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두 번째 고객, 유미라의 모순

유미라의 원룸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베이지색 커튼이 저녁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고, 형광등 하나만 켜져 있어서 방 구석구석이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마주했다. 어제는 포겟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의 유미라는 자신의 몸을 계속 안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모으고, 자신을 더 작게 만들려는 몸짓이 반복되고 있었다.

"요즘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예정된 추적이었다. 기억 삭제 후 72시간 경과 상태를 확인하는 건 포겟의 표준 프로토콜이다. 고객이 부작용을 겪는지, 일상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명명했을 때는.

유미라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몇 초가 지났다. 그녀의 눈이 나를 직접 보지 않고 내 옆 공간을 향해 있었다.

"악몽을 꿔요."

나는 펜을 들었다. 이건 정상 범위의 반응이었다. 기억 삭제 직후 일주일간은 대부분의 고객이 악몽을 보고한다. 뇌가 삭제된 신경 경로의 공백을 인식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학적으로는 '인지 부조화'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것을 '감정의 잔여'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 기억은 삭제되지만, 그 기억이 남긴 정서적 각인은 남는다는 뜻이었다.

"어떤 악몽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유미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깨어나면 기억이 안 나요. 근데 깨어났을 때 손가락 끝까지 식은 느낌만 남아 있어요. 마치... 누군가를 밀어낸 것처럼."

나는 펜을 멈췄다.

그 말은 기억 삭제의 범주를 벗어났다. 내가 지워준 것은 '직장 상사의 성희롱 장면'이었다. 회의실에서의 신체 접촉,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음성 메시지, 술자리에서의 손 위치—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기억에서 '누군가를 밀어낸다'는 감각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악몽은 그냥 심리적인 거예요. 뇌가 공백을 채우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죠." 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기계적으로 들리는지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형사님들이 자꾸 저한테 물어봐요."

유미라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내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뭘 물어봤나요?"

"그날 밤에 뭘 봤냐고요. 저를 왜 찾아가냐고." 그녀의 눈이 이제 나를 직접 마주쳤다. 그 눈 속에는 공포가 있었다. "근데 저는...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아무것도."

내 가슴이 철렁했다.

"연쇄 실종 사건 말이에요?" 내가 차분한 척 물었다.

"제가 그날 밤 강남역 근처에서 뭔가를 봤다고 해요. 목격자로 등록되어 있대요. 근데 저는 기억이 없어요. 그걸 지워달라고 하신 게... 혹시 그 기억이었던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내가 지워준 것은 정확히 3시간 분량의 기억이었다. 유미라가 "그날 밤 퇴근 후 모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고객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게 포겟의 원칙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원칙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당신이 정말 지우고 싶었던 게 뭐였어요?" 내가 물었다.

"직장 상사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그 날 밤에 술도 많이 마셨고..." 유미라가 또다시 몸을 웅크렸다. "기억이 흐릿해서 그냥 싹 지우고 싶었어요. 잊고 싶었어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유미라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진짜로 자신이 그날 밤에 뭘 봤는지 몰랐다. 지금 말이다.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워준 것은 무엇이었나.

"혹시 그 3시간 동안 뭔가 구체적인 게 있었나요? 차라든지, 사람이라든지..."

"차는... 검은색이었던 것 같은데." 유미라가 눈을 감았다. "번호판이 뭐였는지는 몰라요. 그냥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는 거지."

그렇게 흐릿한 기억만 남아 있다는 게 이상했다. 내가 삭제한 기억들은 보통 명확했다. 트라우마는 선명했으니까. 그런데 유미라의 3시간 분량은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어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전화가 울렸다.

이준영 형사였다. 나는 유미라 앞에서 받기가 조심스러워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욕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했다.

"박준호." 형사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유미라가 당신 고객 맞지?"

"네."

"그 여자가 5월 12일 밤 강남역 골목에서 뭔가를 봤어. 목격자 신고로 등록되어 있는데, 지금 와서 기억을 못 한대. 당신이 기억을 지워줬나?"

"당사자 프라이버시는..."

"당신 고객 중에 정채은이라는 여자 알지?" 형사가 끊었다. "어제 자살했어. 아파트 베란다에서. 당신이 지워준 기억이 그 여자를 죽인 거 아닐까?"

내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리고 또 하나." 형사가 계속했다. "당신이 지워준 고객들의 기억 데이터를 다시 분석했어. 모두 같은 밤, 같은 골목, 같은 인물을 담고 있었어. 그런데 그 인물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블러 처리되어 있었어. 자연적인 흐림이 아니라 의도적인 가림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고의로 증거를 인멸한 거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가 당신을 이용한 거거나."

형사가 끊었다.

나는 욕실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 얼굴은 죄인처럼 보였다.

거실로 돌아가니 유미라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짜 질문을 했다.

"혹시 당신이 본 사람의 얼굴이나 특징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있어요?"

유미라가 눈을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나는 그녀의 팔을 봤다. 팔뚝에 손가락 자국이 있었다. 파란색으로 변한 자국이. 누군가 세게 잡은 흔적이었다. 내 호흡이 얕아졌다. 손가락 자국. 그건 유미라가 말한 악몽 속 감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누군가를 밀어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밀려난 것. 팔을 잡혔던 기억. 그런데 그건 지워진 기억이어야 했다.

"그건... 언제 생겼어요?"

"모르겠어요. 깨어나보니 있었어요."

유미라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손이 떨렸다. 펜을 놨다. 이건 프로토콜 범위를 벗어났다. 이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집을 나갔다. 강남의 밤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네온사인들이 깜빡거렸고, 사람들이 걸어다녔고, 세상은 정상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내 안에는 뭔가가 깨지고 있었다.

포겟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지워준 게 트라우마가 아니라 증거였던 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보호한 건 아닐까.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모니터를 켰다. 유미라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데이터 속 그 3시간을 다시 재생했다. 영상이 아닌 기억의 재구성본이었다. 뇌파를 변환한 것이다. 화면에 떠오르는 건 강남역 골목의 밤이었다. 차 한 대. 검은색.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화면을 껐다.

"들어오세요."

박주현이 들어왔다. 조카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말없이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봤어요."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밤에. 그 사람을."

"누가?"

"모르겠어요. 근데..."

박주현이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공포와 확신이 뒤섞여 있었다.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뭘 계속 보고 있다는 거야?"

"저를. 지금도."

박주현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봤다. 그 눈 속에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뭔가를 직시하고 있는 듯한 절박함이 있었다.

그 순간, 내 전화가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나는 박주현에게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받았다.

"박준호 선생님." 차분한 남자 목소리였다. "당신이 지워준 것들이 정말 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만 감춰진 걸까요?"

나는 누군지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끊겼다.

화면 속 검은색 차는 여전히 골목 어딘가에 정차해 있었다. 내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떨렸다. 재생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멈출 것인가. 그 선택 자체가 끔찍했다.

박주현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저씨, 저 봤어요."

내가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이 검어졌다. 데이터 폴더가 닫혔다. 너무 늦었다. 이미 본 것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지워준 기억들처럼.

"뭘 봤어?"

박주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열다섯 살 아이가 이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공포와 의심이 섞인, 어른스러운 표정이었다.

"모르겠어요. 근데 그 사람이..."

그가 말을 멈추고 내 뒤를 봤다. 내가 돌아봤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 문은 닫혀 있었고, 외부 소음은 차단되어 있었다. 포겟의 지하 2층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공기가 달라졌다.

"주현아, 너한테 기억을 지워줬을 때 정말 그게 다였어? 혹시 다른 것도 함께..."

"아저씨가 지워줬어요."

박주현의 목소리가 끊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여기. 정확히 여기. 근데 지워진 것 같긴 한데... 남은 게 있어요."

"뭐가?"

"감정만."

내 얼굴이 굳었다. 이것은 예상 범위를 벗어났다. 내 능력은 기억을 완벽하게 삭제했다. 대가로 내 기억이 흐릿해지고, 악몽이 생기는 것뿐이었다. 감정 잔여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아니, 이제 생각해보니 유미라도 같은 말을 했었다.

'기억이 없는데도 자꾸 그 장면이 떠나가지 않아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박주현을 바라봤다. 그 아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이 파랬다. 공포가 신체에 물리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너 정말로 그 사람을 봤어? 얼굴을?"

박주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근데... 제가 본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저를 봤어요. 분명히."

나는 모니터를 켰다. 유미라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박주현이 화면을 봤다.

"아저씨, 뭘 보고 있어요?"

"너 봤던 그 장면이 여기 있어."

"아니에요. 저 본 건 이거 아니에요."

박주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화면에 집중했다. 데이터 재구성본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강남역 골목. 밤 11시 47분. 차 한 대가 정차해 있다. 검은색 제네시스. 창문이 살짝 열려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차 밖으로 나온다.

영상이 흔들린다. 유미라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포 때문에.

"아저씨, 멈춰요."

박주현이 내 팔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팔뚝에 깊게 파고들었다.

"뭐가?"

"저 영상. 계속 봐도 안 돼요. 뭔가... 이상해요."

나는 박주현을 쳐다봤다. 그 아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이 파랬다. 공포가 신체에 물리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내가 지워준 기억의 감정 잔여가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내가 영상을 멈췄다.

화면 속 프레임은 차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을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역광 때문이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처리된 것일 수도 있다.

"저게 누구야?"

박주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내 전화가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나는 받았다.

"박준호 선생님. 최준철입니다."

차분한 남자 목소리.

"당신이 지워준 것들이 정말 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만 감춰진 걸까요?"

"누구세요?"

"당신이 찾던 사람이에요. 세 번째 고객."

"최준철?"

"정확해요. 그런데 저는 고객이 아니에요."

내 심장이 내려앉았다.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보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세요?"

"뭘 말하는 거야?"

"내일 오후 3시, 포겟에서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화면을 봤다. 일시 정지된 영상. 차 창문 너머의 실루엣.

박주현이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아저씨, 제발."

내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영상을 다시 플레이했다. 박주현의 손이 내 팔에서 떨어졌다. 그가 눈을 돌렸다.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우리 둘 다 이미 본 것들을 되돌릴 수 없었다.

영상이 계속 진행된다.

차 문이 열린다. 누군가가 차에서 내린다. 검은색 코트. 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유미라가 비명을 지른다. 영상이 더 심하게 흔들린다. 도망치려고 한다. 발걸음 소리. 숨소리. 공포의 울음.

그리고 누군가가 유미라를 잡는다. 팔뚝을 세게 누른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든다. 유미라가 저항한다. 그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영상이 끝난다. 검은 화면.

나는 마우스를 놓았다. 손이 떨렸다.

"뭘 봤어?"

박주현이 물었다. 아니, 박주현이 아니었다. 내 목소리였다. 내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사무실이 조용했다. 지하 2층의 방음 처리된 벽들이 모든 소음을 삼켜버렸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공간. 기억을 사고파는 가게. 내 직업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껴졌다.

나는 파일을 닫았다.

"아저씨."

박주현이 말했다.

"저 사람... 저한테도 왔어요. 학교에서. 지워진 기억 속에서."

"뭐?"

"계속 보고 있다고 했어요. 날 보고 있다고."

내가 박주현을 봤다. 그 아이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지워주려고 했던 고통이 아니라, 더 깊은 공포. 내가 지워주지 못한 것들이 남긴 자국.

내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이준영 형사였다.

"박준호, 지금 어디야?"

"포겟에."

"혼자야?"

"아니. 조카가..."

"지금 나갈 준비 해. 유미라라는 고객 있지? 그 여자가 자살을 시도했어. 지금 응급실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형사가 계속했다. "유미라의 집에서 발견된 노트북에 너한테 받은 시술 기록들이 저장되어 있었어. 그런데 거기 뭔가 이상한 게 있어. 당신이 지워준 기억 외에 다른 것도 저장되어 있었어."

"뭐?"

"비디오. 12일 밤 강남역 골목에서 촬영한 비디오. 그리고 그 영상에는... 사람이 찍혀 있었어. 얼굴이 명확하게."

내 숨이 멎었다.

"그 얼굴이 당신이 알 만한 사람이야. 포겟의 고객 중 한 명이거든."

나는 화면을 다시 켰다. 유미라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숨겨진 폴더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지 않은 폴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증거.

박주현이 화면을 봤다.

"아저씨, 저 폴더..."

"뭐?"

"제가 만들었어요."

내가 박주현을 봤다.

"저... 그 날 밤에 뭔가를 봤어요. 정말로. 그래서 아저씨한테 말했는데, 아저씨가 기억을 지워주셨어요. 하지만 지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남은 걸 여기 숨겨뒀어요."

박주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 아저씨가 필요하면."

내가 폴더를 열었다. 비디오 파일이 있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강남역 골목의 밤이었다. 하지만 이건 유미라의 기억이 아니었다. 각도가 달랐다. 높이가 달랐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촬영된 영상이었다.

차 앞에 사람이 선다. 검은색 코트. 얼굴이 명확하게 보인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정채은이었다.

그 여자는 유미라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끌어당기는 동작. 유미라가 저항한다. 손가락이 팔뚝에 깊게 패인다. 그리고—

영상 배경에 또 다른 인물이 보인다. 흐릿하게. 마치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내 폰이 울렸다. 이준영 형사였다.

"너 확인했지? 그 얼굴?"

"네."

"그게 정채은이야. 너한테 기억 삭제 요청했던 그 여자. 그런데 어제 자살했어. 그리고 유미라는 지금 응급실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어. 의사들은 약물 과다복용이라고 하는데..."

형사가 말을 멈췄다.

"박준호, 혹시 네가 이 모든 걸 알고 있던 건 아닐까?"

내가 화면을 봤다. 정채은의 얼굴. 그 얼굴이 유미라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비명. 투쟁.

"형사님."

내가 말했다.

"이 영상에 또 다른 사람이 있어요."

"뭐?"

"배경에.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나는 영상을 멈추고 그 인물을 확대했다. 얼굴이 흐릿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흐려진 것처럼. 아니, 이미 내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기억을 지울 때. 무의식적으로.

"박준호, 답해. 넌 누굴 보호하고 있어?"

형사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보호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 사람이 범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피해자인지. 정채은이 유미라를 끌어당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박주현이 말했다.

"아저씨, 그 사람... 학교에도 왔어요."

내가 박주현을 봤다.

"뭐?"

"따라다녀요. 제가 여기 와서 아저씨 만날 때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 등이 식었다.

"주현아, 너 그 사람의 얼굴을 봤어?"

박주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계속 피해요. 저를 피하는 것처럼."

나는 창밖을 봤다. 포겟의 지하 2층.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 강남의 밤거리뿐이었다. 네온사인, 사람들, 일상. 그리고 그 어딘가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나뿐 아니라 모든 고객을 보고 있었다.

내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낯선 번호였다. 나는 받았다.

"박준호 선생님. 최준철입니다."

차분한 남자 목소리.

"당신이 지워준 것들이 정말 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만 감춰진 걸까요? 내일 오후 3시, 포겟에서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박주현을 봤다. 그 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저씨... 우리 나가요."

하지만 우리는 나갈 수 없었다. 포겟의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밖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움직임. 신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명백한 확인. 나는 손을 멈췄다. 손잡이에 닿은 손가락이 떨렸다.

창밖으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포겟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모든 게 시작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놨다. 박주현을 봤다. 그 아이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더 이상 나갈 수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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