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가능한 선택, 공범자의 길
포겟의 지하 2층 사무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유독 길었다. 발걸음마다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혹은 내 눈이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준철은 이미 앉아 있었다. 내 의자에.
"돌아오셨네요."
그의 목소리는 상담실의 그것과 같았다. 차분하고, 이해심 깊고, 끝없이 위험했다. 화면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콧등, 광대뼈, 입 위쪽만. 나머지는 그림자에 잠긴 채였다.
"경찰이 당신을 풀어줬어."
나는 문을 닫지 않은 채 물었다. 도망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법적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당신이 지워준 기억들은 증거가 될 수 없고, 다른 증인들의 증언은 모두 기억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됐거든요."
그가 웃음을 흘렸다. 진심 어린 웃음이 아니라, 내 행동을 예측한 예술가의 그것이었다.
최준철이 천천히 일어섰다. 책상을 넘어 내게 한 발 다가섰다. 나는 한 발 물러섰다.
"당신이 뭘 하려고 왔는지 알아요. 신고하려고요. 경찰에 다시 가서 나를 지목하려고."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에 닿으려 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당신은 안 할 거예요."
최준철이 컴퓨터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 파일들이 떠올랐다. 내 기억 삭제 기록. 고객들의 데이터. 그 아래, 암호화된 코드들.
"왜냐하면..."
그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코드가 풀려나갔다. 내 개인 파일이 노출되었다. 아버지의 음성 기록. 어머니의 사진. 내가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그의 손에 있었다.
"당신이 법정에 서는 순간, 당신도 공범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발 더 물러섰다.
"당신의 능력이 합법이라는 걸 이용해서, 나는 당신을 고소하겠어요. 의뢰인의 기억을 조작한 혐의로. 그러면 당신의 신뢰도는 완전히 무너진다. 당신이 증언한 모든 기억은 조작된 것일 수 있다고 법정에서 주장할 거거든요."
입이 말라왔다.
"결과는 뻔하죠. 당신도 법정에 서고, 나도 법정에 선다. 하지만 증거는 둘 다 없다. 그러면 우리 둘 다 자유로워요. 다만 당신만 무너진다."
최준철이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동시에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나는 손을 들었다. 이 손이 지워온 것들. 5명의 고객. 수백 개의 기억. 그리고 내 자신.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거 알아요."
최준철의 목소리가 어둠에서 들렸다.
"당신의 능력을 한 번 더 쓰려고요. 마지막으로. 나를 지워버리려고."
나는 그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그의 목소리가 다른 곳에서 들렸다. 내 등 뒤. 그리고 또 다른 곳. 마치 여러 개의 목소리가 겹쳐 있는 것처럼.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이 지웠으니까요. 유미라의 트라우마, 정채은의 양심, 강석민의 죄책감, 박주현의 현실. 그리고..."
나는 불을 찾아 헤맸다. 손이 벽을 더듬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손가락이 벽에 걸렸다. 따뜻한 액체가 흐른다. 내 피인가.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3년 전, 당신이 지우려고 했던 그 기억도요."
내 호흡이 멈췄다. 가슴이 쥐어짜는 느낌. 뇌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 목구멍이 조여온다. 마치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타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무능함을. 그래서 당신은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무능함을 지우기 위해 타인의 기억을 지웠죠."
불이 켜졌다. 최준철이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보였다. 차분한 미소. 무한한 확신. 내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당신의 능력이 거의 소진됐어요. 한 두 번 더 쓸 수 있을까 말까. 그리고 당신이 그걸 나한테 쓴다면, 당신은 완전히 끝나는 거예요. 능력도, 포겟도, 당신 자신도."
최준철이 내 앞에 섰다. 내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차갑고 딱딱했다. 마치 기계의 그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내 맥박을 누른다. 내 심장의 박동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뛴다. 나는 그의 손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다.
"그리고 박주현이 기억을 되찾았어요. 경찰에 신고했을 겁니다. 당신을 목격자로."
나는 손목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팔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축 늘어져 있다.
최준철이 내 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이 기억 삭제 장비를 향했다. 그의 손이 내 손 위에 얹혀 있었다. 마치 내가 스스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내 손가락이 기계에 닿는 순간 전류 같은 감각이 흘렀다. 차갑고 예리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신경이 타는 듯한 고통. 마치 내 신경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피부가 얼어붙는다. 뼈까지 차가워진다.
"하지 마세요."
나는 중얼거렸다.
"이미 끝났어요."
최준철이 말했다. 또는 내 목소리였을 수도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신고해봐야 증거는 없고, 증거를 만들려고 해봐야 당신이 더 깊이 빠져들 뿐이고, 나를 지워버리려고 해봐야 당신이 먼저 무너진다. 완벽한 구조죠. 당신이 만든 구조가."
나는 손목을 빼냈다. 최준철이 놓아줬다. 마치 원래 그럴 계획이었던 것처럼. 내 손목에는 그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붉은 자국들이 내 피부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나는 사무실을 나갔다. 지하 2층의 복도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무릎이 떨렸다. 1층 상담소의 접수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항상 혼자였다.
밖으로 나왔을 때 강남역 주변은 저녁 시간대의 북적거림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누가 나를 보고 있진 않을까. 누가 이미 알고 있진 않을까. 내가 무엇인지.
강남역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내 뒤에서.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 나를 따라온 건 아닐까.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영 형사였다.
"박준호. 최준철이 풀려났다."
목이 말랐다.
"법적 증거가 없어. 지워진 기억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을 수 없고, 다른 고객들의 기억도 신뢰성 논쟁이 있어. 그리고..."
형사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당신의 능력이 합법이라는 게 문제야. 기억 삭제 치료는 현행법상 정신의학적 시술로 분류돼. 그래서 당신을 고소할 수도 없어. 대신 최준철이 당신을 고소할 거야. 비윤리적 치료로."
"그건..."
"당신이 법정에 서는 순간, 당신도 공범자가 되는 거야. 증거가 부족해서 경찰을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없고, 도움을 주려다 보면 당신 자신이 더 깊이 빠져든다. 완벽한 구조다."
"형사님..."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법이 날 막고 있어."
통화가 끝났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아니, 손이 아니라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신고할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공범자가 된다. 침묵할 것인가. 그렇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최준철의 손에 떨어진다. 능력을 써서 최준철을 지워버릴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무너진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생각했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지우려고 했다. "준호, 넌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것을 잘 써야 해." 그 목소리가 자꾸 들렸다. 그래서 지웠다. 능력을 썼다. 처음으로.
한 번의 시술로 나는 아버지와의 모든 음성 기억을 삭제했다. 그 대신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 일부가 흐릿해졌다. 어머니의 얼굴이 사진처럼 변했다. 색이 바래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타인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덮을 수 있다고. 마치 누군가를 도와주면 내가 저지른 것들이 정당화될 것처럼.
아버지는 나를 믿었다. 나는 그 믿음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최준철을 들여놨다. 내 무의식이 자신을 보호하도록 하는 명령들을 받아들였다. 신고하지 않도록. 저항하지 않도록. 계속 지우도록.
포겟을 만든 건 결국 그것이었다. 자기기만의 성채. 아버지의 신뢰를 배신한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만든 또 다른 거짓.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안녕하세요. 박준호님?"
여성의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흔들리는 톤.
"저... 포겟을 찾아서 전화를 드렸는데요."
"누구세요?"
"저는... 누군가를 밀어낸 것 같아요. 그 기억이 자꾸 떠나가지 않아요. 밤마다 악몽을 꾸고. 그래서... 지워달라고 온 거예요."
나는 휴대폰을 놨다. 그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스피커를 켜지 않았는데도 마치 내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나는 서서히 걸어갔다.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찾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찾고 있을 것 같았다.
강남역 지하로 내려갔다. 포겟이 있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하지만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갔다. 지상으로 나왔다.
한강공원 쪽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강의 야경이 내 얼굴에 비쳤다. 거울 같은 수면. 그 안에 내 얼굴이 흐릿했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 포겟의 고객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은 여전히 해킹 상태였다. 최준철이 남긴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버전의 나. 아버지의 신뢰를 배신하고,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고, 자신의 죄책감을 지워가며 살아가는 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박주현이었다.
"삼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제가... 기억이 돌아왔어요. 그 날 밤에 뭘 봤는지. 누굴 봤는지."
"주현아..."
"그건 삼촌이 아니었어요."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얼굴이 자꾸 흐릿해져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흐리게 만들어놓은 것처럼.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해요."
"뭐야?"
"그 사람이 자주 삼촌 가게에 왔다고 해요. 경찰 아저씨가 말씀해주셨거든요. 포겟에 자주 왔던 사람이 있냐고."
나는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사람이 뭐라고 말했어요? 그 사람이."
"삼촌... 그 사람이 제 기억을 일부러 지웠대요. 얼굴을 흐리게 만들어서. 그래서 제가 못 봤던 거래요."
나는 한강을 내려다봤다. 물 위의 불빛들이 흔들린다. 마치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주현아,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말한 건... '너는 이미 본 거야.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라고 했대요."
그 말이 내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최준철이 내게 한 말과 같은 말. 내가 고객들에게 반복해온 말.
통화가 끝났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차가워졌다. 밤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내 손만 유독 차가웠다. 죽은 손처럼.
포겟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겟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없애야 한다. 최준철의 파일을 삭제하고, 고객들의 기록을 지우고, 이 모든 증거를 없애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박주현의 신고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최준철의 손에 떨어진다.
신고할 것인가. 그러면 내가 공범자가 된다. 침묵할 것인가.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
나는 강남역으로 다시 내려갔다.
오후 11시 50분.
포겟은 이 시간대에는 문을 닫는다. 하지만 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 2층에 도착했을 때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가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켰다. 화면의 불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고객 데이터 파일을 열었다.
유미라. 2024년 8월 15일. 기억 삭제: 직장 상사의 성희롱 기억.
정채은. 2024년 9월 3일. 기억 삭제: 어린 시절 학대 기억.
강석민. 2024년 10월 22일. 기억 삭제: 과거의 실패 기억.
박주현. 2024년 11월 1일. 기억 삭제: 학교 왕따 기억.
그리고...
최준철. 2024년 11월 13일.
5명의 고객.
5개의 파일.
그런데 파일 크기가 이상했다. 유미라의 파일은 2.3GB. 정채은은 1.8GB. 강석민은 3.1GB. 박주현은 0.9GB. 하지만 최준철의 파일은 5.7GB였다.
나는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코드가 나타났다. 암호화된 코드. 그 사이로 보이는 것들.
"박준호, 신고하지 마."
아버지의 목소리. 내가 지웠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파일 속에 박혀 있었다.
"박준호, 저항하지 마."
어머니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최준철이 만든 합성 음성이었다.
"박준호, 계속 지워."
내 목소리도 있었다. 내가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 하지만 내 목소리로 만들어진 명령.
파일 안에는 영상도 있었다. 내가 각 고객의 기억을 지우는 장면들. 하지만 그 영상들은 조작되어 있었다. 내가 고객들을 협박하는 모습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내가 최준철의 지시를 받는 모습으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이해했다. 최준철은 내 기억들을 삭제하지 않았다. 그는 내 기억 속에 자신을 심었다. 내가 그를 보호하도록. 내가 그를 신고할 수 없도록. 내가 계속 고객들의 기억을 지우도록.
5.7GB의 파일. 그 안에는 내 무의식을 조종하는 모든 명령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컴퓨터를 껐다.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사무실을 나갔다. 지하 1층으로 올라갔다. 시술실. 기억 삭제 장비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장비의 전원을 하나씩 껐다. 화면들이 검게 물들었다.
마지막 장비 옆에 무언가가 있었다. 주사기.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최준철이 남긴 것이었다. 『최후의 기억 삭제액』. 내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약물.
나는 주사기를 집었다. 그리고 팔에 대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쓸 수 있다면. 한 번만 더 능력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최준철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텐데. 그의 5.7GB의 조작된 기억들을 모두 없애버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최준철이 맞았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썼다. 능력을 너무 많이 썼고, 내 자신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한 번 더 쓰면 나는 완전히 무너진다. 포겟도, 능력도, 나 자신도.
그리고 박주현이 신고했다. 경찰이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증거를 찾고 있을 것이다. 내가 최준철을 지워버린다면, 그건 증거 인멸이 된다. 나는 더 깊은 죄인이 된다.
신고할 것인가. 그러면 내가 공범자가 된다. 침묵할 것인가.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가 최준철의 손에 떨어진다. 능력을 써서 최준철을 지워버릴 것인가. 그러면 나는 완전히 무너진다.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끔찍하다. 모두 나를 파괴한다.
주사기를 내려놨다. 나는 포겟의 불을 껐다. 전체가 암흑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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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경찰청의 형사실. 이준영 형사의 책상 위에 새로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연쇄 실종 사건 추가 피해자 - 20대 여성 4명』
파일의 다음 장에는 포겟의 CCTV 영상 캡처본이 있었다. 박준호가 새로운 고객을 맞이하는 장면. 그 고객의 얼굴은 흐릿했다. 의도적으로 각도를 틀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겼다.
포겟의 지하 2층에 불이 켜져 있었다.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20대 후반의 여성이 들어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눈빛도 흔들리고 있었다.
"저... 누군가를 밀어낸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 기억이 자꾸 떠나가지 않아요. 밤마다 악몽을 꾸고. 그래서... 지워달라고 왔어요."
나는 상담 의자에 앉았다. 손에 힘이 없었다. 내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팔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 지우고 싶으신가요?"
내가 물었다. 수백 번을 반복한 그 질문.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내가 정말로 묻고 싶지 않다.
그 순간 최준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는 내 목소리였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구분할 수 없다.
『당신이 진짜 고민해야 할 건 제가 아니라 당신 자신입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질문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발. 지워주세요."
나는 기억 삭제 장비에 손을 올렸다. 이 기억이 정말 그녀의 기억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의 기억 속에 심어놓은 것인가? 나는 그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었고,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지울 것인가. 그 선택지 사이에서 나는 이미 결정했다. 결정한 게 아니라 조종당했다. 최준철의 5.7GB의 명령들에 의해.
나는 장비를 켰다.
암흑이 고객의 눈빛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기억을 지웠다.
CCTV는 계속 녹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최준철은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신고하지 않도록. 내가 계속 지우도록.
다음 고객의 예약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포겟은 결코 문을 닫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