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정을 넘긴 사무실
자정을 넘긴 사무실은 조용했다. 모니터 불빛만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준호는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목을 돌렸다. 어깨가 결렸다. 내일 아침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내 이유경은 벌써 자고 있을 거다. 침대 한쪽을 비워두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뒤집혔다.
천장이 내려앉지 않았다. 천장이 흔들렸고, 벽이 울렸고, 모든 게 한 점으로 압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 창밖에서 진한 자주색 빛이 터져 나왔다. 게이트다. 게이트 폭발이다.
준호는 책상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 직후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등을 지났다. 따뜻한 액체가 흘렀다. 피다.
"누구 있어?!"
누군가가 외쳤다. 층간 어딘가에서.
"층계로! 계단으로 나가!"
또 다른 목소리. 그런데 그 목소리에서 뭔가가 보였다.
색깔이다.
보라색. 짙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이 음파처럼 울렁거리며 준호의 뇌를 때렸다. 공포다. 그건 공포였다. 누군가의 공포가 그냥 '들렸다'. 목소리가 아니라 감정이 파장으로 전달되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나도 나가야 해."
자신이 중얼거린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서도 보라색이 나왔다. 자신의 공포가 자신의 귀에 들렸다. 이게 뭐지?
건물이 기울었다. 책상이 미끄러졌다. 준호는 손으로 책상 다리를 잡았다. 금속이 울렸다. 높은음의 비명이 아래층에서 올라왔다. 그 비명에서 보라색이 쏟아져 나왔다. 무수한 보라색, 겹겹이 쌓인 공포의 파장.
그리고 무언가 빨간색이 섞였다.
분노? 절망? 준호는 구분할 수 없었다. 색깔이 흐릿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음파가 울렁거렸다. 마치 거짓된 감정처럼. 아니, 거짓이 아니라 뒤섞인 거다. 절망 속의 분노. 분노 속의 절망.
건물이 완전히 넘어갔다.
준호는 떨어졌다. 어둠 속으로. 물건들과 함께.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그 비명은 보라색이었다가 빨간색이었다가 검은색이 되어갔다.
마지막 순간, 준호는 생각했다. 이게 죽음이구나. 그리고 그 생각에서도 보라색이 나왔다.
***
눈을 떴을 때 준호는 살아 있었다.
폐허 위에 누워 있었다. 콘크리트 가루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왼쪽 다리가 욱신거렸다. 팔이 저렸다. 그런데 그 고통보다 강한 게 있었다.
감정이다.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 음파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준호가 눈을 뜬 순간, 그 음파가 증폭되었다.
"저기! 저기 사람 있어!"
누군가가 외쳤다. 그 음성에서 노란색이 나왔다. 희망. 아니, 정확히는 기쁨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쁨이었다. 구조자의 기쁨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색깔들이 겹쳐졌다.
검은색. 무언가 짓눌린 느낌. 죄책감? 아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더 깊은 무언가. 자신이 구했지만 누군가는 못 구했다는 절망. 음파가 울렁거렸다. 거짓된 기쁨 아래 숨겨진 진정한 절망.
"다리 조심해! 저 잔해 위로 올라와!"
또 다른 목소리. 파란색이다. 슬픔. 하지만 결연함이 섞여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뒤섞여 있다. 슬픔 속의 결연함. 슬픔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겠다는 감정.
준호의 뇌가 과부하 상태였다.
색깔이 너무 많았다. 음파가 너무 컸다. 마치 라디오의 모든 주파수를 동시에 들으려는 것처럼 뇌가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울림이 통증이 아니라 정보였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이분 괜찮으신가요? 대답해 주세요!"
누군가가 준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접촉에서 주황색이 나왔다. 걱정. 진정한 걱정이었다. 파장이 맑고 고르게 울렸다. 거짓이 없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한 손가락. 두 손가락. 세 손가락.
"움직인다! 의식이 있어! 구급차 불러!"
누군가가 무전기를 들었다. 그 음성에서 보라색이 흘러나왔다. 두려움. 조금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이 사람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이 누군가를 제대로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보라색으로 울렸다.
준호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건 소리가 아니라 색깔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혼란. 공포. 그리고 무언가 더.
그 무언가가 뭔지 준호는 몰랐다.
***
구급차는 빠르게 움직였다.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 음파에 색깔이 있었다. 경고의 노란색. 긴박함의 빨간색. 음파 자체가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의료진이 준호의 상처를 확인했다. 오른쪽 팔이 골절된 상태였다. 갈비뼈도 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운이 좋으셨네요. 정말 운이 좋으셨어요."
의료진의 목소리에서 노란색이 나왔다. 안도감. 하지만 그 아래 어두운 색깔이 있었다. 죄책감. 자신이 못 구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게이트 근처에 있었나요?"
"네. 사무실에 있었어요."
"그럼 더 운이 좋으신 거네요. 게이트 폭발에서 백 미터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존율은 보통 15퍼센트 미만입니다."
의료진이 주사를 놓으면서 설명했다. 음성에는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색깔은 명확했다. 파란색. 슬픔. 자신이 본 많은 죽음들에 대한 슬픔.
"게이트가 뭐예요?"
준호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에서 보라색이 나왔다. 공포. 순수한 공포.
"3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초차원 공간입니다. 처음엔 한국에서만 나타났는데, 지금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상태고요. 안에는 괴물이 있어요. 아직 정확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매우 위험합니다."
의료진의 설명에서 파란색이 흘러나왔다. 거짓이 아니었다. 이건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파장이 조금 울렁거렸다.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뭔가 준호의 뇌에서 일어났다. 마치 라디오가 한 주파수에서 다른 주파수로 넘어가는 것처럼. 음파가 변했다.
순간적으로,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모든 색깔이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뭔가 다른 형태로.
준호는 깨달았다. 뭔가 자신 안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아주 작은 뭔가. 하지만 분명히 뭔가.
손가락을 세어봤다.
왼손 다섯 개. 오른손 다섯 개. 열 개.
그런데 왜 그의 뇌에서는 아홉 개가 세어지는 거지?
***
병원 응급실은 혼란스러웠다. 준호 외에도 게이트 폭발로 인한 환자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의료진은 바쁜 손놀림으로 상처를 처리하고 있었고, 보호자들의 울음소리와 의료진의 지시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자신의 팔이 깁스에 감싸여 있었다. 갈비뼈 통증으로 숨을 깊게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건 다른 무언가였다.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경. 아침에 준호를 배웅할 때의 그 표정. 그 표정에서 나는 감정이 뭐였지? 사랑? 맞다, 사랑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감정이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색깔로는 기억난다. 핑크색. 따뜻한 핑크색. 하지만 그 색깔이 주는 감정의 강도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마치 사진이 바래지는 것처럼.
옆 침대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회사 동료였다. 박과장. 게이트 폭발 당시 준호 옆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박과장의 주변에서 색깔이 흘러나왔다.
빨간색. 분노. 그런데 그 아래에 파란색이 있었다. 슬픔. 그리고 그 아래에는 보라색. 공포.
세 가지 감정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준호는 눈을 깜빡였다. 색깔들이 음파로 변환되었다. 파장의 울렁임. 빨간색의 분노는 격렬하지만 짧은 주기로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불길이 튀는 것처럼. 파란색의 슬픔은 깊고 길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보라색의 공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 진실이었다.
박과장은 정말로 화나고, 슬프고, 무섭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마치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그 순간, 준호의 뇌에서 다시 뭔가 일어났다. 라디오 주파수가 변하는 소리. 색깔들이 재정렬되었다.
그리고 또 뭔가 사라졌다.
더 작은 뭔가가.
준호의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왼손 손가락을 하나씩 세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다섯 개. 오른손도 다섯 개. 열 개.
그런데 자신의 뇌에서는?
여덟 개.
또 하나가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뭔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박과장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 신음에서 여러 색깔이 섞여 나왔다. 준호는 그 색깔들을 읽을 수 있었다. 고통. 분노.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절망.
준호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박과장이 준호를 바라봤다. 놀란 표정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냥... 다리가 좀 아프네요."
박과장의 말에서 거짓이 흘러나왔다. 검은색. 그 아래에는 진정한 고통이 있었다.
준호는 알았다. 박과장이 자신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왜 숨기는지도.
"간호사를 불러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박과장이 말했다. 역시 거짓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도 많은 것을 숨기고 있으니까.
준호는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을 세는 행동을 멈췄다. 세면 셀수록 뭔가가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
밤이 깊었다.
병원 응급실의 불빛은 밝지만, 창밖은 검은 밤이었다. 준호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료진이 검사를 모두 마쳤다고 했다. X-ray, CT 스캔, 혈액 검사.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신기하게도.
의사는 말했다.
"매우 운이 좋으신 분입니다. 이 정도의 폭발에서 이렇게 가벼운 외상만으로 살아나신 분은 드뭅니다. 내부 출혈이나 두부 외상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 관찰하고 나면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은 거짓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불완전한 진실이었다.
의사 자신도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의료 기기는 그것을 감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부의 문제였다. 깊은 내부의.
준호는 손가락을 다시 세었다. 이번엔 천천히. 의식적으로. 왼손의 엄지부터 시작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다섯 개. 오른손도 다섯 개. 열 개.
맞다. 손가락은 열 개다.
그런데 뇌에서 세어지는 것은?
일곱 개.
정확히 일곱 개였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뭐가 사라졌을까?
아침. 아내가 자신을 배웅할 때의 감정. 그 감정이 흐릿해졌다. 그거였나? 그리고 또 뭐가 있었나? 어제? 어제는 뭐했지? 점심을 먹었나? 누구와? 왜 기억이 안 나지?
공포가 밀려왔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의료 기기에 연결된 손이 떨리자 경보음이 울렸다. 간호사가 달려왔다.
"괜찮으신가요? 진정제를 놓아드릴까요?"
간호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있었다. 하늘색. 밝은 하늘색. 진정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악몽을 꿨어요."
준호가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을 했을 때, 자신의 주변에서 검은색이 흘러나왔다. 거짓.
간호사는 그 색깔을 볼 수 없었다.
진정제가 준호의 팔에 주입되었다.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준호의 뇌에서 또 다른 색깔이 터져 나왔다.
초록색. 평온. 하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더 있었다. 그 색깔은 무엇인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그 색깔이 무엇인지, 그 색깔이 주는 감정이 무엇인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감정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새벽 4시.
병원은 조용했다. 거의 모든 환자가 자고 있었다. 준호만 깨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려고 해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여보, 괜찮아? 뉴스에서 봤는데..."
이유경의 목소리에 공포와 사랑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들었다. 음성뿐만 아니라 색깔로도.
"응, 괜찮아. 운이 좋았어."
준호가 말했다.
"운이 좋긴 뭐가 좋아? 죽을 뻔했잖아! 내일 아침 일찍 가서 데려올게. 그냥 집에서 쉬자. 회사는 상관없고."
아내의 말에서 사랑이 흘러나왔다. 진실한 사랑. 그 색깔은 핑크색. 따뜻한 핑크색.
그런데 준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없었다.
색깔로는 보이지만, 감정으로는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마치 외국어로 쓰인 단어를 읽는 것처럼. 글자는 보이지만 뜻을 모르는 것처럼.
"응, 고마워. 사랑해."
준호가 말했다.
"나도 사랑해. 정말 많이."
전화가 끝났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아내의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따뜻함. 걱정. 사랑.
하지만 뭔가 빠져 있었다.
마치 영화를 자막 없이 보는 것처럼. 입술이 움직이고 음성이 나오지만,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준호는 눈을 감았다. 아내의 목소리를 더 강하게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마치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손가락을 다시 세었다.
여덟 개.
아니다. 다시 세어봤다.
일곱 개.
또 하나가 사라졌다.
***
아침이 되었을 때, 헌터 연합회의 구조대가 병원에 나타났다.
검정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 그들의 배지에는 빨간 원이 있었다. 게이트 헌터의 표시였다.
"이준호 씨?"
앞장선 사람이 물었다. 중년의 남자였다. 그의 주변에서 파란색과 초록색이 흘러나왔다. 슬픔과 평온의 섞임. 복잡한 감정이었다.
"네, 제가 그렇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헌터 연합회 3팀 팀장 한석우입니다. 당신이 게이트 폭발에서 살아났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조사를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석우가 말했다.
"조사요?"
"게이트 폭발에서 그 정도의 거리에서 생존한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혹시 당신이 각성자는 아닐까 해서."
한석우의 말에서 의심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악의가 아니었다. 단순한 확인이었다.
"각성자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게이트 사건 이후로 일부 사람들이 초능력을 각성했습니다. 당신이 혹시 그런 능력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한석우가 물었다.
준호는 한 순간 망설였다. 말해야 할까? 말하지 말아야 할까?
그 순간, 준호의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손가락을 센다.
왼손 다섯 개. 오른손 다섯 개. 열 개.
그런데 뇌에서는?
육 개.
또 하나가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능력을 숨기지 못하면 자신이 무엇이 되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아뇨. 특별한 능력은 없습니다."
준호가 거짓말을 했다.
검은색이 흘러나왔다. 거짓.
한석우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을 세는 행동. 그것은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경증이었다.
한석우는 알았다. 이 남자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네요."
한석우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준호는 알았다. 한석우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증거가 없다는 것도.
"응, 그런 것 같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한석우는 준호를 한 번 더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질문이 있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숨기는가? 그 질문이 눈에 담겨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회복 후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상한 일이 있으시면 이 번호로."
한석우가 명함을 건넸다.
준호는 명함을 받았다.
그 순간, 준호의 뇌에서 색깔이 터져 나왔다.
한석우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났다.
이 사람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만남에서 거짓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석우와 그의 팀원들이 병실을 나갔다.
그 순간, 준호의 뇌에서 또 다른 색깔이 터져 나왔다.
그 색깔은 무엇인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석우가 떠난 후에도 자신이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 거짓말이 들통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
***
오후 2시.
병실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내일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내가 내일 아침 일찍 데러 온다고 했다.
내일 아침.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더 사라질까?
준호는 손가락을 다시 세었다.
육 개.
여전히 육 개였다.
하지만 언제 오 개가 될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오 개가 되었을 때, 그 다음은?
손가락을 세는 것을 멈췄다. 손가락을 세면 셀수록 뭔가가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상태를 인식할 때마다 변화가 가속화되는 것처럼.
준호는 눈을 감았다.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일 아침 자신을 데러 올 그 얼굴.
그때까지 아내를 기억할 수 있을까?
그 색깔을 느낄 수 있을까?
그 감정을 인식할 수 있을까?
준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 확실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뭔가가 점점 빨리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내일 아침, 아내가 올 때.
자신이 아내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