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고객, 박주현의 진술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조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 옆에 있던 그림자만 보였다.
박주현은 아메리카노 잔을 양손으로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나는 대면에 앉으면서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지난 밤, 포겟의 모니터를 통해 본 그 영상은 이제 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경찰이 제시한 다섯 명의 실종자 사진. 그리고 박주현의 기억 속에 있던 그 골목. 같은 장면이었다.
"주현아."
"네, 형."
목소리가 작았다. 나는 그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한 달 전에도 이 손은 떨렸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때 너무 빨리 움직였다. 그의 기억을 지워줬다. 그 기억 속에 담긴 모든 것을—왕따, 폭력, 수치심.
"기억 지우고 나서 어때? 잘 지내니?"
주현이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가 식어있는 것 같았다.
"형, 뭔가... 이상해요."
"이상해? 무슨 이상함이?"
"그게... 설명이 잘 안 돼요. 기억은 없는데, 뭔가 빠진 거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 자꾸 들어요."
나는 그의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있었다. 지워진 기억의 '감정 잔여'일 수도 있었다. 혹은 정말 뭔가 빠진 것일 수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빠진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근데 학교에서 누군가를 봤잖아요. 그 사람 기억."
내 손이 멈췄다.
"누군가?"
"네. 형이 지워줬던 기억 속에 있던 사람. 왕따 맞는데, 거기 누군가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뭔가 계속 나를 봐서 무서웠던 거 같은데."
주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 사람이 누구였지? 기억나?"
"아니요. 기억이 안 나요. 근데 형, 그 사람 얼굴이... 자꾸 떠오르려고 하는데 떠오르지 않아요. 마치 누가 지웠다가 다시 그려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내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주현이의 손이 아니라 내 손이 떨렸다.
"그 누군가가... 지금도 학교에 있어?"
"모르겠어요. 요즘 학교 안 가고 있거든요."
"학교를 안 간다고?"
주현이는 아메리카노를 다시 집었다. 이번에는 한 손으로. 손이 더 떨렸다.
"형이 기억을 지워줬는데도 학교가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지는 모르는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경찰이 말했던 피해자들의 패턴이 떠올랐다. 모두 20대 여성. 모두 강남 지역. 모두 밤거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박주현은 고등학생이었다. 남자였다. 그렇다면 왜 그의 기억에 실종 사건의 현장이 있었을까.
"주현아, 정직하게 대답해줄래? 그날 밤 너는 뭘 했어?"
주현이의 눈이 커졌다.
"그날 밤?"
"그 누군가를 봤던 그날 밤."
"형... 기억이 없어요. 지워줬잖아요."
"지워진 기억 너머에 뭔가 있지 않아? 느낌으로라도."
주현이는 침을 삼켰다. 그의 목이 움직였다.
"누군가... 날 불렀어요. 골목에서."
골목. 다시 그 단어가 나왔다.
"누가? 누가 너를 불렀어?"
"모르겠어요, 형. 진짜 모르겠어요. 근데 그 사람 목소리는 기억나. 자꾸만 떠올라. 밤에 꿈에서도 들려. 그 목소리가... 자꾸 날 찾아."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손가락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내가 뭘 한 거지? 주현이의 기억을 지울 때, 나는 그저 그의 말을 믿었다. 학교에서의 따돌림. 폭력. 트라우마. 그걸 지워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억 속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누군가를 봤다는 기억. 그 누군가의 얼굴. 그 누군가의 목소리.
내가 삭제한 건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 나 진짜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지도 몰라. 근데 자꾸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주현이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해요, 형?"
"포겟으로 가자. 너의 기억을 다시 확인해보자."
"기억을 또 지워줄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내 손가락이 떨렸다. 내 호흡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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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겟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 50분이었다.
약속 시간 10분 전. 나는 지하 2층 문을 열었다. 보안 카드로 입장했다. 실내 조명이 켜졌다. 모니터들이 깨어났다. 데이터 서버들이 윙윙거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검은 옷. 얇은 얼굴. 안경. 최준철이었다. 그의 옆에는 강석민이 서 있었다. 그 너머에는 정채은의 시신이 있었다. 아니다. 정채은은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저건 뭐지? 저게 정채은일 리가 없는데.
"박준호, 늦지 않으셨네요."
최준철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뮤즈라는 능력이 있으시지요?"
"너 누구야? 고객이 아니잖아."
"고객이 아니었죠. 하지만 당신의 고객들을 보낸 사람입니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문 쪽으로. 하지만 문은 이미 잠겨있었다. 강석민이 벽에 기대고 있었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사실 기억을 변형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뭔 소리야?"
"당신이 지운 기억들. 그것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객들은 자신이 봤다고 생각한 것들을 당신에게 말했고, 당신은 그것을 지웠어요. 하지만 그것들이 정말 일어난 일인지, 고객들의 환상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심어진 거짓 기억인지—당신은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뭘 한 거야?"
"완벽한 범죄의 공범입니다."
내 손이 떨렸다. 주현이의 손처럼. 더 심하게.
"박주현의 기억을 보셨나요? 그 기억에는 정말로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는 밤의 골목에서 다섯 명의 여성을 봤어요. 그리고 그들을 본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라지는 과정도 봤습니다. 박주현은 우연히 그 장면에 있었던 것이죠."
"박주현이... 목격자라는 거야?"
"목격자도, 피해자도 아닙니다. 다만 본 것이 있는 사람이죠. 그리고 당신은 그 기억을 지웠어요."
나는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그럼 정채은은?"
"정채은은 실제로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학대. 그것도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그 기억 속에 묻혀 있는 또 다른 것—어른이 되어 저지른 행동—그것도 기억의 일부였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지워줌으로써, 정채은은 자신이 무죄라고 느끼게 되었어요."
나는 의자에 쓰러졌다.
"그 누군가는... 누구야?"
최준철이 일어섰다. 그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입니다."
내 눈이 흔들렸다.
"나는 심리학자예요. 당신의 능력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능력을 이용하면, 완벽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기억을 조작하고, 당신에게 지우게 하고, 증거를 없애버린다. 경찰은 무엇을 조사할 수 있겠어요?"
"박주현을 풀어줘."
"박주현은 이미 자유입니다. 다만 그의 기억이 조각났을 뿐이죠."
내 손이 테이블을 놓쳤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다리도. 내 목도. 모두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경직되었다.
"뮤즈라는 능력 말이에요. 기억을 지우는 대가가 있잖아요?"
최준철이 내 귀에 가까이 왔다.
"당신의 소중한 기억이 흐릿해진다고요. 어머니의 목소리. 첫사랑의 얼굴. 성공의 순간들. 그것들이 물빠진 사진처럼 변한다고."
그가 내 머리를 만졌다. 손가락이 내 관자놀이에 닿았다.
"그런데 그것만이 대가가 아닙니다."
내 시야가 검어지기 시작했다.
"지워진 기억의 감정 잔여. 그것이 당신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요. 점진적으로. 천천히. 당신은 이미 여섯 번을 사용했습니다. 유미라. 정채은. 강석민. 박주현. 그리고 또 다른 두 명. 그들의 기억 속 감정들이 모두 당신의 신경에 쌓여있어요."
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의 손가락이 떨렸다가, 이제 굳기 시작할 거예요. 얼마 후엔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발도. 당신의 목도. 모두가 천천히 마비될 겁니다."
"이건... 뮤즈의 대가가 아니야."
"맞습니다.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선택의 대가예요. 당신은 고객의 말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기억을 한 번도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타인을 구한다고. 그 오만함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박주현은?"
"박주현은 학교에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계속 기억할 거예요. 누군가가 자신을 본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 기억을 지웠으니까요."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내 눈이 감겨왔다. 내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공범입니다, 박준호. 그리고 당신의 고객들은, 각자의 이유로, 모두 내 공범이 되었어요."
최준철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경찰이 당신을 찾을 거예요. 박주현의 기억이 조각났고, 정채은이 죽었으니까요. 그들은 당신을 의심할 거고, 당신의 능력을 추적할 거고,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내 눈이 완전히 감겼다.
"...당신은 이미 다른 세상에 있을 거예요."
암흑이 내려왔다.
그 속에서 내가 들은 것은 박주현의 목소리였다.
"형, 내 기억이 지워진 게 맞아요? 왜 자꾸 누군가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요?"
그 목소리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악몽이 아니라 현실인 것처럼. 현실이 악몽이 되는 순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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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을 다시 만난 것은 그 다음날 오후였다.
포겟의 대기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회색 벽, 낮은 조명,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심리상담소의 모습. 박주현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어제보다 더 작아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 치고는 작은 체격. 어깨가 구부정했고, 손톱이 벗겨져 있었다. 학교에서 맞아본 기억이 있는 것처럼.
"주현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형... 왜 또 날 부르셨어?"
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그 앞에 앉았다. 거리는 1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가 불편해 보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수 없었다. 내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준철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비. 신경계의 붕괴. 그리고 그것이 모두 내 선택의 결과라는 것.
"기억 삭제 이후에 어떤 기분이야?"
박주현이 손가락을 비틀었다. 그의 습관이었다. 긴장할 때마다 손가락을 비트는 습관.
"... 괜찮아요."
"정말?"
"네."
거짓이었다. 얼굴에 다 나와 있었다. 눈 주위의 피부가 움직였다. 눈썹이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나는 심리상담사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3년간 포겟을 운영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거짓말을 구분하는 능력이었다. 물론 그것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지만.
"학교는 어때?"
"... 평소랑 같아요."
"따돌림은?"
박주현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더 빠르게.
"그게... 잘 기억이 안 나요."
내 눈이 고개를 들었다.
"뭐?"
"학교에서 뭐가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형이 지워주셨잖아요. 그런데..."
그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뭔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아요. 기억이 깔끔하게 지워진 게 아니라 구멍이 난 것처럼. 퍼즐에 한 조각이 없는 것처럼."
내가 숨을 마셨다. 길게. 천천히.
박주현을 다시 만나기 전에 나는 그의 데이터를 다시 확인했다. 악몽 속에서 최준철이 내 기억을 건드렸을 때, 무언가 사라졌다. 박주현의 데이터도 마찬가지였다. 파일이 손상된 것처럼 보였다. 동영상 같은 것이 중간중간 끊겨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처럼. 아니, 누군가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었다. 내 손으로. 내 능력으로. 하지만 내 의도 없이.
"주현아, 다시 한 번 생각해봐. 학교에서 뭐가 있었어? 왕따... 그것만 있었어?"
박주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짜로 무언가를 꺼내려고 애쓰는 표정. 마치 수심 깊은 곳에서 뭔가를 건져올리려고 하는 사람처럼.
"있었어요."
"뭔데?"
"... 누군가를 봤어요."
내 손이 떨렸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누구를?"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얼굴도 안 떠올라고, 목소리도 안 들려고... 근데 분명히 봤어요. 그 사람이... 날 보고 있었어. 계속 날 보고 있었어."
나는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박주현이 깜짝 놀라 내 얼굴을 봤다. 그의 눈에서 불안이 공포로 변했다.
"형?"
나는 포겟의 뒤편, 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를 걸었다. 컴퓨터를 켰다.
박주현의 원본 데이터를 불러왔다. 악몽 시퀀스에서 내가 확인했던 파일. 그때는 뭔가 이상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최준철의 협박과 위협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파일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타임라인이 이상했다. 00:00부터 05:47까지는 정상이었다. 학교 복도, 교실, 화장실. 박주현이 맞는 장면들. 얼굴이 흐릿하고, 소리가 왜곡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기억이 불완전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기억은 원래 그런 것이다. 완벽하지 않다. 특히 트라우마 기억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05:47 이후가 문제였다.
갑자기 화면이 검어졌다. 5초간.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장면. 야밤의 골목.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골목.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실루엣만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박주현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박주현의 눈을 통해서.
그런데 그 얼굴이 없었다.
완전히 블러 처리가 되어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지운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지워진 것이었다. 내가 지웠다. 박주현의 기억을 삭제할 때, 나는 "학교에서의 왕따 기억"만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내 능력이 그것보다 더 깊이 들어갔다.
기억의 가장자리를 침범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내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화면의 그 블러 처리된 얼굴. 그것을 복구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불가능했다. 한 번 지워진 기억은 복구 불가능하다. 그것이 뮤즈의 규칙이었다. 내가 세운 규칙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진 규칙.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는 데이터를 다시 돌려봤다. 05:47의 검은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음성 파일도 있을까? 클릭했다. 소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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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어."
"누가?"
"...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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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의 음성. 그것뿐이었다. 목소리는 박주현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음성 파일의 끝 부분에 뭔가 있었다. 매우 미약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나는 음량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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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야. 누군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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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소리는 박주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았고, 더 차가웠다. 그리고 매우 익숙했다.
내 등 뒤로 차가운 것이 흘렀다. 땀이었다.
나는 최근의 고객 데이터를 모두 불러왔다. 유미라, 정채은, 강석민. 그리고 최준철이 언급했던 "또 다른 두 명".
유미라의 데이터를 열었다.
타임라인 07:32부터 07:58까지의 기억. 직장 상사의 성희롱. 그것이 내가 지웠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뭔가 있었다. 07:59부터. 검은 화면 3초. 그리고 야밤의 골목. 같은 가로등. 같은 골목.
그리고 같은 실루엣.
하지만 이번엔 얼굴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 블러 처리되어 있었다. 손. 그의 손에 들려있던 뭔가.
강석민의 데이터. 08:14부터. 사업 실패의 기억. 그것을 지웠다. 하지만 그 뒤에도.
같은 골목. 같은 실루엣. 이번엔 옷이 블러 처리되어 있었다.
정채은의 데이터. 09:23부터. 어린 시절 학대의 기억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같은 골목. 같은 사람. 이번엔 전신이 블러 처리되어 있었다.
나는 각 고객의 기억에서 그 "공통의 장면"만 추출했다. 다섯 개의 클립을 한 화면에 나열했다. 모두 같은 골목. 모두 같은 밤. 모두 같은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블러 처리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를 숨겼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였다.
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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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은 여전히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표정은 달라져 있었다. 공포가 가득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형..."
"주현아.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나는 다시 그 앞에 앉았다.
"그 누군가를 봤을 때... 그 사람이 뭘 하고 있었어?"
박주현의 눈이 떨렸다. 기억을 짜내려고 애쓰는 표정. 하지만 불가능했다. 내가 지웠으니까.
그의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마치 내가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박주현의 입이 떨렸다.
"... 형, 내 기억이 지워진 게 맞아요? 왜 자꾸 누군가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요?"
침묵이 흘렀다. 내 손이 떨렸다. 그의 손이 떨렸다. 우리 둘 다의 손이 떨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뭘 했는지, 내가 뭘 지웠는지, 그 지워진 기억이 뭐였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 말할 수 있을까?
박주현의 눈이 내 눈을 찾았다. 그 안에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피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야."
내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기억이 지워져도,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최준철이 말했던 "감정 잔여". 그것은 신경계에 남아서, 계속 박주현을 괴롭힐 것이었다.
그리고 내 신경계에도.
내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의도적인 떨림이 아니었다. 진짜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내 기억이 흐릿해진다고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 첫사랑의 얼굴.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워진 기억들의 감정이 나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유미라의 성희롱 트라우마. 그것의 공포.
정채은의 어린 시절 학대. 그것의 절망.
강석민의 사업 실패. 그것의 무력감.
박주현의 왕따와 그 "누군가를 본다"는 두려움.
모두가 내 안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 감정들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주현이 일어섰다. 나도 일어났다. 우리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뭘 느끼고 있는지. 그 감정이 뭔지.
누군가가 자신을 본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절망.
나는 포겟의 문을 열었다.
밖은 강남의 밤거리였다. 가로등 불빛. 사람들의 목소리. 자동차의 엔진음.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그 밤거리 어딘가에,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