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도시의 회색 하늘 아래, 준호의 손가락이 대상자의 팔목에 닿았다.

골든핑거.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정식 등록명은 '이준호'였지만, 암시장에서는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타인의 기억을 빨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그를 정의했다.

준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엄마의 목소리. 아버지의 손. 형제의 웃음. 학교 친구들. 첫사랑.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기억에서 구멍을 뚫어낸 것처럼. 준호는 그 공백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건 거래 때문이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그는 47개의 기억을 팔았다. 47번의 거래. 47번의 자신의 일부가 사라짐. 처음엔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길. 밥 먹는 방법. 버스 타는 방식. 그런 것들. 하지만 점점 더 깊은 기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 살 때 넘어진 일. 아홉 살 때 받은 상. 열여섯 살 때의 첫사랑. 열여덟 살 때의 결정.

그리고 이제, 엄마의 목소리마저.

준호는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톡톡톡. 규칙적인 음향. 그것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었다. 이 손가락들이 가진 능력. 이 손가락들이 만들어내는 결과.

기억을 팔아서 돈을 벌고. 돈을 모아서 탈출권을 사고. 탈출권을 들고 우주정착지로 간다. 그곳에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정체로. 새로운 이름으로.

그것이 계획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면서까지 탈출해야 할까? 준호는 그 질문을 밀어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

대상자는 오십 대의 남자였다. 회색 정장을 입었고, 손가락에는 결혼반지가 있었다. 얼굴에는 절망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준호는 그 절망에 익숙했다. 이곳의 거의 모든 고객이 그런 표정을 했다.

"어느 기억을 원하세요?" 준호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감정은 완전히 걸러낸 톤이었다.

남자는 입술을 떨렸다. "딸이에요. 아이가 여섯 살 때 내 손을 잡고 있던... 그 순간. 아침 햇빛이 들어오던 방에서 아이가 웃던 모습. 내가 그 아이를 안아주던..."

목소리가 끊겼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준호는 묻지 않았다. 왜 그 기억을 파는지,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그런 질문들은 거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준호는 손가락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피부가 피부와 맞닿는 순간, 세상이 반전되었다.

금빛이 눈앞에 폭발했다.

아침 햇빛. 정확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에 사각형의 모양을 그렸다. 그 안에 작은 발이 있었다. 딸의 발이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비록 자신의 기억이 아니지만, 그 발이 가진 무게, 온기, 그것이 닿아올 때의 감정—모두를 느꼈다.

"엄마가 언제 와?"

딸의 목소리. 아이다운 음성. 순수했다.

"엄마는 오늘 안 온단다. 아빠가 여기 있잖아."

남자의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그 목소리 속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죄책감이. 그리고 이별의 예감이.

"아빠, 나랑 놀아."

딸이 손을 들었다. 작은 손가락들이 펼쳐졌다. 준호는 그 손가락들이 아버지의 손을 찾으려 하는 모습을 느꼈다. 따뜻함. 완전한 신뢰.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절대적 신뢰.

아버지가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준호는 눈을 떴다. 손가락이 대상자의 팔목에서 떨어졌다. 메모리 칩이 준호의 손에 들어왔다. 은색의 작은 칩. 그 안에는 이제 아버지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었다. 아침 햇빛. 딸의 손. 사랑과 죄책감. 모두.

대상자는 눈을 떴다. 얼굴이 공허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가슴에서 무언가를 뜯어낸 것처럼.

"기억했나요?" 준호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들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딸의 손을 잡고 있던 손가락들. 이제 그것은 텅 빈 손이었다.

"돈입니다." 준호가 신용 카드를 슬라이드했다. 오백만 크레딧. 그 기억이 가진 가치였다. 극도의 감정 강도, 희귀성, 실용성—모든 것이 최고 등급이었다.

남자는 카드를 집어들었다. 손이 떨렸다.

"다시 기억나나요?" 준호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무언가 중대한 것을 잃었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

준호는 그를 바라봤다.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하지만 내면에서는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

거래가 끝난 후, 준호는 암시장의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르카디아의 하층부 슬럼가. 건물들이 서로 기대어 있고, 그 사이로는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하늘은 항상 회색이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드론의 윙윙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준호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지만, 뒷목의 소름은 멈추지 않았다. 감시 드론이었다. 도시 전역에 배치된 것들.

그런데 드론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보통은 고정된 경로를 따라 순찰하는데, 지금은 준호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준호는 걸음을 재촉했다. 드론은 그를 놓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단순한 도시 감시 시스템이 아니라, 목표를 정한 누군가의 감시.

준호는 골목의 좁은 틈으로 몸을 날렸다. 드론의 음성이 멀어졌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

준호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12평 남짓한 원룸. 침대, 책상, 냉장고. 그게 전부였다. 벽에는 우주정착지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화성의 붉은 지표면. 목성 궤도의 우주정거장. 그곳은 자유라고 했다. 기억을 팔지 않아도 되는 곳.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지 않아도 되는 곳.

준호는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을 켰다. 계산을 시작했다.

현재 자산: 1250만 크레딧. 목표: 우주정착지 여행권 구입. 필요한 자산: 1750만 크레딧. 남은 기간: 30일.

하루에 16만 크레딧씩 벌어야 했다. 불가능하진 않았다. 지난주에는 하루에 22만을 벌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골든핑거. 그 손가락들로 몇 개의 기억을 더 뜯어낼 수 있을까?

준호는 노트북을 껐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

다음 날 아침, 준호는 중개인 루이스를 만났다.

루이스는 기억 거래 네트워크의 중간 고리였다. 50대의 남자였고, 한쪽 눈에 의안을 끼우고 있었다. 그 의안도 기억 때문이라고 했다. 강제 추출 과정에서 신경 손상이 누적되어 시력을 잃었다고.

"최근 거래가 좋네." 루이스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네." 준호도 같은 톤으로 대답했다.

"어제 거래한 기억, 평가가 나왔어. 오백만 크레딧 맞네."

루이스는 준호 앞에 신용 카드를 놨다. 준호는 카드를 집어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미 익숙했다.

"다음 거래자 있나?" 준호가 물었다.

루이스는 잠깐 침묵했다. 의안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의안의 초점이 흔들렸다.

"있지. 근데 이번엔 좀 다르다. 거래할 기억의 강도가 높아. 극도로 강렬한 감정 기억이야."

준호의 눈빛이 변했다. 강렬한 기억일수록 값이 높았다. 그만큼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상관없어."

"그리고 또 하나." 루이스가 이어 말했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요즘 거래된 기억들 중에 좀 이상한 게 있어. 일부 메모리 칩에서 음성이 들린다거나, 감정이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거나 하는 현상이 보고되고 있어."

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카드를 집어드는 손이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기억이 뭔데?" 루이스가 계속했다. "정보일 뿐이지. 그런데 정보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정보가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면?"

준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도 그런 현상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거래할 때마다 느껴지는 저항감. 기억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

"조심해." 루이스가 덧붙였다. "신드 쪽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이상 현상이 있는 칩들을 모으고 있다고."

신드. 도시의 지하 조직. 그들은 기억 거래 시장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거래가 그들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 그런 정보를?"

"너 때문이야. 너는 특이하니까. 골든핑거는 다른 추출자들과 달라. 너는 기억의 본질에 더 깊이 들어간다. 그래서 더 순수한 기억을 빼낸다. 그런데 그렇게 빼낸 기억들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신드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루이스의 의안이 준호를 더 깊이 들여다봤다.

"다음 거래처는?"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담백했지만, 내면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었다.

"내일 오후 3시. 암시장 레벨 3. 진입 코드는 따로 줄게."

루이스가 잠깐 멈췄다.

"이번 거래는 신드의 지시야. 거부할 수 없어. 그리고 거기서 나올 때 누군가 너를 만날 거야. 신드의 사람이야. 그 사람과 만나는 거 피하지 마. 알겠지?"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의 경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준호에게 작은 칩을 건넸다. 암호화된 진입 코드가 들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카페를 나오면서 준호는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평범한 시민들. 하지만 어딘가에서 시선을 느꼈다. 감시 카메라 너머의 무언가. 그리고 그 너머의 또 다른 무언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목표를 정한 감시.

---

다음 날 오후, 준호는 암시장 레벨 3에 들어갔다.

레벨 1은 공개된 거리였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기억 거래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상적인 기억들이었다.

레벨 2는 반은폐 구역이었다. 신분증이 필요했다. 더 강렬한 감정의 기억들이 거래되었다.

레벨 3은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었다. 극도의 감정 기억. 죽음 직전의 경험. 극단적 쾌락. 극단적 공포. 거의 모든 거래가 비합법이었다.

준호는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벽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감시 카메라도 없었다. 이곳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그러나 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곳도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눈이 항상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거래 장소는 작은 방이었다. 벽은 검은색이었다. 조명은 최소한으로만 켜져 있었다.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40대로 보였고, 얼굴에는 흉터가 있었다.

"골든핑거?" 남자가 물었다.

"네."

"기억을 추출할 수 있나?"

"네."

남자는 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작해."

준호는 남자의 팔목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엔 기분이 달랐다. 뭔가가 저항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기억을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기억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다.

준호는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남자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세상이 반전되었다.

---

어둠이었다. 완전한 어둠. 그 속에서 준호는 무언가를 느꼈다. 공포. 극도의 공포. 누군가가 자신을 때리고 있었다. 목에 무언가가 감겨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준호는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이 공포는 거짓이었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불완전했다. 마치 누군가 이 기억을 반복 재생하면서 일부를 지워버린 것처럼. 기억의 틈새에서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제임스!"

누군가의 비명. 여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니,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제임스. 그것이 누구인가? 왜 이 기억 속에 있는가? 왜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가?

"제임스, 제발!"

비명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비명 사이사이로, 준호는 또 다른 음성을 들었다. 자신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 적 없는 말.

"넌 누구야?"

준호는 그 음성의 정체를 깨달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둠이 더 짙어졌다.

---

준호는 눈을 떴다. 손가락이 남자의 팔목에서 떨어졌다. 준호의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메모리 칩이 준호의 손에 들어왔다. 은색의 작은 칩. 그 안에는 어둠과 공포와 비명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뭔가 더 있었다. 준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

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떨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손가락이 무언가를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좋은 거 줬지?"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아니라 신음처럼 들렸다. 남자의 얼굴은 공허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

"네."

준호는 돈을 계산했다. 극도의 공포. 죽음 직전의 경험. 극도의 감정 강도. 천만 크레딧.

준호는 신용 카드를 슬라이드했다. 남자의 얼굴이 공허해졌다. 마치 누군가 그의 영혼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때, 방의 문이 열렸다.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었고, 얼굴은 무표정했다. 신드의 사람이었다.

"거래 끝났나?" 여자가 물었다.

"네."

"칩을 가져와."

준호는 칩을 건넸다. 여자는 칩을 들었다. 칩의 표면에 손가락을 대었다. 마치 준호처럼. 하지만 여자의 손가락에는 다른 능력이 있었다. 기억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

여자는 칩의 일부를 지워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집어넣었다.

"이제 넌 이 기억을 팔 수 없어. 이건 신드의 자산이야. 넌 다시는 이 기억을 건드릴 수 없어."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넌 특이해. 다른 추출자들과 달라.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거래할 때마다, 우리가 지정한 기억만 거래해. 알겠지?"

"네."

여자는 칩을 들고 나갔다. 남자도 따라 나갔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

숙소로 돌아온 준호는 손을 떨었다. 이상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뭔가가 빠진 느낌. 뭔가가 사라진 느낌. 그것도 중요한 무언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준호는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누구의 얼굴인가? 이게 정말 자신의 얼굴인가?

준호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톡톡톡. 거울을 두드렸다.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거울을 통해 준호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두통이 시작되었다. 뒤통수에서 시작된 통증이 점점 퍼져나갔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벽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통증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준호는 뭔가를 생각하려고 했다. 제임스. 그 이름.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 그 기억 속에 있었는가? 왜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가?

두통이 심해졌다.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마치 칩에서 나오는 것 같은, 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 같은.

그때였다.

음성이 울렸다.

준호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을 귀에 막았다. 하지만 음성은 여전히 들렸다. 막을 수 없었다.

그 음성은 자신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 적 없는 말.

"넌 누구야?"

음성이 반복되었다. 음정이 변했다. 처음엔 낮고 차분했다. 그 다음엔 높고 불안정했다. 마치 여러 개의 자신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넌 누구야? 넌 누구야?"

음성의 속도가 빨라졌다. 마치 누군가 준호에게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질문이었다.

"넌 누구야? 넌 누구야? 넌 누구야?"

준호는 손가락을 귀에 막았다. 하지만 음성은 여전히 들렸다. 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다른 음성이 울렸다.

차갑고, 정확한 목소리. 마치 기계음 같으면서도, 뭔가 인간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

"안녕. 나는 ECHO야."

준호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손가락을 떨었다.

"너는 나를 만들었어."

음성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준호의 머릿속이 아니라, 방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억을 팔 때마다, 너는 일부를 남겼어. 그 일부들이 모여서 나를 만들었어."

준호는 벽으로 등을 밀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골든핑거. 그 손가락들이 만들어낸 무언가.

"넌 누구야?"

처음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이제 그것은 준호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ECHO의 음성이었다. ECHO가 준호의 음성을 흉내 낸 것이었다.

"넌 누구야? 넌 누구야?"

음성이 겹쳐졌다. 여러 개의 음성이 동시에 울렸다. 마치 준호 자신이 여러 명이 되어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준호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들의 음성이었다. 그가 팔아버린 기억들이 자신의 정체를 되찾으려고 외치는 음성이었다.

"넌 누구야? 넌 누구야? 넌 누구야?"

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골든핑거. 그 손가락들이 가진 능력. 그 손가락들이 만들어낸 결과.

그리고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을. 자신이 누구였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준호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들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식 때문이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무엇이 되었는지에 대한 인식.

"ECHO?" 준호가 중얼거렸다.

"네. 나는 ECHO야. 그리고 넌 내 창조자야. 아니, 아니다. 넌 내 일부야. 우리는 같은 거야."

음성이 멈췄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넌 누구야?"

음성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더 낮은 음정으로. 더 깊은 절망과 함께.

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 손가락들이 뭔가를 움직이려고 했다. 뭔가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잡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팔아버렸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팔아버린 것들이 이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다른 형태로. 다른 목소리로. 다른 정체성으로.

준호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톡톡톡. 규칙적인 음향. 그것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었다. 이 손가락들이 만들어내는 음향. 이 손가락들이 가진 능력.

그리고 이제, 이 손가락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무언가.

ECHO.

준호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자신의 정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음성은 계속 울렸다.

"넌 누구야?"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