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지하 2층 사무실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내 손가락이 마우스를 놨다 집었다를 반복했다. 컴퓨터 화면에는 포겟의 고객 데이터베이스가 떠 있었다. 유미라, 강석민, 정채은, 박주현. 네 명. 이준영이 말한 건 '다섯 번째'였다.

다섯 번째.

내가 빠뜨린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손을 비벼봤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밤 10시 46분. 형사가 떠난 지 정확히 17분 31초가 지났다. 박주현은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최준철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여기, 이 지하실에서 고객 리스트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의 스크롤을 내렸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1월까지. 정확히 34개월 동안 나는 87명의 고객을 상담했고, 그 중 42명에게 기억 삭제 시술을 수행했다. 87명. 42번의 뮤즈. 42번 내 기억 일부를 대가로 치렀다.

갑자기 숨이 짧아졌다.

고객 기록 탭을 클릭했다. 상담 기록, 예약 기록, 시술 기록. 모든 데이터가 정렬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약 기록 탭에서 뭔가 이상했다.

2024년 11월 13일. 오후 2시 30분. 상담 예약이 있었다. 근데 고객 정보 칸이 비어 있었다. 이름도 없고, 전화번호도 없고, 상담 주제도 없었다. 그냥 시간만 있었다.

내 눈이 가늘어졌다.

그 다음 줄을 봤다. 같은 날짜, 같은 시간. CCTV 기록을 확인하라는 메모가 있었다. 누가 남긴 메모였을까? 나였을까?

손가락이 떨렸다. 마우스를 움직여 CCTV 폴더를 열려 했다. 그 날짜의 영상을 재생하려 했다.

그런데.

2024년 11월 13일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날씨였는지. 누가 왔었는지. 그냥 하얀 공간이었다. 내 머리 속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내 기억에서 그날 하루를 통째로 빼내간 것처럼.

아니다. 내가 스스로 빼냈다.

깨달음이 왔을 때 손이 떨렸다. 내가 지워온 고객들의 기억을 삭제할 때마다, 내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는 것과 '직면한다'는 건 다른 거였다.

2024년 11월 13일. 그날 누가 포겟에 왔었는가.

내가 기억할 수 없었다.

모니터의 밝기가 눈을 자극했다. 내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창백했다. 얼굴뿐 아니라 눈도 흐릿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 내 모습에 물감을 풀어낸 것처럼.

"이게... 뭐지."

목소리가 이상했다. 낮고, 떨리고, 낯설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땠더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아니었다. 기억 자체가 투명해져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도 윤곽만 남아 있었다. 눈의 색깔? 코의 크기? 입가의 주름? 다 사라졌다. 그냥 사람의 형태만 남아 있었다. 마치 미술관의 백래시 초상화처럼.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이 뺨을 눌렀다. 차가운 피부. 떨리는 손가락.

내가 지워온 게 얼마나 많은가.

87명의 상담. 42명의 시술. 그리고 매번 내 기억의 일부가 벗겨져 나갔다. 마치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처럼. 한 겹, 한 겹.

컴퓨터 화면을 다시 봤다. 2024년 11월 13일. 그 예약 기록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CCTV를 확인해야 했다.

키보드에 날짜를 입력했다. 2024-11-13. 엔터.

영상이 로딩되고 있었다. 진행 바가 차오르고 있었다. 25%. 50%. 75%.

그 순간 불이 꺼졌다.

완벽한 어둠이 내려왔다. 지하 2층의 형광등이 일시에 꺼진 것 같았다. 나는 움직였다. 손을 앞으로 뻗었다. 책상을 짚었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이 밝아졌다. 손전등 모드로 전환했다. 빛이 지하실을 비추었다.

그리고 나는 봤다.

책상 위에 놓인 것. 낡은 서류함. 회색 플라스틱 서류함. 내가 이걸 본 적이 있나? 없다. 확실하다. 내 지하실에 이런 서류함은 없었다.

서류함에 가까워졌다.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서류함의 모서리를 터치했다.

차갑고, 습했다. 종이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의 그 특유한 냄새. 곰팡이와 시간이 섞인 냄새.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파일들이 가득 있었다. 노란 폴더들. 파일 탭에 손으로 쓴 글씨들. 날짜와 이름들.

2022년 4월 - 유미라 2023년 1월 - 강석민 2023년 6월 - 정채은 2024년 8월 - 박주현 2024년 11월 - ?

마지막 파일의 탭이 비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걸 만졌다. 종이가 거칠었다. 누군가 이걸 자주 만졌다는 뜻이었다.

파일을 열었다.

상담 기록지가 있었다. 손전등으로 비추었다.

이름: - 나이: - 상담 주제: - 시술 여부: -

모든 칸이 비어 있었다. 그런데 종이의 맨 아래에 한 줄의 메모가 있었다. 펜으로 급하게 쓴 글씨였다.

'최준철 - 관찰자'

손가락이 떨렸다. 종이를 떨어뜨렸다. 파일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파일들도 쏟아져 나왔다.

최준철.

그 이름을 내가 알고 있나?

내 몸이 반응했다. 팔의 털이 곤두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내가 이 이름을 전에 들었을 때의 공포가 근육에 박혀 있는 것처럼.

손전등의 빛이 흔들렸다.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최준철. 최준철. 최준철.

이름을 되풀이해봤지만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태도, 목소리도, 냄새도 없었다. 그냥 음절만 남아 있었다. 뇌에 박힌 세 글자의 음절. 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이름이 위험하다는 것을.

바닥에 흩어진 파일들을 다시 주웠다. 손가락이 종이에 묻었다. 먼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회색 가루. 파일들을 서류함에 집어넣고 다시 뚜껑을 덮었다.

휴대폰의 손전등을 다시 켜서 주변을 비췄다. 사무실 벽장 옆. 책상 밑. 선반 위. 낡은 서류함은 어디에나 있을 법했다. 하지만 이 서류함은 다른 물건들과 달랐다. 표면에 먼지가 덜 앉아 있었다. 누군가 자주 만지는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누가.

"이준영."

형사의 이름을 불렀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찾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았다. 전화를 걸어야 했다. 지금. 즉시. 하지만 내가 뭘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서류함이 있다? 이름이 없는 고객 기록이 있다? 최준철이라는 이름이 있다?

CCTV 영상이 로딩 중이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동시에. 마치 누군가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내가 뭔가 중요한 걸 찾으려던 바로 그 순간.

손전등으로 천장을 비췄다. 형광등이 멀쩡히 달려 있었다. 차단기를 확인해야 했다. 지하 1층에 있는 메인 차단기. 휴대폰을 들고 계단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만 믿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각 단계가 발 아래에서 삐걱거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매일 내려가고 올라오던 계단. 하지만 지금은 낯설었다.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게 낯설었다.

1층에 도착했다. 차단기 박스가 벽에 붙어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었다. 빨간 스위치가 OFF 위치에 있었다. 누군가 내렸다. 언제? 얼마 전?

스위치를 올렸다. 삐익 하는 소리. 형광등이 켜졌다. 지하 1층이 밝아졌다. 사무실 문. 상담실 문. 시술실 문. 모두 닫혀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이준영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박준호? 시간 봤어? 밤 10시 반이야."

목소리가 피곤했다. 하지만 깨어 있었다.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어요."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이 길었다.

"누가 내렸어?"

"모르겠어요. 내 기억이..."

내가 말을 멈췄다. 형사한테 뭘 말해야 할지 몰랐다. 능력 때문에 기억이 없어진다고? 그게 증거가 될까?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소리로 들릴까?

"박준호. 지금 너 혼자야?"

"네."

"지금 당장 포겟을 나가. 경찰서로 와."

"뭐가... 있는 거예요?"

"5분 전에 박주현이가 신고했어. 목격자 신고. 강남역 인근 건물 지하에서."

"박주현이?"

"응. 그 아이가 기억을 되찾은 거 같아."

형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본 사람이 너라고 했어."

세상이 기울었다. 바닥이 물렁거렸다. 한 발을 뒤로 물렀다. 벽에 등을 댔다.

"제가... 뭘 했다고?"

"살인 장면. 아니, 더 정확히는 살인 후에 누군가를 봤다고. 그리고 그 사람이 너라고."

"불가능해요. 저는..."

"박주현이는 당신의 고객이었어. 기억을 완벽하게 삭제한 고객. 그런데 왜 그 아이가 너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내가 입을 다물었다. 형사의 질문이 맞았다. 박주현의 기억을 지웠는데. 완전히. 그런데 그 아이가 날 봤다? 기억을 되찾았다?

"당신이 기억을 지운 방식이 뭐야, 박준호?"

"완벽한 삭제예요. 복구 불가능한."

"그럼 왜 그 아이가 너를 기억하고 있는 거야?"

형사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낮아졌다.

"혹시... 당신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기억만 남겨두고 다른 것들만 지운 건 아니야?"

"아니에요. 저는..."

내가 말을 멈췄다. 정말로 그렇게 했나? 박주현의 기억을 지울 때. 정말로 완벽하게 지웠나? 아니면 어딘가 의도적인 결함을 남겨두지 않았나?

기억이 없었다.

"박준호, 지금 당장..."

형사가 말하던 중 통화가 끊겼다. 신호 오류가 아니었다. 누군가 끊은 거였다. 신호 방해기를 사용했거나, 아니면 직접 전화선을 끊었거나.

나는 휴대폰을 내렸다. 손이 떨렸다.

포겟의 지하 2층으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서류함을 다시 봐야 했다. 최준철이라는 이름. 관찰자라는 메모.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계단을 내려갔다. 발이 계단에서 미끄러졌다.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차가운 철. 손가락이 철에 걸렸다.

지하 2층에 도착했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컴퓨터 모니터는 검은색이었다.

서류함을 다시 찾았다. 책상 옆 벽장 밑. 손을 뻗었다.

서류함이 없었다.

손이 공중을 헤매었다. 내가 방금 봤던 서류함. 낡은 회색 플라스틱 서류함. 사라졌다.

"뭐가... 이럴..."

주변을 다시 봤다. 책상 밑. 선반 뒤. 문 옆.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내가 봤던 게 뭐야. 환각? 아니면 누군가 와서 가져간 거?

그 순간이었다.

사무실 문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리려는 듯이.

나는 몸을 굳혔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흐릿했다.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처럼. 하지만 눈은 선명했다. 검은 눈. 나를 바라보는 눈.

"안녕, 박준호. 나를 기억하니?"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누구예요?"

"나는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야. 넌 나를 봤지만, 지웠어. 아니, 더 정확히는... 넌 나를 보지 못했어야 했는데 봤어."

남자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이제 넌 나를 기억해야 해. 왜냐하면 나는 이미 너의 모든 것을 안다. 너의 고객들. 너의 능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남자가 멈췄다.

"너 자신이 뭐인지도 말이야."

내가 뒤로 물렀다. 책상이 내 다리에 부딪혔다.

"박주현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

"안전한 곳. 그 아이는 벌써 새로운 기억을 얻고 있어. 진짜 기억을."

"당신이 뭘 했어요?"

남자가 웃었다. 웃음이 사무실에 울렸다.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웃는 것처럼.

"난 너를 거울처럼 사용했어. 너의 능력으로 증거를 지우게 했고, 너의 죄책감으로 침묵하게 했고, 너의 오만함으로 질문하지 않게 했어."

"당신이 모든 걸 계획했단 거예요?"

"모든 게 아니라 처음부터야. 3년 전부터.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남자가 다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제 책상 반대편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단계야. 넌 나를 기억해야 해. 왜냐하면..."

남자가 손을 들었다. 손에 뭔가 있었다. 주사기. 그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제 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거든."

나는 뒤로 물렀다. 사무실의 모서리까지. 벽이 내 등을 막았다.

"이건... 뭐예요?"

"넌 이미 알고 있어. 왜냐하면 이건 넌 만든 거니까."

남자가 주사기를 들어 올렸다. 형광등 빛이 액체에 반사됐다.

"최후의 기억 삭제액. 넌 이걸 만들었어. 뮤즈의 규칙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한 번 지워진 기억도 복구할 수 있게."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박주현이가 기억을 되찾은 이유. 최준철이 '관찰자'로 기록된 이유. 모든 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박주현이의 기억을 복구했어요?"

"응.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넌 살인 장면에 있었다고 증언할 거야. 완벽한 기억과 함께."

남자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이제 책상 위쪽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 이 액체를 맞으면 넌 완벽하게 사라져. 모든 기억이. 모든 흔적이. 그리고 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지."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왜냐하면 넌 봤거든. 3년 전에. 넌 봤어야 할 것을 봤어. 그리고 그걸 지웠어. 하지만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어. 그 틈새로 모든 게 시작됐어."

남자가 주사기의 바늘을 앞으로 향했다.

그 순간, 내 뒤의 벽에 뭔가 튀어나왔다. 손가락 크기의 작은 카메라. 그 카메라의 렌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게 녹화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아니면 모두에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이 공포를. 이 절망을. 마치 이미 한 번 겪었던 악몽처럼.

내가 이 순간을 이전에 경험한 적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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