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52분, 나는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석우 팀장의 질문이 자꾸만 맴돈다. 타인의 감정을 감지한다는 것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얼마나 숨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다. 침묵하는 동안 그의 감정을 읽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 의심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더 어두운 것이 있었다. 슬픔. 오래된 상처.
"조직에 들어오면 정확한 검사를 받게 됩니다."
한석우가 일어서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 순간, 내 손가락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약지부터. 아니, 이미 사라졌나? 손을 펼쳐 봐도 다섯 손가락이 있다. 하지만 감각은 명확했다. 뭔가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가 점진적으로 무감각해지는 증상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 말이 떠나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간호사에게 퇴원 서류에 사인했다. 퇴원은 빨랐다. 마치 나를 내보내려는 것처럼.
오전 7시 15분, 아파트 입구.
유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코트, 언제나 그렇게 입는 옷. 하지만 그 아래 떨리고 있는 어깨. 그리고 얼굴에 그려진 미소. 그 미소가 거짓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읽고 있었다.
"안녕, 많이 놀랐지?"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주변에 흐르는 감정은 깊은 파란색이었다. 슬픔. 아니, 그보다 더. 공포. 불안.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응, 괜찮아."
내 말이 자연스러웠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도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내 아내의 불안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더 이상한 것은—
그녀를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폐허에서 나왔을 때 정말 죽은 줄 알았어."
유경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향기. 라벤더. 그런데 그 향기가 불러일으켜야 할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한 모든 순간들. 라벤더 향초를 샀던 날. 그때 그녀가 웃던 표정. 그 웃음 속의 기쁨. 모두 흐릿하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동기적으로, 자동적으로. 아내에게 해야 할 행동. 그런데 왜 그것이 행동처럼 느껴질까?
아파트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녀를 다시 봤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유경."
"응?"
"당신 감정이 파란색인데, 왜 웃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안의 공간이 갑자기 좁아진 것 같았다.
"그건 무슨 말이야?"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공포. 내가 변했다는 공포. 내가 자신을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 아래에는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절망.
"미안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거짓말했다. 그리고 그 거짓이 그녀를 안심시킨 것 같았다. 그녀의 파란색이 조금 옅어졌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전 8시 42분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은 나를 유경이 담요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뭔가를 준비했다. 계란말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 그런데 왜 그것을 기억하는가? 내가 좋아한다고 누가 말했나?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기억이었을 텐데, 지금은 데이터처럼 느껴진다.
"먹어."
유경이 밥을 건넸다.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밥을 먹었다. 맛이 있었나? 없었나? 나는 모르겠다. 단지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준호, 정말 괜찮아?"
"응, 충분히 쉬었어."
거짓.
정오가 넘어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유경이 도어폰을 눌렀다. 그 순간, 나는 감지했다. 새로운 감정. 회색이 섞인 초록색. 안정감.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뭔가. 계산. 하지만 무엇을 계산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준호를 감시하려는 것인가? 그의 능력을 착취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게이트 자체를 제어하려는 것인가?
"저 박수진이라고 합니다. 헌터 연합회에서 왔습니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감정이 적은. 하지만 음파는 명확했다. 거짓이 없다. 진정한 초록색. 그런데 그 아래의 계산은 무엇인가?
유경이 나를 바라봤다. 질문하는 눈빛.
"들어와."
박수진은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검은 정장. 단정한 외모.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나를 보는 눈. 마치 표본을 관찰하듯이.
"이준호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헌터 연합회 모집 담당 박수진입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손의 온도. 따뜻했다. 하지만 감정은 차가웠다. 전문적인 차가움.
"귀하의 능력에 대해 들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사례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알고 계신가요?"
"타인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다고. 색상과 음파로."
정확했다. 한석우가 보고했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얻었나?
"조직에 들어오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유경이 내 손을 잡았다. 팔짱을 끼웠다. 그 파란색이 다시 짙어졌다. 불안.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멈춘 감정. 분노? 아니. 절망에 더 가깝다.
"조건이 있습니다."
박수진이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단지 들고만 있었다. 그것이 시간을 버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능력을 공개하지 않는 것."
박수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음파는 울렁거렸다. 거짓. 하지만 어떤 부분이 거짓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능력자는 등록되어야 합니다."
"그럼 내 능력은 일반 감지 능력이라고 등록해 주세요. 조금 강화된."
"그것도 거짓입니다."
침묵.
"나는 전직 각성자입니다."
박수진이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감정을 다시 읽으려 했다. 하지만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에 저도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정 기록'. 특정 장소의 감정 흔적을 읽을 수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없습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분명한 무언가가 있었다.
"능력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합니다. 능력이 강해질수록, 뭔가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당신도 곧 알게 될 겁니다."
그 말이 떠난 후,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헌터 연합회 입사 서류는 간단했다. 신원 확인. 능력 등급 평가. 그리고 계약서. 기밀 유지. 조직에 대한 절대 복종. 위험 상황에서의 우선 배치. 나는 모든 것에 서명했다. 펜을 들었을 때, 손가락이 또 사라지는 환각이 들었다. 약지. 그것이 가장 먼저 사라질 손가락이었다. 나는 그 손가락으로 서명했다.
박수진이 떠난 후, 유경은 나를 바라봤다.
"정말 가야 해?"
"응."
"왜?"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능력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뭔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따라가야 할 것 같다.
"약속해 줄 거 있나?"
유경이 물었다.
"뭐?"
"돌아와. 언제든 돌아와. 아무리 변해도 돌아와."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뭔가 느껴야 했다. 사랑. 아니면 죄책감.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파란색 감정만 읽었을 뿐이다.
"응, 돌아올게."
거짓.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유경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준호..."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 했다. 입술이 떨렸다. 분노가 폭발하려는 순간, 그녀는 그것을 삼켰다. 대신 눈물이 흘렀다.
"제발. 제발 돌아와. 그냥 살아서만 돌아와."
나는 그녀를 안으려고 팔을 들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을 움직일 감정이 없었다. 안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움직일 감정이 없었다. 마치 내 팔이 다른 누군가의 것처럼, 나와 단절된 채로.
"미안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미안함. 거짓된 약속. 그리고 그녀의 절망을 읽어내는 능력. 하지만 그 능력으로는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
유경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현관에 남겨졌다. 밤 11시 43분. 손가락을 다시 세었다. 다섯 개. 모두 있다.
그런데 왜 점점 더 사라지는 느낌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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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간의 훈련이 나를 갉아먹었다.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체력 운동. 능력 측정. 게이트 접근 훈련. 매일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나는 뭔가를 잃고 있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감정. 하나씩, 조용히.
훈련 중 나는 내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정민혁의 감정을 읽고, 한석우의 의도를 파악하고, 박수진의 숨겨진 계산을 감지했다. 그리고 매번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떨어져 나갔다. 기쁨. 슬픔. 분노.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무감각뿐이었다.
밤 10시 30분, 사무실.
한석우 팀장이 내게 말했다.
"내일부터 너는 실제 게이트 임무에 투입된다. 우리가 진행 중인 지하 3층 게이트. 어렵지 않을 거다."
"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게 있다. 게이트 안의 감정들은 거짓일 수 있다. 너는 감지 능력이 있으니까 그걸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의 파란색 감정이 진동했다.
"왜죠?"
"왜냐하면 게이트 안에서는 모든 감정이 참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너는 그것을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고 하면 너는 사라진다."
"사라진다?"
"감정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의 눈에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 아니면 광기.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팀장님."
"뭐?"
"당신이 게이트를 진짜 두려워하고 있어요."
침묵.
"아니다. 나는 게이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게이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것을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 말 이후, 나는 그의 감정을 더 이상 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절망감이 내 안에 박혀 있었다. 그것이 내 절망감인지, 그의 절망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무실 한쪽 구석에 정민혁이 앉아 있었다. 노란색. 밝은 노란색. 하지만 그 안에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아, 신입이군요! 저 정민혁입니다. 팀장님 다음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이준호."
"준호님 어제 뉴스 봤어요? 게이트 폭발 사건? 정말 무섰던데, 그런데 혼자 살아나셨대요. 정말 강운이시네요."
강운. 그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나는 강운이 없다. 나는 저주받았다. 그리고 그 저주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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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30분, 헌터 연합회 본부 지하 3층 게이트 입구.
팀원들이 모였다. 한석우. 정민혁. 그리고 나.
게이트는 거대한 검은 구멍이었다. 그것은 문이라기보다는 상처에 더 가까웠다. 살아 숨 쉬는 상처. 그 안에서 뭔가가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안의 감정을 읽으려 했다.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 개. 모두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감정이 없었다.
절망.
해방감.
공포.
기쁨.
모든 것이 한 번에 밀려왔다. 게이트의 감정이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박수진의 경고가 떠올랐다. 모든 감정이 참이라는 말. 그렇다면 이 모순은 무엇인가? 절망과 해방감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게이트는 무엇을 원하는가?
"준호? 괜찮아?"
정민혁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거짓.
한석우가 손을 들었다.
"들어가자."
우리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우리를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박수진이 말했던 말.
「능력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합니다.」
나는 이미 변하고 있다.
내 감정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출 수 없다.
게이트 안은 절대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색깔이 없었다. 모든 색깔을 삼키는 빛. 나는 앞을 볼 수 없었다. 정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앞에 뭔가 있어요!"
그것은 괴물이었다. 거대한 형태. 하지만 그 형태는 계속 변했다. 인간처럼 보였다가 짐승처럼 변했다. 그리고 다시 무언가 다른 것으로.
"정민혁, 뒤로!"
한석우가 외쳤다. 그의 손에서 빛이 나왔다. 검은 빛. 아니, 그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을 깎아내는 칼날이었다.
나는 그 괴물의 감정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에게는 감정이 없었다. 대신 있는 것은 욕망. 순수한 욕망. 그것이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를 원하고 있었다.
괴물이 움직였다. 정민혁을 향해.
"아!"
정민혁의 비명이 들렸다. 그의 팔에서 피가 흘렀다. 상처.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상처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감정. 정민혁의 감정이 상처 밖으로 흘러나왔다.
공포.
절망.
그리고 무언가 더.
"준호! 뒤로 물러나!"
한석우가 나를 밀었다. 나는 벽에 부딪혔다. 내 등이 벽에 닿은 순간, 나는 뭔가를 느꼈다. 벽이 살아 있다는 것. 게이트의 벽이 나를 흡수하려고 했다.
내 피부가 저렸다. 손가락이 마비되었다. 목소리가 변조되었다.
"팀장님..."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게이트의 목소리였다.
한석우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준호?"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정민혁이 일어났다. 그의 팔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움직였다. 괴물을 향해.
"정민혁, 뭐 하는 거야!"
한석우가 외쳤다.
하지만 정민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게이트의 색깔.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아, 이거... 이거 뭐야..."
정민혁이 웃었다.
"팀장님, 이거 정말... 정말 아름다워요..."
그의 감정이 읽혔다. 절망에서 해방감으로. 공포에서 기쁨으로. 모든 것이 뒤섞였다. 그것이 모순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게이트 안에서는 모든 감정이 참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한석우가 정민혁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정민혁!"
그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정민혁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변하고 있다.
우리는 게이트가 되고 있다.
내 시야가 왜곡되었다. 벽이 천장이 되고, 천장이 바닥이 되었다. 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나는 더 이상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었다.
"준호! 나를 봐!"
한석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왜곡되었다. 음파가 깨졌다. 그의 목소리가 다르다. 이전의 한석우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아니라 절망이 담겨 있다.
나는 내 손을 봤다.
손가락이 없었다.
다섯 개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대신 있는 것은 자유로움. 뭔가에서 해방된 느낌. 손가락이 없어서 행복했다. 통증이 없다는 것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고, 감각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다. 완벽한 자유다.
"아..."
나는 웃었다.
그것이 내 웃음인지, 게이트의 웃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한석우가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어둠이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어났다.
아니, 깨어난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게이트 입구. 새벽 4시 30분.
한석우. 정민혁. 그리고 나.
게이트는 거대한 검은 구멍이었다. 살아 숨 쉬는 상처.
"들어가자."
한석우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다르다. 이전보다 더 낮고, 더 무겁다. 마치 이미 절망을 알고 있는 자의 목소리처럼.
우리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우리를 삼켰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게이트는 나를 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손가락이 없어도 괜찮다.
감정이 없어도 괜찮다.
나는 게이트가 되고 싶다.
그리고 게이트는 나를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