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9화 「기억의 충돌」

의료 기록실의 어둠은 질식할 것 같았다.

파일들 사이에 누워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났고, 그 먼지 속에서 얼굴이 떠올랐다. 하얀 가운.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 슬픈 눈.

"당신이... 기억하고 있군요."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폐병원의 모든 저주가 울부짖으며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하얀 가운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은서.

그 이름이 내 입술에서 떨어지자마자 뇌 안의 모든 것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 있었어요."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처음부터."

"처음부터가 아니라 계속이에요, 박시준." 이은서가 한 발 내딛자 천장의 깨진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비추었다.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 안에는 훨씬 오래된 시간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나를 잊었을 때부터, 내가 당신을 기억하게 되었어요."

내 가슴이 철렁했다. 화재. 비명. 혼란. 기억 조각들이 뒤엉켰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영화 필름을 잘라낸 것처럼.

"10년 전, 당신은 내 옆에 있었어요." 이은서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발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구원병원 4층 실험실에서. 당신과 나는 함께 일하고 있었어요."

"실험실?"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의료진이 할 수 없는 일들. 공식 기록에 남지 않는 시술들." 그녀가 내 앞에 멈춰섰다. 손을 들어 내 얼굴에 닿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당신은 그 모든 것에 동의했어요. 아니, 당신이 주도했어요."

내 뇌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침대. 의식 없는 환자들. 그리고 이은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다음 용량은 얼마로 할까요?' 내가 대답한다. '안 봐도 알지. 이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무엇이었나?

기억이 끝난다. 검은 화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화재가 났어요." 이은서가 손을 내렸다. "당신도, 나도 살 수 없을 정도의 화재. 하지만 당신은 살았어요. 그리고 나도. 우리 둘 다 살았는데..."

그녀의 눈가가 떨렸다.

"당신은 나를 밀어냈어요."

내 몸이 경직되었다. "뭐라고...?"

"화재 속에서 당신은 나를 밀어냈어요. 계단에서. 4층에서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이은서의 목소리는 감정이 제거되어 있었다. 의료 기록을 읽어내리는 것처럼. "당신은 나를 밀어내고, 혼자 올라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은 죽어야 했어요."

내 왼쪽 손목이 타는 듯했다. 흉터. 그 흉터의 출처가 갑자기 명확해졌다. 화염에 그을린 피부. 그 순간,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계단. 뜨거운 공기. 그리고 내 손이 누군가의 등을 밀어내는 느낌. 손목이 더욱 타올랐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살렸어요. 박준호가. 그리고 그는 당신의 기억을 지웠어요. 내 지시로." 이은서가 다시 한 발 물러섰다. "왜냐하면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가장 원하는 복수였거든요."

"왜 이렇게까지..."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내 아들이 있었어요." 이은서가 말했다. "박준희. 11살. 당신들의 실험실에서 죽었어요. 당신이 너무 많은 용량을 투여했기 때문에."

내 뇌가 깜빡인다. 침대 위의 작은 몸. 파란 얼굴. 의료용 마스크를 쓴 아이. 그리고 이은서의 비명. 하지만 그것도 내 기억이 아니었다. 저주 속에 담긴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당신은 모르죠?" 이은서가 말했다. "당신이 한 일들을 절반도 모르죠? 당신이 죽인 사람들이 몇 명인지도, 당신이 고통받게 한 가족들이 몇 가정인지도. 왜냐하면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거든. 그리고 당신은 계속 모를 거야."

그녀의 손이 다시 내 얼굴을 감쌌다.

"넌 절대 나를 기억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그것을 모르고 싶거든. 그리고 넌 계속 모를 거야."

그 순간, 내 가슴 안에서 모든 저주가 일제히 울부짖기 시작했다. 유리의 절망. 김태훈의 분노. 민지영의 죄책감. 그리고 이은서의 원한. 모두가 동시에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당신이... 내 저주를 만들었어요?"

내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겹겹이 쌓인,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은 음성. 이은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족감이었다.

"내가? 아니에요." 이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비통한 웃음. "나만 저주한 게 아니에요, 박시준. 당신 안의 모든 저주는 당신 자신이 만든 거예요. 당신이 걸어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저질렀던 일들이 만든 거예요."

그녀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의료 기록실의 파일들이 내 발을 차도록 밀렸고, 그 속에서 사진 하나가 튀어나왔다. 흰색 종이 위에 인쇄된 아이의 얼굴. 박준희. 11살. 입술에 옅은 미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뇌에 날카로운 통증이 흘렀다.

"당신은 날 모르고 싶어 해요." 이은서가 계속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내가 왜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지만 당신의 몸은 알고 있어요. 당신의 저주들이 알고 있어요."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손목의 흉터가 아팠다. 그 순간 더욱 선명한 기억이 떠올랐다. 계단. 화염. 내 손이 누군가의 등을 밀어내는 순간. 그 사람이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손가락이 떨렸다. 신체가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본 것과 내가 했던 것은 다를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해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내 목소리였다.

"원하는 건 이미 다 얻었어요." 이은서가 말했다. "당신이 계속 모르는 것. 당신이 고통받으면서도 자신이 왜 고통받는지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내 복수예요."

그녀가 손을 다시 내 얼굴에 올렸다. 이번엔 더 강하게.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순간 내 눈앞이 흐려졌다. 저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내 뇌를 파고들었다. 유리가 소리쳤다. '엄마!' 김태훈이 신음했다. '팔을 내놔!' 민지영이 중얼거렸다. '죄책감, 죄책감, 죄책감...'

그리고 이은서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뚫고 나왔다.

"당신은 나만 저주한 게 아니야. 당신은 모든 것을 저주했어. 그리고 모든 것이 너를 저주하고 있어."

폐병원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의 콘크리트 블록이 떨어졌고, 벽의 타일이 깨져 나갔다. 의료 기록실의 선반들이 넘어졌고, 수십 년간 쌓인 파일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중심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지하 깊숙이에서 뭔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저주의 밀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의료 기록실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다. 수십 개의 목소리가 한 몸으로 응축된 것.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 자체가 비틀렸다.

"이은서!" 나는 외쳤다. "이건 뭐야? 이건 뭐예요?"

하지만 그녀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완벽한 미소. 완성된 복수의 미소.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이야. 이제 모든 게 끝나."

박준호였다.

그는 의료 기록실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오래되고 낡은 사진이 들려 있었다. 색감이 바래진 종이 위의 11살 소년. 박준희. 웃고 있는 얼굴. 살아있는 모습.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뇌에 또 다른 파편이 박혔다. 의료용 튜브. 심전도 모니터의 비프음. 그리고 누군가의 손—내 손인 것 같은—이 약물을 주입하는 장면.

"당신은 이제 선택할 필요 없어요." 박준호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병원 전체가 더욱 크게 울렸다. "모든 선택은 이미 끝났으니까."

내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나는 이은서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의료 기록실의 벽을 통과하듯이, 저주 속으로 녹아들듯이.

"잠깐! 당신의 아들... 박준희가... 화재 속에서..." 나는 흐르는 파일들을 헤치며 말했다. "당신의 아들이 왜 거기 있었어요?"

박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

"당신들이 데려갔어요." 그가 말했다. "비밀 실험이라고 하면서. 의료 기록에는 없지만, 당신의 기억 속에는 있어요. 당신이 지웠던 그 기억 속에."

폐병원이 울렸다. 지하 4층에서 지하 5층으로 가는 계단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박준호를 향해 달려갔다.

"당신이 날 저주했어요? 당신이 처음부터 날 조종했어요?"

"조종?" 박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이미 조종되고 있었어요. 당신 안의 모든 저주에 의해. 내가 한 건 그것을 깨우는 것뿐이야."

그의 손에서 박준희의 사진이 떨어졌다. 사진은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왔고,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사진 뒤에는 글씨가 있었다. 붓펜으로 쓴 글씨. '사랑하는 아들 준희에게. 엄마가.'

내 손이 그 사진을 집었다.

"당신의 진짜 목적이 뭐예요?" 나는 외쳤다. "당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아요? 왜 나를 이렇게까지..."

"죽이기?" 박준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10년 전에. 그리고 당신이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내 복수예요. 당신이 고통받는 모든 순간이. 당신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든 순간이."

의료 기록실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박준호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또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 차갑고 계산적인 눈빛. 나를 보는 방식이 마치 내가 이미 죽은 것처럼.

박준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을 데리러 온 사람이에요."

그 순간, 지하 깊숙이에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주들의 울음소리. 수십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외치는 소리.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저주 자체가 된 무언가였다.

나는 박준희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붕괴하는 의료 기록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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