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칩의 음성이 멈춘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준호는 중학교 친구 태성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이 아니라 '그것'만 남아 있었다. 이름도 있고, 함께했던 순간들도 있는데, 정작 코와 입과 눈의 배치가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태성의 얼굴을 다시 그려보려 했지만, 뭔가를 그리는 대신 검은 공간만 더 깊어졌다.
손이 떨렸다.
그는 일어나 앉아 양손을 맞부딪쳤다. 손가락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야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들렸다. 손은 실재했다. 하지만 태성의 얼굴은 없었다.
휴대기를 집어 들었다. 통신 기록에 '태성'이라는 이름이 3년 전부터 없었다. 삭제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준호의 신경계가 경고음을 울렸다. 뇌 뒤쪽이 욱신거렸다. 마치 누군가 두개골 안에서 손가락으로 회백질을 긁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몸이 무언가를 토하려고 했지만 이미 빈 상태였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이런 거였다.
준호는 벽에 기대앉아 호흡을 고르려 했다. 처음 들었던 음성이 환각이라고 자신을 속여 왔다. 스트레스성 이명. 기억 거래로 인한 신경 과부하. 그런 식으로 합리화했다. 하지만 지금 이 공백은 환각이 아니었다. 너무나 명확했다. 없다는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
휴대기의 거래 기록을 확인했다. 지난 3일간 8건의 기억 거래. 어떤 기억들이었는지는 기억했다. 행복한 순간들. 누군가의 첫 키스, 승진 축하 파티, 아이의 탄생 소식. 감정이 강할수록 가격이 높았다. 암시장의 중개인들은 극단적인 감정을 원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기억은? 자신의 감정은?
그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준호는 휴대기를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대신 화면을 켜서 거래 기록 분석을 시작했다.
**거래 1 (3일 전):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 기억 (추정) — 500만 크레딧** **거래 2 (2일 전): 작은 성공의 기억 (추정) — 300만 크레딧** **거래 3 (어제): 친구들과의 고등학교 시절 (추정) — 400만 크레딧** **거래 4~8 (오늘 아침): 소액 거래들**
지워진 기억들: - 중학교 친구의 얼굴 (3일 전 소실) - 아버지의 이름 (어제 오후 소실) -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목소리 (이 아침)
패턴이 명확했다. 강한 감정의 기억을 팔 때마다, 그것과 연결된 다른 기억들이 함께 사라졌다. 루이스가 경고했던 '의식 흔적'이 있는 기억들이었을 거다. 추출되면서 신경 경로 전체가 끊어진 거다. 마치 뇌의 회로도에서 특정 선을 자르는 것처럼.
준호는 일어나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름은 이준호다. 나이는 27세다. 직업은 기억 거래자다. 그런데 이 모든 정보가 외부에서 주입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 안에서 나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거울을 터치했다. 차가운 유리. 실재했다. 하지만 자신은?
휴대기가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준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준호?"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차분한. 준호는 본능적으로 '누구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 전에 상대가 말했다.
"나는 루이스다. 암시장 중개인이다."
준호는 침묵했다. 루이스? 들어본 이름이었다. 상층부 암시장에서 돈 있는 놈들의 기억을 매매하는 중개인. 하지만 준호와 루이스는 만난 적이 없었다. 아니, 만났는지 만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 번호를..."
"당신의 능력에 관심이 있다. 만나자. 지금."
"뭐?"
"당신은 지금 위험하다. 미르라는 감시자가 당신을 마크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
준호의 심장이 떨어졌다. 미르? 신드 조직의 미르? 2층 암시장에서 본 여자. 검은색 옷, 공허한 눈. 그녀가 자신을 마크했다고?
"만나자면... 어디서?"
"당신 집에서 2블록 떨어진 '라페' 카페. 1시간 뒤. 혼자 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통화가 끊겼다.
준호는 휴대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신드의 함정. 기억 위원회의 함정. 아니면 자신의 신경계가 만든 환각?
휴대기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다른 번호였다. 여자의 음성.
"이준호? 나 소피아야."
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소피아. 슬럼가에서 만난 어린 기억 거래자. 천진하고 위험했던. 자신보다 나이가 3살 어렸던.
"뭐 해?"
"당신 좋은 소식 들었어. 루이스가 나한테 물어봤어. 당신이 우주정착지에 가려고 한다는 거."
"소피아, 지금..."
"루이스 말이 맞는 것 같아. 당신 능력 정말 특별하대. 보통 기억 거래자는 한 개, 두 개씩만 거래하는데 당신은 한 번에 여러 개를 빼내갈 수 있다는 거야. 신드에서 벌써 눈을 떴다고."
준호는 침묵했다. 소피아가 계속했다.
"나도 당신이랑 같이 가고 싶어. 우주정착지. 거기 가면... 기억 안 팔아도 되잖아."
"소피아..."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가고 있어. 나도 봤어. 어제 당신 눈. 뭔가 자꾸 한 번 봤던 것처럼 내 얼굴을 봤어."
준호의 목구멍이 타 내렸다.
"난 당신을 모르고 싶지 않아. 당신이 자신을 모르는 꼴도 보고 싶지 않고."
통화가 끊겼다.
준호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도시의 회색 공기가 들어왔다. 거리 아래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자신의 기억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처럼 점진적으로 자신을 잃어가고 있을까?
준호는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셔츠. 바지. 얼굴을 씻었다. 거울의 남자가 물러났다 돌아왔다. 이번엔 조금 더 현실 같았다.
1시간 뒤, 라페 카페.
준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페는 한산했다. 오후 3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중이었다. 창가 테이블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50대로 보였다. 검은색 코트, 흰 셔츠. 얼굴은 특징이 없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도록 설계된 것 같은 얼굴.
"앉아."
루이스가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준호는 앉았다.
"당신의 능력은 특별하다. 일반적인 기억 거래자가 아니다."
"어떻게 알았어?"
"암시장 정보. 당신이 거래하는 기억들의 원주인들이 불완전한 기억 손실을 입고 있다. 보통 기억을 팔면 깨끗하게 없어진다. 하지만 당신의 거래 대상자들은 기억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지는 현상을 보인다. 연결된 기억들까지 함께 빨려나가는 거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단순히 기억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그 기억과 연결된 신경 경로 전체를 읽어낼 수 있다. 이런 능력자는 드물다. 매우 드물다."
"그게 나한테 좋은 거야?"
루이스는 커피를 마셨다. 준호는 그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의식적으로 움직임을 제어하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기억을 많이 팔아서인 걸까.
"당신이 계속 이렇게 거래하면, 2개월 안에 정체성 붕괴가 온다. 의료진들은 '메모리 프래그멘테이션 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는 우주정착지에 도착해도 의미가 없다. 빈 껍데기일 뿐이다."
"그럼 뭘 하라는 거야?"
루이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이 준호의 눈을 바라봤다. 공허했다. 정말로. 마치 눈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 사람을 믿지 마.
음성이 준호의 귀에 울렸다. ECHO였다. 준호는 순간 몸을 경직했다. 루이스는 준호의 반응을 포착했지만 말을 이었다.
"특정 기억만 거래하자. 당신이 팔아서는 안 되는 기억들을 제외하고, 내가 지정하는 것들만. 그러면 당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우주정착지 표값을 충분히."
루이스는 테이블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홀로그래픽 디스플레이였다. 그 위에 기억 목록이 떴다. 준호는 그것을 읽으려 했지만, 화면이 흐릿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읽을 수 없게 설정된 것처럼.
"이 기억들을 팔면, 한 번에 5천만 크레딧이다. 우주정착지 표값이 3천만이니까, 당신은 충분히 갈 수 있다."
"어떤 기억들인데?"
"당신의 어린 시절 기억들.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들. 당신도 이미 일부를 팔았지만, 나머지를 완성해야 한다."
준호는 루이스의 손을 밀어냈다. 손이 차가웠다. 정말로. 마치 그것이 손이 아니라 얼음 덩어리인 것처럼.
"당신은 날 속이려고 해."
루이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이 얼굴에 도달하지 않았다.
"당신이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미르가 당신을 데려갈 거다. 신드 조직은 당신의 기억을 강제로 빼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의 정체성은 완전히 붕괴될 거다. 나는 그것을 막아주려고 한다."
"그럼 넌?"
"당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우주정착지의 기억 네트워크에 접근하려는 거다. 그곳의 기억들은 매우 가치 있다. 당신이 거기 도착하면, 당신의 능력으로 그 네트워크를 읽어낼 수 있을 거다. 그것이 내 투자의 보상이다."
준호는 침을 삼켰다. 루이스의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그 논리 뒤에 숨겨진 의도가 명확했다. 루이스는 자신을 도구로 보고 있었다.
"거절한다."
루이스의 웃음이 멈췄다.
"당신이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제안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기억들도 팔지 않을 거다."
루이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봐. 내일 다시 연락할 게. 그때까지 미르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준호는 카페를 나갔다.
거리로 나온 준호는 계속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도시의 회색 건물들이 자신을 짓눌렀다. 감시 드론이 하늘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이 어디로 가도 이미 누군가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르가. 루이스가. 아니면 자신 안의 ECHO가.
그날 밤 11시, 준호의 숙소.
준호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해보려 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백만.
창문이 열렸다.
준호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안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색 옷. 공허한 눈의 윤곽.
"미르?"
여자가 다가왔다. 준호는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미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이게 더 쉬울 거야."
"뭘 원해?"
"당신의 다음 거래를 내게 보고하라. 누구한테 어떤 기억을 팔 건지. 그리고 거래가 끝나면 즉시 연락하라."
"거절할 수 있어?"
미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이 얼굴에 도달하지 않았다. 루이스와 같았다.
"선택이 아니다."
미르가 손을 펼쳤다. 준호의 팔뚝에 무언가 붙으려 했다. 추적 칩이었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팔을 빼려 몸부림쳤다. 미르의 손이 그의 팔을 누르며 움직임을 제한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 준호는 저항했다. 팔을 비틀고, 몸을 굴렸다. 하지만 미르의 힘이 더 강했다. 그녀의 손에서 나오는 냉기가 팔뚝을 얼려갔다.
준호가 몸 전체로 저항하자, 미르는 그의 어깨를 벽에 내팽개쳤다. 추적 칩이 깊숙이 박혔다. 준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미르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마치 살이 아니라 강철인 것처럼. 준호는 손가락을 깨물려 했지만, 그것도 막혔다.
"이건 당신을 지키기 위한 거다."
미르가 입을 떨어뜨렸다. 준호는 숨을 헐떡였다. 팔뚝의 추적 칩에서 초록빛이 깜박였다.
"우리는 당신을 원한다. 죽은 상태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루이스는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 우리는 다르다."
"그럼 왜 나를 추적해?"
"당신의 기억 중 일부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다. 당신이 처음 거래했던 어린 시절 기억들. 그것들을 돌려주려면, 당신이 루이스와 거래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 거래에서 나오는 정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미르가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멈췄다.
"루이스는 당신을 이용해서 우주정착지의 기억 네트워크에 접근하려고 한다. 당신이 거기 도착하면, 당신의 능력은 그들의 무기가 될 거다.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럼 넌?"
"우리는 당신을 보호한다. 대신 당신은 루이스의 지시를 따르되,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고한다. 그게 거래다."
미르가 사라졌다.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준호는 팔뚝의 추적 칩을 봤다. 작은 초록빛이 깜박였다. 그 깜박임은 자신의 심장박동과 같은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휴대기가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준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당신이 뭘 잃었는지 알고 싶어?"
여자의 목소리였다. 낯설지만 친숙한. 마치 먼 과거에서 들었던 것 같은. 준호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누구야?"
"나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기억해야 한다. 루이스와 미르가 모두 당신을 원하는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다."
"뭐라는 거야?"
"당신의 어린 시절 기억들. 그 안에는 우주정착지의 좌표가 있다. 그리고 그 좌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당신도 알았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팔아버렸다."
"누구야? 이름을 말해."
"당신이 기억해야 할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지금은 아직이다. 하지만 기억해. 루이스도 미르도 당신을 지키려는 게 아니다. 둘 다 당신을 이용하려고 한다. 유일하게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건 당신 자신뿐이다."
"잠깐, 아직..."
통화가 끊겼다.
준호는 휴대기를 내려놨다. 팔뚝의 초록빛이 계속 깜박였다. 자신의 심장과 같은 리듬으로. 그 리듬 속에서 준호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확인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추적 칩의 깜박임과 알 수 없는 목소리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