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회귀 능력을 포기하다

강남 갤러리의 입구에 서자,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초대장에 적힌 시간은 오후 6시. 벽에 붙은 포스터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아버지의 귀환"이라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엔 작은 글씨로 "한솔이 개인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동안, 딸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그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준호의 시야에 색이 쏟아져 들어왔다. 흰 벽면에 붙은 캔버스들. 그 위에는 준호가 상상해본 적 없는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 속의 불빛, 손을 맞잡는 두 인물의 실루엣, 시간이 흐르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색감들. 솔이의 그림이었다.

"어서오세요."

그 목소리에 준호가 돌아섰다.

25세의 한솔이가 거기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어른의 피부, 어른의 눈빛, 어른의 태도를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눈 안에는 뭔가 조심스러운 것이 있었다. 마치 깨질 듯한 유리를 다루듯이, 이 남자를 바라보는 방식이 조심스러웠다.

"솔아."

준호가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솔이는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그냥 "아빠"라고만 말했다.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너무 많은 감정이 눌려 있어서 아무것도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들렸다.

"미안해."

준호가 속삭였다.

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갤러리 안쪽으로 돌아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신호였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전시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준호는 솔이의 뒤를 따랐다. 거리를 재면 정확히 1.5미터. 너무 가까우면 안 될 것 같은, 그렇지만 너무 멀어도 안 될 것 같은 거리.

첫 번째 그림 앞에서 솔이가 멈췄다. 검은 종이 위에 흰 크레용으로 그려진 손. 그것도 작은 손과 큰 손이 겹쳐 있었다.

"이건 2015년 1월에 그렸어요."

솔이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아빠가 집을 나가라고 했던 날이에요."

준호의 눈가가 따끔거렸다. 그 날을 기억했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2010년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 날의 앞뒤를 겪으며 상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날 아침, 솔이가 자신을 붙잡으며 울던 모습. 자신이 그 손을 뿌리쳤던 것. 그 순간의 절망감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했다.

"그리고 이건..."

솔이가 다음 그림으로 옮겨갔다. 이번엔 색이 있었다. 파란색과 회색이 주로 사용된 그림. 누군가 깨어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2020년 3월 23일. 아빠가 깨어났던 날이에요."

준호는 그 그림을 오래 봤다. 선의 흐름, 색의 변화, 그 모든 것이 정확히 자신의 감정과 맞아떨어졌다. 솔이가 자신의 깨어남을 느꼈다는 뜻이었다. 5년을 잃어버린 딸이, 아버지의 회복을 그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솔이, 어떻게..."

"몰라요. 그냥 그려졌어요."

솔이가 돌아섰다. 그 눈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마치 이 아버지가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을 너무 세게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준호는 그 눈을 직시했다. 자신이 남긴 상처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미술을 계속했구나."

"네. 아빠가 없는 동안, 미술이 내 말이 되었어요."

그 말이 맞았다. 준호는 회귀할 때마다 솔이의 그림을 봤다. 2010년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들. 그 그림들이 자신의 회귀 날짜와 정확히 맞았다. 마치 딸이 아버지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아빠 기억나?"

솔이가 물었다. 그것은 사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묻고 있었다. 아버지로서 자신을 기억하는가. 그 때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가. 그 날 미술학원에 몰래 다니던 딸을 기억하는가.

"기억난다. 모두 기억난다."

준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회귀할 때마다 그 시간들을 다시 살았으니까.

"그럼..."

솔이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말할 것이 있지만, 아직 말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준호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딸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년간 아버지 없이 자란 시간, 그 모든 외로움과 분노가 그 눈 속에 있었다.

"솔아, 난..."

준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딸의 눈은 이미 그 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순간, 갤러리 문이 열렸다.

"어? 실례합니다."

간호사 복장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지영이었다.

하지만 지영이 준호를 보자마자 눈이 흐려졌다. "어, 실례. 미술 치료 프로그램 대상자분들이 혹시..."

"지영이?"

준호가 불렀다.

지영이 멈췄다. "네? 저를 아세요?"

그 목소리. 그 톤. 모두 맞았다. 하지만 눈은 준호를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 지영이는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

준호는 천천히 이해했다. 지영은 아직 자신을 간호한 적이 없다. 아직 그 5년이 시작되지 않았다. 이 지영은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남겨진 것이었다.

"당신이 나한테 말했어."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자꾸 누군가를 잃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고."

지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아니야. 할 거야. 미래에."

준호는 그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뭔가 깨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영은 자신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지영을 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뭔가? 자신이 지영을 기억하기 전부터 지영은 자신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인과관계가 역전되어 있었다.

"당신이... 내 미래에서 온 건가?"

준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지영이 물었다. 그녀는 정말 이 남자를 모르고 있었다. 단지, 어딘가 불안정한 환자 같은 모습이 보여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을 뿐.

"당신은... 날 모르네."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알아. 당신은 내 옆에서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어."

"저는 환자가 많아요. 혹시 다른..."

"아니야. 나는 당신을 잊지 못했어."

지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 남자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은 그를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뭔가 더 복잡한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저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지영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이 준호에게 명확해졌다. 기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기억이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지영은 아직 자신을 간호하지 않았다. 자신이 깨어나기 전의 지영이었다.

"미안해. 실수였어."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지영은 어딘가 불안해하며 갤러리를 나갔다.

솔이가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아빠, 뭐 하는 거야? 그 사람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야."

"거짓말이잖아. 아빠가 그 사람을 알고 있잖아."

솔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5년 동안 쌓인 것들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올 것 같은 떨림.

"솔아..."

"아빠는 뭘 하고 있었어?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어?"

"아니야."

"그럼 뭐야? 아빠는 나한테 뭐였어? 나는 아빠를 위해 5년을 기다렸어. 매달 같은 날에 그림을 그렸어. 왜냐하면 아빠가 자꾸 멀어지는 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붙잡으려고 했어."

솔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데 아빠는 뭐야? 모르는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고? 나한테는?"

준호는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솔이가 이미 돌아서 있었다.

"나는 아빠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림을 그렸어. 매달 아빠가 사라지는 날에. 아빠를 붙잡기 위해. 근데 아빠는? 아빠는 뭘 했어?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었어."

솔이가 갤러리 안쪽으로 걸어갔다. 준호는 그 뒤를 따라갔다.

"솔아, 들어 줄래?"

"뭘 들어? 아빠가 뭘 말할 수 있어? 5년이 지났어. 5년. 그 동안 나는 혼자였어. 완전히 혼자였어."

솔이가 한 그림 앞에 멈췄다. 그것은 아직 전시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검은 배경에 흰 선으로만 그려진 인물. 그 인물은 무릎을 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이건 언제 그렸어?"

준호가 물었다.

"매달. 매달 아빠가 사라지는 날에.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날에. 그 날마다 이렇게 그렸어."

솔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 난 정말 무서웠어. 아빠가 영영 안 돌아올 것 같았어. 그래서 그림을 그렸어. 아빠를 잡아두려고. 근데 아빠는 계속 멀어졌어. 그리고 나는 계속 혼자였어."

준호는 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다. 하지만 솔이가 몸을 날렸다.

"손 대지 마."

그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솔아..."

"아빠, 난 아빠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아빠를 붙잡으려고 했어. 근데 아빠는 날 보지 않았어. 아빠는 계속 어딘가 다른 곳을 봤어.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빠는 나를 보지 않고 있어."

솔이가 준호를 마주봤다. 그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아빠, 난 뭐야? 아빠한테?"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몰라. 아빠가 뭘 하고 있었는지, 왜 자꾸 멀어지는 건지,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해주는 건지.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계속 혼자였어."

솔이가 눈물을 닦았다. "아빠, 이제 뭐야? 아빠는 이제 여기 있을 거야? 아니면 또 어딘가 가버릴 거야?"

"난 여기 있을 거야. 약속할게."

"약속? 아빠는 약속을 지킨 적이 없잖아."

그 말이 준호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은 회귀할 때마다 솔이를 남겨두고 과거로 갔다. 그것이 자신의 약속을 깨는 것이었다.

"이번엔 달라. 정말."

"어떻게 다를 거야?"

준호는 천천히 말했다. "난 더 이상 과거로 가지 않을 거야. 난 여기 있을 거야. 너와 함께."

솔이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다. 그것이 희망인지 절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 내려앉았다. 갤러리는 닫혔고, 준호는 병실로 돌아가야 했다. 의료진의 요청이었다. 회복 중인 환자는 야간에 외출하면 안 된다는 규칙.

병실. 흰 벽. 기계음. 소독약 냄새.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7월 21일 밤 11시 59분.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곧 회귀할 시간이었다.

매달 정각에, 준호는 2010년 5월로 끌려가곤 했다. 그리고 회귀할 때마다 현재의 누군가가 사라졌다. 지영, 재훈, 그리고 솔이. 자신이 과거를 바꾸려 할 때마다, 현재에서 누군가가 지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수 있다.

준호는 깨달았다. 회귀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과거를 바꾸려고 애쓰지 않으면, 현재가 유지된다는 것을.

시계가 11시 59분 30초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회귀하지 않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밤 12시 1분을 맞이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

준호는 현재에 남겨졌다.

그 순간, 뭔가가 깨졌다. 거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소리. 아니,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한 곳으로 모아지는 느낌. 여러 겹의 시간이 하나로 압축되는 느낌. 뇌 속에서 뭔가 떨어져 나가는 감각. 마치 오랫동안 울렸던 경보음이 갑자기 멈추는 것 같은 고요함.

침대의 손잡이를 움켜잡은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감각은 마치 낙하하는 비행기 안에서 무중력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단단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자신이 더 이상 여러 시간대에 흩어져 있지 않다는 확실함.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 없음.

준호는 손이 떨리는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아빠?"

솔이의 목소리였다. 목이 메여 있었다.

"솔아. 나야."

"지금 몇 시야?"

"12시 1분이야."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준호는 솔이가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빠, 당신은 이번 달에 안 갔어?"

"응."

"왜?"

준호는 천천히 대답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 말이 나가자, 솔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도였다. 아버지가 마침내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 그리고 분노가 풀려나가는 소리.

"솔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빠... 난..."

솔이가 말을 이었다가 멈췄다. 그리고 나서 다시 시작했다.

"난 아빠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매달 그림을 그렸어. 아빠를 붙잡기 위해. 근데 아빠는 계속 멀어졌어. 그리고 나는 혼자였어."

"나도 알아. 봤어. 그 그림들. 그리고 난 정말 미안해. 솔아, 정말 미안해."

"그럼 이제?"

솔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린아이 같은, 불안한 목소리.

"이제 우리 천천히 시작하자. 완벽하게가 아니라, 그냥... 천천히. 그리고 난 더 이상 어디도 가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정말?"

"응. 정말."

전화를 끊고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이 밝았다. 5년 동안 보던 형광등과 똑같은 형광등. 하지만 이제 그것은 회귀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형광등일 뿐이었다.

새벽 1시 30분.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야간 순찰이었다.

"아, 깬 거예요? 괜찮으세요?"

간호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준호는 그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지영이 아니었다.

"네, 괜찮습니다."

간호사가 생체 신호를 확인했다. 심박수, 혈압, 산소 포화도. 모두 정상이었다.

"특별한 것도 없고 좋은데요. 그런데 뭔가 달라 보이세요."

"뭐가?"

"글쎄요. 눈이? 전에는 좀 더...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여기를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준호는 웃었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간호사가 나갔다. 그 다음, 누군가가 다시 들어왔다.

"어? 깨어 있네."

민준 의사였다. 그는 준호의 차트를 들고 있었다. 야간 회진이었나 봤다.

"의사님."

"음, 회귀 기록 봤어? 어제는 뭔가 특별했나?"

민준 의사가 물었다. 그의 눈은 차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이상한데. 어제 뇌파가 완전히 달라졌어. 회귀할 때마다 나타나던 주기적 이상 신호가 사라졌어. 신경 패턴이 정상화됐다."

민준 의사가 차트를 내렸다. 그의 눈이 준호를 만났다.

"뭘 했어?"

"뭘요?"

"회귀를 안 했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 의사가 의자에 앉았다. "처음부터 알았어.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의사님은?"

"나? 나는 의학자야.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보면 뭐든 파고들 수밖에 없지."

민준 의사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씓쓸했다.

"그런데 지금 너를 보니까... 뭔가 다르네. 전에는 계속 어디론가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여기 있으려고 하는 것 같아."

"그렇군요."

"그게 맞는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것 같아."

민준 의사가 일어났다. "그냥 내 관찰이야.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그가 나가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너는 이제 여기 있다. 완전히."

문이 닫혔다.

준호는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이 밝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회귀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밤이었다. 살아가야 할 밤.

그 밤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선택을 곱씹었다.

회귀 능력을 포기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었다. 5년 전, 그 사고가 일어난 날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시 할 수 있는 능력을.

하지만 그 대신 얻은 것도 있었다.

현재. 지금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솔이가 자신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지영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지영은 어디에 있는가? 회귀 능력이 사라졌다면, 지영도 돌아올까? 아니면 그녀는 영구적으로 준호의 기억에서만 존재할까?

새벽 2시 15분.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안녕하세요. 야간 간호 담당..."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그것은 지영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김지영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준호를 모르는 눈이었다. 그저 환자를 보는 눈.

"오늘 밤에는 특별한 불편함 없으시죠?"

"지영?"

준호가 물었다.

간호사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아세요?"

"아니... 그냥..."

준호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당신이 한 말이 있어요. 내게. '당신은 자꾸 누군가를 잃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라고."

지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 뭔가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이 말하지 않은 말을 누군가 자신의 입에서 들은 것처럼. 눈 속에 미세한 흔들림이 일었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무언가 떠오르려 하는 듯한 떨림.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알아요. 당신은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나한테... 말할 거예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미래에. 우리가 계속 만난다면."

지영이 한 발 물러섰다. 그 움직임은 거부의 몸짓이었지만, 동시에 뭔가 끌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아니, 미안해요. 그냥 잠깐... 이상한 꿈 같은 거예요. 당신을 오래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지영이 생체 신호를 확인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이상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뭔가가 울리고 있는 것처럼.

"그럼... 좋은 밤 되세요."

그녀가 나갔다. 하지만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마치 뭔가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준호는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영은 아직 준호를 모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계속 만난다면.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이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벽 3시.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 없음.

"솔이?"

"응. 아빠 안 자?"

"너도?"

"나도 못 잤어. 그냥... 아빠가 정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나 여기 있어."

"응."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께 있는 침묵이었다.

"아빠, 약속할 거 하나 있어."

"뭐?"

"앞으로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 그냥... 있어 줘. 괜찮아?"

준호의 목이 메였다. "응. 약속할게."

전화를 끊고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이 밝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회귀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밤이었다. 살아가야 할 밤.

그리고 그 밤 너머에 있을 아침.

하지만 솔이는 여전히 자신을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여전히 경계가 있었다. 5년 동안 쌓인 상처가 한 번의 약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준호는 알고 있었다. 그 상처들이 언제 다시 터져 나올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영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무게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천천히 알아가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 안에는 2010년의 솔이도 있었고, 2020년의 솔이도 있었고, 그 사이의 모든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이었다.

대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새로운 시간 속에서, 그는 솔이의 눈에서 경계가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볼 것이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준호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솔이가 확인할 때마다, 그 경계는 조금씩 녹아질 것이었다.

그리고 지영도. 그녀가 준호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가 변할 것이었다. 인과 역전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태로 작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었다.

회귀 능력을 포기한 대가는 무거웠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지금 이 밤. 그리고 그 다음 밤. 그 다음 아침.

모두 확실한 것들.

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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