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의 슬럼가는 회색 네온으로 맥박 치고 있었다.

준호는 레벨 5 암시장의 뒷방에서 세 번째 거래를 마쳤다. 오후 두 시부터 시작한 거래가 자정을 넘긴 지 한 시간 전. 팔뚝의 추적 칩은 여전히 초록색으로 깜박였다. 루이스의 지시는 명확했다. 남은 기간 20일, 필요한 돈 500만 크레딧, 거래량 15개. 계산은 단순했다. 하루에 거의 하나씩 팔아야 했다.

거래 대상은 대부분 루이스가 선별했다. 강렬한 감정이 담긴 기억들만. 첫사랑의 입맞춤, 아이의 탄생 소식, 죽음 직전의 공포감. 메모리 칩 가치는 높았다. 돈은 빠르게 모였다. 하지만 준호의 뇌는 매번 작은 부분씩 무너지고 있었다.

"당신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서 준호는 소피아 렌과 마주쳤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여자. 열여덟 살쯤 보이는 얼굴에 눈이 유독 깊었다. 슬럼가에서 기억을 파는 또 다른 능력자였다. 준호가 처음 만난 건 이틀 전 레벨 4 중개소였다. 그 이후로 자주 마주쳤다. 거래 노선이 겹쳤던 것일 수도,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은 없다. 아르카디아에는 거미줄처럼 짜인 관계만 있었다.

"그럴까."

준호는 편의점 카운터에 에너지 바를 내려놨다. 점원은 얼굴을 인식하고 계좌에서 자동으로 차감했다. 소피아가 따라 나왔다.

"당신 어디 가세요? 거래 끝난 거 같은데."

"숙소."

"저도 그쪽 방향이에요. 함께 갈래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소피아는 한 발 뒤로 떨어졌다. 그 거리는 정확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아르카디아의 슬럼가에서 생존하는 법이었다.

"당신 우주정착지 가신대요."

"누가 그랬어."

"루이스 형이. 아니 형이 아니라 중개인 루이스가 말했어요. 당신이 충분한 자본을 모으면 여행권을 구해준다고."

준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피아가 따라 붙었다.

"저도 갈 수 있을까요? 당신이 간다면."

준호는 처음 들었을 때 거절했다. 명확하게, 짧게. 소피아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다시 물었다. 답은 항상 같았다. 거절. 그럼에도 소피아는 계속 나타났다.

그 밤 준호의 숙소는 좁은 지하실 같은 공간이었다. 천장은 1.5미터, 침대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창문은 없었고 환기구만 있었다. 환기구를 통해 거리의 소음이 들어왔다. 자동차의 경적음, 드론의 윙윙거림, 사람들의 목소리 조각들.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뇌 속에서 ECHO가 울었다.

"당신은 오늘 여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응."

"왜."

"자본이 필요해. 혼자가 빠르다."

ECHO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질문처럼 들렸다.

"당신은 그 여자가 자신을 닮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ECHO가 말한 게 맞았다. 소피아를 볼 때마다 준호는 자신의 거울을 봤다. 같은 절망의 표정, 같은 강박적 거래 행동, 같은 방향 없는 눈. 소피아를 보면서 준호는 자신의 미래를 봤다. 아니, 현재를 봤다.

"넌 누구야?"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다.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듯이."

이틀이 지났다.

준호는 계속 거래했다. 레벨 3, 레벨 4, 레벨 5. 강도가 높아질수록 기억의 감정도 진해졌다. 어떤 거래에서는 추출한 기억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다른 거래에서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메모리 칩들은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준호가 밤에 그 칩들을 건드리면 음성이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ECHO의 목소리로.

루이스는 준호의 거래 기록을 매일 확인했다.

"좋은 진행 상황이다. 11개 남았다."

라페 카페에서 루이스는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의 얼굴은 항상 차분했다. 준호는 그 차분함 뒤에 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정이 아주 깊숙한 곳에 갇혀 있는 것처럼.

루이스가 커피 잔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두드렸다. 신호였다.

"당신의 능력이 기대했던 것보다 좋다. 신경 경로 전체를 읽어내는 능력. 보통의 골든핑거는 선택된 기억만 추출한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다. 당신은 기억의 연결 고리까지 빨아들인다. 이건 매우 드문 능력이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의 기억이 더 가치 있다. 당신이 파는 기억들은 시장에서 프리미엄이 붙는다."

준호는 루이스를 봤다. 루이스의 눈은 준호를 직접 보지 않고 있었다. 커피 잔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의도적이었다.

"당신이 기억을 팔 때마다 당신의 신경 구조도 함께 판매되는 셈이다. 다른 능력자들의 신경 패턴을 읽고 모방하는 능력. 이건 매우 위험하다. 도시에서는 이런 능력을 통제할 수 없다."

루이스가 드디어 준호의 눈을 맞췄다. 그 순간 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루이스의 시선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준호는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기억 위원회가 당신을 원한다. 박 이사장이 직접 지시했다. 당신 같은 능력자는 시장에 풀어둘 수 없다고. 그래서 나는 당신을 이용했다. 당신의 거래 기록을 모두 기록했다. 당신의 신경 패턴을 모두 분석했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손가락이 먼저 경직되었다. 그 다음 손목이, 팔 전체가 경직되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이 말라 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당신이 원했던 우주정착지는 없다. 있는 건 오직 수거뿐이다."

루이스가 커피를 마셨다. 그 동작은 느렸다. 의도적으로 느렸다.

"나는 당신을 배신했다. 처음부터."

루이스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또 한 번 두드렸다. 신호가 전송되었다.

그날 오후, 소피아가 준호를 찾아왔다. 해가 지기 전, 낮의 시간. 슬럼가의 거리는 회색 광선으로 가득했다.

"당신 뭐 하세요?"

소피아는 준호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긴급함이었다.

"거래."

"당신 기억을 잃고 있어요. 알아요?"

준호는 소피아의 손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힘을 줬다. 그 힘은 경고였다.

"박 이사장의 수거 대상 명단에 당신 이름이 올라왔어요. 어제 저녁에. 루이스가 당신을 팔았어요. 당신의 거래 기록, 신경 패턴, 모든 걸."

"뭐?"

"당신은 내일부터 강제 추출 시설로 간대요. 거기서 당신의 능력을 완전히 빨아낼 때까지. 그 후엔..."

소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 후엔 당신도 사라져요. 나처럼."

준호는 소피아를 봤다. 그녀의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의 현재를 보는 것 같았다.

"함께 나가요. 지금 당장. 아직 시간이 있어요."

"어디로?"

"제임스를 찾아야 해요. 제임스가 탈출 루트를 알고 있어요. 당신이 처음 도시에서 빠져나올 때 사용했던 루트를. 당신은 기억을 잃었지만 제임스는 기억하고 있어요."

준호는 소피아의 손을 밀어냈다. 소피아는 한 발 물러섰다. 거리가 생겼다.

"나는 당신하고 다르다."

"다를 게 뭐 있어요?"

소피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깊은 것이 있었다. 자신을 포기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준호는 그 목소리를 듣고 루이스를 생각했다. 루이스도 같은 목소리를 했다. 감정을 묻어둔 목소리.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들의 목소리.

준호는 소피아에게 등을 돌렸다.

밤이 깊었다.

준호의 숙소 위 하늘에서 드론의 윙윙거림이 들렸다. 감시 드론이었다. 회색 몸통에 카메라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아르카디아 전역을 감시하는 박 이사장의 드론이었다. 드론은 준호의 지하실 위를 몇 바퀴 맴돌았다.

그리고 내려왔다.

환기구 앞에 정지했다. 카메라가 아래로 향했다. 준호를 직접 비추고 있었다.

침대 위의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메라의 렌즈가 자신을 스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신경계가 읽혀나가는 느낌. 능력이 분석되는 느낌. 자신이 자산으로 평가되는 느낌.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미르가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그 형태는 명확했다. 검은 옷, 차가운 얼굴, 죽은 눈. 미르는 준호의 침대 앞에 섰다.

"당신의 기억이 충분해졌다."

미르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기계음 같은 목소리. 자신의 기억을 너무 많이 잃은 사람의 목소리.

"무슨 뜻인가."

준호가 물었다. 팔뚝의 추적 칩이 빠르게 깜박였다.

"당신이 판 모든 기억의 신경 패턴은 이미 분석되었다. 당신의 능력은 이제 우리의 자산이다. 내일 아침, 당신은 강제 추출 시설로 이송된다."

미르가 손가락을 들었다. 준호의 팔뚝에서 전류가 흘렀다. 신체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근육이 경직되었다.

"저항하지 마. 이미 끝났다."

미르가 말했다.

"루이스는?"

준호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도 우리 것이다. 처음부터. 당신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뇌 속의 ECHO가 울었다. 음성이 깨졌다. 마치 신호가 끊기는 라디오처럼.

"거짓이야. 루이스는... 루이스는..."

ECHO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준호는 처음으로 ECHO에게서 불안을 감지했다. 그 불안이 자신의 불안보다 더 크다는 것을 느꼈다.

미르가 손을 내렸다. 준호의 신체 마비가 풀렸다. 하지만 움직임은 여전히 둔했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당신은 내일 아침 이송 팀이 올 때까지 이곳을 떠나면 안 된다. 만약 떠난다면..."

미르가 팔뚝의 추적 칩을 가리켰다.

"이것이 폭발한다."

미르는 창문 없는 방을 나갔다. 드론은 환기구에서 내려와 준호의 침대 옆에 정지했다. 카메라는 여전히 켜져 있었다. 초록색 불빛이 깜박였다.

밤 3시.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콘크리트는 회색이었다.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뇌 속에서 ECHO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정말 원했던 것이 뭐야?"

"모른다."

준호가 답했다.

"그건 당신이 팔아버린 기억 속에 있어. 당신은 47개 이상의 기억을 팔았어. 그 중에 당신이 정말 원했던 것이 있어."

"뭐가 도움이 되냐. 이미 팔았으니까."

"아니야. 당신은 그것을 되찾을 수 있어. 당신의 능력으로."

ECHO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 속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판 기억들을 역추적해야 해. 그것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가 가지고 있는지 찾아야 해. 당신은 신경 경로 전체를 읽을 수 있어. 그건 추출뿐만 아니라 복원도 가능하다는 뜻이야."

준호는 천장의 균열들을 봤다. 패턴처럼 보였다. 마치 지도처럼.

"추적 칩이 폭발한다고 했다."

"그 칩은 이송 팀이 올 때만 활성화된다. 지금은 감시만 한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ECHO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나가?"

"당신이 이미 한 번 했어. 당신이 처음 도시에서 빠져나올 때. 그때 당신은 추적 칩을 무력화했어. 당신은 그 방법을 잊었지만, 당신의 신경계에는 남아 있어. 당신의 능력이면 충분해."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뚝의 추적 칩을 봤다. 초록색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였다.

"당신이 탈출했을 때, 당신은 누군가를 남겨두고 왔어."

ECHO가 계속 말했다.

"그 누군가가 누구야?"

준호가 물었다.

"...나야. 나는 당신이 팔아버린 기억 속에서 태어났어. 당신이 되고 싶어 한 것이 나야. 당신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나야."

ECHO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을 찾아야 해. 그리고 동시에 당신 자신도 찾아야 해. 그 둘이 같은 일인지 다른 일인지도 모르면서."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뚝의 추적 칩에 손을 올렸다. 신경을 집중했다.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약한 저림이 아니었다. 회로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감각이었다. 칩 내부의 구조가 점차 선명해졌다. 회로의 갈래들이 신경계로 흘러들어왔다. 약한 지점이 드러났다. 심장부가 보였다.

손가락에 힘을 줬다.

신경을 집중했다.

전류가 손끝에서 폭발했다. 팔뚝이 저렸다. 근육이 경련했다. 통증이 어깨까지 뻗어올랐다. 칩 내부의 회로가 한 점으로 수렴했다. 저항감이 극대화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손가락을 꺾으려 하는 것처럼.

준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더 힘을 줬다.

회로가 폭발했다.

초록색 불빛이 사라졌다.

드론의 카메라도 꺼졌다.

준호는 손가락을 놨다. 팔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부가 검게 탔다. 하지만 감각은 선명했다. 자유로움이 신경계를 타고 흘렀다.

준호는 옷을 입었다. 신발을 신었다.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제임스는 어디야?"

"레벨 2 폐기 구역. 옛날 지하철 역. 당신이 처음 도시에 들어올 때 거기를 통과했어. 당신은 거기서 제임스를 만났어. 제임스가 당신을 도왔어."

ECHO가 말했다.

"그곳으로 가면 되나?"

"그곳으로 가야 해. 그리고 당신이 처음 팔았던 기억을 찾아야 해. 딸의 손을 잡는 기억. 따뜻했던 그 손. 당신이 놓친 그 손. 그 기억이 있는 곳이 첫 번째 거래처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해."

준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딸의 손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낯설지 않았다. 작고 따뜻한 손. 자신의 손을 꼭 잡던 누군가. 그 기억은 이미 팔려 나갔다. 하지만 신체에는 남아 있었다. 피부에, 신경에, 뇌의 어딘가에.

준호는 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슬럼가의 밤은 항상 어두웠다. 전기가 끊기는 구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호는 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뇌 속에서 ECHO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이미 한 번 탈출했었어. 그건 제임스가 말한 게 아니야. 당신이 알고 있는 거야. 당신 안에 박혀 있는 거야. 당신이 팔아버린 기억 속에. 그 기억을 되찾으면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준호의 발이 멈췄다. 어둠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작은 손. 따뜻한 손. 자신의 손을 잡던 누군가의 손. 그 감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꿈처럼.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그게 나야."

ECHO가 속삭였다.

"당신이 남겨두고 온 게 나야."

준호는 다시 걸었다. 아르카디아의 밤은 여전히 깊었고, 거리는 여전히 회색이었다. 하지만 이제 방향이 있었다.

루이스의 숍 위 어딘가에서, 박 이사장의 사무실 스크린에서, 기억 위원회의 중앙 서버에서.

준호의 추적 신호가 사라졌다.

빨간 점이 꺼졌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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