 손잡이를 돌렸다.

"책임도 좋아."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시온의 오염도가 87%로 올라갔다. 기억이 또 하나 사라졌다. 이번엔 어떤 기억이었을까. 시온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없어졌는지 기억할 수 없으니까.

100층은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지 않았다. 벽이 없었다. 천장이 없었다. 바닥만 있었다. 그 바닥 위에 시온과 라헬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 아래, 무한히 뻗어 있는 기억들의 바다가 있었다.

"이게 뭐야?"

시온이 물었다.

"이게 진실이야."

라헬이 대답했다.

"이건 내 기억들이야. 이건 내 정체성이야. 이것이 100층이야."

라헬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기억의 바다가 그녀의 발 아래에서 흔들렸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기억들. 그 속에서 수천 개의 목소리가 울렸다. 라헬의 목소리들이었다. 라헬이 살아온 모든 순간의 목소리들이었다.

"당신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돼."

라헬의 눈이 시온을 바라봤다. 그 눈은 슬펐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기억이니까. 내 죄책감의 결정화. 내 후회의 화신. 내가 지키려고 했던 누군가의 형태를 한 내 자신의 일부야."

시온이 뒤로 물러섰다. 손이 검은빛을 밀어내려고 움직였다. 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짓이야."

"사실이야."

"난... 난 실제의 사람이야."

"그래. 이제는."

라헬이 손을 뻗었다. 그것은 밀어내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그 손에는 폭력이 없었다. 그것은 해방이었다.

검은빛이 물살처럼 흘렀다.

"당신이 여기를 떠날 때, 당신은 비로소 실제의 사람이 될 거야. 내 기억에서 벗어날 때, 당신은 시온이 될 거야. 누가 만든 시온도 아니고, 누가 정의한 시온도 아니고, 오직 당신이 선택한 시온이 될 거야."

검은빛이 시온을 감쌌다. 시온은 다시 떨어졌다.

이번엔 계단이 없었다.

무한한 검은색이 있을 뿐이었다. 시온은 그 속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오염도는 88%로 올라갔다. 그리고 올라갔다. 89%. 90%. 91%.

시온의 뇌가 마지막 신호를 보냈다.

—정체성 붕괴 임박.

—선택하라. 기억을 버리거나, 죽거나.

시온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피부가 타오르는 듯한 열감. 뼈 속까지 스며드는 화염. 금빛이 피어올랐다. 아니, 이제 그것은 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빨간빛이었다. 피의 빛이었다. 자신의 모든 기억을 태우는 빛이었다.

시온은 선택했다.

죽지도, 버리지도 않고. 변하기로.

모든 기억이 동시에 폭발했다. 공주의 기억, 기사의 기억, 죄수의 기억, 반란군의 기억. 모든 것이 불에 타서 회가 되었다. 뇌의 신경이 끊어지는 느낌. 정체성이 해체되는 고통.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뭔가 새로워졌다.

그 회 속에서, 오직 하나의 것만 남았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

그 명령은 이제 의미가 바뀌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시온 자신의 선택이 되었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시온을 정의했다. 그것이 시온을 만들었다.

시온은 손을 펼쳤다.

"내가 누구든... 나는 계속 올라간다."

타워가 울었다. 진동이 90층에서 1층까지 내려갔다. 기억의 바다가 흔들렸다. 라헬의 검은빛이 떨렸다.

그리고 시온 위에 새로운 계단이 나타났다.

91층으로 가는 계단.

그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손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했다. 시온의 손인가, 라헬의 손인가, 타워 자체의 손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무언가인가.

시온은 일어섰다.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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