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층의 문이 열렸다
오염도 82%. 시온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통제 불능으로 흘러나왔다. 정신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누군가의 조종인지 자신의 의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시온은 50층의 문을 통과했다.
50층은 비어 있었다.
복도는 길었고, 벽면은 회색이었으며, 사람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1~49층에서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기억을 거래하는 자들, 사냥감을 찾는 자들, 타워의 법칙을 피해 도망치는 자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공기가 다르고, 빛의 질감이 달랐으며, 심지어 발소리의 반향도 이상했다.
시온은 걸었다.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다리를 움직였다.
50층과 51층 사이의 계단에서 처음 만난 것은 여자 사냥꾼이었다. 나이는 서른 대 중반으로 보였고, 얼굴에는 피로가 깊게 패여 있었다. 오염도는 40%대로, 50층 이상에는 드문 낮은 수치였다.
"당신이... 시온인가요?"
여자는 시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녀를 모르고 있었다. 오염도 82%의 정신으로는 새로운 얼굴을 기억할 여지가 없었다.
"라헬을 찾고 있어요?"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시온의 몸이 경직되었다. 라헬. 공주의 이름이자 배신자의 이름. 여러 기억에서 수집한 그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
"당신 손가락을 봤어요. 골든핑거. 타워에서도 거의 본 적 없는 능력이에요."
여자는 천천히 걸어왔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의도가 있었다.
"라헬의 기억을 빼앗고 싶으세요. 그렇죠?"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섞여 있었다. 어떤 기억에서는 라헬을 지켜야 했고, 어떤 기억에서는 라헬이 적이었으며, 또 다른 기억에서는 시온 자신이 배신자였다.
"저도 라헬의 기억을 본 적 있어요. 아주 오래전에."
여자의 손가락에서 푸른 빛이 나타났다. 골든핑거가 아닌 다른 종류의 능력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라헬이 누구인지 아는 거 아닐까요? 기억을 모두 모아도, 그 여자는 모순투성이거든요."
여자가 손을 뻗었다. 공격이 아니었다. 제안이었다.
"당신에게 라헬의 기억 하나를 주겠어요. 대신... 당신의 기억 중 하나를 나에게 주세요."
시온은 거부해야 했다. 이것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금빛이 흘러나왔고, 여자의 손과 만났다.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시온은 여자의 기억에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기억 추출이 아니었다. 상호 교환이었다. 시온이 빼앗은 기억들의 조각이 여자에게 흘러들어갔고, 동시에 여자의 기억이 시온을 집어삼켰다.
기억 속에서 시온은 여자의 눈으로 라헬을 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 창백한 얼굴. 하지만 그 이미지는 일관되지 않았다. 한 순간은 슬픈 표정이었다가, 다음 순간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진심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겹쳐 있었다. 라헬이 죽어 있는 기억과 라헬이 웃고 있는 기억이 동시에 존재했다. 모순이 충돌했다.
시온이 기억에서 빠져나왔을 때, 여자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공허해지고 있었다. 시온이 흘려보낸 기억들이 그녀의 정체성을 침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라헬은... 61층 이상에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이 그녀의 목소리인지, 시온이 빼앗은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또는 사라졌다. 시온은 보지 않았다. 이미 손가락을 봤기 때문이다.
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조종의 느낌이 아니었다. 갈망이었다.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갈망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5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시온은 멈췄다.
루아가 나타났다. 회색 제복을 입은 그녀는 계단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루아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관심. 아니면 두려움.
"52층 이상은 금지구간입니다. 오염도 60% 이상의 사냥꾼은 진입이 불가능합니다."
시온이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하자, 계단이 반응했다. 벽에 박힌 금빛의 회로들이 밝아오르며 시온의 길을 막았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차단이었다. 시온의 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당신이 라헬을 찾고 있군요."
루아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흥미롭네요. 당신이 오염도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시온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헬은 61층 이상에 있어요. 정확히는... 60층과 61층 사이의 경계에 있다고 할까요."
루아가 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벽이 빛났다. 타워의 기억 회로가 드러났다. 그 회로는 인간의 뇌처럼 얽혀 있었다. 신경망처럼 얽힌 금빛의 선들이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시온은 그것을 봤다. 그리고 무언가가 깨어났다.
"당신도 이제 깨달았을 거예요."
루아의 눈이 그 회로를 따라 움직였다. 마치 읽고 있는 것처럼.
"타워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는 것을."
시온의 호흡이 가빠졌다. 벽의 회로를 따라가며 그는 뭔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건축물의 구조가 아니었다. 신경 신호의 흐름이었다. 기억의 경로였다.
"누군가의 뇌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는 것."
루아의 말이 시온의 머리를 강타했다. 타워 전체가 뇌라니. 그렇다면 이 모든 층들은? 이 모든 기억들은? 시온의 손가락이 떨렸다. 금빛이 불규칙하게 깜박였다.
"라헬은 기억을 조작하는 자예요."
루아가 계속 말했다.
"당신의 모든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 당신이 빼앗은 기억들도, 당신 자신도."
그 말을 끝으로 루아는 사라졌다. 또는 시온이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염도 60%에 가까워지면서 시온의 시각이 왜곡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지구간의 벽이 여전히 시온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은 멈추지 않았다.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치 누군가가 시온의 몸을 직접 조종하려는 것처럼.
시온은 손가락을 벽에 대었다.
금빛이 벽의 회로를 태웠다. 회로가 끊어졌고, 차단이 풀렸다. 타워의 기억 구조가 시온의 손가락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52층의 문이 열렸다.
52층에서 시온은 노인을 만났다. 나이는 칠십을 넘어 보였고, 눈은 흐릿했다. 오염도는 35%로 놀랍도록 낮았다.
"당신이... 시온?"
노인은 시온의 얼굴을 보자마자 몸을 떨었다. 그의 손에는 그림이 들려 있었다. 라헬의 초상화였다.
시온이 그 그림을 본 순간,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의지와 무관하게. 금빛이 노인을 향해 흘러갔다.
"아니, 제발!"
노인이 외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시온의 손가락이 노인의 가슴에 닿았다.
기억이 폭발했다.
노인의 기억 속에서 시온은 라헬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초상화의 기억이 아니었다. 노인은 왕궁의 화가였다. 그는 라헬을 매일 그렸다. 라헬이 웃을 때, 울 때, 창 밖을 바라볼 때. 그 모든 순간들이 노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라헬의 표정 뒤에는 깊은 절망이 숨어 있었다.
시온이 기억에서 빠져나왔을 때, 노인은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온이 흘려보낸 수십 개의 기억이 그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여러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왕궁의 기사, 여성 사냥꾼,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
"당신은... 누구예요?"
노인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개의 목소리로.
시온은 그를 보지 않았다. 이미 손가락을 봤기 때문이다. 금빛은 멈추지 않았다.
56층에서 시온은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라헬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온이 그 기억을 빼앗자, 여성의 입에서 라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시온... 왜 날 찾아?"
그 목소리는 라헬의 것이 아니었다. 여성이 흉내 낸 것이었다. 하지만 시온에게는 충분했다. 오염도가 55%에서 58%로 올라갔다.
58층의 복도에서 시온은 멈췄다. 더 이상 기억을 빼앗을 수 없었다. 손가락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수백 개의 정체성, 수천 개의 순간들이 시온의 뇌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순간, 루아가 나타났다.
"당신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지났군요."
루아는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그 얼굴은 여전히 감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눈동자는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눈이었다.
"라헬을 만나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거예요. 동시에... 당신이 누구였는지 영원히 잊게 될 수도 있고요."
루아의 말은 예언처럼 들렸다. 또는 경고처럼.
루아는 복도의 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벽이 빛났다. 타워의 기억 회로가 드러났다. 그 회로는 인간의 뇌처럼 얽혀 있었다. 신경망처럼 얽힌 금빛의 선들이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시온은 그것을 봤다. 그리고 이해했다.
타워는 뇌였다. 누군가의 뇌. 그리고 그 누군가는 라헬이었다.
"라헬은 기억을 조작하는 자예요. 당신의 모든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
루아가 물러섰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직 경고만 남겼다.
"당신이 빼앗은 기억들도, 당신 자신도."
그 말을 끝으로 루아는 사라졌다.
시온의 손가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금빛이 폭발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시온의 몸을 직접 조종하려는 것처럼.
오염도 계기판을 보려고 했지만, 눈앞이 흐려졌다. 여러 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얼굴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의 중심에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라헬.
60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갈 때, 시온은 한 명의 사냥꾼을 더 만났다.
그 사냥꾼은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시온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신이 시온이군요."
사냥꾼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비통함이 흐르고 있었다.
"라헬의 기억을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시온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금빛은 사냥꾼을 향해 흘러갔다.
사냥꾼은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을 열어주었다.
그 안에는 라헬이 있었다.
라헬은 타워 위에 서 있었다. 100층의 기원의 방 위에. 그녀는 손을 뻗고 있었고, 그 손가락에서 흐르는 것은 금빛이 아니라 검은 빛이었다. 그 검은 빛은 모든 기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라헬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시온, 당신을 지웠어. 당신이 나를 찾기 전에."
시온이 기억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의 몸은 이미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냥꾼의 기억이 그에게 흘러들어갔고, 동시에 시온이 빼앗은 수십 개의 기억이 사냥꾼에게로 역류했다.
사냥꾼의 신경이 불타고 있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의식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왕궁의 기사, 여성 사냥꾼, 카인, 에리스,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그의 뇌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여러 개의 목소리였다. 각각이 다른 언어로, 다른 감정으로 절규했다.
그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있었다.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낯선 기억의 충격에 파괴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수백 명의 타인이 되어 있었다.
손가락의 금빛이 폭발했다.
타워 전체가 울렸다. 마치 누군가의 비명처럼.
"라헬!"
시온의 목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왜 나를 지웠어?!"
금빛이 60층을 관통했다. 벽이 흔들리고, 계단이 울렸으며, 멀리서 여러 개의 기억이 동시에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오염도는 이미 60%를 넘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히 시온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도,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61층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60층의 사냥꾼이 무릎을 꿇었다. 기억을 완전히 빼앗긴 그의 눈은 공허했다. 마치 빈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시온은 그를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눈앞에는 오직 라헬의 모습만 떠돌고 있었고, 그 이미지는 매 순간 변했다.
공주였다가 기사였다가 배신자였다가 피해자였다.
시온의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빼앗은 기억들을 조합했다. 그 여성 사냥꾼의 기억에서 얻은 기술, 카인으로부터 강탈한 기억 위조 능력, 초심 사냥꾼에게서 얻은 감정 추적 기술.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라헬을 찾기 위해.
"라헬의 기억이 어디 있어?"
시온이 무릎 꿇은 사냥꾼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빼앗은 수십 개의 정체성이 겹쳐 울려 나왔다.
사냥꾼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공허함만 남겨져 있었다.
시온은 그를 버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61층으로 가는 계단. 그 계단은 이전과 달랐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벽에 박힌 금빛의 회로들이 시온의 발걸음에 반응했다.
루아의 말이 맞았다. 타워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기억 구조 자체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라헬이었다.
시온의 오염도는 61%였다.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손가락의 금빛이 불규칙하게 깜박였다. 마치 심장이 부정맥을 일으키는 것처럼.
61층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대신 거대한 거울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것은 시온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얼굴이 중첩되어 있었다. 왕궁의 기사, 여성 사냥꾼, 카인, 에리스,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얼굴의 중심에는 여전히 검은 머리의 여인이 있었다.
시온은 거울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거울을 관통했다. 거울이 깨지지 않았다. 대신 물처럼 퍼져나갔다. 액체처럼 변한 거울이 시온의 팔을 감싸고 올라왔다.
"당신이 나를 찾고 있군요."
목소리가 들렸다. 거울 속에서. 또는 시온의 머리 속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를 한 여인이.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빛이 그녀의 얼굴을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온이 직시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라헬."
시온이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그래. 나야."
여인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녀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녀가 이미 수천 번 이 자리에서 시온을 맞이했던 것처럼.
"당신은 무엇을 원하니? 진실? 아니면 당신 자신?"
"둘 다."
시온이 대답했다.
"그럼 안 되지."
라헬이 웃었다. 그 웃음은 슬펐다. 너무나 슬펐다.
"둘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으니까. 진실을 알면 당신은 당신이기를 포기해야 해. 당신 자신을 유지하려면 진실을 영원히 모르고 있어야 해."
시온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라헬을 향해.
라헬은 그 금빛을 받아들였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인 것처럼.
"당신의 기억을 빼앗을 거야."
시온이 말했다.
"내 기억은 이미 빼앗겼어. 오래전에."
라헬이 대답했다.
시온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
"당신이 나한테서 기억을 빼앗았어."
라헬의 목소리가 떨렸다.
"타워에 들어오기 전에. 당신은 그 기억을 가지고 여기 왔어. 그리고 그 기억 안에서 나를 찾고 있었어. 이 모든 시간 동안."
시온의 머리가 흔들렸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라헬의 기억을 빼앗았다니. 하지만 손가락의 금빛이 반응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며.
라헬이 다시 한 걸음 가까워졌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명확해졌다. 너무나 아름다웠고,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당신을 지운 건 나가 아니야."
라헬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했던 짓이 너무 커서, 나는 그 기억을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당신을 지웠어. 당신의 기억을 분산시키고, 타워 곳곳에 흩어놓고, 당신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들었어."
"왜?"
시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그랬어?"
"미안해서."
라헬이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에서는 검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시온의 금빛과는 반대의 색이었다.
"미안하고, 동시에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손가락이 시온의 얼굴에 닿았다.
시온의 뇌가 폭발했다.
기억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내렸다. 타워에서 빼앗은 수백 개의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들이었다. 왕궁에서의 모든 순간들이. 라헬과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이.
공주였던 라헬. 검은 머리를 한 공주. 그녀를 지키기로 맹세했던 기사 시온.
그리고 배신.
시온은 기억했다. 모든 것을 기억했다.
라헬을 버렸던 순간. 왕궁의 정치에 휘말려, 공주를 배신했던 순간. 그리고 그 배신이 라헬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시온의 외침이 61층을 관통했다. 타워 전체가 울렸다.
"라헬! 미안해!"
그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시온의 손가락이 역류했다. 금빛이 라헬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멈추고, 자신으로 돌아왔다. 의도적으로. 시온은 라헬의 손을 놓았다.
금빛과 검은 빛이 충돌했다.
둘이 맞부딪히는 순간, 타워의 모든 층이 동시에 울렸다.
1층부터 100층까지.
모든 기억이 깨어나고 있었다.
시온의 손가락에서 터져 나오는 금빛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라헬의 검은 빛과 얽혀, 타워의 벽을 뚫고, 바닥을 관통했다.
라헬의 얼굴이 완전히 명확해졌다. 시온은 그녀를 알았다. 정말로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온은 이해했다.
자신이 빼앗은 모든 기억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이 찾던 진실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라헬이 자신의 기억을 지운 이유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 절망이었는지를.
라헬이 검은 빛으로 시온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시온의 금빛이 역류했다. 의도적으로. 시온은 라헬의 손을 놓았다.
"미안해."
그 말이 시온의 입에서 나왔는지, 라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62층의 문이 열렸다. 시온은 떨어졌다.
검은 빛과 금빛이 섞여 소용돌이를 이루며 시온의 몸을 감싸고, 그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시온!"
라헬의 절망적인 외침이 들렸다. 마지막으로.
시온의 의식이 끊기기 직전, 라헬의 목소리가 반복된다:
"당신을 지웠어... 미안해... 당신을 지웠어..."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