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온의 눈이 떠졌을 때,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30층을 넘으며 공기의 밀도가 변했다. 1~30층의 수련구간에선 사냥꾼들이 기억을 나누고 거래했다면, 31층부터는 모두가 약탈자였다. 복도의 벽이 짙어졌고, 창밖으로 보이는 타워 외부의 풍경이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해갔다. 마치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31층부터는 다르다."
루아의 목소리가 시온의 귀에 맴돌았다. 경쟁구간. 상위 사냥꾼들의 영역. 여기서는 기억을 빼앗는 것이 예의가 아니었다. 기억을 빼앗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미였다.
시온은 32층의 복도를 걸었다. 오염도 28%에서 시작한 그가 이제 35%였다. 기억 하나를 더 빼앗았을 뿐인데, 머릿속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자신의 기억 중 하나가 사라졌다. 무엇이었을까? 어떤 얼굴의 기억이었을까? 더 이상 떠올릴 수 없었다.
31층에서 만난 여성 사냥꾼은 강했다. 기억을 빼앗는 과정에서 시온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공포가 가득 찬 눈동자. 그 기억 속에서 시온은 왕궁의 기사였다. 하지만 '선하지 못한' 기사였다. 누군가를 버렸다. 누군가를 배신했다. 그 감정은 강했다.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감정인지 아니면 빼앗은 기억 속의 감정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32층의 복도 벽에는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었다. 시온이 1층에서 본 미완성 조각상의 모습이 여기서는 더 명확해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 그런데 그 얼굴은 시온 자신의 얼굴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시온은 손가락으로 그 부조를 만져봤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당신, 실수했어."
33층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시온의 뒤에서 들렸던 목소리. 돌아섰을 때 그곳엔 남자 사냥꾼이 서 있었다. 오염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깨끗한 상태. 하지만 눈빛은 광기에 가까웠다.
"기억을 빼앗으면서 상대의 감정까지 느꼈어? 그건 위험해. 당신은 기억을 도구로 쓸 줄 모르는군."
시온은 그 남자의 기억을 빼앗았다. 강제 추출. 폭력적으로.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시온은 그 안에서 무엇을 얻었는가—공주의 얼굴. 다시 한 번 공주의 얼굴.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 기억 속의 공주는 아름답지 않았다. 냉혹했다. 위험했다.
오염도가 42%로 올라갔다.
"아, 이 정도면 이제 진짜 시작이야."
카인이었다. 검은 옷의 남자가 34층의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오염도는 74%. 거의 광기 직전. 하지만 카인의 움직임은 정확했다.
"당신, 기억을 모으려고 하네. 뭔가를 되찾으려고."
"그래."
시온이 대답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 높이에선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차라리 정직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해."
"그 누군가는 정말 지킬 가치가 있을까?"
카인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시온은 답하지 못했다. 카인이 웃었다.
"내 기억 중 하나를 줄까? 값싼 거 말고."
카인이 손을 내밀었을 때, 시온은 거기서 금빛을 봤다. 골든핑거의 광휘. 기억을 추출하는 손가락의 빛.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시온은 또 다른 왕궁의 기억을 봤다—이번엔 카인이 본 기억. 이번 기억 속의 공주는 죽어 있었다.
오염도 48%.
34층에서 35층으로 올라갈 때, 시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빼앗은 기억 중에서 공주에 관한 것만 분류해보자.
첫 번째 기억: 왕궁의 기사 시온 자신의 기억. 공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공주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떠났다.
두 번째 기억: 여성 사냥꾼의 기억. 공주가 배신자였다. 공주는 왕궁을 무너뜨렸다.
세 번째 기억: 33층의 남자 사냥꾼 기억. 공주는 냉혹했다. 왕궁의 모든 기사를 죽였다.
네 번째 기억: 카인의 기억. 공주는 죽어 있었다.
어느 것이 참인가? 모두 참인가? 아니면 모두 거짓인가?
35층의 문을 통과하며 시온은 거울을 만났다. 거울 속의 자신은 눈이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 안에서 여러 개의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시온의 얼굴. 왕궁 기사의 얼굴. 33층 남자의 얼굴. 카인의 얼굴. 모두가 하나로 뒤섞여 있었다. 시온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울 속 입술이 움직이는데 어떤 음성도 따라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이미 누군가 다른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도 궁금하군."
목소리가 들렸다. 거울 너머에서. 시온이 거울을 돌아봤을 때, 그곳에 서 있던 것은 고상한 외모의 여자였다. 회색 정장. 차가운 눈빛. 오염도는 보이지 않았다. 깨끗한 상태.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것들이 보였다. 추종자들. 무장한 사냥꾼들.
"기억 수집가 연합의 아르테미스."
루아의 목소리가 스스로 떠올랐다. 위험한 자. 기억 강탈자. 타워 상층부의 진실을 추구하는 자.
"당신의 능력은 특이하군. 보통의 사냥꾼들과는 다르다. 혹시 당신도 타워의 진실을 찾고 있나?"
아르테미스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강한 압박이 있었다. 시온은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었다. 공주? 자신의 정체? 기억? 모두 섞여 있었다.
"답이 없다는 건 흥미롭군. 그럼 당신을 제안해볼까. 우리와 함께하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기억을 얻을 수 있어."
아르테미스가 한 발 다가왔다. 시온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그의 손가락에 금빛이 떠올랐다. 기억을 추출하고 싶은 욕구. 강렬한 욕구. 아르테미스의 기억을 빼앗고 싶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아르테미스는 손도 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가락이 공중을 그었다. 마치 무언가를 쓰는 것처럼.
시온의 눈이 흐려졌다. 순간, 자신의 기억이 뒤흔들렸다. 32층의 복도. 거울. 아르테미스의 얼굴. 모두가 동시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가 시온의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
"이게 우리의 능력이야."
아르테미스가 웃었다.
"기억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조작하는 거지. 당신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부분을 고르고, 섞고, 지울 수 있어."
시온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아파왔다. 자신의 기억인지 남의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었다. 비명이 목에서 맺혔다.
"아직은 당신을 건드리지 않겠어. 당신이 좀 더 강해져야 하거든. 50층까지 가봐. 그곳에서 진짜 모순을 만날 거야. 그리고 그때쯤이면 우리의 제안을 다시 생각해볼 거야."
아르테미스가 손가락을 다시 들었다. 공중에 무언가를 그으려는 순간, 시온의 손에서 금빛이 폭발했다. 통제 불능의 광휘. 아르테미스가 놀라며 몸을 날렸다. 추종자들이 시온을 향해 움직였지만, 그 금빛 앞에서 모두 물러섰다. 시온 자신도 자신의 손을 제어할 수 없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자신의 팔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흥미롭군."
아르테미스가 거리를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이미 당신 안에 누군가가 있는 건가. 아니면 당신 자신이 그만큼 강한 건가."
아르테미스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물러섰다. 추종자들도 함께. 마치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시온은 한참을 거울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금빛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거울 속의 얼굴도 다시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은 더 이상 자신의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눈빛이 낯설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36층부터 40층까지는 고요했다. 사냥꾼들이 거의 없었다. 대신 벽에는 더 많은 부조(浮彫)들이 새겨져 있었다. 미완성에서 점점 명확해지는 얼굴. 남자의 얼굴. 시온과 같은 얼굴. 하지만 시온이 아닌 누군가의 얼굴.
41층에 올랐을 때, 루아가 나타났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시온 앞에 섰다.
"오염도 51%. 위험 수위야."
루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더 올라가면 회수 불가능해진다. 지금이라도 내려가면 기억 방기로 오염도를 낮출 수 있어."
시온은 루아의 눈을 봤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읽으려 했다. 깊은 눈. 텅 빈 듯하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눈. 시온은 루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루아의 오염도는 왜 보이지 않는가?
"당신도 오염도를 관리받는 건가?"
시온이 물었다.
루아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 하지만 분명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깜빡였다.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그 눈 뒤로 다른 정체성이 스쳐 지나갔다. 더 오래되고, 더 깊고, 더 위험한 무언가.
"진실은 위에 있지."
루아가 덧붙였다. 대답 대신.
"당신은 계속 올라가야 해. 50층까지. 그곳에서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시온은 한 발 다가섰다. 루아를 마주보려 했다.
"당신은? 당신도 올라가고 싶지 않아?"
루아는 한 발 물러섰다.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멈춘 것처럼. 시온은 루아의 기억을 빼앗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 깊은 눈 속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에 금빛이 떠올랐을 때, 루아는 이미 몸을 날렸다.
"난 이미 충분히 올라갔어."
루아의 목소리가 거리를 두고 들렸다.
"당신이 올라가는 것을 돕는 게 내 역할이야. 더 이상은 아니고."
루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당신이 50층에 도달하면, 모든 게 바뀔 거야. 우리 모두의 일이."
루아의 눈 속에는 명확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모. 또는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
시온은 루아를 쫓지 않았다. 대신 42층으로 올라갔다. 43층으로. 44층으로. 각 층에서 만난 기억들은 모두 같은 사건을 다르게 증언했다. 왕궁의 배신. 하지만 누가 배신자인가는 기억마다 달랐다. 어떤 기억에선 공주가. 어떤 기억에선 시온 자신이. 어떤 기억에선 왕 자신이 배신자였다.
오염도 57%.
시온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손가락이 자주 떨렸다. 눈동자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이중음이 섞여 들렸다.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거울을 지날 때마다 시온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45층의 비문을 만났을 때, 시온의 발길이 멈췄다.
'기원의 방으로 가는 길은 기억을 모두 버린 자만 갈 수 있다.'
글씨는 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따뜻했다. 살아있는 글씨. 살아있는 경고.
시온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에 금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억을 추출하고 싶은 욕구. 점점 강해지는 욕구.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조종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인형이고 누군가가 줄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
그 본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약했던 강박. 이제는 거의 물리적인 힘이 되어 시온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46층으로 올라가며, 시온은 깨달았다.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하지만 그 깨달음은 공포였다. 왜냐하면—
47층의 문이 열리는 순간, 시온의 신체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비명이 목을 찢고 나왔다. 그 안에서 수십 개의 눈빛이 보였다. 모두 다른 기억. 모두 다른 정체성. 모두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공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시온 자신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네 명의 사냥꾼이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서로 다른 시대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모두 같았다. 절망. 분노. 후회.
"저건 기억 감옥이야."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뒤를 돌아봤다. 카인은 47층의 입구에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오염도 78%의 그는 거의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피부가 반투명하고, 눈동자가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같은 기억을 가진 여러 사냥꾼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간이지. 그들이 본 건 모두 같은 사건인데—"
카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비명에 가까웠다.
"모두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재미있지? 정말 미친 짓이야."
시온은 네 명의 사냥꾼을 바라봤다. 첫 번째는 검을 들고 있었다. 두 번째는 창. 세 번째는 독배. 네 번째는 무기를 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난 그날 공주를 보호하려 했다—"
"난 그날 배신자를 죽이려 했다—"
"난 그날 진실을 감춰야 했다—"
"난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네 목소리가 겹쳐 나왔다. 부딪히고, 섞이고, 충돌했다. 단어들이 분리되지 않았다. 감정들이 충돌했다. 기억들이 부서졌다.
"정문에서—뒷문에서—왕의 방에서—"
"공주를 죽인 배신자—공주가 죽어야만 했어—공주는 살아 있었고—"
"기사로서의 의무였어—정의였어—나라를 위한 것이었어—"
시온의 눈동자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아니야! 멈춰!"
시온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에서 금빛이 폭발했다. 네 명의 사냥꾼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들의 목소리가 끊겼다.
하지만 시온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네 명의 기억을 동시에 빼앗기 시작했다. 폭력적으로. 무자비하게.
첫 번째 기억이 시온의 손 위에서 빛났다. 정문. 말. 횃불. 공주의 비명. 칼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
두 번째 기억이 터져 나왔다. 왕궁의 뒷문. 어둠. 누군가를 죽이는 쾌감.
세 번째 기억이 흩어졌다. 왕의 방. 책상. 차가운 결정. 독배를 들고 있는 손.
네 번째 기억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모든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의 기억. 그 기억 속에는 다른 세 명의 기억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들이 본 것들. 그들이 한 것들. 모두.
네 가지 색깔의 기억이 시온의 손 위에서 빛났다. 그것들은 하나로 섞이지 않았다. 네 가지 색깔로 따로따로 남아 있었다. 마치 시온의 몸이 그것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오염도 61%.
시온의 손이 떨렸다.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시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
시온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시온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 안의 누군가를 향한 것인지 불명확했다.
"내가 왜 계속 올라가는지. 왜 멈출 수 없는지."
카인의 몸이 거의 투명해졌다. 그의 목소리만 남았다.
"당신도 곧 우리처럼 될 거야. 수백의 정체성을 가진 채 이 타워를 떠돌 거야. 또는 계속 올라가다가 정신이 완전히 부서질 거고."
시온은 카인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봤다. 네 가지 색깔의 기억이 여전히 떨고 있었다. 빼앗은 기억들이 자신의 기억과 섞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시온의 신체에 침입했지만, 시온의 정체성을 침해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 안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것들을 격리시키는 것처럼. 또는 자신이 그렇게 강해진 것처럼.
시온의 눈동자가 다시 움직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목소리가 나왔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
그 목소리. 그 강박. 그것이 정말 시온의 본능인가? 아니면 누군가 심어놓은 명령인가? 아니면 자신 안의 다른 누군가의 의지인가?
시온은 48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사냥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것도 있었다.
벽에 새겨진 비문.
'기원의 방으로 가는 길은 기억을 모두 버린 자만 갈 수 있다.'
같은 글귀. 하지만 이번엔 옆에 다른 글이 추가되어 있었다.
'기억을 버리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시온은 그 글귀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오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군가는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을 추출하고 싶은 욕구. 타워를 올라가고 싶은 욕구.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루아가 자신을 계속 올라가도록 했다. 아르테미스가 기억 조작의 위험을 보여줬다. 47층의 네 명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비문이 마지막 조각이었다.
'기억을 버리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누군가가 자신을 이 질문 앞에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 안에 있었다.
시온의 손가락에 금빛이 다시 반짝였다. 더 강하게. 더 급하게. 더 이상 시온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49층. 50층. 그 너머로.
50층의 거대한 문이 앞에 보였다. 그 위에는 하나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시온 자신의 얼굴.
시온이 손을 들었다. 금빛이 문을 향해 뻗어 나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팔. 손가락이 떨렸다.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시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열려라."
문이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그 틈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또 다른 얼굴. 또 다른 시온. 또는 시온이 아닌 누군가.
그 순간, 손이 시온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손이 아니었다. 시온의 손이 시온의 팔을 잡았다.
"아직 아니야."
라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라헬은 여기에 없었다. 시온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시온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의 눈동자는 시온과 다른 색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