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새벽 네 시 삼십 분,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닿았을 때 나는 이미 손가락 다섯 개 중 넷을 잃고 있었다. 거울 같은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내 손은 반투명했고, 검지만 남은 손가락들이 공중에서 떨리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한석우 팀장과 정민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간다."
한석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감정은 다르게 읽혔다. 빨강. 분노. 그런데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더 깊은 곳, 조직 내부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그 색채의 진동을 느꼈다. 울렁거리지 않는 순수한 분노. 거짓이 아닌 정당한 분노였다.
"팀장, 잠시만요."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손을 들었다. 한석우가 나를 봤다. 그의 눈이 내 손에 머물렀다.
"하루에 한 번씩 또 사라지고 있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
정민혁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실려 있었다.
"준호, 괜찮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석우에게 물었다.
"당신이 3년 전 잃은 후배는... 정복 임무였나요?"
한석우의 몸이 경직됐다. 그의 감정색이 급격히 변했다. 빨강에서 보라로. 공포와 분노가 뒤섞였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왜 묻는 거야?"
"박수진이 말했습니다. 게이트 내부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특이하다고. 절망과 해방감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그리고..." 나는 숨을 깊게 들었다. "그 감정이 인간의 감정과 연동된다면?"
정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로커룸으로 가는 통로에 서서, 그는 작은 노트북을 꺼냈다.
"내가 밤새 분석했어. 게이트 내부의 감정 파장 데이터와 같은 시간대 임무 투입 인원들의 변화를 비교했어. 준호, 봐봐."
그가 화면을 보였다. 그래프 위에 여러 개의 선이 그려져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보라. 각각 다른 감정을 나타내는 선들이 서로 얽혀 있었고, 그 패턴은 게이트에서 감지했던 감정 음파와 거의 같았다.
"게이트의 감정 진동과 우리 팀원들의 감정 변화가 매칭돼. 특히 한석우 팀장이 게이트 내부에서 감정 억압 능력을 쓸 때, 게이트 내부의 분노가 극대화된다고. 이건 우연이 아니야. 게이트가 우리의 감정을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야."
한석우가 정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정민혁을 보지 않았다. 내 쪽을 봤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게이트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면..." 정민혁이 말을 이었다. "인류의 감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지."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너머로 게이트의 검은 입이 보였다. 그것은 숨을 쉬고 있었다. 천천히, 깊게,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3년 전, 임준욱이라는 후배가 있었어." 한석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1팀의 팀장이었어. 날 많이 따랐고, 나도 그 아이를 많이 보호해주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게이트 심부 정복 임무에 투입되었고, 돌아오지 않았어."
"사고였나요?"
"공식적으로는 그래. 괴물과의 전투 중 사망. 하지만..." 한석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임준욱은 감정 전이 능력자였어. 딱 너처럼. 그리고 그 이후로 박수진이 정보 담당관으로 승진했고, 김태현이 부회장 자리에 올랐어."
정민혁이 덧붙였다.
"임준욱이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이 있어. 로그 파일로 묻혀있었는데, 내가 찾아냈어. '게이트가 나를 부르고 있다. 게이트 안의 감정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내용이야. 준호, 이건 정복 임무가 아니었어. 실험이었어. 게이트를 통제하기 위한 능력자 실험."
내 손가락이 또 하나 사라졌다. 이제 엄지손가락만 남았다. 그것도 반투명했다.
"그럼 나도..."
"그래서 내가 너를 지켜야 하는 거야." 한석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너는 살아나가야 해. 임준욱이 실패한 것을 완성하면 안 된다고."
나는 한석우를 봤다. 그의 눈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있었다. 결연함. 정당한 분노. 그리고 나를 지키려는 의지. 나는 내 남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팀장, 당신의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제 능력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한석우가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 느끼는 분노는 순수합니다. 울렁거리지 않아요. 거짓이 없어요. 당신이 임준욱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고, 저를 지키려고 하는 것도 진심입니다. 제 능력이 남아있는 동안, 저는 이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당신의 감정은 진짜입니다."
한석우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의 감정색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빨강이 파랑으로. 분노가 슬픔으로. 그것은 눈물처럼 흘렀다.
"고맙다. 진심으로."
정민혁이 우리 둘 사이를 바라봤다. 그의 감정은 노랑과 파랑이 섞여 있었다. 슬픔 속의 희망. 또는 희망 속의 슬픔.
로커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여섯 시. 아직 유경이는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켰다.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오늘 일찍 들어올 수 있어? 중요한 얘기가 있어."
유경의 메시지였다. 시간은 어제 밤 열 시였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정민혁을 바라봤다.
"미안해. 나 먼저 가봐도 될까?"
한석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그리고 준호... 집에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해."
---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였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유경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새 잔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부었고, 손에는 휴지가 쥐어져 있었다.
"준호..."
나를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손가락이..."
나는 내 손을 숨기지 않았다. 엄지손가락만 남은 손을 그녀에게 보였다.
"알고 있었어. 나 뭔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
유경이 일어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았어. 내 말을 들을 때도, 내 손을 잡을 때도. 마치 당신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어."
그녀가 한 발 다가섰다.
"그게 뭐예요? 그 손은 뭐예요?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나는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 손이 닿기 전에, 나는 그녀의 감정을 온전히 느꼈다. 절망의 음파. 그 속에 섞인 해방감. 마치 게이트 내부의 감정처럼.
"유경..."
"당신이 사라지고 있는 거 아니야? 당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거야."
그녀의 울음이 터졌다. 나는 그 울음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내 능력이 마지막 남은 감정을 먹고 있다는 것을. 유경을 향한 사랑이 점점 흐릿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내 능력이 그 감정을 읽을수록, 게이트의 음파가 더욱 강하게 울려 퍼진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수진의 전화였다. 하지만 그것은 통상적인 신호가 아니었다. 특수 신호. 긴급 소환.
나는 전화를 받았다.
"이준호. 지금 즉시 본부 8층 지하로 와. 김태현 부회장이 너를 만나길 원해."
박수진의 목소리는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무슨 일인가요?"
"그건 와서 알아. 그리고..."
박수진이 잠시 멈췄다.
"혼자 와. 아무도 말하지 말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유경을 봤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내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 손은 반투명했고, 그녀의 손을 통해 빠져나갔다. 내 손이 그녀의 등을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명한 손가락들이 그녀의 몸을 통과했다.
"미안해. 나 좀 나가야 할 것 같아."
"또? 또 나가?"
유경의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워졌다.
"제발... 제발 돌아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제발 돌아와."
나는 현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유경의 울음이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내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알 수 없는 발신자였다.
"8층 지하는 함정이다. 게이트 최심부로 가. 거기서만 진실이 있다."
나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느꼈다. 게이트의 음파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절망의 음파도, 해방감의 음파도 아니었다.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현관 신발장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엄지손가락만 남은 손으로 운동화 끈을 묶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신발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끈이 미끄러져 내렸다. 다시. 또 미끄러졌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묶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낯설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었다. 목에는 어제 게이트에서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내 왼쪽 팔이었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유리처럼 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뒤에서 유경의 발걸음이 들렸다.
"준호. 제발."
나는 현관문을 열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문 손잡이를 만지려는 손이 떨렸다. 투명한 손이.
"당신이 왜 이러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 거예요?"
유경이 내 뒤에 섰다. 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을 느끼기 싫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느껴야 했는데, 그 감정이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를 향한 그 사랑이 마지막 남은 감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있어. 연합회에서 불렀어."
"또? 매일 나가고 또 나가고..."
유경의 목소리가 끊겼다. 나는 그제야 돌아섰다. 그녀의 눈을 직접 봤다. 빨간 눈. 부어오른 얼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게이트 내부처럼.
"당신 손가락 몇 개 남았어?"
그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뭐라고?"
"손가락. 처음에는 다섯 개였잖아. 지금은 몇 개야?"
내 손을 보니 엄지손가락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없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당신이 뭔가 숨기고 있어. 그 손, 그 변화. 넌 왜..."
유경이 내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내 손을 통과했다. 투명한 공기를 집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아, 아..."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나는 박수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8층 지하. 즉시. 혼자."**
그리고 그 아래, 알 수 없는 발신자의 메시지.
**"함정이다. 게이트 최심부로 가. 거기서만 진실이 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투명한 손이.
연합회 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8시 45분이었다. 지하철 내내 나는 게이트의 음파를 느꼈다. 약하지만 분명한 신호. 마치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8층 지하를 누르려는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한석우였다.
"준호. 넌 지금 어디야?"
"본부에 왔어요. 박수진이 불렀어."
전화 너머로 한석우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8층 지하로 가지 마. 정민혁과 내가 지금 가는 중이야. 그 위에 가서 기다려."
"팀장?"
"준호. 진짜 말 들어. 8층 지하는..."
한석우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그곳은 실험실이야. 게이트 능력자들을 실험하는 곳이야."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상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헌터들, 행정원, 의료진. 모두가 바빴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해 있었다. 누구도 내 투명한 손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본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게이트가 나타난 이후, 이런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렸으니까.
"준호."
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박수진이었다. 그녀는 5층 복도의 한 구석에 서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 과장."
"따라와."
박수진이 인적이 드문 통로로 들어섰다. 나는 따라갔다. 복도 끝에는 잠긴 문이 있었다. 그녀가 카드키를 갖다 대자 문이 열렸다. 그 안은 어둠이었다.
"여긴..."
"게이트 관찰실이야. 아무도 없어. 여기서 말해야 해."
박수진이 불을 켰다. 방 안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벽 전체에 모니터가 붙어 있었다. 게이트 내부의 영상들. 수십 개의 게이트 영상이 동시에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모니터 아래에는 이름과 번호가 적혀 있었다.
**1팀 팀장 김정수 - 감정 소실률 100% (사망)**
**2팀 대원 박민준 - 감정 소실률 87.3%**
**3팀 신입 이준호 - 감정 소실률 23.4%**
내 이름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빨간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게이트의 열쇠 - 최우선 관찰 대상]**
"박 과장. 이게..."
"김태현이 날 보냈어. 너한테 말해야 한다고."
박수진이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김정수를 알아? 1팀 팀장."
"네. 감정 소실률이 100%라고..."
"그건 거짓이야. 김정수는 죽지 않았어. 그냥... 변했어. 게이트 최심부에서."
내 손가락이 떨렸다. 투명한 손가락이.
"무슨 말이야?"
박수진이 모니터를 조작했다. 영상이 바뀌었다. 게이트 내부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지하 시설. 그 안에는 침대들이 있었다. 수십 개의 침대.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이건 뭐야?"
"게이트 정복 임무 중 사망 판정을 받은 능력자들이야. 근데 실제론 죽은 게 아니야. 게이트에 의해 흡수된 거야. 그리고 여기서..."
박수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기서 재구성되고 있어. 게이트와의 계약을 통해서."
나는 화면을 봤다. 침대 위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상태였다. 투명해지고 있었다. 내 손처럼. 아니, 더 진행되어 있었다. 팔 전체가 투명했고, 일부는 몸 전체가 투명했다.
"이건 뭐 하는 거야? 이건 실험이야?"
"그 이상이야. 이건 개조야."
박수진이 한 침대를 가리켰다. 그곳의 사람은 반 이상이 투명해져 있었다.
"감정을 완전히 잃으면, 게이트의 감정을 받게 돼. 그럼 그 사람은 게이트의 일부가 되는 거야. 게이트의 손과 발이 되는 거야."
내 가슴이 철렁했다.
"김정수도?"
"김정수도. 그리고 더 있어. 이미 게이트 최심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조된 능력자들이 열 명이 넘어."
박수진이 모니터를 껐다. 모든 침대 위의 투명한 사람들이 사라졌다.
"김태현이 뭘 하려는 건지 알아?"
"게이트를 통제하려고."
박수진이 천천히 말했다.
"게이트의 감정이 인류의 감정과 연동된다는 걸 알았어. 만약 게이트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면, 인류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어. 공포를 심어주고, 분노를 유발하고, 또는 평온함을 강제할 수 있어. 완전한 통제. 완전한 권력."
내가 손을 떨었다. 투명한 손이.
"그리고 넌 그걸 할 수 있어, 준호. 게이트의 감정을 읽는 유일한 능력자야. 네 능력으로 게이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 그래서 김태현이 널 원하는 거야."
"내가... 게이트를 통제하는 데 쓰인다고?"
"아니. 그보다 더 직접적이야."
박수진이 다시 모니터를 켰다. 이번엔 다른 영상이었다. 내 영상이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동시에, 게이트 내부의 감정 파형이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넌 게이트와 공명하고 있어. 넌 능력을 쓸 때마다 게이트에 신호를 보내고 있어. 네 감정이 사라질 때마다, 그 사라진 감정이 게이트로 흘러들어가고 있어. 그리고 그 감정들이 게이트를 강화시키고 있어."
내 입이 말라졌다.
"그럼... 내가 게이트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거야?"
"아니. 네가 강화시키는 게 아니야. 게이트가 널 통해서 강화되고 있는 거야. 넌 그냥 도구일 뿐이야."
박수진이 화면을 껐다.
"김태현은 이미 게이트 최심부와 계약했어. 그곳의 모든 감정을 자신의 손에 넣기로. 그리고 그걸 위해서 너 같은 능력자들이 필요해. 감정을 읽고, 감정을 소진하고, 그 과정에서 게이트를 강화시켜주는 도구들."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박수진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 이 얘길 하는 거야. 8층 지하로 가지 마. 거기서 만날 사람들은 넌 게이트의 열쇠라고 말할 거야. 그리고 게이트 최심부로 가라고 할 거야. 거기서 모든 감정을 해방시켜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박수진이 내 눈을 봤다.
"내가 도와줄게. 나도 과거엔 능력자였어. 나도... 감정을 잃었어. 그래서 알아. 게이트가 뭔지. 게이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박 과장도?"
"내 능력은 '감정 기록'이었어. 특정 장소의 감정 흔적을 읽을 수 있었어. 그래서 게이트 최심부에 다녀왔어. 그리고 거기서..."
박수진이 말을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거기서 뭔가를 봤어. 내가 말할 수 없는 뭔가를."
"뭔데요?"
"지금은 얘기할 수 없어. 근데 넌 알아야 해. 게이트는..."
갑자기 복도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빠른 발걸음. 여럿이었다.
박수진이 문을 열었다.
"가. 뒤쪽 비상계단으로. 지하로 내려가."
"어디로?"
"게이트 최심부로. 거기가 유일한 길이야."
나는 복도로 나갔다. 뒤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박수진! 그 능력자를 어디로 보냈어!"
김태현의 목소리였다.
나는 뛰었다. 투명한 손으로 비상계단의 손잡이를 잡고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게이트의 음파를 들었다. 더 명확하게. 더 강하게.
**"오라."**
그것이 초대장인지, 명령인지, 혹은 구원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지하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나는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뒤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따라오는 소리.
지하 3층의 게이트 입구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검은 구멍.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절망과 해방감의 음파가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경의 전화를 받지 않은 죄책감이 한 줄기 남아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게이트 내부는 어둠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아니었다. 수천 개의 색이 뒤섞여 있었다. 모든 감정이. 모든 절망이. 모든 희망이.
그리고 그 중심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투명한 몸으로.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될 뻔했던 나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