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 3층
지하로 내려갈 때마다 공기가 달라진다. 산소 함량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것들이 섞여드는 느낌이다.
폐병원 구원병원의 지하 1층을 통과한 지 10분. 손전등의 불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의료 기구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침대 프레임, 심전도 모니터, 수액 스탠드. 모두 10년을 방치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지만 물리적 낡음보다 더 압도적인 건 저주의 흔적이었다.
벽면에 배인 검은 자국들. 그것이 단순한 곰팡이나 습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 피부가 반응했다. 팔의 털이 곤두섰고, 목 뒤가 저렸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내 등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감각. 저주가 공기보다 진하게 떠도는 이 공간에서, 내 몸은 그것을 '음식'으로 인식했다.
침을 삼켰다. 목이 말랐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 손전등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는 게 아니라 끌려가려고 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처럼.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리가 계단 위에 올려지고, 몸이 아래로 향했다.
한수현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보니 마지막 전화는 30분 전이었다. "당신 안에 있는 건 당신이 아니라 저주."
그 말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지하 2층은 더 참담했다. 의료 폐기물 처리 구역이었을 것 같은 곳.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들이 열린 채로 남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더 이상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손전등의 불빛이 그것들을 비출 때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냄새보다 더 강한 건 저주의 밀도였다.
이 층에서는 저주가 거의 물질이 되어 있었다. 공기를 마실 때마다 그것이 폐로 들어오는 느낌.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맥박이 치솟았고, 손가락 끝이 저렸다.
눈앞이 살짝 흔들렸다.
"지하 3층... 3층에 가면 된다."
누가 내 입에서 그런 말을 하게 했다. 나인 줄 알았지만,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거칠었다.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진 것처럼. 기억 거래상들의 조종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내 몸을 움직이는 건 이제 나 자신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더 이상 내 의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유가 없었다.
지하 3층의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손전등이 손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혀 깨지지는 않았지만, 불빛이 천장을 향했다. 그 순간 내가 본 것은—
사람들이었다. 또는 사람의 형태를 한 뭔가가 벽면에 붙어 있었다. 저주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형태들. 입이 열린 채로, 팔이 구부러진 채로. 마치 마지막 순간의 고통이 그대로 고착된 것처럼.
손전등을 주워 들었다. 불빛을 천천히 움직였다. 벽면을 따라 내려가는 형태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지난 며칠간 흡수한 저주들—유리의 원한, 김태훈의 절망, 민지영의 불안감—이 모두 이 공간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벽에 붙은 형태들이 바로 그 저주들의 원천이었다. 누군가 이곳에서 모아둔 저주들의 응축체.
손가락이 떨렸다.
"여기가 아니다."
또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나.
"더 아래다."
지하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더 좁았다. 천장도 낮았다. 마치 무덤으로 내려가는 통로 같았다. 내 어깨가 양쪽 벽에 스칠 정도로. 손전등의 불빛이 계단 끝에 녹슨 철문을 비췄다. 의료 기록실이라는 표지판이 아직도 붙어 있었다.
문을 밀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안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니, 깔끔하다기보다는 보존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최근에 정리한 것처럼. 파일 캐비닛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 키보드가 놓여 있었다. 모니터는 없었다. 아마 10년 전에 누군가 가져갔을 것이다.
손전등으로 캐비닛을 훑었다. 번호와 이름이 적힌 라벨들.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4년 파일을 열었다.
환자 명단이 알파벳 순서로 정렬되어 있었다. A부터 시작해서 찾아갔다. 내 이름은 중간 정도에 있었다.
박시준 - 입원 2014년 7월 14일, 퇴원 2014년 7월 25일(화재로 인한 긴급 퇴원) 진단명: 광범위 화상(2도-3도) 담당 의사: 이은서
손이 떨렸다.
파일을 더 들어갔다. 의료 기록 용지들이 나왔다. 손글씨로 적힌 기록들. 날짜별로 나열된 진료 내용.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2014년 7월 15일. 화상 치료 중. 환자 상태 안정적. 피부 이식 준비. 담당 의사 이은서."
이은서.
그 이름을 읽는 순간, 두통이 터졌다.
뇌가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 내 양손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무릎이 구부러졌다. 바닥에 앉아버렸다.
기억이 밀려왔다.
—하얀 가운. 손에 의료용 장갑을 낀 손. 그 손이 내 팔을 만지고 있다. 뜨거운 감각. 아니, 그건 과거의 뜨거움이 아니라 현재의 기억이 불타오르는 느낌.
—"조금만 참아. 곧 끝나."
—여인의 얼굴. 눈. 입술. 다 보이는데 다 흐릿하다. 마치 포커스가 맞지 않은 사진처럼.
—누군가 내 몸을 밀어낸다. 넘어진다. 어딘가로 굴러간다. 어둠. 더 어둠.
통증이 가시자, 기억도 함께 사라졌다. 마치 그것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손가락을 펼쳤다. 아직도 파일을 쥐고 있었다.
왼쪽 손목을 들어올렸다. 그 위의 흉터.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의료 기구에 의한 화상. 그것도 치료 과정에서의 화상. 아니면... 아니면 다른 이유의 화상.
그 경계가 애매했다.
파일을 다시 들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지만, 계속 읽었다.
환자 명단. 1번부터 끝까지 확인했다.
8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화재로 인한 사망. 공식 기록 그대로.
하지만 명단에는 9명의 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맨 마지막 이름은 다르게 표기되어 있었다.
박준희 - 입원 2014년 7월 1일, 상태: 행방불명(화재 이후) 진단명: 신경계 손상, 기억 장애 담당 의사: 이은서
박준희.
그 이름을 읽는 순간, 내 손이 멈췄다.
누군가 내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천천히, 규칙적인 발걸음. 마치 누군가 내가 읽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문 쪽에서 들어오는 발소리.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돌릴 수 없었다. 척추가 경직되어 있었다.
발걸음이 멈췄다.
"안녕, 시준."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여인의 목소리. 부드럽지만 차가운.
"오랜만이야. 넌 나를 기억하니?"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마치 누군가 내 목을 돌리는 것처럼.
손전등의 불빛이 그 여인을 비췄다.
하얀 가운. 검은 긴 머리. 그리고 그 얼굴—
기억이 아닌 것 같은 기억이 뇌를 강타했다.
그 순간,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머니."
손전등이 떨어졌다. 손가락의 힘이 풀렸다. 바닥에 부딪힌 손전등은 회전하며 불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 안에서 여인의 실루엣만 선명했다.
"어머니라고? 재미있네."
이은서가 한 발 다가섰다. 하얀 가운의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그 아래로 발목까지 덮인 의료용 부츠. 10년 전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복장 그대로.
"너는 기억하고 있었나? 아니면 그냥... 본능적으로?"
내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제어할 수 없었다. 혀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움직였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목소리는 낮고,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남성적이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
이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의료 기록실의 어둠 속에서 그 웃음은 마치 의료 기구들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모르는군. 좋아. 그럼 기억나게 해줄게."
그녀가 손을 들었다. 의료용 장갑을 낀 손. 그 손이 내 얼굴에 가까워졌다.
순간, 뇌가 폭발했다.
—병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병상. 어린 시준이 누워있다. 화상으로 감싼 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참아야 해. 이 고통이 너를 깨끗이 해줄 거야."
—여인의 목소리. 하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포커스가 맞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만들어둔 것처럼.
—의료 기구. 뜨거운 금속. 아이의 피부에 닿다. 비명.
—"조용히 해. 넌 이미 죽어있어야 했어."
통증이 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의료 기록 파일들이 흩어졌다. 종이들이 공중을 헤맸다.
"이게... 뭐야..."
내 목소리가 돌아왔다. 비명에 가까운 내 목소리.
이은서가 무릎을 꿇고 내 얼굴 근처로 몸을 낮췄다. 그녀의 눈이 손전등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넌 몰라도 돼. 넌 그냥... 존재하면 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당신이... 당신이 뭘 했어?"
"뭘 했다니? 나는 너를 구했어. 10년 전, 그 화재 속에서. 넌 죽어야 했지만, 나는 널 살려뒀어. 그리고 기억도 지워줬고. 친절하지 않니?"
그녀의 손이 내 왼쪽 손목을 잡았다. 흉터 위에.
"이건 증거야. 넌 내 손에서 태어났고, 내 손에서 죽었고, 내 손에서 다시 살아났어. 그게 넌 나의 관계야."
손목에 닿은 손이 뜨거웠다. 마치 10년 전의 화상이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화상은 아니었다. 그건 기억이었다. 돌아오는 기억이 피부에 자극을 주는 환각.
"기억 거래상들은?"
"그들? 그들은 그냥 도구일 뿐이야. 내가 그들을 움직였어. 넌 저주를 흡수하고, 그들은 그 저주들을 사고팔고, 난 그 과정을 지켜봤어. 넌 내가 만든 미로 속에서 계속 헤매게 되는 거지. 기억을 잃고, 저주를 흡수하고, 또 잃고. 그게 충분해."
내 손가락이 떨렸다. 바닥의 파일을 더듬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 환자 명단이 보였다.
박준희. 행방불명.
"이건... 누구야?"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이은서가 일어섰다. 캐비닛으로 걸어가 또 다른 파일을 꺼냈다. 그것을 내 앞에 던졌다.
"이게 넌 줄 알고 싶어? 아니면 계속 모르고 싶어? 넌 선택할 수 있어. 지금도. 기억할 수도 있고, 계속 잊을 수도 있어. 둘 다 가능해."
나는 파일을 열었다.
사진이 나왔다. 10년 전의 사진. 병원 복도. 그 위에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한 명은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어린 시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워놓은 것처럼.
"박준희는 넌 몰라도 돼. 그냥 이름만 알아도 충분해."
이은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왜냐하면 그건 넌 이미..."
나는 파일 속 다른 사진들을 넘겼다. 의료 기록. 검사 결과.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한 줄의 기록.
"2014년 7월 25일. 화재 발생. 환자 박준희 사망 확인."
아니, 그 아래에 또 다른 글씨가 있었다. 손으로 긁어낸 흔적이 있었지만, 희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사망 원인: 질식. 화상이 아닌 질식."
손이 떨렸다.
"당신은..."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이은서를 바라봤다.
"박준희의 어머니야."
이은서가 내 말을 끝내줬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곳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10년간 쌓인 무언가.
"그리고 넌 그 아이를 죽였어."
"아니... 나는..."
"10년 전, 그 화재 속에서. 넌 박준희를 질식사시켰어."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부정의 말이었지만, 내 몸은 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손목의 흉터가 뜨거워졌다. 마치 그것이 증거인 양.
그 순간, 내 손목의 흉터에서 통증이 폭주했다. 불타는 듯한 고통이 팔 전체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내 목에서 제어 불능의 목소리들이 섞여 울려 나왔다. 저주들의 비명. 기억 거래상들의 속삭임. 그리고 어린 시준의 울음소리.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되며 내 신체를 지배했다. 저주와 기억 소실의 메커니즘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 화재가 뭐였어? 어떻게 일어났어?"
"넌 알 필요가 없어."
이은서가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이전처럼 빠르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남겨두고 가는 것처럼.
"잠깐—"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이 없었다. 기억의 무게가 나를 누르고 있었다.
"당신은... 뭐야?"
이은서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뒤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나? 나는 박준희의 어머니야. 넌 그 아이를 죽였고, 난 그 아이를 잃었어. 그리고..."
그녀의 손이 문틀에 닿았다.
"...넌 그 죗값을 평생 치를 거야. 매번 저주를 흡수할 때마다. 매번 기억을 잃을 때마다. 넌 내 손에서 태어났으니까. 내 손에서 계속 죽어야 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은서가 저주들을 조종했다는 것을. 유리, 김태훈, 민지영의 강렬한 감정들을 저주로 변환시켜 내게 보냈다. 그들의 절망과 분노를 도구로 삼아서. 저주는 원한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만, 이은서는 그 감정들을 의도적으로 추출하고 내게 전달했다. 그녀는 저주의 주인이 아니라 저주의 조종자였다.
하지만 왜?
"넌 날 조종하려고 저주를 보냈어?"
"조종? 그건 절반만 맞아. 넌 이미 조종당하고 있었어. 저주들이 너를 지배하고 있었어. 그 저주들은 내가 모아뒀거든. 10년 동안 이곳에서."
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 나는 혼자 남겨졌다. 파일들 사이에 누워서. 손목의 흉터를 들여다보며.
그리고 기억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엔 더 선명하게. 더 고통스럽게.
—10년 전의 화재. 연기로 가득한 복도. 어린 시준과 박준희가 나란히 누워있다. 한 명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한 명은 숨을 쉬고 있다.
—손이 내려온다. 어린 시준의 손. 박준희의 손목을 잡는다. 흔든다. 깨워보려고.
—하지만 박준희는 깨어나지 않는다. 이미 산소 부족으로 의식을 잃은 지 오래다.
—어린 시준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친구가 자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 계속 흔든다. 더 세게.
—누군가 나타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인. 이은서. 그녀는 두 아이를 본다. 한 명은 죽어가고 있고, 한 명은 살아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인다. 어린 시준을 밀어낸다. 옆으로. 멀리.
—그리고 그 손가락은 박준희의 입과 코를 덮는다. 완전히. 마지막 호흡까지 차단하며.
기억이 거기서 끝났다. 그 이상은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 장면을 자르고 다시 붙인 것처럼.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파일이 떨어졌다. 종이들이 흩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어린 시준이 한 일은 친구를 깨우려는 절박한 시도였을 뿐. 진짜 살인자는 이은서였다. 그녀가 박준희의 마지막 숨을 막았다. 그리고 그 죄를 내게 뒤집어씌웠다. 기억을 지우고, 저주를 보내고, 10년을 내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지하 4층의 의료 기록실에서, 나는 혼자 남겨졌다. 박준희의 사진을 들고. 그 얼굴이 흐릿한 사진을 들고.
그리고 내 손목의 흉터를 바라봤다. 증거. 10년 전 그 순간의 증거.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전등을 주워 들었다. 불빛이 파일들을 비췄다. 박준희의 의료 기록. 내 의료 기록.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다른 파일들.
지하 4층의 어둠 속에서, 나는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이은서가 떠난 방향과는 반대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벽면의 파일 캐비닛 뒤쪽에 또 다른 계단이 있었다. 지하 5층으로 향하는. 손전등의 불빛이 그것을 비췄다. 그리고 계단 입구에는 누군가 손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돌아올 수 없다."
이은서의 필체였다.
나는 그 글씨를 바라봤다. 내가 이미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은서의 손에서 시작된 이 악순환은 끝나야 했다. 그 아래에서만. 박준희가 죽은 그 자리에서만.
한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