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네 번째 고객, 강석민의 공모

포겟 사무실로 돌아온 지 정확히 22분 후, 박준호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파일 검색창에 'K.M'을 입력했을 때부터였다. 엔터를 눌렀고, 화면에 떠오른 것은 강석민의 기록이었다. 고객 등록일 4개월 전. 사유: '중요한 비즈니스 실패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 요청'. 준호는 당시 강석민의 말을 들었다.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모두 절실해 보였다.

화면을 스크롤하자 기억 데이터 파일이 나타났다. 준호는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픽셀이 로딩되고, 영상이 재구성되고—

그 장면이었다.

야밤의 골목. 비가 내리는 아스팔트. 흐릿한 인물의 뒷모습. 그리고 비명. 준호가 지난 사흘간 반복해서 본 그 장면이, 강석민의 기억 속에도 온전히 담겨 있었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놓았다 다시 잡았다를 반복했다. 화면이 흔들렸다. 준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호흡을 고르려 했지만 고르지 못했다.

강석민을 만나야 했다. 지금. 바로.

---

강남역 인근 카페. 준호가 도착했을 때 강석민은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앞에 손가락을 놓고 있는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너무 평온했다.

"오셨네요, 박 원장님."

강석민이 고개를 들었다. 준호는 그의 맞은편 의자를 밀어내며 앉았다. 말을 할 참이었지만, 강석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제 기억 데이터 때문에 오신 건가요? 데이터를 다시 확인해 보셨다는 걸 느껴요. 당신 눈빛이 바뀌었거든요."

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강석민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조롱인지, 연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

"당신이 지워준 그 기억," 준호가 말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알아차렸다. 강석민도 알아차린 듯했다. "당신은 그 기억을 직접 봤다고 했어요. 당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겪은 일이라고. 그런데... 그 기억 속의 장면이 정확히 일치해요. 내가 다른 고객들한테서 지워준 기억들과."

강석민이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준호를 바라봤다.

"맞습니다."

단 두 글자였다. 그 두 글자가 카페의 모든 소음을 먹어 치웠다.

"당신의 파트너가 그 장면을 봤다는 건가요?" 준호가 물었다. "그 야밤의 골목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걸?"

"그렇다기보다는," 강석민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제 파트너가 그 골목에 있었어요. 그리고 무언가를 했죠. 그걸 제게 이야기했고,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도 공모자가 될까봐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왔던 거고요."

준호의 손이 탁자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당신이... 당신이 제 기억을 지워달라고 한 건 그 파트너의 증언을 없애기 위한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강석민이 몸을 의자에 기대 펴며 준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그 일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제 뇌에 남은 모든 흔적을 지워달라고 했던 거예요. 신경 자극으로. 완벽하게. 그래서 나중에 누가 저한테 물어봐도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준호는 말을 하려 했지만, 강석민이 계속했다.

"당신 능력 정말 신기합니다." 강석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덕분에 완벽한 범죄가 가능해졌어요. 증인이 죽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냥 기억을 못 하는 거죠. 법적으로도 증거 불충분이에요. 기억이 없으면 증언할 수 없으니까. 당신 덕분에."

"당신이..." 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이 했던 거예요? 그 살인들?"

강석민이 고개를 기울였다.

"살인?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어요, 박 원장님. 저는 그냥 비즈니스를 했을 뿐이에요. 제 파트너가 한 일은 제 책임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제 제가 그 파트너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법적으로는 더더욱 제 책임이 아니죠."

준호는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을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뭘 신고하실 건데요?" 강석민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진심이었다. 완전히 진심이었다. "제가 제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청했다는 거? 그건 합법이에요. 심리 치료죠. 당신도 알잖아요. 현행법상 합법이라는 것. 그리고 제가 누군가의 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저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니까 증언할 수 없어요. 기억이 없는데 뭘 증언하겠어요?"

준호는 강석민을 바라봤다. 그 얼굴 속에서 자신의 형상을 봤다. 차분함. 확신. 자신이 옳다는 믿음. 그리고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 준호도 가지고 있던 그 능력.

강석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혹시 당신도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강석민의 눈이 자신을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미라. 정채은. 그리고 강석민 자신. 준호가 지워온 모든 기억 속의 그들.

준호는 카페를 나갔다. 밖의 공기가 찬바람이었다. 거리가 돌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영 형사였다.

"박준호. 중요한 CCTV 영상이 나왔어. 강남역 인근 편의점에서 5년 전 촬영된 영상인데, 연쇄 실종 사건의 모든 피해자들이 한 명의 남자와 함께 있는 게 보인다고. 그리고 그 남자가 누구인지 우린 알아."

"누구예요?" 준호가 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심리학자 최준철이야. 그런데 문제가 있어. 우리가 그를 체포하려고 할 때 당신의 포겟에 그가 고객으로 등록되어 있었단 말이야. 그가 당신한테 뭘 지워달라고 했는지 알아?"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포겟으로 돌아가야 했다. 박주현이 거기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최준철도.

---

포겟의 지하 2층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었을 때, 준호는 복도에 선 한 명의 남자를 봤다. 그 남자는 준호를 보자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최준철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준호가 본 적 없는 누군가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준호가 지워온 모든 기억 속에 있었다. 야밤의 골목에서. 비명 직전의 순간에. 그리고 박주현이 두려워하던 그 '누군가'였다.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준호. 나는 당신이 지워온 모든 기억의 중심에 있던 사람입니다."

---

# 기억을 파는 가게 6화

준호는 남자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했다. 얼굴이 아니라 분위기였다. 강석민의 냉소, 최준철의 차분함, 유미라의 불안감—그 모든 것이 이 남자 속에 섞여 있었다.

"당신이 누구예요?"

"이름은 상관없어요."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중요한 건 내가 뭘 했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뭘 지웠는가입니다."

준호가 뒤로 물러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건물은 이미 저의 통제 아래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보안 시스템도 전부요. 당신이 누르는 버튼은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박주현은?"

"안전해요. 지금은."

준호의 목이 졸렸다. "당신이 최준철이에요?"

"최준철은 제 도구일 뿐입니다."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니었다. 기계적이었다. "당신도 도구였어요. 아주 좋은 도구. 완벽한 도구."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지워온 기억들. 그 기억 속에서 나를 찾아보세요." 남자가 포겟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모니터들이 켜져 있었다. 준호가 3화에서 정렬한 다섯 고객의 기억 데이터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야밤의 골목. 비명. 차량. 그리고 그 모든 장면 속에 흐릿하게 남은 인물.

"저를 기억하세요?" 남자가 화면을 가리켰다. "당신이 지운 모든 기억 속에, 저는 그대로 있어요."

준호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흐릿한 인물의 윤곽이 자신 앞에 선 남자와 일치한다는 것을.

"당신이... 당신이 그 살인들을..."

"살인?" 남자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좀 더 길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걸 살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 거예요."

준호가 책상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 속의 데이터를 다시 봤다. 다섯 명의 고객. 다섯 개의 기억. 그리고 모든 기억의 중심에 이 남자.

"당신이 정채은을 조종했어요? 유미라를..."

"조종? 아니에요." 남자가 준호 곁에 섰다. "그들은 자발적이었어요. 혹은 그렇게 만들었어요."

"박주현을 돌려보내세요."

"당신의 조카는 이 건물의 다른 층에 있어요. 안전합니다. 그를 다치게 할 이유가 없거든요." 남자가 모니터 앞의 의자에 앉았다. 준호의 의자였다. "당신이 지워온 기억들을 보세요. 정말 자세히."

준호는 하나의 파일을 클릭했다. 유미라의 기억. 야밤의 골목. 그리고—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랐다. 흐릿함이 조금 더 걷혔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암호를 풀어놓은 것처럼.

영상 속에서 유미라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남자. 이 남자. 하지만 유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그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본다 해도 외면하는 것처럼.

"유미라는 당신을 봤어요?"

"봤어요."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왔어요. 그리고 당신은 아주 친절하게 그 기억을 지워줬죠."

"당신이 시켰어요. 유미라에게."

"아니에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유미라는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유미라는 제 파트너의 말을 들었어요. 강석민이요. 강석민이 유미라에게 말했어요. '저 남자를 봤다면 잊어야 한다'고. 그리고 유미라는 그 조언을 따랐어요. 당신에게 와서 기억을 지웠어요."

준호의 뇌가 회전하지 않았다. 정보가 너무 많았다.

"강석민이 당신과?"

"강석민은 제 비즈니스 파트너예요."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제가 한 일들을 눈감아주는 대신, 돈을 받아요. 그리고 제가 그의 기억을 지워줄 때, 당신도 함께 그것을 지워요. 완벽한 거래죠."

준호는 의자에 앉았다. 무릎이 약해졌다.

"정채은도?"

"정채은은 좀 달랐어요." 남자가 모니터를 다시 켰다. 정채은의 파일. "정채은은 제 파트너였어요. 그녀는 제가 한 일들을 봤어요. 그리고 저는 그녀의 기억을 조작했어요. 제 범죄를 그녀의 기억 속에 주입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죄책감을 느껴서 자살했어요. 당신이 지워줄 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당신이..."

"당신이 지워준 기억 속에 있는 그 자살은 제 작품이 아니에요."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그건 당신의 작품이에요."

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당신이 그 기억을 지웠을 때, 정채은의 죄책감도 함께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그녀의 유일한 생명줄도 끊어졌어요. 그게 뭐냐면, 속죄의 기회였어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벌받을 기회였어요. 당신이 그걸 빼앗았어요."

준호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정채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 위에 씌워진 죄책감. 그리고 자신이 지워버린 그것. 혹시 자신이 정말로 그 여자를 죽음으로 내몰은 건 아닐까.

"박주현이 어디 있어요!"

준호는 일어섰다.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는 한 발 물러섰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 그 아이요." 남자가 손을 들었다.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영상 통화였다. 박주현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지하 1층의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준호가 본 적 없는 공간이었다. 박주현의 팔에는 주사 자국이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 속에서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뭘 한 거예요!"

"진정제를 투여했어요. 안전한 용량이에요." 남자가 화면을 가리켰다. "그 아이는 당신을 기억하고 싶어 해요. 당신이 지워준 그 기억들을."

준호는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박주현의 눈이 천천히 떠지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건 묻는 눈이었다. 왜냐고.

"당신이 원하는 게 뭐예요?"

"당신의 능력이요." 남자가 말했다. "정확하게는, 당신의 협력이요. 아직도 지워야 할 기억들이 있거든요. 당신이 그걸 도와줄 거예요."

"협박이군요."

"협박? 아니에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현실이에요. 당신이 계속 도와주지 않으면, 그 아이의 기억을 조작할 거예요. 당신이 한 모든 일이 그 아이의 기억 속에 들어갈 거예요. 당신이 기억을 지웠다는 것도, 당신이 범죄자들을 보호했다는 것도, 모두요. 그리고 그 아이는 당신을 고발할 거예요. 완벽한 거래죠."

준호는 남자를 봤다. 이 남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형상을 다시 봤다. 차분함. 확신. 그리고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그냥 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진심처럼 들렸다.

"당신이 내 기억을 지워줄 때, 내 이름도 함께 지워질 거예요. 그래서 내 이름은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 하나 알려줄게 있어요." 남자가 포겟의 출입문으로 향했다. "당신의 조카 박주현이 당신을 따라다니던 그 '누군가'? 그건 나였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지워온 모든 고객들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당신의 능력이 나를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왜?"

"모르겠어요." 남자가 문을 열었다. "아마도 내가 당신과 비슷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타인을 조종하려는 욕망.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오만함. 당신과 나는 거울 같은 존재예요. 그래서 당신의 능력도 나에게는 완벽하지 않아요. 당신이 지운 기억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남아있어요."

남자가 나갔다. 포겟의 사무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모니터 앞에서. 자신이 지워온 모든 기억들 속에.

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박주현이 있었다. 진정제의 영향으로 몸이 무거워 보였다. 그 아이의 눈이 천천히 떠지고 있었다. 마치 준호를 바라보려는 것처럼.

"오빠... 날 잊지 말아 줄래?"

박주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준호는 손을 들었다. 신경이 따끔거렸다. 뇌의 깊숙한 곳에서 자극이 일렁였다.

그 순간, 준호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박주현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그 아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그렇게 되면 남자의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거짓이었다. 또 다른 죄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흐릿해졌다. 마치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준호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박주현을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가. 그 구분이 더 이상 명확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능력이 발동되기 직전, 준호는 자신의 선택을 느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것은 항복이었다.

신경 자극이 박주현의 뇌를 관통했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한 번은 신경 자극이 너무 강해서 화면이 흔들렸다. 한 번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자신의 기억도 함께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이미 공범자라는 것을. 지워가며, 조작하며, 영원히 그 공백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