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가속화
카페의 아메리카노가 식어가고 있었다.
검은 액체를 응시하는 순간, 시야가 뒤틀렸다. 눈앞의 잔이 흐릿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겹쳐들었다. 구원병원 지하 폐기실. 침대 위의 어린 아이. 그리고 박준호의 목소리가 뇌를 관통했다.
'저는 당신의 아버지예요.'
손가락이 먼저 떨렸다. 손 전체로 번졌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놨다. 누를 번호도 없었다. 유리에게 전화해야 했지만, 먼저 숨을 쉬어야 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뇌에 박혔다가 빠져나갔다. 마치 호흡처럼.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테이블이 흔들렸다. 아니, 내가 흔들리고 있었다. 팔뚝에 경련이 일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누군가가 내 신경을 집어 짜는 것 같았다.
"혹시... 자리 괜찮으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20대 중반의 여자가 서 있었다.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뭔가 부서진 게 있었다.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피곤함과 절망이 섞인 눈.
"좋아요."
자동으로 대답했다. 여자는 내 앞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한 번 깜박이며 나를 봤다. 그 순간, 뭔가 내 가슴을 쥐어짰다. 낯설지만 슬픈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 여자를 아는가? 아니다. 절대 만난 적 없다. 그런데 왜 이 감정이?
"커피 맛이 별로 좋지 않으신가요? 얼굴이..."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요즘 뭐 먹어도 맛이 없어요. 그게 아니라 느낌이... 없는 거 같아요."
여자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쓸었다. 그 순간 알았다. 저주다. 이 여자도 저주에 걸려있다. 다른 저주들처럼 그 강도는 엄청났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 저주는 외부에서 온 게 아니었다.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 여자 자신의 절망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 혹시 의사세요?"
"아니요."
"약사?"
"아니요. 왜요?"
여자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뭔가... 상담을 받는 기분이 들어서요. 이상하죠? 모르는 사람인데."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자꾸 다른 이미지가 겹쳐졌다. 어린 얼굴. 울고 있는 얼굴. 누군가의 팔에 안겨있는 얼굴.
"제 이름은 민지영이에요."
"시준입니다."
이름을 말하는 순간, 입이 뭔가 이상했다. 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입을 빌려 쓰고 있는 것처럼. 민지영의 눈이 확장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뒤통수를 쳤을 때처럼. 호흡이 얕아졌다.
"시... 준?"
"네?"
"아, 아니에요. 그냥..."
민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으로 커피 잔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그 움직임은 강박적이었다.
"이건 좀 이상한 질문인데... 당신, 기억을 잃으신 적 있어요?"
얼어붙었다.
"왜 그런 걸..."
"제가... 요즘 계속 같은 꿈을 꿔요. 누군가가 자기를 안고 있는데, 그 사람의 얼굴이 안 보여요. 목소리도. 하지만 따뜻해요. 그리고 슬퍼요."
민지영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확실한 인식이 있었다. 나를 아는 인식.
"혹시 당신이... 저를 알아요?"
침을 삼켰다. 입술이 말라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민지영이 일어섰다. 가방을 들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서 있기만 했다. 마치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저 혹시...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아닐까요?"
"뭐가요?"
"이 저주요. 이 기분."
그 순간, 움직였다. 정신적으로가 아니라 신체적으로. 손이 민지영의 팔뚝을 집어올렸다. 그리고 본 것이 터져 나왔다.
병원의 복도. 하얀 벽. 굴러가는 스트레처. 비명. 누군가의 목소리. 화염. 타는 냄새.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있다. 따뜻한 팔. 그 사람은 자신을 들고 뛰고 있다. 계단을 내려간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팔이 느슨해진다. 그 사람이 쓰러진다. 자신은 바닥에 떨어진다. 어둠이 내려온다.
"아아아아!"
비명을 질렀다. 카페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민지영이 팔에서 손을 빼려고 애쓰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놓을 수 없었다. 저주가 내 손가락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검은 실 같은 것들이 민지영의 팔에서 나의 손목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손목이 타올랐다. 피부가 검게 변했다. 근육이 경련했다. 다른 손으로 팔을 눌렀다. 뭔가 내 안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기억들이.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있었어.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신을 살리려고 했어. 그런데..."
중얼거렸다. 입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쓰러졌어. 불 속에서."
민지영이 손을 비로소 빼냈다. 의자에 쓰러졌다. 호흡이 끊겼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기억 조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누군가의 얼굴. 그것을 기억하려는 순간, 그것은 먹이를 피하는 물고기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신... 뭐예요?"
민지영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있었다. 연민? 그 이상의 뭔가.
"저... 모르겠어요."
정직하게 대답했다.
민지영은 내 옆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화상으로 검게 변한 손을.
"고마워요. 뭘 해주셨는지 모르겠지만... 무거운 게 없어졌어요. 가슴이."
"저는 기억이 없어졌어요."
"뭐가요?"
"당신과 관련된 기억. 방금 본 모든 것. 이미 사라지고 있어요."
말했다. 입술을 깨물면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방금 본 기억이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계단과 화염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나는 그 얼굴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감정만 남겨진 채.
휴대폰이 울렸다. 한수현이었다.
"시준. 민지영을 찾았나?"
"네. 지금 카페에 있어요."
"좋다. 그리고 들어. 너는 저주를 흡수할 때마다 그 저주와 관련된 기억부터 먼저 사라진다. 이건 무작위가 아니야."
팔뚝이 갑자기 저렸다. 누군가가 내 신경을 집어 짜는 것처럼.
"무슨 말이에요?"
"네 뇌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다. 충돌하는 기억을 제거하려는 자기방어 메커니즘이야. 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저주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이 가장 먼저 지워져. 너는 그 사람을 잊는다. 그래서 죄책감도 없어진다. 뇌가 너를 보호하려는 거야."
손이 떨렸다. 한수현의 말이 뭔가 깊은 곳을 건드렸다. 내가 누군가를 구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잊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잊어가고 있다.
"그러면 저는..."
"계속 저주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못 찾을 거야. 그런데 너는 이미 충분히 잃었어. 지금 멈춰야 한다."
전화를 끊었다. 민지영을 봤다. 그녀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 이미 잊어가고 있었다.
"기억을 잃으신 거군요."
"네."
"그래도... 고마워요. 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당신이 뭘 했는지 몰라도."
민지영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얼굴에서의 감정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미 알았던 것마저 빠져나가고 있다. 그 과정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었다.
"전화 줄래요?"
"네?"
"저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번호를 주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유리를 찾아야 했다. 박준호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했을 때, 유리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는 저녁이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목은 여전히 타올랐다. 민지영의 저주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다. 누구였는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중요한 사람을 잃은 슬픔만 남았다.
발이 멈췄다. 의지와 상관없이.
팔이 움직였다. 팔뚝이 경련했다. 그리고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높았다. 더 여렸다. 어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오빠..."
그것이 나온 순간, 뒤에서 손이 내 어깨에 올려졌다.
"시준, 넌 나를 기억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몸을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만 있었다. 손과 목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슬픔.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유리였다.
"오빠! 저 지하철에 있는데... 뭔가 이상해. 화재 예보?"
"지하철? 어느 역이야?"
"강남역. 근데 사람들이 자꾸 내가 시작한 거라고 말해. 내가 불을 냈대. 근데 난..."
신호가 끊겼다.
달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남역으로 가는 길은 한 줄기 미로였다. 밤거리의 신호등들이 차 위에서 빨강-파랑-초록으로 흘러갔고, 손은 여전히 경련하고 있었다. 팔뚝의 근육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민지영의 저주가 신체를 침식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민지영의 저주 안에 담긴 누군가의 것이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수현이었다.
"어디야?"
"강남역으로 가는 중이에요. 유리가..."
"유리? 시준, 너 지금 정신이 있어? 유리는 박준호가 데려갔어. 넌 그쪽으로 가면 안 돼."
"유리가 방금 전화했어요. 강남역에 있다고 했어요."
한수현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 다음 들린 것은 그의 빠른 숨소리였다.
"박준호야. 그놈이 너를 미끼로 쓰려고 하는 거야. 유리는 없어. 없었어. 넌 지금..."
전화를 끊었다. 강남역의 입구가 보였다. 지하철 표지판 아래로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표정들. 누군가는 소방차 사이렌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촬영하고 있었다.
역 내부로 들어섰을 때, 냄새를 맡았다. 타는 냄새. 하지만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이 나를 밀고 지나갔다. 누군가는 어깨에 짐을 부딪혔고, 누군가는 욕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플랫폼에는 약 50명 정도가 있었다.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로 위의 한 지점을. 거기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불이었다. 손가락 크기 정도. 하지만 그 불은 선로 위에서 스스로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태운 게 아니라. 저절로.
"저기 봤어?"
옆에 선 젊은 여자가 휴대폰을 들었다. 비디오 촬영 모드였다.
"불이 선로 위에서 떠 있어. 이거 뭐야?"
그 여자를 무시했다. 대신 선로 위의 불을 봤다. 그 불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내 안의 누군가가 그 불을 통해 말을 걸고 있었다.
"지하철이 올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저기 선로 끝에 봐. 아무것도 없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선로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고, 그 어둠 속에서 불은 계속 타올랐다. 타다 남은 것처럼. 아니, 타다가 시작한 것처럼.
팔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더 강하게. 팔뚝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을 가리켰다. 그리고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불이야. 저기... 불이야."
사람들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말했으니까.
"뭐? 당신도 봤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은 계속 움직였다.
"우리가 불을 냈어. 다시. 또 다시."
"뭐라고 말하는 거야?"
"구원병원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시 반복될 거야."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입술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내 안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내 몸을 사용해서.
플랫폼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는 촬영을 멈추고 나를 피해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진정하세요!"
역무원이 나타났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 접근했다.
"뭐가 문제신가요?"
팔이 그 역무원의 팔을 잡았다. 할 수 없었는데 했다. 손가락이 그의 팔뚝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아! 뭐 하는 거야!"
역무원이 소리쳤다. 하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자국을 깊게 패버렸다. 화상처럼. 화상 자국처럼.
"시준!"
한수현이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나를 잡았다. 밀어냈다. 아니, 깨웠다.
몸이 한 순간 자유로워졌다. 손이 내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한 순간이었다.
"유리는... 어디?"
한수현을 봤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진정한 두려움.
"박준호의 사무실이야. 신촌에 있는 구원회 본부. 난 그 주소를 몰라."
한수현이 내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곳에는 흉터가 있었다. 자국 같은 흉터. 본 적이 없었다. 또는 본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흉터. 넌 이걸 알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흉터를 보는 순간, 뭔가 가슴을 찔렀다. 통증이 아니라 기억의 편린이었다. 화염. 누군가의 팔. 그리고 극심한 절망감.
"이건 박준호의 표식이야."
한수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넌 시준. 열 번째 사람이야. 구원병원 화재에서 죽어야 했던."
"열 번째?"
"아홉 명의 시체. 그리고 넌 살아있었어. 왜 살아있었는지는 몰라도. 박준호는... 그놈은 넌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
한수현이 나를 다시 잡았다. 이번엔 더 강하게.
"유리는 미끼야. 넌 지금 거기로 가면 안 돼. 넌 지금 너 자신이 아니야. 넌 내부에 누군가를 가지고 있어."
팔을 봤다. 여전히 경련하고 있었다. 민지영의 저주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수면상태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깨어나고 있었다.
"저는... 누구예요?"
한수현에게가 아니라 내 몸 안의 누군가에게 물었다.
한수현이 대답했다.
"넌 의사 박시준이야. 10년 전 구원병원의 의사. 그리고 박준호의 아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내 눈물이 아니었다.
플랫폼의 선로 위에서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타다 남은 것처럼. 그리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선로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강남역의 모든 사람을 대피시켜요."
한수현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왜?"
"이제 불이 시작될 거야. 다시. 또 다시. 그리고 이번엔..."
팔이 들어올려졌다. 손가락이 강남역의 천장을 가리켰다.
"이번엔 유리가 불을 낼 거야. 그리고 넌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