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워진 증거
최준철의 심리상담실은 강남역에서 10분 거리의 조용한 빌딩 12층에 있었다.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인테리어는 차분했고, 관엽식물들이 정성스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손에 쥔 서류함을 들었다 놨다. 메모지에 적힌 글씨가 자꾸만 떨려 보였다. '관찰자'.
포겟의 예약 기록을 확인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최준철이라는 이름으로 예약한 고객이 없었다. 기록도, 파일도, 아무것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그래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문을 밀었다. 벨소리가 울렸고, 몇 초 후 그가 나타났다.
"박준호님. 예상했습니다."
최준철은 45세 정도로 보였다. 회색이 섞인 단정한 머리, 하얀 셔츠, 검은색 바지. 심리상담사의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그의 눈. 나를 보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소장하는 방식으로 바라봤다.
"당신이... 포겟에 왔었나?"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 자신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 떨 수 있다는 걸.
최준철이 웃었다. 그 웃음은 진정성이 없었다. 마치 내가 예정된 대사를 읽는 것을 감상하는 배우 같은 웃음이었다.
"맞습니다. 저를 기억하세요?"
기억한다?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포겟의 고객들 중에서.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뭔가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기억에 손을 집어넣고 부분적으로 구겨낸 것처럼.
"당신 기억에는 뭐가 있었는데요?"
내 질문은 이상했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했는데.
최준철이 의자에 앉도록 손짓했다. 나는 앉지 않았다.
"다섯 번의 완벽한 범죄를 지켜본 기억이었어요."
내 가슴이 내려앉았다. 다섯 번. 피해자들. 모두.
"그리고 당신이 제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나머지 고객들의 기억만 지워줬어요. 덕분에 완벽한 범죄가 되었죠."
"아니... 당신은..."
"당신이 저를 지우지 않은 이유를 아세요?"
최준철이 일어섰다. 천천히. 마치 무용을 추듯이.
"당신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이 저를 보호해줬어요."
내 손이 떨렸다. 포겟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준영에게 전화해야 했다. 모든 게 틀렸다. 내가 틀렸다. 나는 범죄자를 풀어줬다.
"당신의 능력이 없었다면, 난 이렇게 오래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최준철이 나에게 가까워졌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이 나를 구원했어, 박준호."
그 말이 칼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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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겟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계속 손을 떨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이준영에게 전화했다. 응답 없음. 다시 눌렀다. 응답 없음.
택시가 강남대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압구정역. 강남역. 한강공원 방향. 모든 장소가 낯설었다. 내가 매일 지나던 길인데, 이제 그 길 위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포겟에 도착했을 때 밤 11시였다. 빌딩은 조용했다. 지하 2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이 낯설었다. 누군가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지워버린 것처럼.
사무실 문을 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영 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준호, 지워진 기억은 법적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손이 멈췄다.
"당신의 증언도 신뢰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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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겟의 벽에는 여전히 고객들의 기억 데이터가 보관되어 있었다. 암호화된 파일들. 유미라. 정채은. 강석민. 박주현. 그리고 비어 있는 공간. 최준철의 기억이 있어야 할 공간.
나는 의자에 앉았다.
법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었다. 최준철의 자백도. 내 증언도. 모두.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번호 미표시.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화면을 끄려 했다. 하지만 멈췄다.
같은 사람?
내 기억 속에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 게 아니라 흐릿해졌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지우듯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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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내팽개치고 서버실로 향했다. 포겟의 모든 기록이 있는 곳. 최준철의 예약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혹은 그의 기억 데이터가. 완벽하게 지워진 줄 알았지만, 백업이나 로그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서버실 문은 열려 있었다.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손전등을 켰다. 휴대폰 불빛이 어두운 공간을 헤집고 다녔다. 서버 랙이 줄지어 있었고, 모니터는 검은 화면이었다. 키보드 위에는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누군가 이미 모든 흔적을 지웠다.
"찾는 거 있으세요?"
나는 몸을 굳혔다. 돌아섰다.
최준철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만 보였다.
"당신이... 여기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한 발 다가섰다. 나는 한 발 물러섰다.
"포겟의 모든 기록을 지웠나요?"
"지웠다기보다는, 원래 없었던 거죠. 당신이 저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최준철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승리가 있었다.
"3년 전, 당신이 저를 찾아왔어요."
내가 그를 봤다. 그의 말이 이상했다. 포겟은 최근에 설립되었다. 3년 전이라니.
"당신은 기억 삭제 능력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의 뭔가."
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린 시절? 나는 어린 시절에 뭘 했던 건가.
"그래서 저는 당신을 도와줬어요. 당신이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포겟을 만들도록."
"이게 무슨..."
"새로운 정체로. 그리고 저는... 저는 당신을 관찰했어요. 처음부터."
최준철이 다시 한 발 다가섰다.
"완벽한 범죄의 조건을 아세요? 증거가 없는 것. 목격자가 없는 것. 하지만 더 완벽한 범죄는?"
나는 서버실 벽에 등을 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범인 자신도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내 가슴이 철렁했다.
"당신은 고객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었어요. 누군가 '이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면, 당신은 그 사람이 왜 그런 기억을 지우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저는 당신을 찾아갔어요. '제 트라우마를 지워달라'고. 당신은 저를 도와줬어요."
"왜? 왜 날 기억하지 못하게 했어?"
"왜냐하면 저는 당신이 지워야 할 기억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최준철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주사기가 있었다.
"저는 당신이 지워야 할 기억을 본 사람이었어요. 당신의 기억 속에 숨겨진 그 기억 말이에요."
"뭐라는 거야?"
"당신은 저를 기억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당신의 그 기억 속에 있었거든요."
주사기가 내 팔에 다가왔다.
그 순간, 포겟의 모든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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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영 형사가 서버실 문을 통해 들어왔다. 뒤에는 경찰들이 있었다. 그들의 총구가 최준철을 향했다.
"손 들어."
최준철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주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박준호, 당신은 뒤로 물러나."
나는 움직였다. 무기력하게.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이준영이 최준철을 수갑채웠다.
"최준철, 당신을 연쇄 살인, 기억 조작, 협박 혐의로 체포합니다."
최준철이 웃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진정성이 없었다.
"당신들이 뭘 할 수 있겠어요? 증거가 뭐가 있어요?"
이준영이 나를 봤다.
"박준호의 증언이 있습니다."
"증언? 그 남자는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요."
최준철이 나를 봤다.
"당신은 내 얼굴을 기억하는가? 당신이 나를 기억한다면, 당신이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경찰들이 그를 밖으로 끌어갔다. 그의 웃음은 계속 들렸다. 복도를 통해. 엘리베이터를 통해. 아래층으로.
이준영이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은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포겟의 모든 기록은 압수할 것입니다."
이준영이 말을 이었다.
"당신의 기억 데이터도 포함됩니다."
내가 그를 봤다.
"뭐라고요?"
"당신의 능력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이상, 모든 삭제된 기억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다릅니다."
이준영이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는 서류가 있었다.
"당신의 모든 기억을 법원에 제출할 것을 요청하는 영장입니다."
나는 서류를 받지 않았다.
"내 기억을 제출하라는 건가요?"
"당신이 지워온 모든 고객들의 기억이 당신의 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을 복구하면,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당신은 증인입니다."
이준영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동정으로 가득 찼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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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겟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다시 한 번 자문했다.
내가 정말로 박준호인가?
아니면 나도 최준철이 만든 또 다른 고객일까?
휴대폰이 울렸다. 박주현의 번호였다.
"삼촌? 내 기억이 돌아왔어."
주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근데 이상해. 그 장면에서 너를 봤는데..."
나는 숨을 멈췄다.
"뭘 봤어? 정확히."
"그 남자가 너한테 뭔가 주입하려고 했어. 주사기 같은 거. 삼촌, 너는 왜 거기 있었어?"
주현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의문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주현, 미안해. 나중에 얘기하자."
전화를 끊었다.
포겟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어두웠다. 아무도 켜놓지 않은 불이 있었다.
아니다. 누군가는 켜놨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불을 껐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의 범죄를 지워줬다면, 나는 공범이다.
내가 누군가의 죄책감을 지워줬다면, 나는 그 죄를 대신 짊어진 건가?
내가 자신의 기억을 지워줬다면, 나는 누구인가?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영 형사였다.
"박준호, 당신을 보호 증인으로 지정하겠습니다. 내일 법정에 출석해서 증언해주시기 바랍니다."
"법정에서 뭘 증언하라는 건가요?"
"진실입니다."
"진실이? 형사, 저는 진실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증언하세요."
통화가 끊겼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뭔가?
최준철이 범인이라는 것. 그가 다섯 명을 죽였다는 것. 그가 내 능력을 이용했다는 것.
하지만 증거는?
포겟의 고객 데이터는 법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이준영이 말했다. 최준철의 자백도 없다. 그는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도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결국 최준철은 풀려날 것이다.
아니, 이미 풀려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서버실로 다시 내려갔다. 경찰들이 모든 것을 압수했지만, 무언가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버실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이곳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벽에는 뭔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아냈다.
글씨였다.
"당신은 이미 나를 지웠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지웠다. 이제 우리는 같은 사람이다. -최준철"
나는 그 글씨를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박준호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정말로 이곳의 주인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지워온 모든 고객들이 정말로 다른 사람들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포겟으로 다시 올라왔다.
사무실의 벽에는 고객들의 기억 데이터가 여전히 보관되어 있었다. 경찰들이 압수하지 못한 것들. 혹은 압수하기로 결정하지 않은 것들.
나는 첫 번째 고객의 파일을 열었다.
유미라의 기억.
그 파일을 보는 순간, 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기억 속에는 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유미라가 아니었다.
나는... 관찰자였다.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누군가.
최준철처럼.
나는 손을 떨면서 다음 파일을 열었다.
정채은의 기억.
그 파일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얼어붙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정말로 이 살인을 했던 건가?
아니면 이건 최준철이 만든 또 다른 환각일까?
아니면 내가 본 것은 고객의 기억이 아니라, 고객의 눈으로 본 나의 기억일까?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 미표시.
나는 전화를 받았다.
"박준호?"
그 목소리는 최준철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이제 알았을 거예요. 당신의 고객들은 모두 당신의 분신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지워온 기억들은 모두 당신의 기억이었다는 것을."
"이건... 불가능해."
"불가능? 당신이 자신의 기억을 몇 번이나 지웠는데?"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은 자신이 포겟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포겟의 고객이었어요. 내가 만든 도구였어요."
"그럼... 당신은?"
"저는 관찰자예요. 처음부터. 당신이 자신의 기억을 지울 때마다, 저는 그걸 봤어요. 그리고 기록했어요."
통화가 끊겼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포겟의 벽에는 여전히 고객들의 기억 데이터가 보관되어 있었다.
유미라. 정채은. 강석민. 박주현.
그리고 나.
나도 고객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졌다.
내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 환각일까?
내일 법정에 서야 한다. 최준철을 고발하기 위해. 하지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내 증언? 내 기억?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것들.
나는 마지막 파일을 열었다.
박준호의 기억.
내 기억.
그 파일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3년 전, 나는 누군가를 죽였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포겟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준철은 그것을 봤다.
그리고 최준철은 나를 이용했다.
그리고 최준철은 다섯 명을 더 죽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웠다.
그리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내일 법정에서, 나는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내가 저지른 범죄를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최준철의 범죄만 증언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할 것인가?
나는 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사무실의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나는 내일을 기다렸다.
법정. 증언석. 진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진실은 없다는 것을.
있는 것은 오직 기억뿐이고,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웃었다.
최준철처럼.
진정성 없는 웃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