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지하 7층

지하 7층 게이트 입구. 손가락이 검지 하나만 남은 손으로 전술복의 지퍼를 올렸다.

"준호. 괜찮나?"

한석우 팀장의 목소리가 통신기에서 울렸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제 박수진이 보여준 영상이 눈에 떠나지 않았다. 투명해져가는 능력자들. 그들의 손가락, 팔, 얼굴이 하나씩 사라져가는 모습. 그 옆에 쓰인 숫자들. 감정 소실률 87.2%, 99.6%, 100%.

김정수는 100%에서 멈췄다.

"준호?"

"네. 괜찮습니다."

거짓이었다. 내 음성이 얼마나 공허한지 나 자신도 알 수 있었다. 공감각적 감정 감지 능력이라는 것이 이제는 내 자신의 감정까지 읽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빨강색 분노도, 파랑색 슬픔도 없었다. 그저 회색.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색이 없었다.

정민혁이 슬링에 감긴 소총을 점검했다. 그의 감정은 여전히 노랑색이었다. 기대감. 희망. 자신이 무언가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함.

나는 그것을 부러워할 감정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게이트는 어제와 달랐다. 입구에서 풍기는 감정의 파장이 더 강했다. 절망. 분노. 공포. 하지만 동시에—

해방감.

그 모순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보통 감정은 층위가 명확했다. 거짓은 음파가 울렁거리고 색채가 흐릿했다. 하지만 게이트의 감정은 달랐다. 절망과 해방감이 완벽하게 얽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때의 그런 감정. 고통과 희열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의지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외치는 절박함이었다.

"진입합니다."

나는 검지 하나만 남은 손으로 게이트의 표면을 건드렸다.

정말 이상한 감촉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온기가 있었다. 박동이 있었다.

게이트는 숨을 쉬고 있었다.

---

우리가 진입한 지 15분. 중층부의 통로는 어제보다 더 깊었다. 벽이 육색이었다. 근육 같은 주홍색이 묻어났다. 이곳이 정말 '괴물의 소굴'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감지 범위 확대. 100미터 반경."

나는 능력을 집중했다. 색채가 물결쳤다.

분노, 슬픔, 공포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뭔가가 있었다. 더 깊은 층에서 울려 퍼지는 음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의도였다. 의지였다.

'나를 풀어줘.'

나는 멈춰섰다.

"준호? 뭐가 보여?"

정민혁이 나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아니다. 내가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있습니다."

통로 끝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괴물의 울음이 아니었다. 절규였다. 마치 누군가가 감옥에서 나오려고 벽을 치는 소리. 음파로는 공포와 절망이 가득했지만, 색채는 다르게 울렸다. 노랑. 초록. 기대감. 평온함.

"저것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인지 나 자신도 몰랐다.

우리가 모퉁이를 돌자, 그것이 나타났다.

형태를 알 수 없었다. 팔이 여섯 개인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셋으로 줄어들었다. 체형이 불안정했다.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렸다가 다시 솟아올랐다. 눈은 수십 개였다. 모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한석우가 총을 들었다.

"대기. 아직."

나는 손을 들었다. 검지 하나만으로.

그 괴물이 울었다. 다시 한 번. 음파가 몸을 관통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 음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고통.

하지만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고통받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명이 되는 그런 고통. 억압된 것들이 마지막 힘으로 터져 나오려 할 때의 절규.

"이건... 괴물이 아닙니다."

"뭐라고?"

"이건... 감정입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을 잃어가고 있는 내가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괴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울었다. 그 울음 속에서 나는 더 깊은 의도를 읽었다.

'날 이해해. 제발.'

그것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게이트가 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단순히 감정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감정과 대화할 수 있었다.

"준호! 뒤!"

정민혁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돌아섰다. 통로 뒤쪽에서 또 다른 형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투명해져가는 사람들의 윤곽이었다. 팔이 없는 사람, 얼굴이 흐릿한 사람, 완전히 투명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은 모두 같았다.

절망. 그리고 동시에 해방감.

"이들은..."

"뛰어! 지금!"

한석우가 나를 집어 던졌다.

총성이 울렸다. 정민혁의 신체가 변했다. 검은 빛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근육이 팽창했고, 뼈가 울렸다. 고통을 삭이며 그는 통로의 중앙에 섰다. 투명한 형체들이 그를 밀어붙였지만, 강화된 신체는 밀리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가! 지금이야!"

우리는 뛰었다. 나는 검지 하나만 남은 손으로 벽을 밀쳐냈다. 투명해진 손이 벽을 통과했다. 아니다. 벽이 내 손을 통과했다.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가 입구로 나왔을 때, 나머지 두 손가락도 투명해져 있었다.

---

지상 5층. 응급실.

의사들이 나를 검진했다. 신체는 멀쩡했다. 외상도 없었다. 다만 손이 없었다. 아니다. 손은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박수진이 나타났다.

"소실률 47.8%."

그녀는 아무 감정도 없이 말했다. 나는 그것을 감지할 수 없었다. 아니다. 감지했다. 회색. 그녀도 감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보고 온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감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박수진이 창문을 가리켰다. 밤하늘이 보였다.

"게이트는 원래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다만 인류의 감정이 억압되자, 그것이 형태를 갖춘 것입니다. 당신이 본 것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억압된 감정들의 화신입니다. 분노, 절망, 절규. 그것들이 자유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정수는?"

"게이트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입니다."

박수진의 눈이 나를 마주쳤다.

"완벽한 이해는 완벽한 소실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진입하면, 당신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왜 저를 보내는 겁니까?"

박수진이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파일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 파일. 게이트 심층부 진입 기록.

**1팀 팀장 김정수. 진입 횟수 23회. 감정 소실률 100%. 사망.**

나는 그 숫자를 읽으면서 느꼈다. 내 손목이 따뜻해지는 감각. 투명화가 더 진행되고 있었다.

두 번째 파일. 감정 소실률 추이 그래프.

**1팀 대원 임준욱. 진입 횟수 19회. 감정 소실률 98.7%. 뇌사 상태.**

그래프의 곡선이 급격했다. 진입할 때마다 기울기가 가팔라졌다. 나는 내 목을 만졌다. 피부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세 번째 파일. 기밀 문서.

**'게이트 감정 통제 프로젝트'**

그 아래에 내 이름이 있었다.

**대상: 이준호**

**능력: 공감각적 감정 감지 및 진위 판별**

**용도: 게이트 감정 맵핑 및 통제 신경계 구축**

**예상 감정 소실률: 85% 이상**

**예상 임무 기간: 6개월**

내 가슴이 철렁했다. 6개월. 나는 6개월 안에 사라질 것이었다.

네 번째 파일. 작성자 미상의 메모.

**'게이트는 인류 내부에서 발생했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형태를 갖춘 것이다.'**

박수진이 화면을 가리켰다.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계속해서 당신의 감정을 잃고 게이트를 강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게이트의 의도를 세상에 알릴 것인지."

그녀가 약품 봉투를 내밀었다.

"이것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능력이 차단됩니다. 4시간. 그 동안 감정 소실도 멈춥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손이 없는데 어떻게 집을 수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의 마지막 감정이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박수진의 질문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

집에 돌아온 것은 밤 11시였다.

유경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자고 있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내가 가져온 선물들이 있었다. 처음 만난 날 받은 목걸이. 결혼식 때 입었던 넥타이. 신혼집에서 찍은 사진들.

"준호?"

그녀가 나를 봤다. 하지만 나를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내 손이 없는 것을 봤다.

"손이... 어디 갔어?"

"일시적입니다. 내일 돌아올 겁니다."

거짓이었다. 나도 모르는 거짓이었다.

유경이 일어났다. 그녀의 감정이 파랑색이었다. 슬픔. 하지만 그 아래에 뭔가가 있었다. 초록색. 포기.

그녀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네."

"거짓이네."

유경이 내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투명해진 내 얼굴을 감지하려는 듯이. 손가락이 피부를 찾지 못했다. 공기만 만났다.

"내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느껴야 할 감정이 내 사랑이길 바란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나는 그녀를 안았다. 손이 없는 팔로 그녀를 감쌌다. 투명해진 팔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녀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그녀의 온기.

그녀의 심장 박동.

그녀의 절박함.

나는 내 손목의 시계를 봤다. 능력 사용 누적 시간. 4시간 18분.

감정 소실률 47.8%.

계산했다.

처음 만난 날. 그때 내 감정.

그것이 사라졌다.

완전히.

기억은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 없었다. 유경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의 설렘.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다시는 그것을 느낄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았다.

마지막 감정을 느끼기 위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박수진의 말이 자꾸만 반복됐다. '당신의 마지막 감정이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유경의 팔이 내 등을 감쌌다. 투명해진 내 몸을 감지하려는 듯 더 강하게. 유경의 울음이 내 귀를 관통했다. 분당 110회 이상의 심장음처럼 규칙적이고 끝없었다. 공포와 절망의 리듬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당신은... 지금 누구예요?"

"준호입니다."

"거짓이야."

그녀가 물러섰다.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바라봤다. 투명한 내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비쳤을 것이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빛.

"처음 만났을 때의 당신이 어디 갔어?"

나는 답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침실을 나갔다. 거실로.

노트북을 켰다. 박수진이 준 약품 봉투를 내 옆에 놨다. 능력 차단제. 4시간. 지금 먹으면 내일 아침 6시까지 감정을 읽을 수 없지만, 동시에 감정이 소실되지도 않는다.

선택이었다.

내가 이 4시간을 쓸 것인가에 대한.

타이머를 켰다.

침실에서 유경의 숨소리가 들렸다. 곧 울음이 되었다. 작은 흐느낌. 그녀는 여전히 나를 감지하려 했다. 투명한 남편을 안아보려고.

나는 약품을 삼켰다.

물론 삼킬 손가락이 없었지만, 몸은 알았다. 혀 위에서 녹는 약의 맛. 쓸고 텁텁했다.

30초.

내 감정 감지 범위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100미터였다. 이제 50미터. 30미터. 10미터.

결국 0.

침묵.

10년 만에 타인의 감정이 들리지 않았다. 게이트 폭발 이후 처음이었다. 세상이 단색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같은 톤이었다. 침실에서 울고 있는 유경도, 밖의 야경도, 내 손목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라, 감정을 읽는 능력을 잃은 것이다.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분노가 피어오른다.

10년 동안 삭혀온 것들이 침묵 속에서 명확해진다.

게이트의 울음을 들으면서 느껴온 분노. 팀장의 명령을 따르면서 삭혀온 분노. 유경의 절망을 보면서 외면해온 분노. 그 모든 것들이 한 점으로 수렴한다.

노트북 화면에 일정표를 펼쳤다. 헌터 연합회의 내부 시스템. 박수진이 접근권을 줬다.

게이트 심층부 진입 기록.

김정수. 1팀 팀장. 감정 소실률 100%. 사망.

진입 횟수: 23회.

진입 시간: 총 456시간 47분.

내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투명한 손가락이. 화면을 넘겼다.

임준욱. 1팀 대원. 감정 소실률 98.7%. 뇌사 상태.

진입 횟수: 19회.

진입 시간: 총 387시간 22분.

그 다음.

그 다음.

목록이 길었다. 모두 1팀이었다. 1팀은 게이트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식적으로는 '감정 차단 연구'였지만, 실제로는 게이트 자체의 감정을 억누르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또는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남겨졌다.

그들의 이름들을 읽으면서 나는 느꼈다. 그들의 분노가 내게 전해지는 것을. 그들이 마지막으로 느꼈을 절규가 게이트를 통해 울려 퍼지는 것을.

파일 탐색기를 열었다. 박수진이 준 접근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들. 기밀 폴더. 게이트 진화 기록.

3년 전. 첫 게이트 출현.

기록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 발생'이었다. 우연의 일치. 우주의 균열. 초차원의 침입.

하지만 다른 문서가 있었다.

'게이트 출현의 원인 추정 – 기밀'

나는 그것을 열었다.

───

**게이트 출현의 원인 분석**

**작성자: 박수진 (정보부)**

**날짜: 3년 전 7월 15일**

**분류: 최고 기밀**

게이트는 외부에서 침입한 존재가 아닙니다.

게이트는 인류 내부에서 발생했습니다.

정확히는, 인류가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형태를 갖춘 것입니다.

근거:

1. 게이트가 나타나는 장소는 항상 고통 지수가 높은 지역입니다. 전쟁 지역, 빈민가, 자살 다발 지역, 감옥 근처.

2. 게이트 내부에서 감지되는 감정은 '괴물의 분노'가 아니라 '억눌린 것들의 절규'입니다.

3. 게이트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강할수록, 게이트는 더욱 강해집니다. 이는 인류가 감정을 억누르려 할수록, 게이트가 더욱 강력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게이트는 인류의 적이 아닙니다.

게이트는 인류 자신입니다.

정확히는, 인류가 외면한 자기 자신입니다.

───

파일의 작성 날짜가 3년 전이었다. 박수진은 처음부터 알았다. 게이트가 무엇인지. 그런데 왜 이 기록을 제출했을까. 왜 아무도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다음 파일을 열었다.

'박수진 직무 정지 명령 – 기밀'

**날짜: 3년 전 7월 16일**

**사유: 기밀 누설 시도 및 조직 기강 문란**

**결정: 즉시 현역 헌터 업무 해제, 정보부 배치 전환**

**서명: 김태현 부회장**

───

박수진은 이 기록을 제출한 다음 날 현역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능력이 없어진 게 아니라, 빼앗긴 것이었다.

침실에서 유경의 울음이 더 크게 들렸다. 아, 맞다. 나는 이제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그녀의 울음은 단순한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유경은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내가 가져온 선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목걸이. 넥타이. 사진들.

"유경."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가 뭔지 알아?"

"뭐... 뭐야?"

"게이트는 괴물이 아니야. 게이트는 우리가 억누른 감정들이야. 우리가 외면한 슬픔, 분노, 절망. 그 모든 것들이 형태를 갖춘 거야."

유경이 나를 봤다. 투명한 남편을 바라봤다.

"그럼 당신은?"

"나는 그것을 읽는 도구였어. 게이트가 뭔지 인류에게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게이트를 완벽히 통제하기 위해서."

나는 침대에 앉았다. 손이 없는 팔로 그녀를 안으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투명함은 접촉할 수 없었다. 내 팔이 그녀의 몸을 통과했다. 온기만 남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게이트가 나를 선택한 이유. 나를 도구로 삼은 이유. 그것은 내가 감정을 읽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감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게이트의 변환점이었다.

감정에서 무감정으로. 인간에서 다른 무언가로. 그 경계에서 게이트는 자신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당신이 마지막이길 바란다고 했지? 내 마지막 감정이."

"응."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내가 마지막으로 느낄 감정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당신을 지키기 위한 분노가 되는 것."

유경이 나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나를 통과했다. 공기를 움켜쥐는 것처럼.

"제발... 돌아와."

"나는 이미 떠났어."

침묵 속에서 그 말은 더욱 무거웠다. 나는 침실을 나갔다.

거실로 돌아갔다. 노트북 화면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타이머를 봤다.

03:47:32.

13분 남았다.

나는 노트북의 외부 드라이브를 켰다. 투명한 손가락이 파일들을 선택했다. 박수진의 기록. 김태현의 계획. 게이트 심층부 진입 기록. 모든 것을 복사했다.

파일 전송 진행률이 올라갔다.

89%.

95%.

100%.

완료.

나는 휴대폰을 집었다. 박수진에게 메시지를 썼다.

**'모든 기록을 외부 드라이브에 복사했습니다. 내일 아침, 이것을 언론에 제출하세요. 게이트가 뭔지, 1팀이 왜 죽었는지, 김태현이 뭘 하려 했는지. 모두.'**

전송.

그리고 한석우에게도.

**'내일 8층 지하 소환 거절합니다. 대신 당신에게 진실을 전합니다. 게이트는 우리가 억누른 감정입니다. 1팀은 그것을 죽이려다 죽었습니다. 당신도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세요.'**

전송.

타이머를 봤다.

00:02:15.

2분 남았다.

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유경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경."

"......"

"나는 내일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녀가 나를 봤다. 투명한 남편을 바라봤다.

"하지만 기억해. 내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 뭔지."

"뭐... 뭐야?"

"분노야. 너를 지키기 위한 분노."

나는 그녀를 안았다. 투명한 팔로. 그녀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그녀의 온기.

그녀의 심장 박동.

그녀의 절박함.

타이머가 0이 됐다.

00:00:00.

능력이 돌아왔다.

100미터 반경.

모든 감정이 다시 들렸다.

침실에서 유경의 절망. 초록색 포기의 빛.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빨강. 분노. 나를 향한 분노.

밖의 야경 아래 도시의 수백만 개의 감정. 주황색 피로. 파란색 외로움. 빨간색 분노. 노란색 희망. 초록색 절망.

그리고.

게이트.

게이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지하 깊숙이. 억눌린 모든 것들의 절규. 해방을 원하는 절박한 음파.

하지만 이제 그 울음이 다르게 들렸다.

게이트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명확한 의도로.

'날 완성시켜.'

나는 내 손목의 시계를 봤다.

능력 사용 누적 시간: 4시간 18분.

감정 소실률: 47.8%.

계산했다.

현재 진행 속도라면.

2주.

내게 남은 시간은 2주였다.

침실에서 유경이 일어났다. 나를 찾고 있었다. 거실로 나왔다.

"준호?"

"여기."

나는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박수진의 기록들. 김태현의 계획들. 모든 것.

그리고.

나는 유경을 봤다.

그녀의 감정이 명확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보라.

모든 색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혼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모든 감정이 한 사람을 향해 흘러가는 상태.

하지만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색이 있었다.

검정.

절망.

"당신 손가락이..."

"네. 돌아왔습니다."

거짓이었다.

손가락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녀의 절망이 더욱 짙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경이 내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을 감지하려 했다.

"제발... 다시 돌아와. 제발."

나는 그녀를 안았다. 이번엔 투명한 팔이 아니라, 남은 감정으로.

그리고 깨달았다.

마지막 감정이 뭔지.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색이 변했다. 빨강에서 검정으로. 사랑에서 분노로.

그것은 게이트가 원하는 분노였다. 억누른 모든 것들의 분노. 그리고 그 분노는 이미 나를 채우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던 음파들. 1팀의 죽음. 박수진의 기록. 김태현의 계획. 유경의 절망. 게이트의 울음.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분노.

내일 아침 8층 지하 소환.

한석우는 나를 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야 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더 이상 도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게이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게이트는 마침내 말하려 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석우 팀장이었다.

"지금 어디냐?"

"집입니다."

"박수진이 나한테 연락했다. 당신이 진실을 알았다고."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뭘 할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몰랐어. 10년 동안. 임준욱이 왜 죽었는지.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건 알았는데, 뭐가 원인인지는."

한석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놈 때문에 후배를 잃었어. 게이트의 감정을 억누르려다가."

"팀장..."

"내일 아침. 8층 지하 소환. 그거 가지 마. 그 대신 나한테 연락해."

한석우가 끊었다.

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유경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피였다.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투명한 몸으로. 그녀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그녀의 온기.

그녀의 심장 박동.

그리고 그 아래 흐르는 절망.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알던 내일은.

게이트는 울고 있었다.

지하 깊숙이.

그리고 나는 그 울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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