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세 번째 고객, 정채은의 자백

정채은의 아파트 현관 앞에 섰을 때, 손가락이 떨렸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했다. 포겟의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정채은의 프로필—대학생, 여성, 20대 초반. 그녀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학대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 어둠 속의 손, 반복되는 비명. 준호는 그것을 지워주기로 했었다. 정채은이 눈물을 흘리며 "이 기억만 없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준호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구원이라고.

초인종을 눌렀다.

기다렸다. 30초. 1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준호는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그 순간 옆 집 문이 열렸다. 60대 여성이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정채은 씨 있나 해서요."

"저 아이? 요즘 거의 안 나와. 밤 중에만 나갔다가 들어와. 뭔가 좀 이상해."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상하다는 게?"

"그냥 뭔가 표정이 없어. 눈이 죽었다고 해야 하나. 예전엔 인사도 잘했는데."

기억을 지운 지 48시간. 기억 삭제의 신경 안정화 기간은 보통 72시간이었다. 그 안에 고객들은 일시적 불안정을 겪을 수 있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더 깊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받았다. 여성 이웃의 말—'눈이 죽었다'—그 표현이 자꾸 떠났다.

"혹시 방에 있나요?"

"아, 열쇠가 있나? 요즘 거의..."

준호는 포겟의 고객 계약서를 꺼냈다. 응급 상황 조항. 정신 건강상 위기 시 보호자 접촉 허가. 그리고 거기에는 정채은의 어머니 연락처가 있었다. 30분 뒤, 어머니가 열쇠를 들고 왔다.

아파트 안은 어둠 속에 있었다. 커튼이 모두 쳐져 있었다. 냉장고의 불빛만 켜져 있었고, 바닥에는 라면 용기와 편의점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채은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정채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초점 없는 눈. 준호가 봤던 그 표정이 맞았다. 마치 영혼이 몸을 떠난 것처럼.

"안녕하세요, 준호 형이에요."

정채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기억 삭제 후 신체 반응 둔화는 흔한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준호는 침대 옆에 앉았다. 어머니는 거실에 남겨두고.

"어제밤도 악몽 꿨어?"

"네. 근데 이상해요. 기억이 없는데 악몽을 꿔요.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그냥 감정만 남아있어. 공포감."

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건 기억 삭제의 정상적 부작용이었다. 뇌는 감정을 기억하는 부위와 인지를 기억하는 부위가 다르다. 기억은 지워졌어도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의 '자국'은 남을 수 있다. 준호는 고객들에게 이것을 설명했다. 대부분은 "그럼 괜찮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채은의 눈을 보니 그것이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다른 건 없어? 불안감? 죄책감?"

정채은이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양팔로 자신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형, 저... 제가 뭘 했는지는 모르는데."

준호의 호흡이 멎었다. "뭘 했다고?"

"기억이 없어서 몰라요. 근데 제 몸이 알아요. 뭔가를 밀어낸 것 같은 느낌, 누군가를 미는 힘이 남아있는 느낌. 손가락이 자꾸 아파요. 왜 손가락이 아플까요?"

준호는 정채은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 마디가 부어 있었다. 상처처럼 보였다. 마치 누군가를 밀어낸 것처럼.

"채은아, 너한테 진짜 중요한 거 하나만 물어볼 게. 정직하게 대답해줄래?"

정채은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공포와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날 밤에 너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어?"

"..."

침묵이 흘렀다. 정채은의 입술이 떨렸다.

"있었어?"

"몰라요.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난다고? 아니면 말하기 싫은 건데,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는 거야?"

정채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이 거짓의 신호였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수백 명의 고객을 만나면서 배운 것들 중 하나. 눈동자가 흔들린다. 목이 조금 굳어진다.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정채은은 이 모든 신호를 다 내보내고 있었다.

"너 지우기 전에 뭘 했는지 기억했잖아. 내가 물었어, 정말 지우고 싶은 거냐고. 그리고 넌 말했어. '네, 형. 제발 지워주세요. 이 기억만 없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준호는 정채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정채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이 깨지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제가 뭔가 했어요."

"뭐?"

"몰라요! 정말 몰라요!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에요. 기억을 지우기 전에 형이 저한테 '정말 지우고 싶은 거냐'고 물었고, 저는 대답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제가 뭘 말했는지 생각해보니까 이상해요. 제가 말한 말이 제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마치 누군가 제 입으로 말하게 한 것처럼."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건 기억 삭제의 부작용이 아니었다. 이건 기억 조작이었다.

정채은을 바라봤다. 그녀의 호흡이 얕아져 있었다. 피부색이 창백했다. 눈동자는 계속 흔들렸다. 공포에 잠긴 표정이었지만, 그 공포 아래에는 뭔가 더 있었다. 절망. 아니, 그 이상의 것.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

"너를 여기로 보낸 사람이 있어? 날 찾도록 한 사람?"

정채은이 고개를 저었다. 움직임이 느렸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모르겠어요. 진짜 몰라요."

준호는 정채은의 아파트를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휴대폰을 켰다. 형사 이준영의 번호를 눌렀다.

"정채은의 기억 데이터를 다시 한번 확인해줄 수 있어?"

"왜?"

"정채은의 기억이 조작된 것 같아. 제가 지우기 전에 그 기억이 이미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있는지."

통화는 30초가 지속되지 않았다. 이준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미 다 알아. 정채은의 기억 데이터를 분석해봤어."

"뭘 찾았어?"

"세 개의 레이어가 있었어."

준호는 계단에 멈췄다. 휴대폰을 귀에 더 가까이 당겼다.

"첫 번째 레이어는 원래 기억. 두 번째 레이어는 누군가가 심어준 기억. 세 번째 레이어는 넌 지운 기억이야. 즉, 정채은은 처음부터 거짓된 기억을 '진짜 기억'이라고 믿고 있었어. 그리고 넌 그 거짓된 기억을 지워줬어. 완벽한 증거 인멸이야."

준호의 다리가 흔들렸다. 계단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럼 정채은이 지워달라고 한 기억은?"

"누군가가 심어준 기억이야. 정채은은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는지도 몰랐어."

"누가 했어?"

"그걸 알 수 있다면..."

이준영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정채은의 기억을 조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준호, 한 가지 더 있어. 정채은이 너한테 기억을 지워달라고 했을 때, 넌 그 기억이 진짜 정채은의 기억인지 확인했어?"

준호의 입이 열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답은 알겠네. 안 했지. 넌 항상 그래. 고객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그게 문제야, 준호. 그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야."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밤이 되고 있었다. 강남의 거리는 밤이 되면 더 화려해진다. 불빛이 더 많아지고,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들이 다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으니 어둠이 펼쳐졌다.

어둠 속의 골목. 비명. 그리고 자신이 지워준 기억들이 섞여 나타났다. 유미라의 손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모습. 강석민이 골목 구석에서 웃고 있는 모습. 정채은의 손가락이 부어 있는 모습. 박주현이 "누군가를 봤어요"라고 말하는 모습. 그리고 모든 기억의 중심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얼굴이 흐릿한,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는 눈을 떴다. 계단 위에서. 밤 9시 40분.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었다. 포겟으로부터의 알림.

"[긴급] 박주현이 실종되었습니다. 지난 2시간 추적 불가 상태."

박주현. 그 아이가 뭔가를 봤다고 했다. 누군가를 봤다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 아이를 찾아왔다.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유미라, 강석민, 정채은, 그리고 박주현. 모두 같은 밤. 모두 같은 누군가.

손이 떨렸다. 준호는 택시를 탔다. 포겟으로 향했다. 강남대로의 야간 교통이 막혔다. 15분이 걸렸다. 지하 2층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박준호."

최준철이었다. 심리학자 최준철. 포겟의 마지막 고객. 준호의 데이터에는 그가 고객으로 등록되지 않았다. 아니, 등록되었다가 지워진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박주현이 있었다. 조카의 목이 묶여 있었다. 조카의 눈이 공포로 가득했다.

준호의 발이 움직이려 했지만 멈췄다. 최준철의 다른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준호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때 쓰는 약제와 같은 종류였다.

"이미 다 알아챘나요?"

"박주현을 놔."

준호의 목소리는 낮고 흔들렸다. 자신도 그것을 느꼈다. 공포가 아니었다. 더 깊은 무언가였다. 죄책감.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진실에 대한 거부감.

"모든 게 나의 계획이었어. 유미라, 강석민, 정채은. 그들의 기억을 조작했고, 넌 그 조작된 기억을 지워줬어. 완벽한 범죄의 도구가 되어줬어."

최준철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포겟의 형광등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명확해졌다. 30대 중반, 깔끔한 외모, 차분한 표정. 준호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비슷한 지성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눈에는 준호가 자신 안에서 느껴본 적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감각함.

"넌 이미 알고 있잖아. 넌 내가 원래 고객이었어. 내 기억을 지워달라고 했어. 살인 기억을."

준호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맞다. 최준철이 포겟을 찾아온 것은 3주 전이었다. 준호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기억이 흐릿했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그리고 넌 지워줬어.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건 그게 아니야."

최준철이 박주현의 목을 더 조였다. 조카가 숨이 찬 목소리로 신음했다. 준호의 주먹이 쥐어졌다.

"내가 원했던 건 완벽한 범죄야. 증거가 없는. 목격자가 없는. 내 기억도 없는. 그리고 넌, 넌 그걸 도와줬어. 무의식적으로."

포겟의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다섯 고객의 기억 데이터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의 중심에는—최준철이 있었다. 얼굴은 흐릿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블러를 풀고 있는 것처럼.

"박주현이를 봤지? 그 아이는 날 봤어. 그날 밤에. 그래서 기억을 조작했고, 넌 그 조작된 기억을 지워줬어. 완벽해."

준호는 모니터 화면을 봤다. 유미라의 기억 속 골목. 강석민이 웃고 있는 모습. 정채은의 손가락이 부어 있는 모습.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의 가장자리에—최준철이 있었다.

얼굴 없이. 그저 손, 옷, 그림자로만.

준호는 화면을 더 자세히 봤다. 포겟의 데이터베이스를 직접 열었다. 유미라의 기억 파일을 클릭했다. 화면에 다층 구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투명한 레이어들이 겹쳐 있었다. 첫 번째 레이어—원본 기억. 두 번째 레이어—누군가가 삽입한 기억. 세 번째 레이어—준호가 지운 기억.

그리고 그 모든 레이어의 가장자리에, 최준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손, 옷, 그림자. 그것들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블러 처리를 해제하고 있는 것처럼.

강석민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정채은의 기억도. 박주현의 기억도.

모두 같은 구조. 모두 같은 인물. 모두 같은 흔적.

"처음엔 모든 게 명확했어. 그 아이는 날 봤어. 그리고 난 그걸 알았어. 그래서 너한테 왔어. 기억 삭제를 원한다고. 내 기억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아이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어. 너를 통해서."

최준철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심리학자의 목소리. 환자를 설득하는 톤. 준호가 자신도 모르게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계획된 것 같았다. 최준철의 목소리, 최준철의 말투, 최준철의 모든 것이 준호를 조종하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뮤즈라고 불리는 넨 능력, 그건 완벽하지 않아. 기억을 지울 때 주변 기억도 함께 흔들어. 마치 파동처럼. 그래서 넌 내 기억뿐 아니라 그 아이의 기억도 함께 지웠어. 무의식적으로. 난 그걸 이용했어."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시선이 박주현을 향했다. 조카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도움을 청하는 눈이었다.

"기억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특히 어린이의 기억은. 넌 이미 알고 있어. 정채은이 악몽을 꿨다고 말했잖아. 지워진 기억의 감정이 남아있다고. 그리고 그 감정이 점점 선명해진다고."

최준철이 주사기를 들어 올렸다. 준호가 움직이려 했지만 최준철이 박주현의 목에 바늘 끝을 댔다. 조카의 몸이 경직되었다. 호흡이 더 얕아졌다.

"넌 나를 막을 수 없어. 법도 너를 막을 수 없어. 왜냐하면 기억은 증거가 아니니까. 지워진 기억은 더더욱 아니야. 그리고 이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그가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오직 계산만 있었다.

"넌 나를 지워줘야 해. 모든 기억을. 이 아이가 본 것까지. 그리고 너도 함께."

준호의 세상이 흔들렸다. 포겟의 사무실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워온 기억들 사이에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보호해온 것은 누군가의 피해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이제 사냥은 끝나갔다.

"정채은이 죽었어."

최준철의 말이 떨어졌다. 준호의 몸이 굳었다.

"기억을 지웠어도 감정이 남아있었어. 그 여자는 약했어. 죄책감이 많았어. 그래서 넌 내게 도움이 돼. 넌 그것도 모르고 날 도와줬어."

준호는 입을 열려 했다.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채은이 죽었다. 그 아이가. 자신이 구원하려고 했던 그 아이가.

"정채은의 유서에 뭐라고 썼는지 알아? '형이 날 구원해줬는데, 왜 자꾸 누군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돼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니야. 난 정말 그 여자를 봤거든. 계속. 그리고 그 여자가 나를 봤거든. 심리학자 선생님 말이 맞았어. 마음이 기억을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몸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최준철이 박주현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조카의 목이 더 조여졌다. 호흡음이 더 작아졌다.

"이제 선택해. 넌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어. 단 한 가지 방법으로. 날 지워주고, 이 아이의 기억도 지우고, 너 자신의 기억도 함께 지워. 그럼 모든 게 끝나. 깨끗해. 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고, 죄책감도 없어. 넌 이미 그렇게 해왔잖아."

준호의 손이 주먹이 됐다가 펴졌다. 펴졌다가 다시 주먹이 됐다. 그의 눈이 포겟의 모니터로 향했다. 화면에는 다섯 명의 고객 데이터가 있었다. 유미라, 강석민, 정채은, 박주현, 그리고—

최준철.

다섯 개의 기억. 모두 같은 밤. 모두 같은 골목. 모두 같은 비명. 그리고 모두 같은 인물이 중심에 있었다.

그 인물이 지금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리학자의 눈. 모든 약점을 파악한 눈. 준호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알고 있는 눈.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 못하는 순진함을 아는 눈.

"시간이 없어. 이 주사기 안에 든 약은 5분이면 이 아이를 죽일 거야. 넌 5분 안에 선택해야 해."

최준철이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 3분.

"5분."

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 손으로 몇 명의 기억을 지워왔는가. 몇 명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진실을 묻어왔는가.

자신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흐릿했다. 마치 물에 빠진 사진처럼. 자신이 몇 개의 기억을 지울 때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도 함께 사라져갔다.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손. 어머니의 목소리. 모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준호는 포겟의 기억 삭제 장치를 봤다. 그 기계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기계의 표면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버튼은 빨간색이었다. 누르면 모든 게 끝난다. 최준철의 기억도, 박주현의 기억도, 그리고 자신의 기억도.

하지만 그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준호는 느꼈다. 최준철이 자신이 버튼을 누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되길 원하고 있다는 것을.

"4분 30초."

최준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은 마치 신처럼 들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처럼. 모든 것을 계획한 신처럼.

준호의 손가락이 버튼에 닿았다. 아주 가까이. 누르기 직전.

그 순간, 포겟의 문이 열렸다.

형사 이준영이었다. 뒤에는 경찰관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도 흐릿했다. 마치 준호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는 것처럼.

"박준호. 손을 떼."

이준영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하지만 준호는 이미 손을 떼고 있었다.

아니, 손을 떼려고 하고 있었다.

최준철의 주사기가 내려와졌다. 손가락이 펴졌다. 박주현이 해방됐다. 조카가 경찰관들 쪽으로 뛰어갔다. 그 순간, 최준철의 얼굴이 변했다. 무감정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승리? 아니다.

해방.

마치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해 계획되었던 것처럼, 최준철은 경찰관들에게 양손을 들었다. 항복의 제스처였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봤다. 그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이 모든 것이 계획이었다는 것을.

경찰의 진입 타이밍. 최준철의 항복. 그리고 포겟의 모니터에 떠오르는 영상—경찰관들이 포겟으로 진입하는 장면. 그 영상이 너무나 명확했다. 마치 미리 설치된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준호는 포겟 내부를 둘러봤다. 벽의 모서리. 천장의 각도. 모두 이상했다. 마치 무대처럼. 마치 계획된 공간처럼.

그리고 최준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신의 이 순간도.

자신의 이 선택도.

그리고 자신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도.

모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포겟의 밤거리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 흐릿함 속에서,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비명.

누군가의 손.

누군가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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