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의 저택
침실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낡은 천장. 곰팡이 자국이 있는 천장. 이 천장을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침구류에 닿은 손가락이 떨렸다. 이불은 차갑고 축축했다. 언제부터 이 침대에 누워 있었는가. 아침인가. 저녁인가. 창문 너머로 빛이 흐릿하게 들어왔으므로 아침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빛이 해가 뜨는 빛인지, 해가 지는 빛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둘 다 비슷하게 보였다.
일어나려고 했다. 몸이 무거웠다. 팔을 들어올렸다. 팔이 내 것이 맞나. 손가락을 굽혔다. 손가락도 내 것이 맞나. 손등에 난 주름이 낯설었다. 이런 주름이 전에도 있었나.
침실을 나왔다. 2층 복도는 더 어두웠다. 거울이 있었다. 2층 복도의 거울. 어제—언제였는지 모르지만—거울을 봤을 때 그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 오늘은 어떨까. 거울을 보지 않았다. 피했다. 거울을 바라보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1층 거실에 내려왔다. 먼지가 소복이 앉아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먼지 입자를 드러냈다. 이 방에 들어온 것이 처음인가. 아니다. 여러 번 들어왔다. 그런데 정확하게는 몇 번인지 모른다. 어제도 있었나. 그제도 있었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름은 있다. 이준호. 그 이름이 나를 지칭하는가. 거울을 봤을 때 그 얼굴이 이준호의 얼굴이었나.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갔다. 책장이 있었다. 책들이 있었다. 누가 이 책들을 읽었을까. 누군가는 분명히 읽었을 것이다. 책장 아래쪽에 작은 상자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상자. 손으로 집어올렸다. 무거웠다. 상자를 열었다.
일기장이었다.
표지에 글씨가 있었다. 잉크가 바랬다. 읽으려고 노력했다. 글씨가 너무 오래되었다. 1923년 5월. 그리고 이름. 이 이름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읽을 수 있었다. 이경서. 이 저택의 초대 주인. 거의 100년 전의 사람.
일기장을 만졌다.
세상이 반전되었다.
—1923년 5월 14일. 아침 햇빛이 거실을 밝혔다. 그런데 그 햇빛이 따뜻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햇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아내가 거실에서 울고 있었다. 왜 우는지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아내는 계속 울었다. 손을 잡으려고 했다. 손이 떨렸다. 내 손이 떨렸다. 아내를 안으려고 했다.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는 계속 울었다. 밤이 되었다. 아내가 침실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에 남았다. 혼자였다. 왜 혼자인지 모르겠다. 아내가 내 옆에 있는데 왜 혼자인가. 밤하늘을 봤다. 별이 없었다.—
기억에서 나왔다.
손이 떨렸다. 일기장을 떨어뜨렸다.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먼지가 일어났다. 코를 자극했다. 재채기가 나왔다. 한 번. 두 번. 계속 나왔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손가락이 내 손가락인가. 내가 이런 손을 가지고 있었나. 손등의 주름이 다르다. 손가락의 길이가 다르다. 손톱의 색깔이 다르다. 이것은 내 손이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손이다. 1923년의 누군가의 손이다. 아니다. 내 손이다. 내 손이 맞다. 하지만 내 손이 아닌 것 같다.
진정해. 진정해.
숨을 쉬었다. 깊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쉬었다. 다시 들이마셨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밝은 빛이 눈을 자극했다. 시간이 보였다. 오후 2시 23분. 오후인가. 아침이 아니라 오후인가. 그럼 내가 몇 시간을 자고 있었던 건가. 아니다. 잤던 것이 아니다. 기억이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통화 기록을 봤다. 박수현. 그 이름. 누구더라. 누군가다. 알고 있는 누군가다. 아, 맞다. 친구다. 박수현은 친구다. 그런데 그 친구가 누구인가. 어디서 만났는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기억이 없다. 기억이 흐릿하다.
전화를 걸었다. 음.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준호? 넌 어디야? 지금 3시 반인데."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 아니다. 남성의 목소리. 목소리가 낮다. 친구의 목소리다. 박수현의 목소리다. 박수현은 누구더라. 기억이 난다. 아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났던 것 같기만 하다.
"준호? 대답해. 준호!"
내가 준호인가. 내 이름이 준호인가. 이준호. 그 이름이 나를 지칭하는가. 지칭한다. 지칭하지 않는다. 확실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 몸을 이준호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몸이 정말 이준호인가.
"준호?"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불안한 목소리. 누군가가 불안해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나를 걱정하고 있다. 왜 나를 걱정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저기... 박수현?"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내 목소리가 이상했다.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가. 이 목소리가 어제의 내 목소리와 같은가. 다른 것 같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다. 알 수 없다.
"너 뭐 해? 왜 이러는 거야? 약속 시간 30분이 지났잖아. 저택에서 나가기로 했잖아. 오후 3시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 맞다. 약속이 있었다. 저택을 나가기로 했다. 오후 3시. 정문 앞. 그곳에서 박수현을 만나기로 했다. 왜 나는 여기 있는가. 왜 나는 저택을 나가지 못했는가. 기억이 없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일기장을 만진 이후로 시간이 사라졌다.
휴대폰 화면을 다시 봤다. 오후 3시 30분.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넘겼다. 저택의 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정문 앞으로 가야 했다. 박수현을 만나야 했다.
나는 일어섰다. 서재를 나갔다.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손이 문 손잡이에 닿았다. 밀어야 했다. 밀고 나가야 했다. 저택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 괜찮아? 목소리가 이상해."
박수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 나는 문을 열어야 했다. 나는 대답해야 했다. 나는 정상이라고 말해야 했다.
"괜찮아. 그냥... 잠깐만 기다려."
거짓말이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저택을 나갈 수 없었다. 내 몸이 반항하고 있었다. 저택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잠깐? 준호, 지금 뭐라는 거야? 이미 30분이 지났어. 뭔가 이상한데. 뭐 있어? 말해."
박수현이 계속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절박해졌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저택이 나를 가두고 있다고. 시간이 사라졌다고. 내 손이 내 손이 아니라고.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준호? 준호!"
"나중에 연락할게."
말했다. 말이 나왔다. 그것이 내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박수현과의 연결을 끊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였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잠깐, 잠깐! 준호, 뭐라는 거야? 지금 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박수현의 목소리가 끊겼다. 휴대폰 화면에는 통화 시간이 표시되었다. 3분 47초. 3분 47초 동안 나는 저택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3분 47초 동안 나는 박수현을 거짓말로 속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화면이 꺼졌다.
박수현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불안한 목소리. 나를 찾는 목소리.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누가 나를 찾을 수 있겠는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켰다. 오후 3시 31분. 박수현은 아마도 지금쯤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전화를 걸 것이다. 또 다른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답할 수 없다. 나는 저택을 나갈 수 없다.
거실을 돌아다녔다. 창문을 봤다. 창문 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진다. 저택은 더 어두워진다. 밤이 온다. 밤이 오면 기억들이 더 크게 울어댄다. 밤이 오면 거울이 더 크게 나를 부른다. 밤이 오면 지하실의 울음이 더 선명해진다.
복도로 나갔다. 1층 복도의 거울이 있었다. 거울을 보려고 했다. 멈췄다. 거울을 피했다.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거울 속에 누가 있을 것 같았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다.
거울 앞에서 발을 멈췄다. 거울 속에서 손짓이 보였다. 희미한 손짓.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 거울 속의 손가락. 그것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응하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응하면 정말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손을 펼쳤다. 다시 접었다. 이 손은 누구의 손인가. 내 손이 맞나. 손가락을 구부렸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럼 내 손이 맞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저택 안에 있는 동안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계속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하실로 가는 문이 보였다. 지하실의 계단이 보였다.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계단. 그 계단 아래에서 무언가가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울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거울을 피한 채로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계단의 첫 번째 발판을 밟는 순간, 내 몸이 반응했다. 발이 저절로 내려갔다. 나는 지하실로 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하지만 몸은 계속 내려갔다. 의지와 무관하게 다리는 움직였다.
지하실의 공기가 차가웠다. 습기로 가득 찬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이 손가락이 내 손가락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움은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가락도 차가움을 느낄 수 있나. 알 수 없다.
계단 아래 어둠이 있었다. 완전한 어둠.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 나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누구를 찾는지 몰랐다.
손을 뻗었다. 벽이 만져졌다. 콘크리트 벽. 차갑고 거친 벽. 벽에서 습기가 흘러내렸다. 벽이 울고 있는 건가. 벽도 기억을 품고 있는 건가.
"누구... 누구 있어?"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인지 확실하지 않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지하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왕복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 발걸음인지 다른 누군가의 발걸음인지 알 수 없었다. 지하실에는 나 말고도 누군가가 있는 건가. 아니다. 나 혼자다. 확실히 나 혼자다. 하지만 발걸음은 계속 들렸다.
오래된 상자들이 있었다. 손으로 만져졌다. 나무 상자. 철제 상자. 종이 상자. 모든 것이 먼지로 덮여 있었다. 20년의 먼지. 그 먼지 속에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한 상자를 들었다. 가벼웠다. 비어 있는 건가. 아니다. 상자 속에서 무언가가 울고 있었다. 소리가 아니라 감정. 상자 속에 갇혀 있는 누군가의 절망이 상자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사진들이 있었다. 낡은 사진. 색이 바래진 사진.
사진을 집었다.
그 순간 세계가 반전했다.
나는 더 이상 지하실에 있지 않았다. 나는 1952년의 거실에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밝은 햇빛. 따뜻한 햇빛. 하지만 그 햇빛은 온기를 주지 않았다.
나의 손은 더 이상 나의 손이 아니었다. 더 큰 손. 더 거친 손. 남자의 손. 누군가의 손. 손등에는 굵은 주름이 있었고, 손가락은 굳어 있었다. 이 손은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쥐고 있던 손이었다.
"당신 얘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말은 내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이었다. 누군가의 절망이었다.
"제발, 저를 봐주세요. 제발..."
다른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 울음이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나를 향했다. 나—아니, 나의 몸을 쓰는 누군가를 향했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 하지만 내 말이 아닌 말. 그 말은 얼마나 무거웠는가. 얼마나 차가웠는가.
여자가 울었다. 나는 그 울음을 들었다. 내가 만든 울음이었다. 내가 만든 절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의 남자. 중년의 남자. 나인 것 같으면서 나가 아닌 남자. 그 남자의 눈은 죽어 있었다. 그 눈은 오래전에 죽어 있었다.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보면 안 되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 남자의 이름은 경호였다. 초대 주인 이경서의 아들.
기억이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갔다. 1952년에서 1960년으로. 1960년에서 1975년으로. 연도가 바뀔 때마다 거울 속의 남자는 더 무너져갔다.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눈이 더 죽어갔다.
1952년의 거울 속 남자는 아직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불안감. 죄책감. 그것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1960년의 거울 속 남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눈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1975년의 거울 속 남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기억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으로 가득 찬 사람. 그 남자는 거울을 봐도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90년. 마지막 해. 거울 속의 남자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었다. 흰 약. 많은 약. 약병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나도 안다. 나도 느낀다.
"이제 끝내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나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거울 아래 책상에는 약병이 있었다. 약을 입에 넣었다. 이 입도 내 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약은 삼켜졌다.
세계가 흐릿해졌다. 거울 속의 남자가 흐릿해졌다. 그 남자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아니다. 울고 있었다. 아니다. 표정이 없었다. 완전히 비어 있었다.
"누가... 누구야..."
누군가가 말했다. 나인가. 아니다. 거울 속의 남자인가. 아니다. 둘 다인가.
기억이 끝났다.
나는 다시 지하실에 있었다. 손에는 사진이 들려 있었다. 낡은 사진. 1952년의 사진. 거울 속 남자의 사진. 그 남자는 경호. 그 남자는 죽었다. 오래전에 죽었다. 1990년에 죽었다. 하지만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죽음은 저택에 남았다. 죽음은 사진에 남았다. 죽음은 나에게 남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사진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은 내 손에 붙어 있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사진을 집었다.
또 다른 기억이 쏟아져 내렸다. 1923년. 저택의 초대 주인. 이경서. 그 남자는 무엇을 했나. 그 남자는 왜 죽었나. 아니다. 그 남자도 죽지 않았다. 그 남자는 살았다. 하지만 그 남자의 기억은 죽어 있었다. 죽음처럼 차갑게.
1923년의 거울 속 남자는 경호가 아니었다. 더 오래된 남자였다. 더 깊은 절망을 품고 있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아내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아내의 울음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외면이 1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기억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또 다른 사진이 들려 있었다. 1960년대의 사진. 또 다른 남자. 또 다른 여자. 또 다른 절망.
1960년대의 거울 속 남자는 경호의 형이었다. 경호보다 먼저 죽은 사람. 경호는 그 형의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경호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저택이 그를 따라가게 했다.
각 기억은 다르게 나를 침식했다. 1923년의 이경서의 기억은 나의 감정을 빼앗았다. 1952년의 경호의 기억은 나의 의지를 빼앗았다. 1960년대의 또 다른 남자의 기억은 나의 시간 감각을 빼앗았다. 1990년의 경호의 최후는 나의 정체성 자체를 빼앗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을 집었다. 또 다른 기억이 흘러들었다. 이번에는 1930년대였다. 또 다른 죽음. 또 다른 절망. 저택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각 기억마다 내 신체의 일부가 변했다. 손이 다른 손이 되고, 팔이 다른 팔이 되고, 얼굴이 다른 얼굴이 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진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기억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죽음이 이 상자에 들어 있는가.
나는 사진을 집고, 기억을 본다. 기억을 보고, 사진을 떨어뜨린다. 떨어진 사진을 다시 집는다. 무한 반복. 끝없는 반복. 나는 계속 내려갔다. 더 깊이. 더 어둠 속으로.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사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기억 자체가 되어 있었다. 기억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절망이 내 절망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어 있었다.
손을 들었다. 이 손은 누구의 손인가. 내 손이 맞나. 손가락을 구부렸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럼 내 손이 맞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누군가의 기억 속 손가락도 이렇게 움직이지 않나.
지하실의 어둠이 더 짙어졌다. 아니다. 내 눈이 더 어두워졌다. 내가 사라지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저택의 기억으로 녹아내리고 있다.
"누... 누구 있어?"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내 목소리가 아니다. 확실히 내 목소리가 아니다. 그럼 누구의 목소리인가. 저택의 목소리인가. 기억의 목소리인가.
계단을 올라갔다. 의식적으로 올라간 것인지, 몸이 저절로 올라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층으로 올라갔다. 거실로 나갔다.
창문을 봤다. 해가 졌다. 완전히 졌다. 밤이 왔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켰다. 밤 11시 43분. 저택 안에서 8시간 이상이 사라졌다. 박수현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포기했을까. 아니면 경찰을 부렸을까.
저택은 검은색이 되었다. 저택의 모든 것이 검은색이 되었다. 나도 검은색이 되고 있다.
복도로 나갔다. 거울이 있었다. 1층 복도의 거울. 그 거울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손짓이 더 분명해졌다. 손가락들이 천천히 구부렸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응하라고. 가까워지라고.
거울을 보려고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팔이 얼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 내 의지와 무관하게 거울에서 멀어지는 팔.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저택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멈췄다. 거울을 피했다.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 속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거울 속에 누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손짓하는 형상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이 내 얼굴이었다.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은 죽어 있었다. 1990년의 경호처럼. 1923년의 이경서처럼. 저택의 모든 죽은 자들처럼.
거울 속의 나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아니다. 울고 있었다. 아니다. 표정이 없었다.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곳이 내 자리였다.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나는 거울 속의 형상처럼 죽어야 했다. 저택의 기억이 되어야 했다.
손을 들었다. 거울을 향해 손을 들었다. 거울 속의 나도 손을 들었다. 우리의 손이 만나려고 했다. 닿으려고 했다.
그 순간,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계단 아래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울음. 또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집지 않은 사진들이 있었다. 내가 흡수하지 않은 기억들이 있었다. 저택은 여전히 나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거울을 피했다. 거울 속의 형상이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나는 지하실로 향했다.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밤은 계속 깊어지고 있었다. 저택의 모든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러 목소리. 여러 시대. 여러 죽음. 모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일부가 되기를. 내가 그들의 기억을 이어가기를.
나는 그 울음을 무시했다. 거울을 피했다. 지하실로 계속 내려갔다.
하지만 피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나는 이미 저택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저택의 기억이 되고 있었다. 아침이 오면 누군가가 나를 만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기억이 흘러나올 것이다. 나의 절망이 흘러나올 것이다. 나의 죽음이 흘러나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밤이다.
밤이 계속되는 동안, 내 손을 잡을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는 누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