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부터 깨어났다.
먼저 오른손 검지가 움직였고, 그 다음 중지가 따라왔다. 마치 누군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손가락들이 하나씩 펼쳐졌다. 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병실의 천장이 아니었다.
낡은 벽지, 그 위에 떠 있는 형광등.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가슴을 짓누르던 의료용 모니터 밴드는 사라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근육이 제대로 반응했다. 5년 동안 누워만 있던 팔이, 다리가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
창밖을 봤을 때 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거리가 달라져 있었다. 건너편 편의점의 간판 글씨가 낡았고,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모양이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입은 옷의 스타일도—목 높이, 소매 길이, 바지의 핏이 모두 지금과 달랐다. 가장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휴대폰이었다. 스마트폰이 맞는데, 화면이 작고 두껍고, 가장자리가 각졌다.
"꿈이야?"
준호가 중얼거렸다. 손가락으로 팔뚝을 꼬집었다. 예리한 통증이 즉시 뇌를 관통했다. 현실이었다. 준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떨렸다. 5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다리였지만, 신체는 거기에 응했다. 마치 누군가 더 강한 의지가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처럼.
거울이 있는 욕실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으며 천천히 이동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했다.
주름이 없었다. 검은 머리였다. 살이 팽팽하게 올라와 있었다. 손을 얼굴에 대고 만져봤다. 피부의 질감이 달랐다. 젊었다. 자신이 젊은 시절의 얼굴이었다.
"뭐야, 이게..."
준호가 옷을 들어올렸다. 팔뚝, 가슴, 배에 남아 있어야 할 각종 의료 자국들이 없었다. 피부는 매끄러웠다.
벽에 붙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볼펜으로 표시된 날짜들. 준호는 달력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2010년 5월. 달력 위쪽에 명확히 인쇄되어 있었다.
준호가 벽에 기대앉았다. 숨이 차올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마치 자유낙하하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는 손가락을 꼬집었다. 또 다시. 그리고 또.
통증은 계속 생생했다.
집 밖으로 나갔다. 거리의 풍경이 더욱 선명해졌다. 건너편의 카페 간판에 쓰인 폰트, 가로등의 높이, 보도블록의 색상—모든 것이 10년 전의 서울이었다. 한 노인이 준호를 지나쳤다. 그 노인의 휴대폰은 여전히 피처폰이었다. 검은색 화면에 빨간 숫자가 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의 집 주소를 기억했다. 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의 이름이 달라진 곳도 있었고, 새로 생긴 건물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지형은 같았다. 신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기만 했다.
집 문을 열었을 때 냄새부터 떠올랐다. 5년 전의 냄새였다. 거실의 소파, 주방의 타일, 벽지에 배어 있는 그 냄새. 손가락이 2010년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준호의 눈물이 흘렀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현관 쪽에 서 있는 인물을 봤다. 딸이었다. 13세의 한솔이였다. 교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길게 내려와 있었다. 준호가 5년 동안 꿈속에서 반복해서 본 딸의 모습이었다.
"아빠, 괜찮아?"
솔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준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버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 뭐 했어?"
준호는 입을 열지 못했다.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딸의 얼굴을 바라만 봤다. 이 얼굴을 5년을 못 봤다. 식물인간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이 얼굴이 자신의 전부였다.
"아빠, 진짜 뭐야?"
솔이가 한 발 물러섰다. 경계심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의 이상한 태도에 불편해하는 표정이 분명했다.
"그냥... 너를 보고 싶었어."
준호가 겨우 말을 꺼냈다. 목이 메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10년 전의 목소리였다.
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이 준호의 가슴을 찢었다. 거리감이 있었다. 딸과 자신 사이의 거리.
준호는 솔이를 따라갔다. 딸의 방은 여전히 미술 용품과 스케치북으로 가득했다. 벽에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솔이는 책상에 앉아 학원 숙제를 시작했다. 수학 문제집이었다. 준호는 문 옆에 서서 딸을 바라봤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지금 이 순간, 딸이 숙제를 하고 있는 이 평범한 순간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지를.
"뭐해?"
솔이가 돌아보며 물었다. 준호는 딸 곁에 앉았다. 책상 위의 물건들을 살펴봤다. 연필, 지우개, 그리고 오른쪽 모서리에 스케치북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꺼냈다.
"아빠! 그건—"
솔이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준호가 이미 스케치북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풍경화가 있었다. 준호가 모르는 풍경이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추상화였다. 색감이 아름다웠다. 한 장 또 한 장을 넘기며 준호는 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멈췄다.
페이지 위에 그려진 것은 사람이었다. 한 남자가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천국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그림이었다. 준호는 제목을 읽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 2020년 3월 21일."
글씨가 명확했다. 딸의 손글씨였다. 년도, 월, 일이 모두 명시되어 있었다. 2020년. 3월. 21일. 준호가 깨어난 날짜였다. 정확히 10년 뒤.
준호의 손이 떨렸다.
"솔이, 이 그림은..."
준호가 돌아봤다. 솔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딸은 입을 열고 있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표정에서 준호는 두려움을 읽었다.
"넌 어떻게..."
"모르겠어. 그냥... 꿈에서 본 거야."
솔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는 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뿐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겪고 있다는 듯한.
"솔아, 아빠한테 말해 줄래? 어떤 꿈이었어?"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이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지금 방금 그린 그림인데?"
"그냥... 손이 그렸어. 아빠가 깨어나는 거, 그게 전부야."
솔이가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준호의 손에서 빼앗으려는 듯. 준호는 딸을 놓아주지 않았다.
"솔아, 아빠가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너 이 그림을 언제 그렸어?"
"어제?"
"어제? 정확히 언제?"
"밤에... 잠들기 전에."
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어제 밤. 그것은 자신이 2020년에서 깨어난 밤이었다. 지영이 자신을 돌보고 있던 그 밤. 민준 의사가 뇌파를 확인하던 그 밤.
"솔아, 아빠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병원?"
"맞아. 아빠가 병원에 있어. 그런데 너는 왜 아빠가 깨어난다는 걸 알았어?"
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모르겠어, 아빠. 진짜 모르겠어. 그냥... 느껴졌어."
준호는 딸을 안았다. 솔이의 몸이 떨렸다. 아버지의 팔에 안겨 있는 딸이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약한지 느껴졌다. 5년 동안 이 아이는 혼자였다. 아버지 없이.
"괜찮아. 아빠가 여기 있어. 이제 괜찮아."
준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자신을 위한 말이기도 했다.
벽에 붙은 시계를 봤다. 오후 11시 47분.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손가락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마치 누군가 줄을 당기듯이. 그 감각이 팔로 올라왔다. 어깨로. 목으로.
"아빠?"
솔이가 물러섰다. 준호의 표정을 보고 놀랐다.
"아니야, 아니야. 더... 더 있고 싶어."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딸의 손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가락이 더 이상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존재가 그의 신체를 거두어가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
오후 11시 48분.
"아빠!"
솔이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준호의 시야가 흐려졌다. 침대로 끌려가는 느낌. 아니, 시간이 끌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끌려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준호가 외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의식이 흐려진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준호가 본 것은 솔이의 두려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둠.
오후 11시 59분 59초.
시간이 역행했다. 준호는 그 차이를 감지했다.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도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과거로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영화 필름을 거꾸로 감는 것처럼.
의식이 깨지면서,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을 뜨는 순간, 하얀 천장이 보였다. 기계음.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위로 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준호! 준호, 깨셨어?"
지영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로. 마침내.
"어, 어디..."
준호의 목은 말라 있었다. 지영이 물잔을 들었다. 빨대로 물을 마시게 했다. 한 모금, 두 모금.
"괜찮으세요?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겠어요."
지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준호는 천천히 눈을 돌렸다. 병실 벽에 붙은 달력. 2020년 3월 1일.
그게 이상했다.
어제는 5월 15일이었다. 2010년의 5월 15일. 솔이의 방. 스케치북. 그 그림. 그리고 오후 11시 48분.
"3월... 1일?"
준호가 중얼거렸다.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3월 1일입니다. 어제 밤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셨어요. 의료 기적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어요."
의료 기적.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2020년의 손이었다. 주름이 생겼다. 5년의 세월이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방금 전, 2010년의 솔이 손을 잡았던 손이기도 했다.
"지영... 내가 어디에... 왜 여기 있는 거지?"
준호가 물었다. 지영의 얼굴에 슬픔이 흘렀다.
"2015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계셨고요. 어제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하신 거예요."
5년.
2010년 5월 15일에서 2020년 3월 1일까지. 정확히 10년이 아니라, 깨어난 것은 5년 뒤였다. 2015년에 사고가 났다는 것은... 그 사이 5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준호는 손가락을 꼬집었다. 통증이 생생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내 딸은... 솔이는?"
지영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직... 연락이 안 되고 있어요. 당신 누나분께서 계속 알아보시고 있습니다."
누나. 준호의 자매였다. 그녀가 5년간 준호를 돌봤을 것이다. 솔이의 어머니인 주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 가족은?"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모든 걸 설명해 드릴 거고요."
지영이 말을 돌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준호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이상한 감정이 준호를 휩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떠나가는 느낌.
의사가 들어왔다. 박민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40대 중반,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준호의 눈을 들여다봤다.
"한준호 씨. 정상적인 의식 회복입니다. 신경학적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이네요. 다만, 뇌파 검사를 다시 한 번 해야겠습니다."
민준이 차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뇌파 기록이 좀 이상하거든요. 며칠 전부터 규칙적인 변동이 있었어요."
준호는 민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자신의 머릿속은 2010년의 서울로 돌아가 있었다. 거리의 간판. 사람들의 옷. 그리고 솔이의 얼굴.
"그런데 내가... 기억을 잃어버렸나요?"
준호가 물었다.
민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장기간 의식 불명이었는데, 퇴행성 기억 손상이 거의 없네요. 오히려 기억력이 매우 선명해 보입니다."
그렇다. 준호의 기억은 명확했다. 5년 전의 기억도, 어제의 기억도 마찬가지로 생생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내가 어제... 아니, 내가 방금...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준호가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꿈을 꾸셨나요?"
민준이 물었다.
"그보다 더... 현실 같은."
준호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후 11시 48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 그리고 솔이의 두려운 얼굴.
"아, 미안합니다. 장시간의 의식 불명 후에는 악몽을 꾸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민준이 차트에 뭔가를 적었다. 그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준호는 그의 눈에서 의구심을 읽었다. 의사는 준호의 반응을 의심하고 있었다.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 의료진이 들어왔다 나갔다. 혈액 검사, 신경학적 검사, 뇌 스캔. 준호는 모든 절차를 받았다. 지영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곁에서 지냈다.
오후 2시.
준호의 누나 준영이 들어왔다. 50대 초반의 여자였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는 준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오빠!"
준영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준호는 누나를 안아주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솔이는... 솔이는 어디 있어?"
준호가 물었다. 준영의 얼굴이 경직됐다.
"솔이는 오빠가 사고 난 후로 엄마랑 함께 있어. 아직 오빠가 깨어났다는 걸 모르고 있어."
"주영이는?"
"이혼했어. 3년 전에."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3년 전. 그렇다면 솔이가 19살 때였다. 딸은 엄마를 따라갔을 것이다.
"솔이가 나한테 연락할 생각이 없나?"
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 솔이가 많이 힘들었어. 오빠가 없던 5년 동안..."
"내가 알아. 내가 다 알아."
준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아? 오빠는 의식이 없었는데?"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이 2010년의 5월 15일을 살았다고? 딸의 방에서 그 그림을 봤다고? 그것이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다고?
"누나, 내가 미쳤어?"
준호가 물었다. 준영이 고개를 저었다.
"미치지 않았어. 의료 기적이야. 의사 선생님들도 놀라고 있어."
하지만 준호는 알았다. 이건 의료 기적이 아니었다. 이건 뭔가 다른 것이었다.
오후 4시.
민준이 다시 들어왔다. 뇌 스캔 결과를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한준호 씨,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과가 뭐길래 그런 표정이에요?"
준호가 물었다.
"신체적으로는 이상이 없습니다. 오히려 5년 동안 누워만 있었던 사람치고는 회복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뇌파입니다."
민준이 차트를 펼쳤다. 규칙적인 파동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 기록을 보세요. 며칠 전부터 매달 같은 시간에 비정상적인 뇌파 변동이 있습니다. 마치 의도적으로 유발된 것처럼요."
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매달 같은 시간. 그것은 오후 11시 59분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역행하는 순간.
"그게... 뭘 의미하는데요?"
"모릅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민준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변했다. 의사의 눈이 아니었다. 어떤 진실을 추적하는 사냥꾼의 눈이었다.
"당신이 의식 불명 중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사는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 준호의 뇌파 변동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준호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민준이 차트를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준호를 관통하고 있었다.
오후 11시 45분.
지영이 준호의 혈압을 재고 있었다. 야간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 준호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2020년의 야경이었다.
"어제 밤에 뭘 꾸셨어요?"
지영이 물었다. 준호가 돌아봤다.
"악몽이라고 했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실래요?"
"왜?"
"당신이 돌아올 때마다 뭔가 달라져요."
지영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 말은 마치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처럼 들렸다.
준호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지영을 잃을 것 같은 공포가 가슴을 짓누른다. 그녀는 뭔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반복을 감지하고 있었다.
"당신이 돌아올 때마다?"
준호가 물었다.
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자신이 말한 것을 후회하는 듯.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피곤한가 봐요."
"지영, 내가 뭐가 달라졌어?"
준호가 다시 물었다. 지영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반복이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표정이 달라져요. 처음엔 혼란스러워하시다가, 자꾸 깨어날 때마다 뭔가 알아가시는 눈빛이 되세요."
지영이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 손이 자꾸 떨려요. 마치 뭔가를 붙잡고 싶은데 놓쳐버리는 그런..."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정말로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당신이 자꾸 시간을 확인하세요.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영이 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당신 뭐예요?"
그 순간, 손가락에 더 강한 힘이 들어왔다.
오후 11시 55분.
"지영, 내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준호가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목이 경직되었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당신 정신 차려요.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지영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도 곧 자신을 떠날 것이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야 해. 솔이를 찾아야 해."
준호가 말했다. 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나가세요. 의사 선생님이—"
"아니야, 지금 바로. 내가 시간이 없어."
준호가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근육이 5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준호는 또 다른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은 2020년의 몸이었다. 약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식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2010년과 2020년을 오가면서.
"당신 뭐하는 거예요?"
지영이 준호를 누었다. 준호는 저항할 수 없었다.
오후 11시 58분.
손가락에 힘이 든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감각. 그리고 어둠.
마지막으로 준호가 본 것은 지영의 두려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준호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의식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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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다.
하얀 천장. 기계음. 소독약 냄새.
그리고 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준호! 준호, 깨셨어?"
같은 대사. 같은 표정.
준호는 천천히 눈을 돌렸다. 벽의 달력을 봤다.
2020년 3월 1일.
다시.
준호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이건 악몽이 아니었다. 이건 반복이었다. 시간의 반복.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처음엔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의지가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천천히, 자신의 의지가 돌아왔다. 손가락이 펼쳐졌다. 손목이 움직였다. 팔이 반응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32분.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 능력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것이 시간을 거슬러가는 무언가였다는 것을.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과거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지영이 자신의 반복을 감지했다. 그리고 솔이도. 딸은 자신이 깨어날 날짜를 정확히 그렸다. 10년 뒤의 날짜를.
"지영, 오늘이 며칠이야?"
준호가 물었다. 지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3월 1일이세요. 왜?"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봤다. 2020년의 손이었다. 주름이 있었고, 나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2010년의 솔이 손을 잡았던 손이기도 했다.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건가?"
준호가 중얼거렸다.
지영이 손을 잡았다.
"당신 정신 차려요. 아직 회복 초기예요."
하지만 준호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보고 있었다.
2010년 5월 15일. 그리고 2020년 3월 1일.
둘 사이에 10년의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준호는 그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