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의 파열
솔이의 미술 전시회장은 작은 갤러리였다. 화이트 큐브 공간에 스포트라이트만 켜져 있고, 벽에 붙은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준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2010년 6월 15일, 그 특정한 날짜로 돌아온 준호는 전시장 입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림들은 모두 아이의 손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이 그렸을 법한 투박한 선들, 그러나 그 안에는 뭔가 깊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파란색과 회색의 조합. 반복되는 창 모양. 그리고 창 너머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손가락들.
준호는 천천히 각 작품 앞에 멈췄다. 한 그림에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
손이 떨렸다.
그림 속의 아버지는 흐릿했다. 마치 빛 속에 잠긴 듯이. 하지만 딸은 선명했다. 딸이 손을 뻗어 아버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들 사이로는 눈물 같은 파란 물감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솔이는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다. 13살의 솔이. 검은 교복을 입고, 긴 머리를 한 쪽으로 묶은 솔이. 그 얼굴에는 불안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왔어?"
아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어질 수 있는 뭔가를 다루는 사람처럼.
"응. 솔이가 그렸어?" 준호가 가장 큰 그림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
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준호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딸은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예쁘네."
"정말?"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바꿨다. 준호가 다시 솔이를 봤을 때, 아이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너무 예뻐. 솔이가 이렇게 잘 그렸구나."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강압적이지 않았다. 평가하지 않았다. 단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솔이는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아빠... 이 그림이 제일 좋아?"
"응. 제일 좋아. 왜냐하면 솔이가 그린 그림이니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준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갤러리의 다른 그림들보다, 전시장의 어떤 작품보다도, 솔이가 그린 이 서툰 그림이 가장 아름다웠다.
솔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빠... 미안해."
"뭐가?"
"내가... 자꾸 아빠한테 안 좋은 딸이라서."
준호는 솔이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마치 다친 새를 다루듯이. 그리고 아이를 안았다. 솔이의 몸이 처음엔 경직되었지만, 곧 준호의 가슴에 파묻혔다.
"솔이는 나쁜 딸이 아니야. 아빠가 나빴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5년간의 죄책감, 모든 후회가 그 두 마디에 담겼다. 솔이는 아버지의 가슴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했다.
하지만 영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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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 돌아온 준호는 병실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영이의 목소리가 없었다. 재훈의 목소리도 없었다. 대신 무거운 침묵만 있었다.
시계는 오후 3시 2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거울을 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창백했나? 눈 밑의 검은 반달이 언제 생겼나?
거울 속의 이목구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조심스럽게 지워가고 있는 것처럼.
"준호."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거울을 내렸다. 병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민준 의사였다.
"오늘 기분이 어때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은 준호의 옆에 앉았다.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한 장의 종이를 펼쳤다. 뇌파 그래프였다.
"이거 봤어요?"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뇌파 기록입니다. 5년간." 민준이 그래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이상합니다. 당신이 깨어난 이후로 정확히 한 달 주기로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나요. 수면 뇌파가 아닙니다. 뭔가... 다른 상태입니다."
준호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 패턴이 나타날 때마다..." 민준이 또 다른 자료를 펼쳤다. 병원 직원 명부였다. "사람들이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민준의 손가락은 한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호사 김지영. 그 옆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명부에서 완전히 제거된 흔적이었다. 다른 페이지를 넘기자 또 다른 이름이 보였다. 이재훈. 그것도 마찬가지로 제거되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빨간 줄로 그어져 있었다. 간호사 박수진, 의료기사 최준석. 모두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간호사 김지영. 당신의 담당 간호사였죠? 이 명부에 없어요. 아무 기록도 없습니다. 의료 기록도 전산 시스템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있고요. 당신의 친구 이재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간호사 박수진, 의료기사 최준석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깨어났을 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민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한준호, 당신 뭔가 말해야 할 게 있지 않나요?"
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제 의료 윤리상 이걸 보고할 의무가 있어요. 이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거든요. 당신은 뭔가 할 수 있어요. 그게 뭔가요?"
"......"
"말해요. 제발. 제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민준의 눈에는 진심이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진심이 있으면 질문도 깊어진다. 질문이 깊어지면 답변도 위험해진다.
준호는 일어났다.
"미안해요. 나중에 얘기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한준호!"
하지만 준호는 이미 병실을 나가고 있었다. 민준의 목소리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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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병원의 복도를 걸었다. 형광등이 천장에 줄지어 있었고, 각 등마다 작은 벌레들이 모여 있었다. 복도의 끝에는 창문이 있었다. 서울의 하늘이 보였다. 회색이었다.
누군가를 또 잃었나?
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지영. 통화 기록은 있지만 이름이 없었다. 단지 숫자만 있었다. 재훈도 마찬가지였다. 수진, 준석도. 그 숫자들을 누르면 누가 나올까?
준호는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거울을 찾았다. 복도의 한 구석에 작은 거울이 있었다. 아마 환자용 화장실 근처였을 것이다. 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 맞나?
눈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코의 선이 뭉개졌다. 입의 모양이 불확실해졌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조심스럽게 지워가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하얀 종이 위의 희미한 자국처럼.
준호는 거울에 손을 대었다. 거울 속의 손도 따라 올라왔다. 하지만 그 손이 자신의 손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손가락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살짝 빛이 통과하는 것처럼.
'내가 누구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커졌다. 준호는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준호. 한준호. 한준호."
이름을 반복하면 사라지지 않을까? 이름이 남아 있으면 자신도 남아 있지 않을까?
"당신은 자꾸 누군가를 잃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지영인가? 아니면 그냥 자신의 환각인가?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시계를 봤다. 오후 11시 47분.
6월 21일 밤 11시 59분까지 12분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한 달. 다시 회귀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준호는 거울 앞에서 손을 펼쳐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의지와 관계없이. 마치 누군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신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연락처를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한준호.
이름이 있었다. 휴대폰 안에 자신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위험했다. 다음 회귀 후에는 이것도 사라질 수 있다.
준호는 거울 앞에서 손을 펼쳐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다음 회귀에서 누가 사라질까?
아니면... 자신이 사라질까?
준호는 병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오후 11시 58분.
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어도 거울 속의 흐릿한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1분이 남았다.
준호의 숨이 멈췄다.
마지막 순간, 그는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다시 가야 할까? 아니면... 이번엔 돌아오지 말까?'
그리고 시간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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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눈이 떠졌다.
햇빛이었다. 2010년 6월 15일의 햇빛. 5년 전의 햇빛.
그는 낯선 공간에 있었다. 미술관의 벽화실. 하얀 벽에 여러 작품들이 붙어 있었다. 중학교 학생들의 미술 전시회였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신체가 온전했다. 2010년의 신체. 43세의 신체가 아니라 36세의 신체.
'솔이. 솔이의 전시회.'
그는 벽화실을 돌아다녔다. 여러 작품들을 지나쳤다. 파스텔로 그린 풍경화, 물감으로 표현한 자화상, 색연필로 만든 만화...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솔이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한 그림 앞에서 멈췄다.
검은색 종이 위에 파란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 제목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날"이었다.
그림 속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아이의 실루엣. 그리고 그 뒤로... 아버지의 형상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사라져 가고 있는 것처럼.
준호의 눈이 따뜻해졌다.
"솔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3살의 솔이가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표정이었다.
"아빠?"
솔이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여기 있다는 게 불편한 것일까?
"이 그림... 솔이가 그렸어?" 준호가 물었다.
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예뻐. 정말... 잘했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5년간의 후회가 한 문장에 담겼다. 딸의 전시회에 가본 적이 없다는 죄책감. 딸의 미술을 무시했다는 죄책감. 딸을 통제했다는 죄책감.
솔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알던 아버지의 표정이 아니었다.
"아빠가... 왜?"
"미안해. 진짜 미안해. 솔이를 못 알아줘서. 솔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꾸 강요했어."
준호는 솔이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아이가 도망칠까봐 너무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미술을 좋아하는 솔이. 그게 정말 좋아. 그림도 정말 좋고."
솔이의 눈이 흔들렸다. 아버지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 하지만 조금씩 방어가 풀리고 있었다.
"정말?"
"응. 진짜로."
준호는 솔이를 안았다. 천천히. 딸의 몸이 경직되었다가 조금씩 풀렸다. 솔이의 어깨가 떨렸다. 울음인지 숨인지 알 수 없는 것.
"미안해, 솔아."
그리고 48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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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눈이 떠졌다.
2020년 6월 21일. 병원의 천장.
그는 숨을 쉬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또 누군가를 잃었나?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지영. 재훈. 솔이.
모두 그대로였다. 이름이 남아 있었다.
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준호는 거울을 들었다. 병실의 작은 거울. 자신의 얼굴을 봤다.
더 흐릿해져 있었다. 눈의 초점이 흐렸다. 코의 선이 뭉개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조심스럽게 지워가고 있는 것처럼. 이제 거울 속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희미한 윤곽만 남아 있었다.
'내가 누구지?'
그 생각이 다시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민준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이전과 달랐다. 더 예리했다. 더 집요했다.
"한준호. 우리 좀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민준은 손에 파일을 들고 있었다. 뇌파 기록. 의료 데이터. 모든 증거.
"당신의 뇌파가 정확히 한 달 주기로 이상을 보여요. 그리고 매번 그 이상이 생기고 나면,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기록에서 사라져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데이터 오류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당신을 더 자세히 관찰해보니까... 이건 오류가 아니에요. 이건 뭔가... 패턴이에요."
민준은 파일을 펼쳤다. 세 개의 뇌파 기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2020년 5월 21일. 6월 21일. 그리고 오늘.
"매달 정확히 이 시점에서 당신의 뇌파가 급격한 변화를 보여요. 마치 의식이 다른 곳으로...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처럼."
"......"
"당신은 뭔가 할 수 있어요. 그게 뭔가요?"
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의사가 믿을까?
"제 의료 윤리상, 이 데이터를 보고할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민준의 눈에는 진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무서웠다. 진심이 있으면 질문도 깊어진다.
"당신은 뭔가 초자연적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걸 멈춰야 해요."
순간, 준호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희망도, 절망도. 남은 건 공허함뿐이었다.
민준이 그것을 본 것 같았다. 의사의 눈이 흔들렸다.
"뭐... 뭐가 문제예요?"
"미안해요."
준호는 일어났다. 민준을 밀쳤다.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밀어냈다. 민준은 의자에서 넘어졌다.
"한준호!"
하지만 준호는 이미 병실을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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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복도. 준호는 계단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너무 느렸다. 계단을 내려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마지막 층에서 나왔다. 병원의 로비.
사람들이 가득했다. 환자들, 보호자들, 의료진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준호는 그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병원 밖으로 나왔다. 서울의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6월의 저녁이었다.
준호는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걸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지영. 재훈. 솔이. 엄마 주영.
이들 중 누가 다음에 사라질까? 아니면 자신이 사라질까?
준호는 거울을 다시 꺼냈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거울. 자신의 얼굴을 봤다.
더 흐릿해져 있었다. 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코도. 입도. 거의 모든 것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지워져 가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이 떨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준호는 거울을 떨어뜨렸다. 깨졌다. 산산조각.
거울 조각들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보였다. 눈 하나. 코 반 개. 입의 일부.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았다.
준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47분.
정확히 12분이 남아 있었다. 다음 회귀까지.
그는 솔이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보세요?"
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23살의 솔이.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 게 불편한 듯한 목소리.
"솔아?"
"네... 아빠?"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뭐... 뭐가 문제예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 뭐가 문제인데요?"
"내가 누구인지... 자꾸 잊어버려. 미안해."
순간, 솔이의 목소리가 변했다.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아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빠가 어디 있어?"
"내가 지워지고 있어. 계속 지워지고 있어."
"아빠!"
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솔이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끊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정을 했다.
이번엔 회귀하지 않기로.
손가락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마치 반항하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신경을 강제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처럼.
준호는 주변을 보았다. 서울의 거리. 사람들. 자동차. 신호등. 모든 것이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흘렀다.
오후 11시 50분.
준호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오후 11시 55분.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오후 11시 58분.
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어도 거울 속의 흐릿한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지 흰 종이 위의 희미한 자국일 뿐.
그리고 마지막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가야 할까? 아니면... 이번엔 돌아오지 말까?'
오후 11시 59분.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리고 시간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