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시온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또 다른 누군가의 것처럼 보였다. 왕궁의 기사라는 단어가 뇌를 스쳐 지나갔고, 그 순간 공주라는 이미지가 따라붙었다. 기억이 아니라 환상처럼. 시온은 주먹으로 거울을 쳤다.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골든타워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것도 부서지지 않는 것 같았다.
30층에서 31층으로 가는 길은 더 어두웠다.
루아의 경고가 맞았다. 경쟁구간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었다. 31층의 입구를 지나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더 이상 초심 사냥꾼들의 밝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빛이 고갈된 사람들이 보였다. 기억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또는 너무 많이 빼앗아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자들의 눈이었다.
31층부터 35층까지는 빠르게 지나쳤다. 시온은 이제 패턴을 이해했다. 약한 사냥꾼들은 먼저 도망쳤고, 강한 사냥꾼들은 시온을 보고 경계했다. 누군가는 싸웠지만, 시온이 이미 축적한 기억들의 능력 앞에서는 무너졌다. 검술, 궁술, 재빠른 발놀림. 남의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것처럼 움직였다.
34층에서 만난 사냥꾼은 달랐다.
그 남자는 시온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정면으로 받아냈다. 팔뚝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남자는 웃었다. 그리고 시온에게 기억을 빼앗기면서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어."
시온의 손가락이 남자의 가슴팍에 닿았을 때, 세상이 뒤틀렸다.
기억은 폭발처럼 들어왔다. 항상 조각적이었던 편린들과 달리, 이번엔 너무 깊었다. 감정이 물처럼 흘러들었다. 죄책감. 실패감.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
시온은 그 감정 속에서 왕궁의 이미지를 봤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어두운 복도.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시온—아니, 그 남자의 기억 속 기사는 그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검이 내려왔다.
그리고 반복되는 한 문장.
'공주를 지키지 못했다.'
시온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기억에서 나가는 데 수 초가 걸렸다. 현실이 천천히 돌아왔다. 31층의 복도, 깨진 팔을 안고 있는 사냥꾼, 그리고 자신의 떨리는 손. 시온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처음이었다. 타인의 감정이 이렇게 깊이 들어온 적은.
오염도 표시가 눈에 떠올랐다.
41% → 48%
7%가 한 번에 올랐다.
시온은 그 사냥꾼의 기억을 계속 들었다. 공주의 목소리, 왕궁의 향기, 배신의 순간들. 모두 이 남자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시온의 것이 되고 있었다. 시온은 기억 속에서 어떤 패턴을 찾으려 했다. 이 감정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왜 자신의 뇌에서 반향음처럼 울리는지.
'왕궁. 공주. 배신.'
단어들이 시온의 의식에 박혔다. 마치 처음 들은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시온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 사냥꾼은 이미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을 모두 빼앗기고 나면, 몸은 본능만 남는다. 먹고, 자고, 생존한다. 그것이 전부다.
35층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카인을 만났다.
"오, 넌 더 진행했구나."
카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옷이 더 헤져 있었고, 눈 아래 검은 자국이 더 깊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자기 자신의 팔을 자꾸만 집었다.
"넌 누구야? 아니, 누구였어?" 카인이 중얼거렸다. "난 누구지? 난 분명 누군가였는데..."
시온은 카인을 지나쳐 가려 했다.
"잠깐, 잠깐!" 카인이 시온의 팔을 잡았다. "당신도 누군가를 찾고 있군. 나도 그랬어. 누군가의 얼굴. 누군가의 목소리. 누군가의 약속."
카인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가 돌아왔다.
"다 잊었어. 전부. 기억을 너무 많이 빼앗으니까, 내 것도 남는 게 없었어. 그래도 찾아. 왜 찾는지도 모르는데."
시온은 카인을 자세히 봤다. 그의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자신이 30층 거울 앞에서 본 모습과 비슷했다. 하지만 카인은 훨씬 더 깊었다. 그의 오염도는 50% 이상이어야 했다.
"넌 기억을 얼마나 모았어?"
"몇 개?" 카인이 웃음을 흘렸다. "세 자리. 백 개 넘게. 근데 이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이건 내 손가락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손가락을 빼앗은 건가?"
카인이 갑자기 시온에게 달려들었다.
움직임은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빨랐다. 시온이 빼앗은 기억들 중 하나—어떤 기사의 반사신경—이 반응했다. 시온은 몸을 굴려 피했고, 동시에 카인의 팔을 잡았다. 강탈. 시온의 손가락이 카인의 피부에 닿았다.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카인의 기억은 시온이 본 다른 편린들과 완전히 달랐다. 조각이 아니라 파편이었다. 산산조각난 거울처럼 흐트러진 이미지들. 누군가를 죽인 장면, 누군가를 배신한 장면, 누군가를 속인 장면. 하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 카인의 기억이면서도, 모두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카인의 정신 오염도는 58%였다.
시온은 그 기억에서 나왔다. 카인은 이미 넘어진 상태였다. 기억을 빼앗기니 몸도 따라 무너졌다. 시온의 오염도는 다시 올라갔다.
48% → 55%
7%가 또 올라갔다.
시온은 숨을 고르며 오염도 표시를 봤다. 55%. 더 이상 올라가면 정체성 블랙아웃이 시작된다고 루아가 말했다. 70%를 넘으면 광기다. 하지만 시온은 계속 올라가야 했다. 왕궁의 기사라는 정체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고, 공주라는 이미지도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타워의 상층부에 있다고 확신했다.
35층에서 36층으로 가는 통로는 더 좁아졌다. 벽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기호 같은 것. 글자 같은 것. 시온은 그것을 읽을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37층에서 루아를 만났다.
"오염도 55%. 위험 신호네."
루아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정했지만, 그 눈에는 뭔가 다른 빛이 있었다.
"계속 올라가면 50층 이상으로 진입할 수 있어. 거기서는 훨씬 강한 기억들이 있어. 왕궁 사건에 대한 진짜 편린들 말이야."
시온은 루아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루아가 왜 자신의 기억 오염도를 알고 있는지, 왜 왕궁 사건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는지.
"넌 누가 시켜서 타워에 온 게 아니야."
루아의 질문이 시온을 멈추게 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그건 타고난 게 아니야. 누군가가 심어준 거야."
시온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부인할 수 없었다. 루아의 말이 맞았다.
"그럼... 넌 뭐야?"
"너와 같은 사람이야. 누군가에게 심어진 기억을 가진."
루아가 한 발 물러섰다.
"50층까지 가. 거기서 넌 진짜 자신을 찾을 거야. 그리고 왜 타워에 왔는지도."
루아의 뒷모습이 어두워졌다. 시온은 계속 올라갔다.
40층, 41층, 42층. 각 층마다 더 강한 사냥꾼들이 있었다.
42층의 한 사냥꾼이 시온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기억이 빼앗길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시온의 손가락이 그 여자의 가슴팍에 닿았을 때, 새로운 기억이 들어왔다. 왕궁. 공주. 그리고—
'배신.'
하지만 이번엔 다른 각도였다. 이번엔 공주가 시온을 배신했다. 약속을 깨뜨렸다. 누군가를 지키라고 했으면서, 자신이 먼저 등을 돌렸다.
시온은 그 기억에서 나왔다.
오염도 표시가 떠올랐다.
55% → 62%
시온의 얼굴이 비틀렸다. 혼란했다. 같은 사건인데 기억이 다르다. 공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도 있고, 공주에게 배신당한 분노도 있다. 둘 다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둘 다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여자는 시온을 바라봤다.
"당신은 이제 깨닫기 시작했군요. 기억이라는 게 뭔지."
"뭐... 뭐야?"
"하나의 사건. 여러 개의 진실. 당신이 찾는 것도 그런 거예요. 타워가 당신에게 보여주려는 것도 그런 거고."
여자가 일어났다. 기억을 모두 잃었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였다.
"50층 이상으로 올라가면 더 많은 진실을 만날 거예요. 하지만 기억할 거 있어요."
"뭐..."
"당신이 찾는 게 정말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모를 수도 있다는 거."
시온은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이미 귀는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공주의 웃음. 왕궁의 향기.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심어준 것인지.
시온은 43층으로 올라갔다. 오염도는 62%.
43층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 시온의 눈앞이 일순간 흐려졌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는 듯한 감각. 아니다. 그건 감각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빼앗은 기억 속의 누군가가 느꼈던 통증이 자신의 뇌에 반향하고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가 43층 복도 중앙에 서 있었다. 카인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고, 입가에는 광기 어린 웃음이 맺혀 있었다.
시온은 멈췄다. 카인과의 거리는 대략 10미터. 충분히 먼 거리였지만, 그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당신도 누군가를 찾고 있군. 나도 그랬어."
카인의 목소리는 부서진 유리 같았다. 날카롭고, 불규칙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정함이 가득했다.
"내가 찾던 사람은... 아, 기억이 안 난다."
카인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들이 피를 흘리며 두피를 파고들었다.
"이놈의 타워. 날마다 누군가를 잃고 있어. 어제의 나, 그저께의 나, 열흘 전의 나. 그들이 모두 다른 사람이야. 그들이 모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어."
시온이 한 발 물러섰다. 카인의 오염도가 얼마나 높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상태만 봐도 위험했다. 정신 붕괴 직전의 상태. 시온이 이전에 보았던 몇몇 사냥꾼들도 이런 상태였는데, 그들은 모두 더 이상 타워에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괜찮아. 오염도 62%. 나는..."
카인이 비틀거리며 웃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나왔다.
"나는 74%. 타워 관리국에선 이미 나를 추방 명단에 올렸을 거야. 하지만 난 나갈 수 없어. 내가 누구인지 찾을 때까지는."
"당신의 기억을 가져갈 수는 없어."
시온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실이었다. 카인의 기억은 너무 오염되어 있었다. 그런 기억을 빼앗으면 자신의 오염도가 급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시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카인과의 싸움은 단순한 기억 사냥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그래. 난 이미 알았어."
카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들이 공중에서 뭔가를 움켜쥐는 듯한 동작을 했다. 그 순간, 공기 자체가 떨렸다.
시온이 본 것은 기억의 편린이었다. 카인이 손으로 잡아낸 기억의 조각. 그것은 마치 유리 구슬처럼 빛났고,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정체성이 중첩되어 있었다.
"기억 위조. 내 능력이야. 내가 빼앗은 기억들을 섞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
카인이 그 구슬을 시온에게 던졌다.
시온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 기억의 편린이 자신의 등 위를 지나갔다. 복도의 벽에 맞은 순간, 벽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갈라진 게 아니라 녹아내렸다.
"내가 만든 기억은 현실을 왜곡해. 그 안에 담긴 정체성들의 광기가 세상을 오염시키지."
카인이 또 다른 편린을 만들어냈다. 이번엔 둘이 아니라 셋.
시온은 빼앗은 기억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검술, 궁술, 독약 연금술. 그것들을 조합했다. 독약을 검에 묻혀서 던졌다. 아니, 던진 게 아니라 화살로 만들었다. 빼앗은 궁술 기억 속의 정확도를 이용해서.
카인의 편린들이 그 화살에 맞았다. 기억의 조각들이 폭발했다. 복도 전체가 순간 밝아졌다.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정체성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카인이 무릎을 꿇었다.
"쩝... 못 이기네."
그의 입에서 또 다른 피가 흘렀다. 이번엔 귀에서도.
"넌 아직 시작 단계야. 나는 이미 끝 단계거든."
시온은 숨을 고르지 못했다. 자신의 가슴이 헐떡거렸다. 빼앗은 기억들을 조합해서 싸운 것이 처음이었다. 그 순간, 시온의 손가락이 자동으로 또 다른 기억을 만들려고 움직였다.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손가락이 누군가의 손가락처럼 움직였다. 주변 사냥꾼들의 기억이 자신의 의지 없이 흘러나오려 했다.
그 느낌은 중독적이었다.
자신이 수많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 자신이 모든 능력을 가진 것 같은 느낌. 자신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시온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기억의 흘러나옴을 억제했다. 하지만 그 중독적인 쾌감은 여전히 뇌를 파고들었다. 그 아래에는 공포가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것 같은 공포. 자신의 정체가 완전히 붕괴될 것 같은 공포. 시온은 그 공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다시 그 쾌감을 원하고 있었다. 그 모순이 그의 뇌를 짓누르고 있었다.
"오염도 확인해봐."
카인이 약하게 웃었다.
시온이 자신의 오염도를 확인했다.
62% → 73%
한 번의 전투로 11%가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기억 사냥이 아니라 기억을 조합한 능력 사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온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공포 때문이기도,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그 느낌을 원하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자신을 집어삼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둘이 동시에 시온의 뇌를 점유하고 있었다.
"나가. 지금 나가. 내가 회복하기 전에."
카인의 말이 명령처럼 들렸다.
시온은 카인을 지나쳐 43층을 빠져나갔다. 복도 끝에서 루아가 서 있었다. 루아는 시온을 보자 한 가지 메모를 건넸다. 그 위에는 숫자만 적혀 있었다.
73%
"위험 신호를 넘어섰어. 이제 넌 돌아올 수 없어."
루아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정했지만, 그 눈에는 뭔가 다른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만족감이었다.
"50층까지 가. 거기서 넌 왕궁 사건의 진짜 기억을 만날 거야. 그리고..."
루아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루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온은 알아야 했다. 그것이 물리적 진입 금지인지, 정신 붕괴의 불가역인지, 아니면 타워 관리국의 추방 예고인지. 하지만 지금은 묻지 않았다. 자신 안에 있는 강박이 모든 질문을 삼켜버렸다. 공주의 목소리. 왕궁의 기억.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 해도, 그것이 모두 누군가가 심어준 것이라 해도, 시온은 멈출 수 없었다.
44층, 45층, 46층. 각 층마다 더 강한 사냥꾼들이 있었고, 각 층마다 왕궁 사건에 관련된 더 구체적인 기억들이 있었다. 시온은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기억을 빼앗고, 계속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시온은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각 층마다 새로운 기억이 들어올 때마다, 시온의 선택은 점점 더 능동적이 되었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기억 사냥이 아니었다. 더 강한 능력을 원하는 욕망이 시온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욕망이 자신을 집어삼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함께 있었다.
46층에서 시온은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났다.
타워 관리국의 추적자들이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녀 둘. 그들은 시온을 보자 즉시 포위 태세를 취했다.
"오염도 73%. 추방 대상 확정."
여자가 무언가를 기록했다.
"넌 더 이상 타워에 머물 수 없어. 즉시 하강하거나 강제 추방당할 거야."
시온의 몸이 반응했다. 빼앗은 기억들이 전투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시온은 멈췄다. 타워 관리국과 싸울 수는 없었다. 그들은 타워 자체의 일부였다.
"난 50층까지 가야 해."
"불가능해. 70% 이상의 오염도로는 50층 진입이 차단돼. 타워의 규칙이야."
시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루아의 말은 뭔가? 그렇다면 자신이 찾던 진짜 기억은?
"기다려. 난 아직..."
시온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추적자들의 눈이 시온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시온의 손가락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빼앗은 기억들이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오염도가 급상승하고 있어. 기억들이 이탈 단계에 접어들었어."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넌 이미 끝이야. 타워가 너를 거부하고 있어."
추적자들은 시온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대신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했다. 시온은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올라갔다. 46층에서 47층으로.
47층에서 시온은 한 명의 여성 사냥꾼을 만났다. 그 여성은 시온을 보자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군요. 드디어."
그 여성의 눈은 시온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치 과거의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의 기억을 찾고 계신 거죠? 공주, 왕궁, 배신... 그 모든 것."
시온이 다가갔다. 이미 그 여성의 기억을 빼앗기로 결정했다. 그 여성이 왕궁과 연결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기억에 당신이 있어요. 그런데 당신의 기억에는 나를 버린 당신이 있어요."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그 사건 말이에요. 왕궁에서 일어난 그 배신. 당신은 공주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공주를 버렸어요. 명령을 거부하고 떠났어요."
시온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 왜 당신은 지금 공주를 찾고 있을까요?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그건..."
"당신의 기억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심어준 거예요. 공주를 지켜야 한다는 죄책감. 공주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그 모든 게 거짓이에요."
여성이 시온의 손을 잡았다.
시온이 그 손을 잡았을 때, 새로운 기억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왕궁. 공주. 그리고 또 다른 배신.
하지만 이번엔 시온이 배신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었다.
왕궁의 기사였던 시온은 명령을 거부했다. 공주를 지키라는 명령을. 대신 다른 누군가를 선택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공주를 버렸다.
그 누군가는 누구였나?
기억 속에서 그 누군가의 얼굴이 흐릿했다. 하지만 감정은 명확했다. 사랑. 그리고 죄책감.
시온의 얼굴이 비틀렸다. 기억 속에서 자신은 공주를 버렸다. 약속을 깨뜨렸다. 누군가를 지키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강박은? 지금 자신이 공주를 찾으려는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거짓이었다. 누군가가 심어준 거짓이었다.
오염도 표시가 떠올랐다.
73% → 82%
9%가 한 번에 올랐다.
시온의 뇌가 여러 개의 정체성을 동시에 처리하려고 했다. 공주를 지키려는 자신. 공주에게 버림받은 자신. 공주를 배신한 자신. 공주를 배신당한 자신. 누군가를 사랑했던 자신.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시온의 뇌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부인이 분노로 변했다. 분노가 절망으로 변했다. 절망이 광기로 변했다.
"당신은 누구세요?"
여성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당신이 버린 사람이에요. 당신이 공주 대신 선택한 사람이에요."
시온은 더 이상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자신의 귀가 다른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빼앗은 수백 개의 기억 속의 목소리들.
그들이 모두 시온을 부르고 있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목소리로. 다른 감정으로.
그 중에서 하나만 명확했다.
"넌 누구냐, 시온?"
그것은 공주의 목소리였다. 또는 누군가가 시온에게 심어준 공주의 목소리였다.
또는 시온 자신이 만들어낸 공주의 목소리였다.
시온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복도의 벽이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이 물결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손가락이 누구의 손가락인지 알 수 없었다.
47층의 문이 닫혔다. 48층의 문이 열렸다.
시온은 계속 올라갔다. 49층. 50층.
50층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어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형태. 누군가의 목소리. 누군가의 기억.
시온은 그것을 보기 위해 눈을 떴다. 하지만 자신의 눈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이 누구의 눈인지 알 수 없었다.
82%의 오염도 속에서, 시온은 50층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루아의 말의 의미가 명확해졌다.
"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것은 물리적 진입 금지가 아니었다. 정신 붕괴의 불가역도 아니었다.
타워가 시온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시온이 더 이상 타워의 손님이 아니라, 타워 자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50층의 어둠 속에서, 시온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공주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카인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루아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모든 목소리였고, 동시에 아무 목소리도 아니었다.
시온은 50층 깊숙이 들어갔다.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리고 시온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멈출 수 없었던 이유를.
기억 이탈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저절로 또 다른 기억을 만들려고 했다. 뇌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미 돌아갈 수 없었다. 루아의 말이 맞았다. 이 순간부터 시온은 타워의 일부였다.
시온은 82%의 오염도 속에서 선택했다.
계속 올라가기. 멈출 수 없는 강박처럼, 그저 계속 올라가기.
50층의 어둠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