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게이트
새벽 4시 30분, 게이트 입구 앞에서 나는 검은 구멍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망. 해방감. 공포. 기쁨. 네 가지 감정이 뒤섞여 음파의 진동으로 울려 퍼졌다. 일반적인 괴물의 신호라면 분노와 배고픔 정도만 나와야 했다. 그런데 이건... 뭔가 다른 거였다. 색깔도 흐릿했다. 빨강과 노랑이 계속 섞였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준호. 준비됐나?"
한석우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감정은 파란색이었다. 깊고 어두운 파란색. 슬픔이 아니라 뭔가 더 무거운 것. 나는 그 파란색을 봤을 때,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장면인데 마치 내가 본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복도. 쓰러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 한석우의 손.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나는 대답했지만 내 목소리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입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또 사라졌다. 이번엔 약지였다. 감정 감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 나는 능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손가락이 사라졌다. 이것이 정상인가?
정민혁이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감정은 밝은 노란색이었다. 순수했다. 정말 순수했다. 그 순수함 속에는 준호를 따르는 마음, 그리고 게이트 정복에 대한 단순한 소명감이 들어 있었다. 정민혁은 게이트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괴물이 뭔지도. 그저 따라야 할 사람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첫 임무인데 떨려요?"
정민혁이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후배를 응원하는 선배 같은 눈. 아니, 선배를 따르는 후배 같은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봤을 때 뭔가 불편했다. 내가 그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건지 몰랐다. 나는 지금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잃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정민혁은 내 거짓을 모르는 것 같았다. 능력자가 아닌 사람은 감정을 숨기기가 쉬웠다. 아니, 숨길 수 있었다.
한석우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신호가 들어오자 뒤에서 나머지 팀원들이 전진했다. 이 팀은 총 6명이었다. 한석우 팀장, 정민혁, 그리고 나를 포함한 4명의 신입 사원. 모두 게이트 정복 경험이 없는 자들이었다. 조직의 매뉴얼에 따르면 이것은 "경험 축적 임무"라고 불렸다. 즉,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한석우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 게이트는 D급 등급. 괴물 3~4마리 정도 예상된다. 우리의 목표는 게이트 심층 감지다. 심층에서 뭔가 이상한 신호가 나오고 있어. 준호, 너는 그 신호를 캐치하는 게 임무야. 우리가 괴물을 처리하는 동안 넌 감정 파동에 집중해. 그리고 그 파동이 뭔지 알아내.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왜 나를 이 팀에 배치했는지. 왜 내 감정 감지 능력이 필요했는지.
"정민혁, 넌 전투 지원. 괴물 처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준호 보호에만 집중해. 이해했나?"
정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생겼다. 이제야 상황을 인식한 것 같았다.
게이트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색깔이 폭발했다. 빨강, 노랑, 보라, 파랑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음파의 진동이 내 두개골을 때렸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집중해. 호흡을 유지하고 신호를 따라와."
한석우가 말했다. 그의 음성은 냉철했다. 이곳에서는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게이트 내부는 우리가 온 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천장이 없었다. 혹은 천장이 있었는데 너무 높아서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회색의 끈기 있는 물질로 덮여 있었고, 벽은 살아 있는 것처럼 가끔 맥박치듯 움직였다.
"첫 번째 괴물. 정면 15미터."
정민혁이 외쳤다. 그의 신체가 강화되었다. 근육이 부풀어 올랐고, 피부가 푸르게 변했다. 신체 강화 능력. 대가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나중에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괴물이 나타났다. 거미 같은 형태였지만, 거미는 이렇게 크지 않았다. 3미터는 넘었다. 그것의 감정은 분노와 배고픔이 섞인 빨강이었다. 일반적인 괴물의 신호였다.
정민혁이 돌진했다. 그의 주먹이 괴물의 외골격을 때렸다. 딱딱한 소리가 났다. 괴물이 울음을 질렀다. 그 울음은 비명에 가까웠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한석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감정을 읽어. 약점을 찾아."
"네."
나는 괴물의 감정에 집중했다. 빨강이 있고, 또 다른 색이... 있었다. 초록색. 평온함. 그것은 괴물의 등 뒤에 있는 혹 같은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뇌 역할을 하는 기관일 것이었다.
"등 뒤, 혹 부분. 거기가 중추입니다."
한석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을 뽑았다. 아니, 뽑은 게 아니었다. 공중에서 칼이 나타났다. 아, 그건 그가 뽑은 게 맞았다. 내가 본 것이 착각이었나? 손가락이 또 사라졌다. 이번엔 검지였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손가락이 사라졌다. 이건 이상했다. 박수진이 말한 규칙과 맞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한석우가 움직였다. 그의 속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치 화면이 건너뛰어지는 것처럼. 칼이 괴물의 혹을 관통했다. 녹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괴물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무너졌다.
"다음."
한석우가 말했다.
두 번째 괴물은 박쥐 같은 형태였다. 날개가 있었고, 입이 너무 컸다. 그것의 감정은 여전히 분노와 배고픔이었다. 빨강. 일반적인 빨강.
정민혁이 또 돌진했다. 이번엔 그의 고통이 더 컸다. 피가 흘러나왔다. 신체 강화의 대가였다. 한석우가 칼을 휘둘렀다. 또 다시 초록색. 약점을 찾았다.
"좋아. 이제 심층으로 들어가자."
한석우가 말했다.
세 번째 괴물은 인간형이었다. 이등신 크기의 인간형 괴물. 하지만 그것의 얼굴은 여러 개였다. 마치 얼굴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그것을 봤을 때,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것의 감정이...
빨강이었다. 분노. 하지만 동시에 노랑이었다. 해방감. 희열.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했다. 음파가 울렁거렸다. 마치 두 개의 파동이 충돌하는 것처럼.
"이건... 뭐죠?"
나는 중얼거렸다.
"뭐라고?"
한석우가 물었다.
"감정이... 모순적입니다. 분노와 기쁨이 동시에..."
한석우의 얼굴이 굳었다. 파란색이 더 어두워졌다. 슬픔이 아니라 공포였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한석우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 모순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이 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나를 보낸 것이었다.
한석우가 내 눈을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말이 아니라 신호였다. 깊이 들어가.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
정민혁이 괴물에게 돌진했다.
"기다려!"
나는 외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정민혁의 주먹이 괴물을 때렸다.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건 해방의 비명이었다. 기쁨의 비명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정복이 아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정말 구원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인가?
'이건 분노인가 희열인가? 아니... 이건 괴물이 아니라 게이트 자신의 목소리인가?'
내 목소리가 떨렸다.
한석우가 칼을 휘둘렀다. 괴물이 무너졌다. 녹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녹색 액체가 빨강과 노랑으로 변했다. 섞였다. 그리고 흩어졌다.
"나가자."
한석우가 말했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올 때, 나는 뭔가 이상한 신호를 감지했다. 게이트 심층 어딘가에서 울려 오는 음파. 모든 감정이 뒤섞인 음파.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초록. 모든 색깔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돈의 파장.
그것은 괴물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더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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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3층 게이트 입구로 나오자, 아침 햇빛이 얼굴을 때렸다. 새벽 5시 47분.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려 눈을 가렸다. 그때 내 손가락이 보였다. 엄지손가락만 남아 있었다.
"준호, 괜찮아?"
정민혁이 물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피투성이였다.
"네, 괜찮습니다."
거짓이었다.
차에 타고 조직 본부로 돌아가는 길, 시간이 이상했다. 핸드폰 화면은 오전 6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게이트 안에서 경과한 시간을 생각하면 맞지 않았다. 게이트 내부 시간이 왜곡되는 건가? 아니면 내 감각이 이상한 건가?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한석우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정민혁은 뒷좌석에서 붕대를 감은 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내 휴대폰이 울렸다. 알려지지 않은 번호였다. 나는 받았다.
"여보세요?"
"이준호."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박수진이었다.
"첫 임무 수고했어. 결과는 좋았어. 그런데..."
"네?"
"게이트 심층에서 뭔가 감지했지?"
내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알았죠?"
"난 전에도 같은 능력자였거든. 그리고 넌 내가 본 능력자들 중에서 가장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야. 깊이 들어가면... 뭔가 보이겠지. 그 뭔가가 뭔지 알고 싶어."
박수진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뭔데요?"
"그건... 넌 봐야 알 수 있어. 그리고 준호. 엄마를 생각해봐. 언제는 그리웠지?"
전화가 끊겼다.
엄마.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뭔가를 떠올리려고 했다. 엄마의 얼굴. 엄마의 목소리. 엄마와 함께한 시간들.
하지만 모든 것이... 사진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감정이 없었다. 엄마를 사랑했던 그 감정의 자리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을 도려낸 것처럼.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뭔가... 더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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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8시였다. 헌터 연합회 건물은 하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박스였다. 창문이 거의 없었다. 마치 감옥처럼. 아니, 정확히는 게이트처럼. 무언가를 가두기 위한 구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정민혁은 자신의 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팀장, 다음 임무는 언제예요?"
"일주일 뒤."
"그 사이에 뭐해요?"
"훈련. 그리고 보고서 작성."
한석우는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3층. 정보 관리팀.
박수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이 많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고, 모니터 여러 개가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회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색깔이 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무 색깔도 아닌 상태. 마치 사진의 채도를 완전히 낮춘 것처럼.
"준호."
그녀가 나를 불렀다. "결과 보고는 한석우가 하겠지? 난 다른 게 궁금해."
"뭔데요?"
"게이트 심층에서 뭐 느껴졌어?"
나는 한석우를 봤다. 그는 정민혁과 함께 복도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의도적인 거리 두기.
"모순된 감정입니다."
나는 박수진에게 말했다. "분노와 해방감이 동시에. 마치 두 개의 음파가 충돌하는 것처럼."
박수진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의 회색 감정이 살짝 움직였다. 무언가 확인된 것 같은 움직임.
"그렇지. 그게 맞아."
"뭐가 맞다고요?"
"게이트의 진짜 감정. 그걸 느낄 수 있는 능력자는 드물어.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게이트 안의 괴물들만 감지해. 하지만 넌... 게이트 자체의 감정을 읽고 있어."
박수진이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는 내 데이터가 떴다. 사진, 능력 스펙, 감정 소실 진행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손가락 소실 상황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약지, 검지. 엄지손가락만 남은 상태.
"게이트가 뭐예요?"
나는 물었다.
"그건 넌 아직 모를 시간이야.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깊이 들어가면."
박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 준호. 엄마를 생각해봤어?"
내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난 전에 능력자였거든. 그리고 넌 내가 본 능력자들 중에서 가장 빠르게 소실되는 사람이야. 벌써 손가락이 대부분 사라졌지?"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 손가락들은 환각처럼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 소실 과정은 예측 불가능해. 하지만 대체로 먼 기억부터 사라져. 엄마, 할머니, 어린 시절 친구들. 그 다음이 현재의 사람들이야."
박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회색 감정이 더 진해졌다.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 그걸 마지막까지 느낄 수 없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거야. 너는 그 사람이 누구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경.
아내의 이름을 생각했을 때, 나는 뭔가를 느껴야 했다. 사랑. 감사. 죄책감. 뭐든지. 하지만 내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을 파낸 것처럼.
"집에 가."
박수진이 말했다. "아내한테 안녕이라고 해."
나는 본부를 나왔다. 한석우와 정민혁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남겨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은 아직 내 얼굴이었지만, 뭔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천천히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처럼.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유경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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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였다. 문을 열자마자 유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있었어! 전화 왜 안 받아!"
그녀가 거실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감정은 빨강이었다. 분노. 하지만 그 빨강 안에는 검은색이 잔뜩 들어 있었다. 공포. 그리고 그 공포 안에는 파란색이 있었다. 슬픔.
"미안해."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라니! 넌 어디 다쳤어! 피투성이 아니야!"
유경이 내 팔을 잡았다. 내 셔츠에 진짜 피가 묻어 있었다. 정민혁의 피였나, 아니면 괴물의 피였나.
"괜찮아."
나는 말했다. "임무 중에 조금 다쳤을 뿐이야. 괜찮아."
유경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감정이 더 선명해졌다. 분노, 공포, 슬픔. 모든 것이 동시에.
"넌 뭐가 괜찮아! 나는 미쳐 있었어! 아침부터 뉴스 봤어! 게이트에서 헌터가 죽었대! 넌 왜 전화를 안 받아!"
그녀는 내 가슴을 치고 있었다. 약한 주먹이지만 그 안에는 모든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감정을 명확히 읽을 수 있었다. 분노 뒤의 공포. 공포 뒤의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의 사랑. 하지만 나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내 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울고 있는데, 나는 그 눈물에 반응할 감정이 없었다.
"미안해."
나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유경을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을 들어 그녀를 감싸려 했다. 하지만 내 몸이 거부했다. 마치 내 몸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인 것처럼. 팔이 움직이지 않았고, 입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명확히 감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유경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 색깔이 흐릿해졌다. 슬픔에 잠긴 파란색. 그리고 내 감정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정오였다. 유경은 거실의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이제 진정되어 있었다. 피로의 회색과 슬픔의 파란색이 섞여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하얀 천장. 그리고 그 천장 위의 무언가. 게이트 심층에서 들었던 음파. 모든 감정이 뒤섞인 혼돈의 파장.
손을 들어 봤다.
엄지손가락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사라지고 있었다.
얇아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는 것처럼. 혹은 내가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를 생각해봐.
박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어제... 엄마를 생각했는데... 그리움이 없었다.
그건 언제부터였지?
손가락이 사라진 것도 이상했지만, 이것이 더 이상했다. 엄마를 사랑했던 그 감정.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국을 먹을 때 느껴던 따뜻함.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손.
모두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다. 사진처럼. 감정이 없는 사진처럼.
내 눈을 떴다.
천장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내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그리고 그 흐릿함 안에서 나는 뭔가를 봤다.
게이트.
게이트가 내 침실에 나타나 있었다. 거대한 검은 구멍. 절망과 해방감이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빨강과 노랑이 뒤섞여서. 하지만 이건 불가능했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게이트가 보인다? 아니면 이건 환각인가?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준호..."
"이준호..."
음성이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내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두 음성이 겹쳐 있었다. 마치 내가 이미 게이트의 일부인 것처럼. 그 목소리가 게이트 자신인지, 내 무의식인지, 아니면 누군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침실은 침실이었다. 천장은 천장이었다. 게이트는 없었다. 모두 꿈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꿈은 너무 생생했다.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완전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없었다.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준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 가지였다.
나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계속 들렸다. 침실의 어둠 속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