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 기록실의 진실
의료 기록실의 파일들 사이에서 박시준은 숨을 고르려 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진동하고 있었다. 파일 속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박준희. 11세. 2014년 7월 15일 사망. 사망 원인: 의료 과오.
자신이 죽인 아이.
"그걸 봤군."
박준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손전등을 들고 있지 않았는데도 그의 윤곽이 보였다. 저주가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저주 덩어리인 것처럼.
시준은 벽에 등을 붙였다. 박준호가 한 발씩 다가왔다.
"10년을 기다렸어. 10년을 기다리면서 너를 봤어. 강남역에서, 카페에서, 거리 모퉁이에서. 너는 기억하지 못했지. 내 딸 박준희를 죽인 게 너라는 걸."
기억이 돌아올수록 시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2014년 7월 15일. 그날의 기억.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었다. 아니다. 그것도 자신의 기억이었다. 다만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박준호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어린 여자아이. 검은 머리. 웃고 있는 얼굴. 시준은 그 얼굴을 본 순간 눈이 따끔거렸다.
"그 아이를 되살리기 위해 이 모든 걸 했어. 너의 능력을 이용해서. 저주받은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의 저주를 너에게 먹이고, 너의 기억을 지우고, 너를 조종했어. 그리고 너는 정말 잘했어. 저주를 받아들였고, 기억을 잃어갔고, 결국 여기까지 왔어."
"박준희는 죽었어. 이미 10년 전에."
시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맞아. 그 아이는 죽었어. 그리고 그건 너 때문이야. 너와 그 여의사 때문이야."
박준호가 사진을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내가 너를 죽이려고 온 건 아니야, 시준. 나는 너를 완전히 비우려고 왔어. 너의 모든 저주를 수집해서, 너 안의 모든 것을 제거해서, 그 빈 공간에 내 딸을 다시 채우려고."
박준호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주. 응축된 저주의 형태였다.
"너는 이미 죽었어야 했어. 10년 전에. 그런데 그 여의사가 너를 살렸어. 왜냐하면 그녀도 미쳤거든. 그녀도 죽은 아들을 되살리고 싶었어. 그래서 너를 이용했어. 너를 살려두고, 기억을 지우고, 저주의 그릇으로 만들었어."
시준은 벽에서 몸을 밀어냈다. 의료 기록실의 천장이 흔들렸다. 저주의 진동이 건물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누가 날 저주했어?"
"모두야."
박준호가 웃었다. 그 웃음은 울음처럼 들렸다.
"나도 저주했고, 그 여의사도 저주했고, 이 병원 자체도 저주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너 자신이 너를 저주했어. 너는 자신의 죄를 견딜 수 없어서 기억을 거부했고, 그 거부 자체가 저주가 되었어."
폐병원 전체가 울음소리를 냈다.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의료 기록실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나오는 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저주였다.
하얀 연기처럼, 또는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저주들. 그것들이 박준호를 감싸고, 시준을 감싸고, 의료 기록실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시준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저주. 자신이 흡수한 모든 저주들이 이제 자신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너야."
박준호가 말했다.
"너 자신이야. 너는 이미 저주가 되었어. 완전히."
시준은 무릎을 꿇었다. 신체의 제어가 불가능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다리가 자동으로 경련했다.
"난 누구야?"
시준이 물었다.
"난 박시준이야. 박준희를 죽인 사람이야.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기억이 쏟아져 나왔다. 2014년 7월 15일. 지하 5층의 시술실. 어린 박준희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팔에 주사바늘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 자신의 손이 약물을 주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자신의 몸을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흐르는 듯한 감각. 신경이 역방향으로 타는 통증. 시준의 팔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자신의 팔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시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기억은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단지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형태로.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분리했고, 그것을 저주의 형태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저주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기억의 편린들을 되찾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난 그런 거 아니야."
시준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기억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한 거야. 나는 의사였어. 전문가였어. 그리고 난 실수했어. 과다 투여했어. 아니다. 실수가 아니었어. 선택이었어. 박준희의 어머니가 우리한테 돈을 더 줄 수 없다고 했을 때, 난..."
"시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준은 고개를 들었다. 의료 기록실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무너지는 벽 너머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민지영이 의료 기록실로 뛰어들었다. 저주의 안개를 헤치고.
"시준, 돌아와!"
그녀의 목소리가 시준을 불러왔다. 그 목소리는 저주와 다른 무언가였다.
시준은 민지영의 손을 잡았다. 그 손에서 따뜻함이 전해졌다. 아니다. 뜨거움이었다. 저주가 그녀를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민지영의 피부 아래에서도 검은 선이 타오르고 있었다.
"물러나!"
시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민지영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시준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나는 이미 저주받았어. 너 때문에. 그래서 상관없어."
의료 기록실 뒤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준! 나 여기야!"
유리가 뛰어들었다. 그 작은 몸이 저주의 안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저주가 너한테 있잖아. 그래서 난 너를 찾을 수 있어. 너의 저주를 따라서."
김태훈이 뒤따라왔다. 그의 왼팔 끝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넌 내 팔을 구했어. 그럼 이번엔 내가 너를 구해야지."
민지영이 먼저 시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통해 유리가 감지했다. 유리가 시준의 가슴에 손을 올렸을 때, 김태훈이 뒤따라왔다. 세 개의 손이 시준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한수현.
그도 의료 기록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파일들이 들려있었다. 시준의 의료 기록. 박준희의 의료 기록. 그리고 수십 개의 다른 파일들.
"이것들이 전부야. 모든 진실이 여기에 있어."
한수현이 파일들을 천천히 펼쳤다. 각 기록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시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준, 넌 이미 알고 있어. 아마도 넌 모르겠지만, 넌 알고 있어. 저 기억들 안에 있는 진실을 말이야."
박준호가 웃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서 저주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가면을 벗는 것처럼. 하지만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아니다. 그건 얼굴이 아니었다.
"너희가 모두 모였네."
박준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변했다. 더 이상 박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진 것이었다. 아이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 죽은 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더 깊은 울음. 마치 폐병원 자체가 숨을 쉬는 소리 같았다.
"이제 시작이야."
박준호의 몸이 천천히 변형되기 시작했다. 관절이 역방향으로 구부러졌다. 목이 180도 회전했다. 입이 귀까지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변형이 아니었다. 저주가 그의 형태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박준호는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저주 그 자체로 변모하고 있었다.
시준은 민지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 유리, 김태훈, 한수현의 손도 놓지 않았다. 그들의 손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저주. 그 저주를 통해 시준은 또 다른 것들을 느꼈다.
박준희의 저주. 이은서의 저주. 그리고 자신의 저주.
시준의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손에서 먼저. 그 다음 팔. 그 다음 가슴.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불이 아니었다. 각성의 불이었다.
"시준!"
민지영이 외쳤다. 하지만 시준은 점점 그녀의 목소리를 멀리서 듣고 있었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시준은 폐병원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지상부터 지하 5층까지. 모든 방, 모든 복도, 모든 구석진 곳. 그리고 거기에 남겨진 저주들. 수백 개, 수천 개의 저주들.
그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의료 기록실의 벽들이 투명해졌다. 그 뒤에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형광등 불빛. 냉동실의 문들. 그리고 침대 위의 아이들. 지하 5층의 시술실. 그곳이 진짜였다.
시준의 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은 이미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기억이 남긴 흉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흉터가 이제 말하기 시작했다.
10년 전. 시술실. 침대 위의 박준희. 그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 그리고 자신의 손. 자신의 손이 약물을 주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일부였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분리한 조각. 이은서라는 여의사가 자신의 기억에서 떼어낸 것. 그것을 저주로 변환시킨 것.
"아니야. 아니야!"
시준이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이미 세상에 도달하지 않았다.
한수현이 파일을 던졌다. 그것들이 공중에서 펼쳐졌다. 의료 기록들이 환상처럼 떠다녔다. 이름들. 환자 번호들. 진단명들.
그 중 하나에 시준의 이름이 있었다. 박시준. 1997년생. 입원 기간: 2014년 3월 15일 ~ 2014년 5월 22일. 진단: 급성 약물 중독. 기억 상실 증후군. 그 아래, 붉은 글씨로 쓰인 메모: '환자의 기억 의도적 삭제. 이은서 의사에 의해 시행. 사유: 환자의 정신 보호. 승인자: 박준호.'
시준의 몸이 경련했다. 그 기억의 파편이 뇌를 찢고 지나갔다.
박준희. 11세 여자아이. 입원 기간: 2014년 3월 12일 ~ 2014년 7월 15일. 진단: 희귀 신경계 질환. 치료: 실험적 약물 투여. 결과: 사망. 사망 원인: 약물 과다 투여.
"내가 했어?"
시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넌 했어. 넌 정말 했어."
박준호의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변했다. 박준희의 목소리였다. 열한 살 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10년의 증오가 담겨있었다.
"넌 날 죽였어. 약물을 과다 투여해서. 그리고 기억을 지웠어. 그리고 1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모르고."
박준호의 형태가 더욱 일그러졌다. 검은 연기가 그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 속에서 수십 개, 수백 개의 얼굴들이 떠다녔다. 모두 박준희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각각의 얼굴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노. 슬픔. 절망. 그리고 죄책감.
시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주는 하나가 아니었다. 폐병원은 하나의 저주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주들의 집단. 박준희와, 그 아이를 죽인 실험의 다른 피해자들과, 그들의 부모들과, 그들의 분노와 절망이 응축된 형태.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박준호 자신의 저주였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저주. 그것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박준호는 가해자가 아니었다. 그도 저주의 그릇이었다. 박준희의 저주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박준호는 자신의 딸을 되살리기 위해 시준을 조종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박준희의 저주가 박준호를 조종하고 있었다. 박준호는 저주의 도구였다.
"시준!"
민지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더 가까워졌다. 시준이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는 그녀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 놓지 마. 제발."
민지영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준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자신의 팔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데.
유리가 시준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 작은 손이 시준의 심장을 만졌을 때, 무언가가 깨어났다. 저주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 그들의 손을 통해 흘러오는 온기. 저주와는 다른 것.
"우리가 널 기억해. 넌 혼자가 아니야."
유리가 속삭였다.
그 말이 사실인가. 시준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기억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저주를 흡수했을 때 전해받은 것들을 통해. 그들은 시준을 저주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본다.
시준의 손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은 불이 아니었다. 금색의 불. 은색의 불. 무지개 색의 불.
각 저주가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박준희의 저주. 이은서의 저주. 그리고 시준 자신의 저주.
박준호의 형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흩어졌다. 얼굴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뭔가 남아있었다. 더 깊은 곳에 숨겨진 뭔가. 박준희의 순수한 저주. 아버지의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저주.
한수현이 파일을 모두 모았다. 그 파일들이 시준의 손 위에 떨어졌다.
"모든 기억이 여기 있어. 넌 읽을 수 없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읽을 수 있어. 그리고 그들은 진실을 전할 수 있어."
한수현이 말했다. 그의 눈이 시준을 바라봤다. 냉철한 관찰만 있었다. 그는 시준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넌 이제 알았어. 넌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야. 넌 그 둘 다야. 동시에.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아니야."
"그럼... 난 뭘 해야 하는데?"
시준이 물었다.
"그건 넌 결정해야 해. 이제부터는 누구도 너를 조종할 수 없어. 너는 이미 저주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
한수현이 대답했다.
의료 기록실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천장이 내려앉았다. 벽들이 부서졌다. 바닥이 갈라졌다. 그 틈새로 더 깊은 어둠이 드러났다.
시준은 민지영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유리, 김태훈, 한수현의 손도. 그들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저주들. 그것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온기도 전해져 왔다.
"나가자."
시준이 말했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저주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움직였다. 폐병원의 지하에서 위로. 계단을 오르며. 무너지는 벽을 헤쳐며.
시준의 손에서 불이 타올랐다. 그 불이 폐병원을 밝혔다. 그 빛 속에서 시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손이 아니었다. 검은 선이 온몸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저주의 선. 하지만 그 선들 사이로 금색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폐병원의 입구가 보였다. 그곳으로 향하려던 순간.
시준의 몸이 갑자기 멈췄다.
"뭐야?"
민지영이 외쳤다.
시준의 발에서 다시 불이 붙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로 타오르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로. 더 깊은 곳으로.
"시준!"
유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시준은 자신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이 자신을 거스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다. 그것은 자신 안의 다른 것이었다. 박준희의 저주. 그것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미안해."
시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지하로 떨어졌다.
"시준!"
민지영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그 목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시준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끝없이 내려갔다. 폐병원의 지하 5층을 넘어서.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그곳에서 시준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시준의 시체가 아니라 다른 것. 더 오래된 것. 더 깊은 곳에서 온 것.
그 위에는 한 장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박시준에게.
10년 전, 넌 선택했다. 박준희를 살리거나 자신을 죽이거나. 넌 자신을 죽이기로 했다.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못했다. 그래서 넌 저주가 되었다.
이제 넌 알았다. 그럼 이제 넌 무엇이 될 것인가.
다시 선택할 시간이다.
넌 돌아갈 수 있다. 위로. 그들에게. 그들의 손을 놓고.
아니면 넌 여기 남을 수 있다. 박준희와 함께. 폐병원의 깊은 곳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킬 수 있다. 저주의 벽으로."
시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리고 다시 열렸다.
시준이 보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색깔이 없었다. 형태만 있었다. 그 형태들 위에는 모두 이름이 적혀있었다.
민지영. 유리. 김태훈. 한수현.
그리고 자신의 이름.
박시준.
아니다. 다른 이름도 있었다.
박준희.
두 개의 이름이 겹쳐있었다. 마치 하나인 것처럼.
시준의 손에서 다시 불이 붙었다. 이번에는 어떤 색깔도 아닌 순백의 불. 그 불이 모든 것을 밝혔다. 폐병원의 모든 층. 모든 방. 모든 저주받은 영혼들.
"이제 뭘 할 거야?"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하지만 동시에 박준희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우리가 뭘 할 거야?"
시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박준희가 누구인지도, 그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단지, 자신의 손 위에 남겨진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순백의 불이 그것을 비추었다.
폐병원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준의 눈이 다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