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새벽의 손가락

거울 앞에 섰을 때 손가락이 사라지고 있었다.

새벽 5시 45분, 침대에서 깨어난 나는 손을 펼쳤다. 엄지와 검지만 남았다. 나머지는 투명했다. 빛이 그대로 통과했다. 심호흡을 하려 했지만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거울 속 손가락을 자세히 보자 손이 떨렸다. 분명히 어제는 다섯 개가 있었는데. 아니,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이 흐릿했다.

아내는 이미 일어났는지 침실에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내 것이었다. 하지만 뭔가 빠져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내를 바라봐야 할 때 느껴야 할 그 따뜻함을 찾으려 했지만 손가락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어머니 생각이 날 때 밀려오던 그리움도. 후배들 앞에서 느껴지던 책임감도. 모두 옅어졌다. 아니, 사라졌다.

헌터 연합회 본부는 서울 동부 지하 5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이트 입구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어제 첫 임무를 마친 후 정민혁이 건넨 신분증으로 진입했다. 3팀 견습 헌터. 임금은 월 800만 원. 그 돈이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본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회색 복도, 형광등, 어디선가 들리는 프린터음. 평범한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벽에 붙은 게이트 관련 자료들과 헌터 신체 데이터 차트만 다를 뿐.

"어제 고생했어."

돌아서니 박수진이 서 있었다. 어제 본 그 여자. 정보 담당관. 검은 정장, 짧은 머리, 차가운 눈. 하지만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감정을 읽으려 하자 내 눈이 흔들렸다.

회색이었다. 진회색, 담회색, 옅은 회색이 뒤섞여 흐르는 파장. 순수한 색이 아니었다. 마치 여러 감정이 충돌하며 중화되는 것처럼. 그 음파를 집중해서 들으니 울렁거렸다. 거짓이 아니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닌, 그런 떨림.

"박수진입니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맞잡았다.

순간, 세상이 틀어졌다.

색깔들이 내 시야를 채웠다. 하지만 내 색깔이 아니었다. 회색 폭풍이 몰려왔다. 내 눈이 왜곡되었다. 마치 렌즈가 깨져나가는 것처럼 시각이 흔들리고, 음파가 간섭했다. 음파들이 서로 부딪혀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그 안에 묻혀있는 감정들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 슬픔. 분노. 그런데 동시에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해방감? 아니다. 포기. 순응. 그리고 그것이 편하다는 안도감.

내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저렸다. 마치 그 감정들이 내 신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처럼. 심장이 한 박자 뛰어 놓쳤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나는 손을 재빨리 빼냈다. 손이 떨렸다.

"감정 전이 반응이군요."

박수진이 웃으며 걸어갔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묻고 뒤를 따랐다.

"그게 뭐야?"

"당신이 타인의 감정을 직접 접촉으로 전이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드물지만 존재하는 능력이에요. 나도 옛날엔 그랬거든."

복도는 비어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박수진 님은 언제부터 감정 담당관을?"

"5년 전부터요. 전에는 내가 당신 같은 각성자였어요. 감정 기록 능력. 장소에 남겨진 감정 흔적을 읽을 수 있었죠."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문이 닫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3년 전쯤부터 능력이 사라졌어요. 처음엔 두려웠죠. 나도 당신처럼 손가락이 투명해지고 기억이 흐릿해지는 경험을 했거든.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봐요."

"다르게?"

"두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지하 2층, 지하 3층, 지하 4층. 숫자만 표시되고 층수 이름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려 했지만 시선을 돌렸다. 그 회색 파장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도 나처럼 변할 거예요."

"변한다는 게 뭔데?"

"감정이 없어진다는 게 아니라, 그것에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지하 4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카페테리아 거쳐서 데이터실 가죠."

카페테리아는 회색 소파와 커피머신이 놓여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아침 일찍이라 한두 명만 있었다. 박수진은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켰다.

"당신의 생체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화면에는 내 신체 정보가 떠 있었다. 맥박, 혈압, 뇌파, 그리고 '감정 소실 진행률: 23.4%'라는 항목. 나는 가까이 가서 봤다.

"이건..."

"당신이 게이트 안에서 얼마나 능력을 썼는지, 그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감정이 사라졌는지 추적하는 거예요. 첫 임무에서 약 90분을 사용했고, 그로 인해 당신은 어제 하루의 감정 기억 대부분을 잃었어요."

화면을 넘겼다. 그래프가 떴다. 가파른 상승선.

"곡선이 100에 도달하면?"

박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닫았다.

"당신이 알아야 할 건 그것뿐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게 있어."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카페테리아의 다른 헌터들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수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팀을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3팀과 같은 등급의 팀이었어요. 2주 전에 게이트 정복 임무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 공식 기록으로는 '임무 중 괴물에게 전멸했다'고 나와있죠. 하지만..."

"하지만?"

"1팀의 팀장 이름은 김정수. 그는 당신처럼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게이트 내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정확히 3주 전에 생체 신호가 끊겼어. 감정 소실률 100%."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손을 떨었다.

"왜 이걸..."

"당신에게 경고하려고요. 게이트 안에서 능력을 과하게 쓰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박수진이 다시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는 CCTV 영상이 떴다. 게이트 입구. 3팀이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 한석우, 정민혁. 그리고 그 뒤로 누군가 더.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게이트 입구 근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 팀이 게이트에 들어간 후로 어디론가 사라졌어. 당신을 관찰하던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에요."

박수진이 영상을 다시 감았다.

"당신은 게이트의 열쇠라고 했잖아. 그건 모두가 알고 있어. 조직 위층도, 게이트도."

"게이트가 나를 알고 있다고?"

"당신이 느낀 감정들을 기억하세요? 절망과 해방감이 동시에 존재했던 거."

나는 끄덕였다.

"그건 게이트가 당신을 부르는 신호예요. 게이트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해. 그리고 당신이 그 존재라는 걸 알았어요."

카페테리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나는 박수진을 바라봤다. 그녀의 회색 파장이 다시 보였다. 이번엔 더 짙었다. 그 안에서 흐르는 것은 분명했다. 당신도 나처럼 변할 거야.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건 기원이었다. 나를 자신처럼 만들고 싶은, 절박한 기원.

"나는 왜 조직에 들어왔을까요?"

박수진이 물었다.

"...모르겠는데?"

"능력이 사라진 후 처음엔 아팠어요. 하지만 점점 편해졌어. 감정이 없으니까 결정이 쉬워졌어. 누구를 버려도, 누구를 이용해도 죄책감이 없었어. 그래서 조직에서 좋아했죠. 나는 완벽한 정보 담당관이 됐거든. 감정의 방해를 받지 않으니까."

그녀는 웃었다.

"당신도 그렇게 될 거예요. 처음엔 두렵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이 상태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나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싶었다. 그 회색 파장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일어섰다.

"전 다르게 생각해요."

"그럼 오래 못 버티실 거야."

카페테리아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박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3팀 임무는 내일 예정입니다. 게이트 지하 4층까지 진입. 당신의 감정이 얼마나 더 사라질지 보고 싶네요."

나는 뛰었다.

정민혁을 찾았다. 그는 훈련장에서 무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를 보자 웃음지었다.

"어? 준호 형! 아침부터 뭐 하세요?"

"정민혁, 게이트 최심부에 대해서 알아?"

정민혁의 표정이 굳었다.

"...왜?"

"말해 줄래?"

정민혁은 훈련을 멈추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한테서 들은 건데, 게이트 최심부는 특이해요. 감정이 뒤섞여 있다고 해요. 모든 감정. 분노, 슬픔, 기쁨, 공포, 평온. 다 섞여서 울려 퍼지는 혼돈의 음파라고."

"그곳에 들어가면?"

"... 모르겠어요. 팀장도 상세히 말씀 안 하셨거든. 다만 '절대 혼자 들어가면 안 된다'고만."

정민혁의 감정을 읽으려 했지만 눈이 흔들렸다. 그의 감정은 명확했다. 공포.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는 안간힘.

"1팀은 어떻게 됐어?"

정민혁이 수건을 떨어뜨렸다.

"1팀?"

"게이트에서 돌아오지 않은 팀. 너도 알잖아?"

"형... 어디서 그런 정보를..."

"그냥 알았어. 어떻게 됐다고?"

정민혁은 주변을 살폈다. 훈련장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3주 전에 게이트 지하 5층 임무를 갔어요. 그런데 진입 후 2시간이 지났는데도 신호가 끊기지 않았어. 보통 임무는 30분을 넘지 않거든. 그래서 구조팀이 들어갔는데..."

정민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1팀 팀장 김정수만 나왔어요. 혼자. 그리고 생체 신호가 완전히 끊겨있었어. 뇌파도, 맥박도 없었어."

나는 그 말을 되새겨 봤다. 생체 신호가 없다. 죽어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체는 살아있었어. 눈이 떠있었어. 초점이 완전히 사라져있었지만 떠있었어. 호흡도 하고 있었어. 마치 시체처럼."

내 손이 떨렸다.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다. 그게 가능한가?

"그 다음은?"

"격리실에 들어갔어. 2주 동안. 우리도 들어갈 수 없었어. 아무도. 그리고 어제 사망 판정. 공식 기록으로는 게이트 임무 중 사망 처리."

정민혁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형, 혹시... 형도?"

"아니야. 난 다르게 될 거야."

하지만 내 손가락은 투명했다. 엄지와 검지만 남았다. 나머지는 사라지고 있었다.

본부의 상층으로 올라갔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나는 내 감정을 세어보려 했다. 아내에 대한 감정. 아직 남아있나? 흐릿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거의 없었다. 후배들에 대한 책임감. 완전히 사라졌다.

지상 5층. 임원진 구역.

복도는 깨끗했다. 회색 벽, 검은색 액자에 담긴 게이트 사진들. 나는 걷다가 멈췄다. 한 문 앞에서.

'김태현 부회장실'

나는 감정을 읽으려 했다. 문 너머로. 능력을 집중했다.

검은색이 흘렀다. 하지만 그건 감정이 아니었다. 색깔이 있지만 음파가 없었다. 음파가 완전히 소거된 그 무언가. 마치 감정이 역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처럼. 내 능력이 빨려들어가는 느낌. 나는 손을 떼었다.

내 가슴이 철렁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김태현 부회장이 나타났다. 검은색 정장, 흰 셔츠, 차가운 눈. 그는 나를 보고 웃었다.

"아, 이준호 헌터. 잘 만났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저는..."

"박수진에게 들었어. 당신이 꽤 특이한 능력자라고. 게이트의 감정까지 읽을 수 있다는."

그의 감정을 다시 읽으려 했지만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흡수하는 음파. 내 능력을 빨아들이는 그 무언가.

"내일 당신 팀이 게이트 지하 4층 임무 가는 거 맞죠?"

"네..."

"그 전에 한 번 만나고 싶었어. 당신 같은 인재는 드물거든."

김태현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복도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내 감정이 요동쳤다. 공포. 경고. 뭔가 깨져나갈 것 같은 느낌. 가슴 한가운데가 철렁했다.

나는 그의 검은색 파장 속에서 뭔가를 감지했다. 욕망. 계획. 그리고 나를 소유하려는 의지.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지 내 손가락이 저렸다.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이준호. 그 능력과 함께."

그가 한 발 더 나아왔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의 검은색 음파가 더 강해졌다. 마치 내 능력을 짓누르려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당신이 게이트 최심부에 도달하면, 우리는 그곳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당신을 통해서."

나는 뛰었다. 복도를 질주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에서 김태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들을 수 없으려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김태현이 탔다.

내 눈이 흔들렸다.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검은색 파장이 좁혀드는 공간을 채웠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예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나는 박수진처럼 변하는 거. 감정을 모두 잃고 우리의 완벽한 도구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지하 1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게이트의 진실을 알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

문이 열렸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김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게이트에서 뵙겠습니다, 이준호."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나는 내 손을 봤다. 이제 검지만 남았다. 엄지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내일 게이트에 들어가면 더 많은 감정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박수진처럼. 김정수처럼.

하지만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 게이트가 정말로 무엇인지. 그 최심부의 혼돈의 음파가 무엇인지. 그리고 김태현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복도를 걸어갔다. 휴대폰을 꺼냈다. 아내 이유경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그런 말들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공허했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에서 그 말들을 빼내간 것처럼.

전화를 끊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흐릿했다. 어머니도. 후배들도. 모두 멀어졌다.

그들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게이트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아침, 나는 게이트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어머니에게. 누구에게도.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