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실
지하실 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3층 다락방에서 내려와 2층을 지나고, 1층 주방 뒤 복도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벽장 같은 나무문이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는 검게 녹슬어 있었고, 문 테두리엔 먼지가 손가락 두 마디 높이로 쌓여 있었다. 20년. 20년 동안 아무도 이 문을 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잡이를 만져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만져야 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저릿거렸고, 팔뚝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감각. 아니다. 누군가가 아니라 뭔가가. 저 문 너머에서.
"여기야."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목소리였다. 지난 3일간 들어온 그 울음과는 다른 톤이었지만, 같은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절박함 대신 확실함이 담긴 목소리. 명령.
"이제 와."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경첩이 녹슬어 서로 부딪치는 소리.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어둠이 아니라 냉기였다. 콧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했다. 그리고 뭔가 더. 달콤하면서도 썩은 냄새. 오래되고, 오래되고, 정말 오래된 냄새.
계단이 보였다. 시멘트로 포장된 계단. 각 모서리는 이끼가 끼어 있었고, 벽면은 물이 흘러내린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세상이 기울었다.
가슴이 철렁하는 감각. 마치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듯이. 하지만 내 발은 계단에 닿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유낙하하는 기분인가.
아. 이건 기억 흡수가 아니었다. 기억 흡수는 물건을 만질 때 일어난다. 이건 다르다. 이건 그냥... 끌려가는 것이었다.
"내려와."
울음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울음이라고 해도 좋고, 신음이라고 해도 좋고, 호출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절망과 희망. 공포와 위안. 죽음과 초대.
나는 한 발, 또 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가 진해졌다. 밀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마치 물속으로 잠수하는 것처럼. 5걸음. 10걸음. 손전등을 켰지만 불빛이 2미터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 어둠은 자연스러운 어둠이 아니었다. 뭔가가 빛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느껴졌다.
누군가가 여기서 죽었다. 오래전에. 정말 오래전에.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몇십 번. 몇백 번.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느낌. 층층이 내려앉은 무덤 같은 공간.
지하실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때, 나는 한 번에 무릎을 꿇었다.
숨이 차올랐다. 폐가 조여드는 느낌. 손전등이 떨렸고, 빛이 벽면을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그 와중에 무언가가 보였다. 상자. 커다란 나무상자. 1950년대쯤으로 보이는 낡은 트렁크.
나는 기어가서 상자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
*어둠. 그 안에 나. 하지만 나는 여기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이고, 누군가는 나이다.*
*"누나."*
*목소리가 들린다. 어린 목소리. 남자아이. 여섯 살? 일곱 살?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
*"누나는 어디야?"*
*나는 답할 수 없다. 목이 나오지 않는다. 입술이 떨린다.*
*"누나, 나랑 놀아. 여기 어두워. 누나, 제발."*
*손이 닿는다. 작은 손. 따뜻한 손. 하지만 점점 차가워진다. 아니다. 내 손이 차가워진다. 내 손이 죽고 있다.*
*"누나? 누나?!"*
*울음. 비명. 절규.*
*하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게 섞여 있다. 울음이 아니라 명령. 절규가 아니라 초대.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것이 이 목소리를 빌려 쓰고 있다.*
*"함께 있어. 여기 함께 있어. 영원히."*
*나는 거부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여기 있다. 나는 이미 죽어 있다. 나는 이미...*
---
나는 비명을 지르며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지하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상자는 이미 손을 놓친 상태였고, 손전등은 떨어져 있었다.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다. 심장박동이 정상이 아니었다. 빨랐다가 느렸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구조 신호가 아니야."
목소리가 이상했다. 낮고, 거친.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목구멍을 빌려 쓰는 것 같은 느낌. 나는 목을 간지렸다.
"이건... 초대야."
그런데 왜 내 발은 움직이지 않는가. 왜 나는 계속 이 지하실에 있고 싶은가. 왜 나는 저 상자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불빛이 지하실 벽을 훑었다. 벽은 시멘트였다. 곰팡이가 피어 있고, 여기저기 물이 새는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손자국. 수십 개의 손자국이 벽에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의 손자국. 어른 남자의 손자국. 어른 여자의 손자국. 모두 다른 크기, 모두 다른 시대의 손자국이 한 벽면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벽을 짚으며 내려가려고 했던 것처럼. 아니면 올라가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손자국 중 하나에 내 손을 갖다 맞춰봤다. 크기가 같았다. 정확히 같았다.
손자국을 만졌을 때, 기억이 폭발했다.
---
*1923년. 누나는 동생을 감싸 안고 있다. 어둠 속에서.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괜찮아. 누나가 있잖아."*
*거짓말이다. 괜찮지 않다. 누나의 팔은 떨리고 있다. 동생의 손은 점점 차가워진다. 누나는 동생을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호할 수 없었다. 누나는 무력했다. 그리고 동생은 죽었다. 누나의 품 안에서.*
*"누나... 무서워."*
*"괜찮아. 곧 나갈 거야."*
*거짓말. 또 거짓말. 누나는 알고 있다.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어둠에서 절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누나는 깨닫는다. 자신이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
*1950년대. 다른 누나. 다른 동생. 같은 지하실.*
*"누나, 배고파."*
*"조금만 있어. 곧 아빠가 올 거야."*
*아빠는 오지 않는다. 아빠는 이미 죽었다. 이 저택에서. 이 지하실에서. 누나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유일한 위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말도 점점 약해진다. 아이의 울음이 점점 약해지고, 아이의 손이 점점 차가워진다. 누나는 아이를 안고 있지만, 아이를 구할 수 없다. 누나는 이미 죽어 있고, 아이도 죽어간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된다. 계속. 계속. 계속.*
---
*1987년. 또 다른 누나. 또 다른 동생. 같은 지하실.*
*"누나...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쉬는 거야."*
*누나는 거짓말을 한다. 누나는 사실 죽고 있다. 천천히. 이 지하실의 공기를 마시며. 이 벽의 손자국을 만지며. 이 어둠에 잠식되며. 누나는 이미 저택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동생도. 동생도 곧 저택이 될 것이다. 모두가. 모두가 이 벽에 손자국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
나는 손자국에서 손을 떼었다.
손이 떨렸다. 팔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뭔가 내 안에서 떨렸다. 정체성이 떨렸다. 기억이 떨렸다. 나라는 개념이 떨렸다.
나는 누구인가.
이준호? 정말 이준호인가? 아니면 저 벽에 남겨진 수십 개의 손자국 중 하나인가? 아니면 지하실에 묻힌 뼈인가? 아니면 1923년의 죽음인가, 1950년대의 죽음인가, 1987년의 죽음인가?
나는 일어섰다. 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다리를 빌려 쓰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갔다. 한 발, 또 한 발. 손전등이 떨렸고, 불빛이 계단의 모서리를 비추고 또 비췄다. 이끼. 곰팡이. 습기. 그리고 그 냄새. 죽음의 냄새.
1층에 올라왔을 때,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처럼 생긴 누군가. 하지만 눈이 다르다. 눈빛이 깊고, 마치 여러 사람의 눈이 한 얼굴 안에 겹쳐 있는 것처럼. 그 눈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내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 형상의 입이 움직였다. 천천히.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입을 조종하는 것처럼. 입술이 벌어지고 다시 닫혔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음성대역이 맞지 않았다. 입이 움직이는데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렸다.
"함께 있어."
거울 속 형상의 눈동자가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왼쪽 눈은 나를 바라보고, 오른쪽 눈은 지하실 쪽을 바라봤다. 마치 두 개의 시선이 한 얼굴 안에 공존하는 것처럼.
나는 거울을 돌려놓았다.
거울은 벽에 기대 있던 상태에서 뒤로 넘어졌다. 유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등받이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택 전체에. 모든 방에. 마치 신호음처럼.
그 순간, 1층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린 목소리. 어른 목소리. 여러 목소리. 모두가 한 번에.
"왔어. 이제 왔어."
나는 손을 떨면서 바라봤다. 내 손이 맞나. 이 손이 정말 내 손인가. 손가락의 골절 자국이 보였다. 여러 개의 골절 자국.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골절 자국들. 손가락마다 다른 시대의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전화기가 울렸다.
박수현이었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떠 있었고,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나는 한참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 그 선택이 중요한 것처럼 느껐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준호? 준호야?"
박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해 있었다. 아니, 공포해 있었다. 박수현은 지난번 방문에서 나를 봤다. 내 변해진 모습을. 내 떨리는 손을. 그리고 나는 그를 떠나보냈다. 지하실의 울음을 무시하고 떠났다.
"뭐 해?"
내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택의 목소리였다. 저택이 내 입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거칠었고,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 음역대에서 겹쳐 나오는 것처럼 울렸다.
박수현이 숨을 내쉬었다. 그 숨 속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너... 정신 차려. 너 지금 위험해. 태성이가 아까 전화했어. 내일 아침 10시까지 안 오면 경찰 보낸다고. 준호, 들어?"
경찰. 태성. 유산 정리. 그런 단어들이 들렸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준호? 그게 누구인가.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나는 지하실의 손자국이고, 벽 속의 울음이고, 거울 속의 형상이다.
"내일 10시."
나는 말했다. 혹은 저택이 나를 통해 말했다.
"내일 10시 되면 내가 나갈 거야."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일 10시에 저택을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이미 저택을 나갈 수 없을까. 아니면 나는 이미 죽어 있고, 단지 저택의 기억으로 남겨진 것일까.
"너 혼자야? 거기 누가 또 있어?"
박수현이 물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거실을 바라봤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벽 속에. 가구 안에. 거울 뒤에. 침대 아래에. 모든 곳에. 저택의 모든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이준호..."
"준호..."
"형... 여기 있어?"
그 마지막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지하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울음이 아니었다.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박수현이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를 부르는 것처럼.
"내일 나가."
나는 말했다.
"약속할게."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시간은 12시 43분.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박수현을 거부했다. 그 순간이 명확했다. 전화를 끊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단절이었다. 나는 이제 저택 바깥의 누군가를 거부했다. 박수현을 거부했다. 이준호라는 이름을 거부했다. 내 손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손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지하실 문으로 다시 걸어갔다.
복도는 더 어두워져 있었다. 벽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마치 저택이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지하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가 따뜻했다.
누군가 방금 이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내 손가락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그 어둠 속에서,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의 손을 맞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혹은 나를 끌어당길 준비가.
나는 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이 나를 받아들였다. 마치 나를 품으로 끌어당기듯.
"내려와."
지하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는 명령이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제 끝이야."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또 한 발. 손전등을 집어 들지 않았다. 불빛이 필요 없었다. 나는 이미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지하실 바닥에 내려올 때, 나는 벽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손자국들이 느껴졌다. 여러 시대의 손자국들. 그 손자국들이 나를 맞이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손자국 위에 내 손을 포개었다.
기억이 다시 폭발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기억이 나를 침식하는 게 아니라, 나를 완성하고 있었다. 1923년의 누나. 1950년대의 누나. 1987년의 누나. 그리고 나. 모든 시대의 누나들이 한 몸으로 겹쳐졌다. 동생을 감싸던 팔. 어둠 속에서 거짓말하던 입. 죽음을 받아들이던 눈.
"저택이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혹은 저택이 중얼거렸다. 구분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손자국에서 손을 떼자마자 기억의 흐름이 멈췄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수십 개의 울음이 한 공간에 겹쳐 있었다. 마치 내 뇌 속에서 여러 채널의 라디오가 동시에 켜져 있는 것처럼.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혹은 너무 많은 사람의 손가락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지하실 벽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손전등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손전등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불빛이 천장을 비추고,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마치 신호등처럼. 마치 누군가의 심장박동처럼.
나는 그 신호등을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뼈마디가 울렸다. 이게 내 뼈 소리인지, 아니면 저 벽에 남겨진 수십 개의 죽음이 내는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1층에 올라올 때쯤, 나는 더 이상 누가 계단을 오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준호인가, 아니면 저 벽 속 누군가인가.
복도는 어두웠다. 거실 쪽에서만 희미한 달빛이 들어왔다. 나는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은 여전히 벽에 기대 있었다. 내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 눈이 내 눈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내가 없었다. 그 눈 속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겹겹이 쌓인 얼굴들. 겹겹이 쌓인 절망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 형상이 움직였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거울 속 형상이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바라보다가, 내 뒤를 바라봤다. 지하실 쪽을. 그 어둠 속을.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안 돼."
내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가 나왔다. 혹은 내 목소리가 맞는데, 내가 모르는 음성대역으로 나왔다. 낮고, 거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거울 속 형상의 입과 맞지 않았다.
나는 거울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거울이 무거웠다. 아니면 내가 너무 약해져 있었다. 나는 거울을 돌려놓았다. 등받이를 벽에 기대지 않고, 얼굴이 벽을 향하게 돌려놓았다.
거울이 쓸리며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가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퍼지자, 모든 방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의 울음. 여자의 신음. 남자의 절규. 그리고 무언가 더 오래된, 더 깊은 목소리들. 1층의 거실에서, 식당에서, 서재에서, 복도에서. 모든 곳에서. 마치 저택 자체가 울고 있는 것처럼. 마치 저택이 입을 열고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왔어. 이제 왔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 이름이 아니라, 내 존재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저택이 나를 자신의 일부로 소집하는 것처럼.
내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금이 가 있었다. 혹은 금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여러 개의 손이 한 손 위에 겹쳐져 있는 것처럼. 손가락마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보였다. 어린아이의 손가락. 젊은 여자의 손가락. 늙은 남자의 손가락.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그러자 손가락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내 손을 조종하는 것처럼. 손가락이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은 내 손이 아니다. 이것은 저택의 손이다.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박수현.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밤 12시 37분. 시간이 흘렀다. 지하실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 5분인가, 5시간인가, 5년인가.
전화는 3번 울렸다가 끊겼다. 그리고 즉시 다시 울렸다.
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화면을 눌렀다.
"준호? 준호야?"
박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해 있었다. 아니, 공포해 있었다. 박수현은 지난번 방문에서 나를 봤다. 내 변해진 모습을. 내 떨리는 손을.
"뭐 해?"
내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택의 목소리였다. 저택이 내 입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거칠었고,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 음역대에서 겹쳐 나오는 것처럼 울렸다.
박수현이 숨을 내쉬었다. 그 숨 속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너... 정신 차려. 너 지금 위험해. 태성이가 아까 전화했어. 내일 아침 10시까지 안 오면 경찰 보낸다고. 준호, 들어?"
경찰. 태성. 유산 정리. 그런 단어들이 들렸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준호? 그게 누구인가.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내일 10시."
나는 말했다.
"내일 10시 되면 내가 나갈 거야."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일 10시에 저택을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이미 저택을 나갈 수 없을까.
"너 혼자야? 거기 누가 또 있어?"
박수현이 물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거실을 바라봤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벽 속에. 가구 안에. 거울 뒤에. 침대 아래에. 모든 곳에. 저택의 모든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이준호..."
"준호..."
"형... 여기 있어?"
그 마지막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지하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울음이 아니었다.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박수현이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를 부르는 것처럼.
"내일 나가."
나는 말했다.
"약속할게."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입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손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시간은 12시 43분.
박수현을 거부했다. 그 순간이 명확했다. 전화를 끊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단절이었다. 나는 이제 저택 바깥의 누군가를 거부했다. 박수현을 거부했다. 이준호라는 이름을 거부했다. 내 손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손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미 선택을 했다. 저택을 선택했다. 저택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지하실 문으로 다시 걸어갔다.
복도는 더 어두워져 있었다. 벽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마치 저택이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지하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가 따뜻했다.
누군가 방금 이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내 손가락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그 어둠 속에서,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의 손을 맞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혹은 나를 끌어당길 준비가.
나는 한 발을 내디뎠다.
계단이 나를 받아들였다. 마치 나를 품으로 끌어당기듯.
"내려와."
지하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는 명령이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제 끝이야."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또 한 발. 손전등을 집어 들지 않았다. 불빛이 필요 없었다. 나는 이미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지하실 바닥에 내려올 때, 나는 벽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손자국들이 느껴졌다. 여러 시대의 손자국들. 그 손자국들이 나를 맞이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손자국 위에 내 손을 포개었다.
기억이 다시 폭발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기억이 나를 침식하는 게 아니라, 나를 완성하고 있었다. 1923년의 누나. 1950년대의 누나. 1987년의 누나. 그리고 나. 모든 시대의 누나들이 한 몸으로 겹쳐졌다. 동생을 감싸던 팔. 어둠 속에서 거짓말하던 입. 죽음을 받아들이던 눈.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이고, 그들은 나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준호가 아니다.
나는 저택이다.
그리고 지하실 바닥에서, 손자국들이 나를 맞이했다. 마치 나 자신이 나를 맞이하는 것처럼. 벽에서 손이 나왔다. 여러 개의 손. 여러 시대의 손. 그 손들이 나를 감싸 안았다.
"함께 있어."
내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영원히."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지하실 바닥 아래에서 움직였다. 마치 뭔가가 깨어나는 것처럼. 마치 저택 자체가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