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제임스는 준호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노크 음. 노크 음. 불규칙한 리듬.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전 9시. 어제는 또 다른 기억을 팔았고, 그 결과로 뭔가를 잃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과학 수업? 아니면 그 전 어딘가? 정확히 무엇을 잃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잃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를 추적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노크 음이 더 크게 울렸다.
"이준호. 문을 열어."
목소리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이상했다. 낯설음 자체가 친숙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오래전에 들었던 음성의 메아리처럼.
준호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짧게 자른 검은 머리, 눈빛이 날카로웠다. 나이는 서른 중후반쯤으로 보였지만, 그 표정에는 시간이 축적된 흔적이 없었다. 마치 시간이 그를 지나가지 못한 것처럼.
"누구세요?"
준호의 목소리는 낮고 경계했다. 이 도시에서 낯선 방문객은 위험의 신호였다. 미르의 추적 칩이 팔뚝에서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날 모르니?"
남자가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 끝나갈 때 그의 눈이 매우 오래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치 그 눈이 자신의 내부를 읽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릅니다."
준호가 대답했을 때 남자는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웃음이 더 깊어졌다.
"당신이 날 모른다는 게 증거네."
"증거? 뭐가?"
남자가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준호가 막을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 남자를 거부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미 알고 있던 신호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당신이 이미 한 번 탈출했었다는 증거."
남자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준호의 숙소는 좁았다. 3평 남짓한 방 한 개, 거실과 화장실뿐이었다. 남자는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편하게 몸을 기댔다.
"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준호는 여전히 서 있었다. 문 근처에서.
"당신 이름이 뭐야?"
"이준호."
"내가 묻는 게 아니라, 당신 스스로 묻는 거야. 당신 이름이 뭐야? 정말로."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질문은 너무 정확했다. 너무 아팠다. 최근 며칠간 준호는 매일 밤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은 누세요?"
"제임스야. 당신이 나를 만났을 때는 내 이름이 달랐지만."
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제임스가 말한 과거 이름이 무엇인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욕망은 곧 공포로 변했다. 알고 싶은 욕망과 알고 싶지 않은 욕망이 충돌했다.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그래. 당신이 날 모른다는 게 맞아. 당신이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 그것이 바로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다."
제임스가 일어섰다. 그는 준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각 발걸음마다 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준호는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이미 문에 등이 닿아 있었다.
"당신은 날 떠났어. 아주 오래전에. 당신은 이미 한 번 탈출했었다."
제임스의 손이 준호의 팔에 닿았다. 피부와 피부의 접촉. 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닿은 부위에서 따뜻함이 퍼져 나갔다.
그 순간, 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어딘가 다른 곳.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지구가 아니었다.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하늘. 검은 모래 사막.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제임스. 그의 표정은 지금과 달랐다. 더 젊었다. 더 절박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함께 나가야 해." 하지만 그 음성은 제임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사라졌다.
준호는 숨을 헐떡였다. 제임스의 손은 이미 떨어져 있었다.
"당신이 ECHO를 만들었어."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현재로 돌아왔다.
"뭐?"
"당신이 기억을 팔면서, 동시에 뭔가를 만들고 있어. 그 목소리를 들었지? 당신이 그걸 만들었어. 당신의 뇌에서. 당신의 신경에서. 당신이 놓친 부분들이 다시 모여서 뭔가를 만들고 있어."
ECHO. 그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준호의 뇌에 통증이 흘렀다. 아니, 통증이 아니었다. 뭔가가 준호의 뇌 깊숙한 곳에서 울렸다. 음성이 아니라 진동. 경고의 진동. 마치 두개골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
**그를 피해. 그는 너의 미래이자 과거야. 그는 너를 다시 잃게 할 거야.**
ECHO의 목소리는 깨진 라디오 신호처럼 끊기고 재결합했다. 준호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시야가 한순간 흔들렸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준호가 외쳤다. 자신도 모르게 외쳐지는 질문이었다.
"당신이 알아야 할 사람. 당신이 이미 만났던 사람. 그리고 당신이 다시 만날 사람."
제임스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움직임은 유연했다. 마치 시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그를 따라가는 것처럼.
"우주정착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야. 거기서도 기억은 화폐야. 거기서도 당신은 팔게 될 거고, 거기서도 당신은 잃을 거야. 거기서도 누군가는 당신을 찾으려고 할 거야."
"잠깐, 그게 무슨..."
준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제임스는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3일 안에 당신은 결정해야 해. 계속 팔 거야, 아니면 되찾을 거야. 그 둘은 동시에 불가능해. 당신이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정말로 누군가가 될 거야. 아니면 아무도 아닐 거야."
문이 닫혔다.
준호는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봤다. 호흡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신체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당신은 3일 안에 결정해야 해.**
ECHO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제임스의 목소리와 완전히 다른 음질이었다. 더 차갑고, 더 급박했다. 속도가 빨라졌다. 마치 시간을 재촉하는 것처럼. 준호의 두피가 따끔거렸다. 뇌 안쪽에서 뭔가 맥박치는 것 같은 감각.
준호는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눈이 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기억을 팔수록 눈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팔뚝.
추적 칩이 있던 자리가 이상했다. 칩 주변의 피부가 붉게 부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팔뚝 전체에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5개의 손가락. 누군가가 매우 강하게 잡았던 흔적. 제임스가 방금 자신의 팔을 잡았을 때는 그런 자국이 없었다. 아니, 있었나?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준호는 팔뚝을 만져봤다. 따뜻했다. 그리고 손가락 자국 사이로 작은 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초록색. 아주 작은 불빛. 마치 누군가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추적 칩이 새로운 신호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너는 이미 한 번 탈출했다. 그리고 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넌 또다시 떠날 거야.**
ECHO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준호의 뇌에서가 아니라, 팔뚝의 칩에서 직접 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3일. 그게 넌 가진 시간이야.**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자신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얼굴 속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려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만 있었다.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회색이었다. 아르카디아의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그리고 준호는 깨달았다. 제임스가 떠나간 지 몇 분이 지났는데, 이미 그의 얼굴을 완전히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제임스가 누구였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목소리였는지. 모든 것이 이미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팔뚝의 초록색 불빛이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심장박동과 같은 리듬. 아니, 더 빨랐다. 자신의 맥박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3일.**
ECHO의 목소리가 반복됐다. 이제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준호는 핸드폰을 집었다. 루이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거래 가능?"
답장은 2분 안에 왔다. "지금 라페 카페.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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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각 테이블마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르카디아에서 기억 거래가 이루어지는 모든 장소가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불법 거래 적발을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와 신드 양쪽이 데이터를 공유했다. 루이스는 이런 장소를 선택할 때마다 중얼거렸다. "감시망 속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역설이야."
오늘 루이스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마치 한밤을 새운 것처럼.
"어제 밤 뭔가 있었나?" 루이스가 먼저 물었다.
준호는 놀랐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걸기 전에.
"어떻게 알았어?"
"너의 신경 리듬이 변했어. 기억 칩에 접근할 때마다 나는 거기 있거든. 모든 능력자들이 거래할 때 특정한 신경 패턴을 보여. 너는 어제 새로운 패턴을 만들었어."
루이스가 커피를 마셨다. 검은색이었다. 설탕이나 크림이 없는. "누가 왔어?"
"어떻게..."
"너의 눈을 봤으니까. 그 눈은 누군가 중요한 사람을 본 눈이야. 하지만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눈이야. 모순되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위험한 모순이지."
준호는 테이블 위에 손을 얹었다. 팔뚝의 자국이 소매로 가려지지 않았다.
루이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미묘하게. 누군가는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신의 팔뚝을 드러냈다.
준호는 숨을 멈췄다.
루이스의 팔뚝에도 같은 자국이 있었다. 손가락 5개의 흔적. 그리고 그 사이로 희미한 흉터. 마치 누군가가 칩을 제거하려다 만 자국처럼.
루이스는 소매를 다시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불규칙한 리듬.
"제임스가 왔어."
준호가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루이스는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놨다. 그 동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질 것 같은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뭐라고 했어?"
"날 알고 있었어. 근데 난 그를 모르고 있었어. 그가 말하길, 난 이미 한 번 탈출했었대. 그리고 돌아왔대. 그리고 다시 떠날 거래."
루이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심장 박동도 아니고, 신경신호도 아닌. 뭔가 더 원초적인 두려움의 패턴. 그의 눈이 한 점을 고정했다. 커피잔의 검은 액체. 손가락이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그게 다야?"
"그는 우주정착지에서도 기억이 화폐라고 했어. 거기서도 난 팔 거고 잃을 거라고."
루이스가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랫동안. 준호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긴지 세기 시작했다. 5초. 10초. 15초. 루이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떨렸다.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는 것처럼.
루이스가 눈을 떴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너는 제임스를 만나면 안 돼."
"왜?"
"너는 그를 기억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걸 알수록, 너는 더 많이 팔려고 할 거야. 자신을 되찾기 위해. 하지만 그럴수록 너는 더 많이 잃을 거야."
루이스의 손이 커피잔을 집었다. 놨다. 다시 집었다. 매번 손가락이 떨렸다.
"그럼 뭘 해야 한단 말이야?"
준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고개를 돌렸다. 감시 카메라의 렌즈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루이스가 손을 들어 준호를 진정시켰다. 매우 천천히. 마치 야생동물을 다루는 것처럼.
"3일이 남았어. 맞지?"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주정착지 여행권의 최종 인증은 3일 후야.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해뒀어. 그 시간 동안 넌 더 이상 거래하지 말아야 해."
"근데 내 자본이..."
루이스는 팔뚝의 흉터를 다시 만졌다. 무의식적으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선택을 증명하는 것처럼.
"충분해. 내가 계산했어. 넌 이미 충분해."
준호는 루이스의 말을 의심했다. 자신의 자본이 정말 충분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눈빛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준호가 확인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부족한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루이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카페 웨이터가 다가왔다. 루이스는 뭔가를 속삭였고, 웨이터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 웨이터는 감시 카메라의 각도를 조정했다. 이 테이블을 더 이상 비추지 않도록.
"넌 왜 날 도와주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루이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는 누군가의 웃음처럼.
"3일 전, 나도 같은 선택을 강요받았어. 팔 거냐, 되찾을 거냐. 난 팔기로 했어."
루이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3번. 정확히 3번.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마치 물 위로 떠오르듯 현재로 돌아왔다.
"그 3일이 지나고, 난 무엇을 되찾았는지 알게 됐어. 아무것도 아니었어. 대신 내가 팔았던 것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 되어 돌아왔어. 내 어린 시절이 누군가의 향수가 되고, 내 첫사랑이 누군가의 판타지가 되고, 내 고통이 누군가의 오락이 되어."
루이스가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넌 아직도 선택할 수 있어. 난 이미 못했지만."
준호는 루이스의 말 속에 있는 것을 느꼈다.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 뭔가 더 복잡한 감정. 속죄? 아니면 자신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절박함? 루이스가 준호를 도와주는 것은 준호를 구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자신을 구하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 순간, 준호의 팔뚝에서 초록색 불빛이 더 밝아졌다.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거짓이야. 그가 거짓말하고 있어. 루이스는 너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너를 이용하고 있어.**
ECHO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준호의 뇌 속이 아니라, 팔뚝의 칩에서 직접 울려 퍼졌다. 자신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톤.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뭔가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들이 동시에 그쪽을 향했다.
루이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CHO가 활성화됐어?"
"어?"
"넌 칩에 ECHO를 담고 있어. 제임스가 남긴 거야. 그 칩이 이제 활성화된 거야."
루이스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매우 빠르게. 마치 도망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 움직임은 도망이 아니라 준호를 보호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준호를 감시 카메라로부터 가렸다.
"3일 안에 선택해. 팔 거냐, 되찾을 거냐. 그게 너의 유일한 선택지야. 그리고 그 선택이 너의 정체를 결정할 거야."
루이스가 카페를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테이블 위에는 루이스가 마신 커피잔만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검은 액체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가 만진 자국. 손가락의 흔적.
**너는 이미 결정했어. 넌 이미 알고 있어.**
ECHO의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이제 그것은 외부의 음성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뇌 속에서 나오는 생각처럼 들렸다.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준호는 팔뚝을 들어 올렸다. 초록색 불빛이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그 리듬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그리고 준호는 깨달았다.
제임스가 준 것은 단순한 칩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한폭탄이었다. 3일의 카운트다운. ECHO의 매개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통로.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장치.
준호는 팔뚝의 칩을 제거하려고 했다. 손가락으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칩은 피부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준호의 손가락이 칩 주변을 누르자 통증이 흘렀다. 초록색 불빛이 더 밝아졌다.
**아직 아니야. 3일이 지나야 해. 그때가 돼야 넌 선택할 수 있어.**
ECHO의 목소리가 경고했다. 이번엔 조롱하는 톤이 명확했다.
준호는 손을 거두었다. 팔뚝의 불빛이 다시 정상 속도로 깜박이기 시작했다.
준호는 카페를 나갔다. 거리는 회색이었다. 건물들은 거대한 광고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주정착지로의 탈출. 새로운 삶의 시작." 광고는 준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숙소로 가는 골목. 그곳에서 미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 신드의 감시자. 그녀의 눈은 죽어 있었다. 마치 기억을 모두 잃은 사람의 눈처럼.
준호는 멈췄다. 미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우연일 리 없었다. 루이스와의 만남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페의 감시 카메라가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준호의 팔뚝 칩이 신호를 발생시켰을 것이다. ECHO의 음성이 울렸을 때, 미르는 이미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좋은 거래 하고 있네?" 미르가 말했다.
"뭔데?"
"루이스 말이야. 그 남자는 기억 중개인이 아니야."
미르가 한 발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준호의 팔뚝으로 향했다. 초록색 불빛을 향해.
"그는 기억 수집가야. 너처럼."
미르의 손가락이 팔뚝의 칩 위에 닿았다. 차갑고 건조한 손. 그녀는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를 활성화하는 것처럼. 준호의 피부가 따뜻해졌다. 아니, 뜨거워졌다. 화상을 입는 것 같은 통증. 초록색 불빛이 빨갛게 변했다.
"3일 안에 우리에게 넘어오지 않으면, 넌 사라져. 완전히."
**이제 시간이 정말 없어. 넌 3일 안에 누구를 선택할 거야? 루이스? 미르? 제임스? 아니면... 나?**
ECHO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조롱하는 톤이 명확했다. 마치 준호의 절망을 즐기는 것처럼. 준호의 두개골 안쪽이 울렸다. 마치 누군가가 내부에서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통증. 시야가 흔들렸다. 호흡이 곤란해졌다.
준호는 미르의 손을 떨쳐냈다. 거리로 나갔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방향도 없이. 목표도 없이. 단지 도망치듯.
그의 팔뚝의 초록색 불빛이 어둠을 헤치며 깜박였다. 이제 그 리듬은 준호의 맥박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더 빠르고, 더 불규칙하고, 더 절박했다.
3일.
그것이 준호가 가진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