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르의 직접 개입
카페를 나온 지 사흘째였다.
준호는 슬럼가의 이면도로를 따라 걸었다. 추적 칩이 팔뚝을 지나갈 때마다 신경을 태우는 듯한 통증이 흘렀다. 초록색 불빛이 맥박처럼 깜박였다. 상공의 감시 드론이 선회했고, 준호는 낡은 건물의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뇌 속 목소리가 울렸다.
"ECHO?"
준호가 중얼거렸다.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목소리는 명확했지만, 그 명확함이 오히려 준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기억이라면 사라졌을 터이고, 본능이라면 거래 과정에서 마모되었다. 준호는 골목의 벽에 기대 앉았다. 팔뚝의 칩이 더 빠르게 깜박였다. 신경이 타들어가는 통증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이 골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이 나타났다. 검은 코트를 입은 인물. 얼굴은 회색 안경으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알았다. 미르였다.
"3일이 지났어."
미르의 목소리는 차갑고 평탄했다. 감정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감정이 너무 깊어서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가락이 떨렸다. 도망칠 준비를 했지만, 미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의 무게가 준호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루이스가 뭐라고 했어? 우주정착지? 기억 복원?"
"내가 뭘 알겠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거짓말이었다. 루이스는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 약속들은 모두 미르의 추적 칩 앞에서 무너졌다.
"우린 너의 거래 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어. 너는 지난 20일간 15개의 기억을 팔았어. 그 중 일부는... 흥미로워."
미르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준호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골목의 벽이 그를 막았다.
"너는 누군가의 딸의 손을 기억하고 있어. 왜?"
준호의 숨이 멎었다.
"그 기억은 너에게서 나왔어. 그런데 너는 그 딸을 본 적이 없지. 너는 아버지도 아니고, 보호자도 아니야. 그럼 왜 그 손을 기억하고 있었어?"
"난 그 기억을 팔았어. 너희가 원했잖아."
"그래. 우린 그걸 원했어. 왜냐하면 그 기억 속에 뭔가가 있었거든. 너는 알아? 뭐가 있었는지?"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판 기억을 자신이 알 리 없었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 기억은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몸에서 떨어진 살처럼.
미르가 준호의 팔뚝을 집었다. 추적 칩이 있는 자리. 미르의 손가락이 그것을 누르자 초록색 불빛이 밝아졌다. 준호의 손가락이 경련했다. 신경이 타들어가는 통증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뭔가. 뇌 깊숙이 박힌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
"우린 같은 종족이야."
미르의 목소리가 변했다. 차갑던 톤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끔찍했다.
"나도 너처럼,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 기억의 80퍼센트는 사라졌어. 신드 조직에서 강제로 빼앗아갔어. 내가 뭘 잃었는지도 모르고, 뭘 남기고 왔는지도 모르고,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르의 손이 떨렸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지만, 준호는 느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원한다. 넌 다르거든. 넌 여전히 기억이 남아있어. 너의 신경 경로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기억들을 저장하고 있어. 그걸 역추적하면... 내가 뭘 잃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너는 나에게 답이 될 수 있어."
"미르..."
"기억을 계속 팔지 마. 대신 나한테 줘. 내가 모아줄 테니까. 그럼 넌 살 수 있어. 신드도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난 너를 보호해줄 수 있어. 박 이사장도, 루이스도 너를 보호하지 못하지만, 난 할 수 있어."
"그건... 협박이야?"
"아니야. 약속이야."
미르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준호는 그 얼굴에서 무엇인가 깨진 것을 봤다. 마치 자신처럼 깨져 있는 무언가. 하지만 자신과 다른 종류의 깨짐이었다. 미르는 이미 깨진 상태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깨짐에 익숙해 있었다.
"내가 선택의 여지를 주고 싶지만... 너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넌 이미 신드의 손에 들어와 있어. 넌 이미 우주정착지에 갈 수 없어. 넌 이미 도시를 떠날 수 없어. 그래서 넌 선택할 수 없는 거야."
미르가 손을 놨다. 준호는 벽에 기대 있었다. 팔뚝의 칩이 계속 깜박였다. 이제 그 리듬이 준호의 심장박동과 일치했다.
"3일 안에 답을 줘."
미르가 물러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실루엣. 준호는 미르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우리는 둘 다 자신을 잃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찾아야 해."
그리고 미르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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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방향은 없었다. 다만 움직였다. 다만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는 도시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ECHO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여자... 그녀는 너를 구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뭐야?"
"자신을 구하려는 거야. 너를 이용해서."
"루이스는?"
"그것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아는 건... 넌 시간이 없다는 거야."
준호는 지하 상가로 내려갔다. 밤 11시. 상가는 거의 비었다. 한두 개의 노점상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준호는 그 중 하나에 멈춰 섰다. 메모리 칩을 파는 검은 시장의 노점이었다.
"뭐 찾아?"
할머니 같은 여인이 물었다.
"내 기억을 팔 수 있어?"
"당신 기억? 그건... 복잡해. 당신 기억은 이미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할머니가 준호의 팔뚝을 봤다. 추적 칩을 본 것이다.
"신드 조직?"
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 기억은 팔 수 없어. 신드가 먹고 있으니까. 당신이 팔 수 있는 건... 신드가 이미 가진 것들의 사본뿐이야. 하지만 그것도 위험해. 위조 기억이 걸리면..."
"사라진다."
"맞아. 완전히 사라져."
준호는 노점을 떠났다. 다시 거리로. 다시 어둠으로. 추적 칩이 계속 깜박였다. 이제 그 깜박임이 준호의 심장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 시간을 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운트다운. 3일.
그 순간, 준호의 시각이 왜곡됐다.
세상이 일렁였다. 마치 화면의 주사율이 떨어지는 것처럼 프레임이 끊겼다. 준호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왜곡은 심해졌다. 건물의 모서리가 흐릿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이 번져갔다.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손가락 끝이 저렸다.
그리고 다른 것이 밀려들어왔다.
기억. 아니,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경험.
준호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루이스를 만난 카페가 아니었다. 다른 공간. 다른 시간. 미르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미르의 윤곽이 흔들렸다. 얼굴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당신의 기억 중 일부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다."
미르의 목소리만 명확했다.
준호는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없는 것처럼.
"그 기억들을 모아서... 우린 뭔가를 만들 수 있어. 너는 알아? 기억들이 모이면, 그것은 더 이상 기억이 아니야. 그것은... 신체가 돼. 의식이 돼. 우리는 넌 그것을 만들고 있었어. 너는 우리의 실험 대상이야."
준호는 일어서려고 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이 얕아졌다.
"그리고 너는 이미 실패했어. 너는 이미 한 번 우리의 실험에서 실패했어. 그래서 다시 돌아왔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거야. 너는 같은 실수를 또 하고 있어."
준호는 소리치려고 했다. 목에서 나오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만 흔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현실이 돌아왔다.
준호는 거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호흡이 가쁜 헐떡거림으로 변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가락이 여전히 경련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지나갔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ECHO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건... 기억이 아니야. 그건 미래야. 또는 과거야. 시간이 뒤섞여 있어. 그리고 너는..."
"뭔데?"
준호가 중얼거렸다.
"이미 한 번 이것을 겪었어. 그리고 너는 다시 겪을 거야. 같은 선택을 해. 같은 실수를 해. 같은 결말을 맞이할 거야."
준호는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었다. 그 순간 손이 준호의 팔뚝을 잡았다.
"일어나."
미르였다. 여자는 준호를 들어올렸다. 준호의 다리에 힘이 없었다. 미르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준호를 끌었다. 골목 안으로.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준호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저항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골목의 끝. 낡은 문. 미르가 그것을 열었다.
내부는 어두웠다. 준호는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문이 닫혔다. 자동 잠금. 준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
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움직임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미르의 형태가 선명해졌다. 여자는 준호 위에 서 있었다. 그 얼굴은 여전히 무감정했다. 하지만 눈은 다였다. 눈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미르가 준호의 팔뚝을 집었다. 추적 칩이 있는 자리.
"당신의 거래 기록을 추적했어. 15개의 기억. 그 안에 뭔가가 있어."
미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준호는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회색 안경이 벗겨져 있었다. 그 눈 안에는 절망이 있었다.
"내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당신이 거래한 기억들 중에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뭘 잃었어?"
준호가 물었다.
"모르지. 그래서 찾아야 해. 당신과 함께. 당신이 판 기억들을 역추적하면, 내가 뭘 잃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왜 신드 안에 있는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미르가 손을 떼었다. 여자는 준호 옆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신드 조직은 당신을 원해. 당신의 신경 구조가 특별하니까. 루이스도 당신을 이용하려고 해. 박 이사장은 당신을 수거하려고 해. 하지만 나는... 나는 다르게 생각해."
"뭐가 다르다고?"
준호가 물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쪽에 설 수 있어. 신드 안에서. 나는 신드의 내부 구조를 알아. 나는 박 이사장의 신뢰를 받아. 내가 당신을 보호하면, 당신은 살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어."
"그건 거래네."
준호가 말했다.
"그래. 거래야.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래야. 루이스의 약속은 거짓이야. 우주정착지는 없어. 그곳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박 이사장의 제안은 죽음이야. 당신은 그냥 데이터로 수거될 거야. 하지만 나와 함께라면, 당신은 살 수 있어."
미르가 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무언가가 흔들렸다. 감정. 아니면 그것의 흔적. 또는 절망에 빠진 누군가의 필사적인 노력.
"당신은 나에게 답이 될 수 있어. 당신의 기억 안에 내 기억이 있을 수도 있어. 우리가 한 번 만났을 수도 있어. 당신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당신을 원하는 거야."
준호는 미르를 바라봤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 주변에는 검은 자국이 있었다. 마치 많은 밤을 잠들지 못한 것처럼. 또는 너무 많은 기억을 강제로 빼앗긴 것처럼.
"3일이야. 당신은 3일 안에 선택해야 해."
미르가 일어섰다. 여자는 준호를 내려다봤다.
"루이스를 따를 거야? 박 이사장에게 항복할 거야? 아니면 나를 믿을 거야? 그 3일이 지나면, 당신은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을 거야. 당신은 그냥 움직이는 시체가 될 거야. 기억도 없이. 정체성도 없이. 그냥... 기능만 남은."
미르가 문을 열었다. 밖의 불빛이 들어왔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미르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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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거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피해 지나갔다. 준호의 팔뚝 추적 칩이 빠르게 깜박였다. 리듬이 변했다. 이제 그것은 심장박동이 아니라 경고음이었다.
ECHO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가야 해. 지금. 당장."
"어디로?"
준호가 중얼거렸다.
"도시 경계. 남쪽 터널. 넌 거기로 가야 해. 거기로 가면 우주정착지로 갈 수 있어. 거기가 유일한 길이야."
"그건 거짓이잖아. 우주정착지는 없다고 했잖아."
준호가 말했다.
"그래. 거짓이야.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거야. 넌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어. 넌 이미 한 번 이 지점을 넘었어. 그리고 다시 넘으려고 해. 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어."
준호가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었다. 팔뚝의 칩이 더 빠르게 깜박였다. 그 리듬이 점점 빨라졌다.
"뭐가 실수야?"
준호가 물었다.
"넌 자신을 되찾으려고 해. 하지만 넌 자신을 이미 팔아버렸어. 넌 자신을 찾을 수 없어. 넌 그냥 계속 팔아야만 해. 그것만이 길이야."
"그럼 당신은? 당신이 뭔데?"
준호가 중얼거렸다.
"나는... 너를 도와주고 있는 거야. 또는 너를 옭아매고 있는 거야. 우린 아직 모르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건..."
ECHO가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또는 그것이 추적 칩의 소리였다. 또는 그것이 도시 전역을 감시하는 중앙 AI의 카운트다운이었다.
박 이사장의 서버에서, 준호의 위치를 나타내는 빨간 점이 화면 위에서 깜박였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신호가 나타났다. 루이스의 신호. 그리고 또 다른 신호. 제임스의 신호. 모두 준호를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박 이사장은 화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떠 있었다.
"추적 칩의 신호 강도가 변했다. 대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준호의 추적 칩이 더 빠르게 깜박이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준호는 팔뚝의 통증을 느꼈다.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통증. 마치 누군가 칩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박 이사장이... 칩을 조종하고 있어. 넌 이미 추적당하고 있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ECHO의 목소리가 변했다. 이전의 무감정한 톤이 아니라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일어섰다. 다리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움직였다. 거리를 헤쳐나갔다. 사람들이 그를 피했다. 또는 그들은 준호를 보지 못했다.
준호는 중얼거렸다.
"내가... 뭘 잃었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오직 ECHO의 목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넌 이미 알고 있어. 그래서 계속 팔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