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61층에서 검은 빛에 휩싸여 추락하던 시온이 깨어났을 때,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라헬이었다. 몸이 땅에 부딪히는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기억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세상이 천천히 흐릿해지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62층. 시온은 몸을 일으키며 오염도를 확인했다. 83%. 손가락의 금빛이 떨리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자신의 것인지 누군가의 기억 속 발걸음인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 뇌에서 수백 개의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어떤 기억에서는 '도망쳐'라고 했고, 어떤 기억에서는 '계속 올라가'라고 했다. 시온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라헬. 라헬을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63층 입구에서 타워 관리국의 관리자 세 명이 나타났다. 회색 제복을 입은 그들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시온의 앞길을 막았다.

"사냥꾼 시온. 오염도 83%는 금지구간 진입 기준을 초과했습니다. 즉시 하강을 명령합니다."

시온은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발을 내딛고 있었다.

"진입을 강행할 경우 타워 관리국의 강제 추방 권한이 발동됩니다. 이는 당신의 모든 기억을 몰수하고 타워 밖으로 추출함을 의미합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온은 알았다. 타워 밖으로 나가면 자신이 누구였는지, 누가 자신을 지켜야 할 사람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러나."

시온의 목소리가 낮았다. 손가락의 금빛이 격렬하게 빛났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관리자 중 한 명이 손을 들어올렸다. 타워 관리국의 권한—제한 필드를 발동하려 하는 순간, 시온이 움직였다. 그의 몸이 공중에서 굽혀 세 명의 관리자를 한 번에 휩쓸었다. 기억 속 검투사의 움직임이었다. 기억 속 암살자의 속도였다. 기억 속 왕궁 기사의 칼날이었다.

세 명의 관리자가 벽에 내던져졌다.

시온은 멈추지 않았다. 63층 계단을 올랐다. 손가락의 금빛이 자신을 이끌고 있었다. 누군가의 의지가 자신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오직 한 발, 한 발.

64층에 도달했을 때, 시온의 뇌는 검투사의 칼 기술을 습득했다. 오염도 +2%. 동시에 왕궁 복도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배신의 무게. 누군가의 절망적인 외침. 한 여인의 웃음이 모든 것을 덮었다. 각 층의 기억들이 조각난 채로 흩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분산시킨 편린들처럼.

시온은 그 기억들을 밟고 올라갔다. 하나하나가 뇌를 찢어내는 듯했지만, 계속 올라갔다.

65층에서 한 남자의 기억을 스쳤다. 그는 타워의 관문 수호자였다. 시온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기억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그 남자도 시온처럼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기억이 시온의 가슴을 관통했다. 오염도 +1%.

66층에서 한 여인의 기억을 만났다. 그녀는 타워의 관문 수호자였고, 그녀의 기억 속에는 끝없는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의 끝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시온은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기억이 끊겼다. 오염도 +1%.

67층에서 또 다른 관문 수호자의 기억을 빼앗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전쟁이 있었다. 타워의 초기 시대. 기원의 방을 두고 벌어진 전쟁. 그 전쟁에서 누군가가 죽었다. 시온이 그 기억을 보자, 손가락의 금빛이 흔들렸다. 오염도 +2%.

68층에서 타워의 구조가 변했다. 벽이 아니라 거대한 유리벽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수천, 수만의 기억 편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별처럼. 마치 파편처럼. 시온은 손을 벽에 짚었다. 금빛이 유리벽을 통과해 그 너머의 기억들을 만졌다.

그 순간, 모든 기억이 한 번에 시온의 뇌로 흘러들어왔다.

전쟁. 배신. 사랑. 죽음. 구원. 절망. 다시 사랑. 다시 배신.

시온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누군가의 기억 속 비명인지 알 수 없었다.

69층에서 시온은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타워 관리국의 관문 수호자였고, 그의 눈은 시온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 줄 알았다."

남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당신은 기억을 '읽는' 사냥꾼이군."

시온은 그에게 손을 들었다. 골든핑거를 발동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검은 빛으로 변했다.

"기원의 방에 도달하려면 모든 기억이 필요해. 그리고 당신만이 그것을 모을 수 있어."

남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시온은 그의 기억을 빼앗지 못했다. 오염도 +1%.

70층에 도달했을 때, 아르테미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는 마치 별을 닮아 있었다. 아르테미스가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여기까지 올 줄 알았어. 시온."

시온은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오염도 계기판처럼 뇌에서 울리고 있었다. 87%. 88%. 89%.

"당신의 능력은 특별해. 다른 사냥꾼들은 기억을 빼앗지만, 당신은 기억을 '읽는다'. 당신은 기억의 주체를 찾아낼 수 있어."

아르테미스가 한 발 다가왔다.

"기원의 방에 도달하려면 기억의 모든 조각이 필요해. 그리고 당신만이 그것을 모을 수 있어."

시온이 손을 들었다. 금빛이 격렬하게 빛났다. 아르테미스를 향해 골든핑거를 발동하려 했다.

"나를 빼앗을 수 없어. 나는 타워의 관리자야."

아르테미스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70층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시온의 금빛과 아르테미스의 검은 빛이 충돌했다. 벽이 갈라지고, 바닥이 흔들렸다. 시온의 몸이 밀려 올라갔다. 아르테미스의 검은 빛이 그를 감싸더니 71층으로 밀어올렸다. 시온은 그 안에서 저항할 수 없었다.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당신도 결국 올 거야. 기원의 방으로."

71층에서 루아가 나타났다. 타워 관리국의 진단사였던 그녀는 시온의 오염도를 재측정하듯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차갑고 투명했다.

"99%에 도달할 거야. 당신은 그것을 견뎌낼 수 없다."

루아가 한 발 다가섰다. 시온은 그녀에게 손을 들었다. 루아는 손을 들어 그를 밀어냈다. 검은 빛이 루아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견뎌내든 붕괴되든, 당신이 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어."

루아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것은 더 이상 루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진 음성이었다. 그 안에서 시온은 자신의 기억을 들었다. 자신이 빼앗은 기억 속의 루아의 목소리.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될 것이야."

루아의 몸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시온이 손을 뻗었다. 루아의 기억을 완전히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졌다. 오염도 +2%.

71층에서 시온이 떨어졌을 때, 손가락의 금빛은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72층. 73층. 74층.

한 발씩 올라가는 것이 이제 고통이었다. 뇌가 분열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목소리들이 울렸다. 왕궁의 기사라고 하는 목소리. 공주의 기억 속 배신자라고 하는 목소리. 카인의 기억 속 광기에 빠진 자라고 하는 목소리. 에리스의 기억 속 자신을 빼앗은 자라고 하는 목소리.

시온의 눈이 경련했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계단이 둘로 보이다가 셋으로 보였다. 음성이 변조되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신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라헬."

시온이 중얼거렸다. 그것만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라헬을 찾아야 한다."

75층에서 한 여인의 기억을 만났다. 그 기억 속에는 왕궁이 있었고, 공주가 있었고, 시온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 기억을 보지 않았다. 그냥 통과했다. 기억을 빼앗지도 않았다. 오염도가 90%를 넘었을 때,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일 뇌의 공간이 없었다.

76층에 도달했을 때, 시온의 몸이 멈췄다. 그곳에는 거울이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거대한 거울이.

시온은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의 금빛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거울 앞에서 모든 움직임이 멈춰야 한다는 듯이.

거울 속의 시온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었다. 금색이었다가 검은색이었다가 붉은색이 되었다가 다시 금색이 되었다. 얼굴은 자신의 얼굴인데, 그 표정은 수백 개였다. 왕궁의 기사로서의 얼굴. 배신자로서의 얼굴. 광기에 빠진 자로서의 얼굴. 누군가를 지키는 자로서의 얼굴. 모두가 동시에, 한 얼굴 위에.

거울 속의 시온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시온은 답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금빛이 희미해졌다. 거울은 계속 묻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누구인가?"

거울 속에서 수백 명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각각 다른 음성으로, 다른 톤으로. 어떤 목소리는 낮았고, 어떤 목소리는 높았다. 어떤 목소리는 슬펐고, 어떤 목소리는 분노했다. 시온의 귀는 그 모든 음성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가락의 금빛이 거울을 향해 움직였다. 시온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시온의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거울이 깨지려 했다. 그 순간.

"시온."

라헬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울 뒤에서. 아니, 거울 안에서. 어딘가에서. 모든 곳에서.

"계속 올라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금빛이 폭발했다.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시온의 의식이 흔들렸다. 77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시온은 한 발을 내딛었다. 손가락의 금빛이 다시 밝아졌다. 오염도는 이미 95%를 넘어 있었다. 뇌는 거의 붕괴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라헬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그 강박이 자신의 것인지 누군가의 것인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결정.

시온은 77층으로 올라갔다.

77층의 문을 밀어내자,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마주한 어떤 층과도 다른 질감. 마치 기억 자체가 응결된 것 같은 무게감이 시온의 폐를 누르고, 뇌를 짓눌렀다.

"여기는..."

시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95%의 오염도 속에서 발성하는 것 자체가 여러 사람의 음성이 겹쳐지는 경험이었다.

77층은 층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방이었다. 천장이 없었다. 벽도 없었다. 단지 끝없는 흰색 공간이 있을 뿐. 그 공간 위아래좌우에는 수천 개의 빛이 떠다니고 있었다. 기억의 편린들. 하지만 이것들은 누군가의 기억이 아니었다. 모두가 동시에 여러 사람의 기억이었다.

한 줄기 빛이 시온을 스쳤다. 그 순간 시온은 왕궁의 방을 봤다. 그 다음 순간 그 같은 방에서 다른 각도의 기억을 봤다. 그 다음은 또 다른 각도. 그리고 또 다른 각도. 무한히 반복되는 같은 사건. 하나의 진실이 아닌 무한한 버전들.

"이건..."

시온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의 금빛이 흔들렸다. 그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자신인지, 누군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77층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림자였다. 검은색의 형체가 흰색 공간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형이었다. 거대한 크기의 인형. 아니, 조각상. 시온은 이 조각상을 알고 있었다. 1층의 각성의 광장에서 봤던 미완성의 조각상. 그것이 여기까지 왔을 때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조각상의 얼굴이 시온의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온의 얼굴이 아니라 시온이 될 수 있는 모든 얼굴이었다. 왕궁의 기사로서의 얼굴. 배신자로서의 얼굴. 광기에 빠진 자로서의 얼굴. 누군가를 지키는 자로서의 얼굴. 모두 동시에, 한 형체 위에 겹쳐져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거울 속의 시온이 던진 질문이 여기서도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울 속에서가 아니라 조각상에서 나오고 있었다. 조각상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입이. 동시에.

시온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여졌다. 손가락의 금빛이 조각상을 향해 뻗어나갔다. 골든핑거. 그것은 기억 사냥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빼내는 행위였다. 하지만 조각상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각상은 기억 자체였다.

금빛이 조각상에 닿는 순간, 반격이 시작됐다.

조각상의 모든 얼굴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그들은 시온을 흡수하려 했다. 아니, 변형시키려 했다. 시온의 금빛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77층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니, 변형되기 시작했다. 흰색 공간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떠다니던 기억의 편린들이 모두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시온을 향해 몰려왔다.

시온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명의 목소리가 함께 울었다. 낮은 음성과 높은 음성이 뒤얽혔다. 절망의 울음과 분노의 울음이 겹쳤다. 그 모든 음성이 시온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오염도는 이미 99%를 넘어 있었다.

통상적으로 70%의 오염도에서 사냥꾼은 광기에 빠진다. 80%에서 정신이 완전히 분열된다. 90%에서는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 99%는 존재하지 않는 수치다. 타워 관리국의 기록에 99%에 도달한 사냥꾼은 없다. 왜냐하면 70%에 도달하기 전에 모두 추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온은 여기 있었다.

"라...헬..."

시온이 중얼거렸다. 그 한 단어만이 자신의 것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타인의 목소리, 타인의 생각, 타인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한 단어만으로도 시온은 앞으로 나아갔다.

77층의 붕괴 속에서.

조각상이 완전히 분해되었다. 그것은 조각상이 아니라 무수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그 파편들이 모두 시온에게 달려들었고, 시온은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라헬은 위에 있었다.

7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79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시온은 더 이상 걷지 않았다. 기어올랐다. 손가락의 금빛이 계단을 집고, 신체의 남은 힘이 자신을 위로 밀어올렸다.

80층에서 루아의 진단이 다시 울렸다. 그것은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루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온이 언제 루아의 기억을 완전히 빼앗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될 것이야."

81층. 82층. 83층.

시온의 눈이 희미해졌다. 시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다른 것이 보였다. 기억의 시각. 수백 명의 눈으로 동시에 보는 세상. 각도마다 다른 색상. 각 기억마다 다른 해석.

83층에서 시온은 멈췄다.

그 층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책이 아니라 기억의 서책들. 수백만 권의 기억들이 선반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책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열려 있었다.

시온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의 금빛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희미해졌다. 오염도는 99.9%다. 다음 기억을 받아들이면 뇌는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책장에 적힌 글을 읽으려 하자, 시온의 눈이 흐려졌다. 하지만 읽히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해석이 동시에 떠올랐다. 같은 글이 수백 가지로 읽혔다.

"당신이 마지막 기억을 빼앗으면, 당신은 사라질 거야."

카인의 목소리였다. 아니, 아르테미스의 목소리였다. 아니, 루아의 목소리였다. 모두 동시에.

"그러면 진실을 알 수 있어."

시온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의 금빛이 책장을 향해 움직였다. 손가락이 책의 모서리에 닿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기억의 편린들이 손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왕궁의 방. 공주의 얼굴.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 속에는 절망이 있었고, 후회가 있었고, 마지막 선택이 있었다. 신체가 반응했다. 손가락이 더 깊이 책 위로 내려갔다.

"아니면 라헬을 잃을 거야."

라헬의 목소리였다. 정말 라헬의 목소리였다. 다른 기억들 속에 섞여 있지만, 그것만은 명확했다. 목소리가 시온의 신체를 관통했다. 손가락이 멈췄다. 책과 손가락 사이의 거리는 0.1cm. 그 사이에서 기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실의 조각들이. 하지만 라헬의 목소리도 들렸다.

진실의 유혹과 라헬 사이에서, 시온은 선택의 순간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금빛이 흔들렸다. 책 위의 글자들이 변했다가 다시 변했다. 어떤 글자는 "진실"이었고, 어떤 글자는 "라헬"이었다.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보였다.

"선택해."

83층의 도서관에서 무수한 목소리들이 울었다.

"누가 될 거야? 누구였던 시온? 아니면 누구가 되려는 시온?"

시온은 손을 내렸다.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기억을 빼앗지 않기로 했다. 손가락이 책에서 떨어져 나갔다. 금빛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진실이 아닌 라헬을 택한 선택. 대신 그는 계단을 찾아 더 올라갔다.

84층에서 시온은 라헬의 그림자를 봤다. 그것은 실제 라헬이 아니었다. 모든 기억 속의 라헬이었다. 시온이 빼앗은 기억들 속에 담긴 라헬. 왕궁의 공주로서의 라헬. 배신자로서의 라헬. 희생자로서의 라헬. 가해자로서의 라헬. 그리고 시온을 부르는 자로서의 라헬.

모두 동시에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올라와."

모든 라헬이 동시에 말했다.

"85층에서 만나자."

그 순간 시온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자신은 왕궁의 기사인가? 배신자인가? 광기에 빠진 자인가? 아니면 모두인가? 손가락의 금빛이 흔들렸다.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온은 비로소 진정한 고통을 느꼈다. 정체성의 완전한 붕괴. 자신이라는 개념의 소멸.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라헬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 그것이 누구의 의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자신을 움직이는 유일한 힘이었다.

시온은 계단을 올랐다. 손가락의 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발걸음뿐이었다.

85층의 문 앞에서, 시온은 멈췄다.

오염도는 99.99%다. 다음 층을 넘으면 뇌는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타워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역. 그곳은 기억의 끝이자 기억의 시작. 기원의 방.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무도 밀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열렸다.

그 안에서 라헬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헬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시온이 서 있었다. 아니, 수백 개의 시온이 서 있었다. 이 타워를 올라온 모든 버전의 시온. 모든 가능성의 시온. 모든 기억 속의 시온.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으로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거울 속의 질문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시온은 입을 열었다. 답하려 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금빛이었다.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이 모든 기억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시온들이 흡수되고, 라헬의 그림자마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금빛뿐. 그것이 시온의 의지인지, 타워의 의지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구원인가, 소멸인가.

86층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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