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회의 손길
강남역 플랫폼의 불은 내 손을 통해서 자라났다.
내 팔이 내 명령을 거부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사이, 선로 위의 불길이 도시 지도처럼 펼쳐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나를 밀어냈다. 누군가 내 등을 때렸다. 하지만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모두 대피하세요."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차갑고,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갈라진 음성이었다. 내 안에서 누군가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수현이 나타났다.
플랫폼의 가장자리에서, 사람들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는 그. 검은 코트 자락이 몸에 감겨 있었고, 그의 눈은 나—아니, 내 안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꺼져."
그 말이 나왔을 때, 내 몸의 통제권이 돌아왔다. 무릎이 꺾였다. 팔이 떨어졌다. 나는 선로 위에 쓰러졌다.
한수현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내 안에 뭐가 있어?"
한수현이 나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너 자신이야."
그는 나를 플랫폼 밖으로 끌어냈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뒤돌아봤다. 선로 위의 불은 이미 꺼져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촛불을 끄듯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강남역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표면으로.
"박준호를 알아?"
한수현이 물었을 때, 나는 무언가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내 뇌 안에서. 마치 선반에서 물건이 떨어지듯이. 그것이 내 기억이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추락감. 공허함. 그리고 나서 아무것도 없음.
"박준호는 구원회의 리더야. 10년 전 화재에서 딸을 잃었어."
한수현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지표면에 도달했다.
강남역 출입구에서 나왔을 때, 밤은 깊어있었다. 서울의 불빛들이 내 눈을 찔렀다. 너무 밝다. 너무 많다. 내 눈동자가 그 자극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또 다른 기억이 흔들렸다.
"어디로 가?"
"안전한 곳."
한수현이 택시를 불렀다. 강남대로 위의 야간 택시들이 물고기처럼 헤엄쳤다. 그 중 하나가 멈추었다.
승차 직전, 한수현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내 것을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가 내 안의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택시 안에서, 한수현은 기사에게 주소를 말했다. 나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누군가 내 신경을 튕기고 있는 것처럼.
"내 안의 것이 뭐야?"
"저주야. 너 자신의 저주."
한수현이 창밖을 봤다. 강남의 밤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택시는 홍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수현이 전화를 받았다.
"응. 지금 데려가고 있어. 네. 상태는... 좋지 않아."
그가 나를 바라봤다.
"민지영이 깨어났어. 너한테 할 말이 있대."
민지영.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흉부가 조여왔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떠올랐다기보다는, 내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마치 고장 난 전구처럼 깜빡깜빡거렸다.
택시가 멈추었다. 홍대 뒷골목의 어느 건물 앞이었다. 오래된 빌라. 4층 높이. 창문에서 불이 새어나왔다.
한수현이 돈을 냈다. 우리가 내렸다.
빌라 3층. 복도가 어두웠다. 한수현이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세 명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남자였다. 50대 초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자선가의 미소가 붙어 있었다. 박준호였다. 나는 그를 본 적 없는데, 그를 알았다. 내 뇌가 그를 인식했다. 경고음처럼.
두 번째는 여자였다. 20대 중반, 흰 셔츠에 청바지. 민지영이었다. 그녀가 나를 봤을 때,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세 번째는 또 다른 남자였다. 나처럼 젊았고, 나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오셨네요."
박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죽어가는 새를 다루듯이.
"구원회의 박준호입니다. 당신을 만나뵙고 싶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한수현이 내 곁에 섰다.
"당신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타인의 저주를 흡수하는 능력. 정말 놀라운 재능이에요. 우리는 당신을 이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을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박준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내 얼굴에 가까워졌다. 나는 그의 눈을 봤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총. 검은색의 작은 총. 그것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트리거 위에 있었다.
나는 그 이미지를 밀어냈다. 내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사라졌다. 하지만 남아있었다. 내 뇌의 어딘가에.
"폐병원의 저주를 종식시키려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
박준호의 손이 내 어깨에 올려졌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아버지의 손처럼.
"폐병원의 봉인을 해제해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그곳의 저주를 흡수하면 이 도시의 모든 저주받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요."
민지영이 다가왔다.
"당신... 기억하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뭘?"
"내 엄마. 당신은... 당신은 내 엄마를 죽게 놔뒀어요."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내 입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난 그때 어렸어요. 엄마가 병원에 있었어. 화재 때문에 한 번 나왔는데, 당신이... 당신이..."
민지영이 울음을 터뜨렸다.
"내 엄마를 다시 안으로 밀어넣었어요. 왜? 왜 그랬어?"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가슴이 파괴되는 것 같은 통증으로 수축했다. 호흡이 얕아졌다. 내 손이 떨렸다. 죄책감이 물리적인 형태로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감각 속에서,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내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경 끝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죄책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세포를 부식시키는 산이었다.
"미안해..."
내가 말했을 때, 한수현이 움직였다. 그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 끝이야."
그가 총을 꺼냈다. 작은 권총. 그것을 박준호를 향했다.
"박준호. 구원회의 활동은 여기까지다."
박준호가 웃었다.
"당신이 저를 죽일 수 있을 줄 아세요?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10년 전에."
그의 얼굴이 변했다. 아니,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보는 방식이 변했다. 그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얼굴이 겹쳐졌다. 화상을 입은 얼굴. 죽음의 얼굴.
"내 딸이 죽었어. 당신의 손으로. 그리고 당신은 살아있어. 여기서. 나 앞에서. 그게 공정해?"
박준호의 손이 올라갔다. 검은색의 또 다른 총. 그것이 나를 향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느리고 일정한 리듬. 마치 심장박동처럼.
사람이 나타났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하지만 그것은 의료용 가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례식 복장이었다. 죽음의 옷.
내 기억이 흔들렸다. 파편처럼 떠오르는 10년 전의 장면들. 화염. 검은 연기. 그리고 이 여자. 그녀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여기 있었다. 살아있었다.
"모두 멈춰."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 전체가 떨렸다.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린 것처럼.
박준호의 총이 떨어졌다.
한수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지영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나는 그 여자를 봤다.
그녀의 눈이 내 것을 마주쳤다.
"시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나간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시작된다."
그녀의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람의 형태.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빛을 삼키는 검은 구멍처럼.
내 안의 저주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수현의 총이 박준호를 향했을 때,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 손이 한수현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무 생각 없이. 본능처럼. 그의 손가락이 트리거에서 미끄러졌고, 총성은 천장을 향해 울렸다. 석고가 떨어져 내렸다.
"뭐 하는 거야!"
한수현이 소리쳤다.
"모르겠어."
내 목소리가 낮았다. 내 몸이 나를 배신했다. 내가 박준호를 쏘는 것을 거부했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 근육은 그것을 거부했다. 10년 전의 어떤 기억이, 내 뇌에서 소실된 기억이, 여전히 내 몸에 남아있었다.
박준호가 총을 들어올렸다. 이번엔 내게.
"당신은... 너는 왜 죽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마치 구부러진 유리처럼. 한 번 깨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박준호."
그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공기가 진동했다. 민지영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귓가에서 피가 흘렀다. 음파. 저주의 음파. 그녀가 내는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박준호의 손이 떨렸다.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무릎이 구부러졌다.
"제발... 제발..."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 딸을 돌려줘. 우리 딸을 돌려줘."
그 순간, 내 안의 저주가 반응했다.
지금까지 내가 흡수한 모든 저주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유리의 저주. 김태훈의 저주. 민지영의 저주.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10년 전부터 내 안에 있던 저주. 그것들이 모두 깨어났다.
내 손이 떨렸다. 피가 흘렀다. 코에서. 귀에서. 눈에서.
"시준!"
한수현이 나를 붙잡았다.
"견딜 수 없어. 너무 많아. 너무 많은 저주가..."
내 목소리가 여러 개였다. 마치 많은 사람이 내 입에서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유리의 목소리. 김태훈의 목소리. 민지영의 목소리. 그리고 내 자신의 목소리.
"당신은 누구예요?"
그 여자가 물었다. 그녀는 박준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살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비추고 있었다. 마치 검은 호수처럼. 깊고 끝없는.
"나는... 나는..."
내가 대답하려 했을 때, 복도 끝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천천히. 일정하게. 마치 심장박동처럼.
복도의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마치 물 위에 떠오르는 것처럼. 하얀 옷을 입은 자. 검은 옷을 입은 자. 회색 옷을 입은 자. 그들은 천천히 원을 형성했다. 나를 중심으로.
"우리는 저주 사냥꾼들이야."
맨 앞의 남자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친절했다. 하지만 그 친절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안다. 폐병원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 그리고 박준호를 제거하는 것. 당신의 능력 없이는 불가능해."
내 안의 모든 저주가 한 번에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