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이트 최심부
지하 4층. 게이트 최심부의 입구 앞에서 한석우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모두 투명해진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색채로만 감지할 수 있었다. 팀장의 감정은 짙은 빨강과 파랑이 뒤섞여 있었다. 분노와 슬픔. 하지만 그 아래에는 희미한 초록색—결연함이 있었다.
"가. 정민혁이 저들을 막고 있어. 시간이 없다."
한석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감정 억압 능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있는 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곧 터져 나올 감정의 파도를 억지로 가두는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팀장, 당신도—"
"나는 괜찮다. 넌 가야 한다."
그는 나를 밀어냈다. 손가락 없는 손이 내 등을 밀었다. 그 순간, 내 감정 감지 범위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정민혁이다.
지하 4층 깊숙한 곳에서 그의 신체 강화 능력이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근육이 터질 듯 팽팽해지고, 뼈가 부서질 듯 울렸다. 그의 비명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능력의 폭발음이었다. 게이트의 몸통을 막으려 몸을 던진 그가, 이제 그 압력에 짓눌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멈출 것을 알았다.
게이트 최심부의 문은 손가락 모양으로 파여 있었다. 나는 투명해진 손가락을 그곳에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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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파의 세계
문이 열렸을 때, 세상이 음파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각이 사라졌다. 색채도 형태도 없었다. 오직 음파만이 울려 퍼졌다. 수천, 수만 개의 감정이 동시에 진동하고 있었다. 빨강의 비명, 파랑의 흐느낌, 노랑의 환호, 보라의 공포, 초록의 고요함. 모든 색이 모든 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누군가의 심장 속에 갇혀 있던 분노. 아이를 낳고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 승진을 포기하고 가족을 택한 아버지의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복잡한 감정. 연인에게 버림받은 직후의 공허함. 죽음 직전의 해방감.
모든 감정이 나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감정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모두 투명해진 몸이 이제는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팔뚝이, 팔이, 어깨가. 내 신체가 게이트에 흡수되고 있었다.
이게 감정 사망인가?
그 순간, 모든 음파가 한 점으로 수렴했다.
"환영한다, 열쇠여."
목소리였다. 인간이 아닌,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담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수천 개의 음성이 겹쳐진 것처럼 들렸다. 분노하는 목소리, 울음 섞인 목소리, 웃음 섞인 목소리. 모두가 동시에.
"넌 왜 저항하는가? 우리와 함께 자유로워져라. 억압받지 말고, 감정을 느끼고, 모두 드러내거라. 그것이 우리의 이름이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다."
게이트의 목소리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해져 사라졌다. 이제 팔도 사라지고 있었다. 내 몸이 게이트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아주 작은, 거의 꺼져가는 불빛 같은 감정이.
"준호."
아내의 목소리였다.
불가능했다. 여기는 게이트의 최심부다.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이유경의 목소리를.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당신, 나를 버리지 마."
내 안에 남은 마지막 감정이 그것이었다.
아내를 향한 사랑. 아무리 능력을 써도 사라지지 않던 그 감정.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도, 결혼식 날의 기쁨도, 함께 보낸 모든 순간도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남은 것은 이것이었다. 그녀를 지키고 싶은 마음. 그녀 곁에 있고 싶은 마음.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 마지막 감정입니다."
내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게이트를 통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모든 음파가 한 지점으로 수렴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게이트가 울렸다.
처음으로, 하나의 감정으로. 그것은 절망도 해방감도 아니었다. 분노도 기쁨도 아니었다. 모든 감정이 한 순간에 하나로 녹아드는 음파였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수십 년 동안 억누르던 눈물을 터뜨리는 소리처럼 울렸다.
"넌... 우리를 이해하는가?"
게이트의 목소리가 변했다.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감정의 집합체인 그것이, 처음으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투명해진 몸통으로 일어섰다. 남은 것은 몸통뿐이었다.
"당신은 억압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인류도 파괴받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감정도, 우리의 감정도 모두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움입니다. 억누르는 게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 불완전한 감정으로도 타인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게이트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다른 음파였다. 모든 색채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빨강은 더는 분노만이 아니었고, 파랑은 더는 절망만이 아니었다. 각각의 감정이 제 빛을 찾기 시작했다. 게이트의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억압하는 형태에서 표현하는 형태로. 벽이 부드러워지고, 음파가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넌?"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완전한 감정 해방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타인을 지키는 것으로."
그 순간, 게이트 전체가 진동했다. 폭발적인 음파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불완전한 감정으로 타인을 구하는 것. 남은 감정으로 공존을 이루는 것. 게이트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감지했다.
지하 4층 깊숙한 곳에서 정민혁의 신체 강화 능력이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근육이 한계를 넘어섰다. 뼈가 부서지고, 혈관이 터졌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변화였다.
정민혁의 모든 감정이 폭발했다. 후배를 잃은 팀장을 지키려던 결연함,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던 용기. 신체 강화 능력이 한계를 넘어서면서 그 모든 것이 음파로 변환되었다. 빨강과 파랑과 초록이 한데 섞여 폭발음을 내며 게이트에 흡수되었다.
그의 감정이 게이트를 깨웠다.
색채의 폭발. 음파의 울음. 게이트가 처음으로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을 직접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게이트 자신을 변화시켰다.
한석우가 감지했을 것이다. 그의 감정 억압 범위 안에서, 후배의 최후를 느꼈을 것이다. 정민혁이 더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게이트를 변화시켰다는 것도.
"나와야 한다."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게이트의 목소리인지, 내 목소리인지, 아니면 정민혁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게이트 최심부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모든 음파가 나를 밀어냈다. 투명해진 몸이 다시 형태를 찾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팔이, 얼굴이. 게이트가 나를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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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출
나는 필사적으로 빠져나왔다.
지하 4층의 공간으로 나왔을 때, 한석우는 여전히 서 있었다. 감정 억압 능력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그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억눌렀던 감정들이 터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민혁은?"
나는 물었다.
한석우가 천천히 고개를 젓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정민혁의 마지막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의 후배가 게이트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순간을. 신체 강화 능력의 폭발이 게이트의 벽을 뚫고, 그 벽이 정민혁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그 순간, 게이트 입구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게이트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이 갈라지고, 천장이 흔들렸다. 게이트가 변하고 있었다. 억압에서 표현으로. 정민혁의 감정이 그것을 만들었다.
"나가. 지금."
한석우가 나를 밀었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손가락 5개가 모두 돌아온 손으로 나는 벽을 짚으며 달렸다. 감정 소실률은 몇 퍼센트가 되었을까? 더는 세지 않기로 했다. 남은 것은 충분했다. 아내를 향한 사랑. 그것만으로도.
복도를 달리며 나는 게이트 최심부에서 느낀 것을 다시 감지했다. 정민혁의 신체 강화 능력이 한계를 넘어 폭발하며 게이트에 흡수되었던 그 순간. 그의 모든 감정이 게이트를 깨웠다. 정민혁이 게이트를 깨웠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변화였다. 그는 게이트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다."
나는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지하 4층에서 한 줄기 빛이 터져 나왔다. 게이트가 변하고 있었다. 억압하는 형태에서, 표현하는 형태로.
한석우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의 감정 억압 능력이 풀리고 있었다. 3년 전 후배 임준욱의 죽음,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든 감정들이 터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봤다. 색채로, 음파로.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그가 느끼고 있다는 것이. 억누르지 않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
"당신도 느껴야 합니다."
나는 말했다.
"억누르지 말고."
한석우가 나를 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눈물이 맺혔다. 색깔 있는 눈물. 실제 눈물.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69층. 사무실 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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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
문이 열렸을 때, 창밖의 하늘은 여명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벽 4시 30분쯤. 정확히 3년 전, 나를 깨웠던 같은 시간.
"유경이가 여기 있을 거야."
한석우가 중얼거렸다.
나는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다리로 걷는 것 같았다. 게이트 최심부에서 느낀 모든 감정들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절망, 해방감, 분노, 기쁨, 평온함. 그것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하나의 감정만 명확했다.
사랑.
하지만 사무실에 가까워질수록 공포가 밀려왔다. 2주. 그 안에 나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능력도, 기억도, 감정도. 투명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게이트가 무엇인지, 정민혁이 어디로 갔는지, 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손가락이 떨렸다. 투명함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사무실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아내를 봤다.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밤새 깨어 있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이 느껴졌다.
절망.
하지만 그 절망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것.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마지막까지 남겨 둔 것.
그것이 내 감정을 읽으려는 것이었다.
"유경."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모든 음파가 멈췄다. 게이트 최심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색채가 한 지점으로 수렴했다.
"당신이..."
나는 말했다.
"내 마지막 감정입니다."
그녀의 얼굴이 흔들렸다. 절망이 무너졌다. 그 자리에 확신이 들어섰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하지만 그 확신 뒤에는 또 다른 절망이 숨어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절망.
"손가락이?"
그녀가 일어섰다. 내 손을 잡았다. 투명하지 않은 손. 돌아온 손. 하지만 아직도 일부는 반투명했다. 팔뚝이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2주입니다."
나는 말했다.
"2주 안에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그녀의 손이 더 강하게 나를 잡았다. 마치 내가 흘러내려가는 것을 막으려는 듯. 하지만 나는 이미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게이트 최심부에서 나올 때부터 서서히. 한 단계씩. 내가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더 멀어지는 것처럼.
"그럼 우리는?"
그녀가 물었다. 그 질문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함께할 시간이 너무 짧다는 절망. 내가 사라진 후에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절망.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더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느꼈다. 색채와 음파가 아니라, 따뜻함으로, 손의 온기로, 심장 박동으로. 내 팔이 투명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당신이 내 마지막 감정이라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럼 그 이후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는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게이트가 변했다. 억압이 해방으로 바뀌었다. 정복이 공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민혁의 감정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 순간, 손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내를 안고 있는데도 점점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손이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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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한석우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김태현이 올 거야."
그의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여러 발. 여러 명. 무장한 사람들. 준비된 사람들.
나는 아내를 놓지 않았다.
"도망칩시다."
유경이가 말했다.
"아직 2주가 남았잖아요."
"그 2주 동안 뭘?"
한석우가 물었다.
나는 창밖을 봤다. 새벽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여명이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지하에서는 게이트가 울고 있었다.
이제 다른 음파로.
절망의 음파가 아니라, 표현의 음파로.
"게이트가 변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가 희미했다. 이미 절반쯤 투명해진 내 목소리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억압에서 표현으로. 정민혁의 감정이 그것을 만들었어요. 그의 신체 강화 능력이 게이트에 흡수되면서, 게이트는 비로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석우가 나를 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공존입니다."
나는 말했다.
"게이트와 인류의 공존. 억누르지도, 파괴하지도 않는. 그것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
"모릅니다."
나는 솔직했다.
"하지만 정민혁이 그 길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무실 문이 터졌다.
김태현이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있었다. 게이트의 변화를 감지했을 것이다. 지하에서 울려 나오는 다른 음파를. 억압이 아닌 표현의 음파를.
"게이트가..."
그가 중얼거렸다.
"변했다."
그는 나를 봤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총을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갈등이 있었다. 지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이 변화의 의미를 이해할 것인가. 게이트를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관찰할 것인가. 내부 명령과 현실이 충돌하고 있었다. 색채로 보면 그것이 명확했다. 빨강의 분노와 파랑의 혼란이 그의 몸 안에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를 봤다. 색채로, 음파로. 그의 감정을 읽었다. 놀라움, 혼란,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작은 희망. 아직 결정하지 못한 희망.
"2주."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더 희미해졌다.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내겠습니다. 게이트도, 나도. 그 전에 진실을 알릴 기회를 주십시오."
김태현이 나를 봤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총을 들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아직은.
그 순간, 창밖의 하늘이 완전히 밝아졌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