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 수집가 4화
지하철역 계단 아래에서 손을 불태웠다.
폐병원에서 나온 지 이틀, 박준호의 추격을 피해 강남역 지하통로를 헤매던 중이었다. 검은 승용차 두 대가 에스컬레이터 입구를 막으면서 모든 게 끝났다. 본능이 나를 계단 아래로 내몰았다. 손이 금속 난간에 비비며 내려가다가 마지막 세 계단을 건너뛰고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손등에 화상 같은 따가움이 남았다.
손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빨갛게 벗겨진 피부 위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내 왼손이 누군가를 밀어낼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 조각인지 실제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박준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시준을 찾으면 보고하라.' 그 뒤에 나를 노리는 저주의 무게감. 마치 수심 깊은 바다에서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리는 듯한 느낌이 가슴을 짓눌렀다.
"도와줄까?"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팔의 남자가 서 있었다. 왼쪽 팔이 팔꿈치 아래에서 끝나 있었고, 검은색 셔츠 소매가 끝부분에서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흉터 같은 선이 있었는데, 그것이 상처인지 피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괜찮습니다."
일어나려 했다. 손가락이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남자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위협처럼 느껴졌다. 박준호가 나를 찾으면 끝이라는 확신이 뼈를 타고 흘렀다.
"내 이름은 김태훈입니다."
남자가 한 발 물어섰다. 팔을 내린 채로 서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자조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팔이 없다는 사실을 매번 재확인하는 듯한 속도로.
"시준입니다."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무언가가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저주였다. 그의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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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극도로 응축되어 있었다. 마치 흑연 덩어리처럼, 손가락에서 어깨까지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 저주 속에는 절망이 있었다. 끝없는 절망.
"손을 놓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왜?"
"모르겠습니다."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저주가 내 팔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주 속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둠. 손이 밀어낸다. 타이어가 간다. 팔이 떨어져 나간다. 구부러지지 않는 각도로.
내 왼팔을 관통하는 통증. 뼈가 으스러지는 환각. 근육이 경련하는 감각. 내 몸 안에서 무언가가 비틀렸다. 팔이 으스러지는 뼈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근육 경련의 온도가 피부를 태웠다. 마치 그 팔이 김태훈의 팔과 함께 비틀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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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땅 위에 누워 있었다.
계단 아래 조명이 희미한 공간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의 타일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위에 먼지가 얼마나 쌓여 있는지 세려고 했다. 세기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했다. 다섯을 센 다음 여섯을 세려면, 다섯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다섯을 기억하고 있었나?
"시준?"
김태훈이 내 옆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정상이었다. 저주가 걷혀 나갔다. 절망이 그의 눈에서 사라졌다.
"괜찮습니까?"
"모릅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이 젖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팔로는 자신의 얼굴을 덮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떨고 있었다.
"고마합니다."
"뭐가요?"
"저를 살려줬습니다."
그를 보았다. 정말로 그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저주가 빠져나간 자리에 무언가 다른 것이 차오르고 있었다. 절망이 아니라 다른 것. 내가 그를 구원했다는 확인.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뭐하죠?"
"모릅니다."
나는 내 이름을 기억했다. 시준. 내 이름은 시준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제도 기억나지 않았다. 일주일 전이 기억나나? 기억나지 않았다.
내 왼쪽 손목의 흉터를 봤다. 누군가의 손가락 자국처럼 보이는 그 흉터. 언제 생겼는지, 왜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것이었다.
"저를 도와주신 분은?"
김태훈이 물었다.
"누구죠?"
"제가 알고 싶은데요."
한팔로 일어나려 애썼다. 그의 팔꿈치를 잡아 들어올렸다. 그 순간,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손이 누군가를 밀어낸다. 타이어가 간다. 팔이 떨어진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시준?"
김태훈이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네."
"혹시 당신이 저를 아세요?"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팔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를 도와주셨어요."
나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돕는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유리'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기억했다. 아니다, 화면에서 읽었다. 내 손가락은 자동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시준 오빠!"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공포로 떨리는 목소리.
"무슨 일이야?"
"저를 도와줬던 그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누가?"
"아저씨라고 해요. 그리고..."
유리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말해요. 당신 때문에 자신의 딸이 죽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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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철역을 빠져나갔다.
김태훈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한팔은 흔들렸다. 유령 같은 팔의 움직임.
거리는 밤이었다. 강남역 위쪽 거리. 네온사인들이 어둠 위에 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구도 내가 무서워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유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유리가 어디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기억났다. 공포로 떨리는 그 음성.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전화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발신 기록에는 '한수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시준. 뭐 했어?"
목소리가 냉정했다.
"유리가 누군가에게 잡혔대요."
"누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말했대요. 제 때문에 자신의 딸이 죽었다고."
침묵이 흘렀다.
"박준호가 찾아갔나?"
"박준호?"
"너를 노리는 사람이다."
내 손이 떨렸다. 왼손이 떨렸다. 그 손가락 자국이 있는 손이.
"유리는 어디 있어요?"
"모르지. 하지만 박준호가 그녀를 가져갔다면..."
"그럼 어떻게 돼요?"
"넌 끝이다."
한수현이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거리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구도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단지 내 이름이 시준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그것도 얼마나 더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태훈이 내 팔을 잡았다.
"당신이 저한테 뭘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이 위험해 보여요."
그를 보았다. 한팔뿐인 남자. 하지만 그의 눈은 또렷했다.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의 눈. 내가 그걸 알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유리라는 아이를 알아요?"
"모르는데요."
"전화를 받았어요.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잡혔대요."
"그럼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아요?"
"할 수 없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왜요?"
"모르겠어요."
김태훈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팔이 흔들렸다. 공중에서 맴도는 팔.
"저도 모르는 게 있어요."
"뭐요?"
"제 팔을 잃은 날. 누가 저를 밀었는데, 그 사람의 얼굴이 안 보였어요. 어둠이 너무 짙었나? 아니면 제 눈이 감겨있었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손가락의 감각은 잊혀지지 않아요."
그가 내 손가락을 바라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손을 봤다. 왼손. 그 손가락들.
"당신의 손가락이 저를 밀었어요."
내 손이 떨렸다. 이미 떨리고 있었다.
"제가?"
"기억 안 나세요?"
"네. 기억이 안 나요."
"그게 더 무서워요."
김태훈이 말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당신을 밀어낸 사람을 기억해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못 봤어요. 당신은 저를 도와줬어요. 하지만 왜 했는지는 기억 못 하세요. 이게 맞아요?"
"네."
"그럼 당신이 처음부터 뭘 한 사람이냐는 거예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걸 모르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한수현이었다.
"박준호가 유리를 데려갔다."
"그리고?"
"이준희도 사라졌다."
"이준희?"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10년 전 화재에서..."
"죽었던 사람?"
"그래.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 살아있었어. 그리고 지금 사라졌어."
한수현의 말이 끊겼다.
"뭐요?"
"박준호의 딸이 유리라는 정보가 있어."
"뭐?"
"화재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박준호의 딸. 그 아이가 유리일 수도 있다는 거지."
정보들이 얽혀 있었다. 유리. 박준호. 화재. 죽은 딸. 살아있는 딸. 내 호흡이 가빠졌다. 손가락 자국을 확인했다. 여전히 그 자국이 있었다.
"그럼 유리를 데려간 건 박준호 자신이라는 뜻인가요?"
"아니다. 박준호는 아직 서울 외곽에 있어. 하지만 그의 사람들이..."
전화가 끊어졌다.
김태훈을 봤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보고 있었다.
"같이 가자."
"어디로요?"
"모르겠어요."
"모르는데 간다고요?"
"네."
김태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극적인 웃음이었다.
"알겠어요. 저는 어차피..."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다시 봤다.
"당신이 저를 밀었다면, 저를 도와준 이유가 뭐예요?"
"모르겠어요."
"그럼 이제 저를 또 밀 건가요?"
목소리에는 공포가 아니라 이상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래도 같이 가겠어요."
김태훈이 한팔로 일어섰다.
우리는 거리를 나섰다. 밤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보고, 누군가는 친구와 웃고, 누군가는 피곤해 보였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한팔의 남자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
내 발이 향한 곳은 강남역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길이었다. 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발은 기억하고 있는 길.
"어디가 맞는지 알아요?"
김태훈이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이 길이 맞는 것 같아요."
"당신 말이 좀 이상해요."
"뭐가요?"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거."
웃음이 나왔다. 비극적인 웃음이었다.
거리가 변했다. 네온사인이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건물들이 낡아 보였다. 마치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길.
"여기... 본 적 있어요."
김태훈이 말했다.
"어디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팔이 여기서 끊어진 것 같아요."
우리 앞에 건물이 보였다. 낡은 건물. 창문이 깨져있었다. 간판은 떨어져 있었고,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화재의 흔적.
구원병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디예요?"
김태훈이 물었다.
내 입에서 이름이 나왔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이름.
"10년 전 화재가 난 병원이에요."
"그럼 제 팔은..."
"여기서 끊어졌어요."
"그럼 당신도..."
"여기 있었어요."
병원 입구에 섰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여자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오셨네요."
이준희가 말했다.
"당신이..."
"저예요. 10년 전에 당신이 불 속으로 밀어낸 사람."
"당신은 죽었어야 했는데..."
"맞아요. 죽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왜 살아있냐고 하고 싶으신 거죠?"
이준희가 웃었다. 그 웃음 속에 뭔가 인간이 아닌 것이 섞여 있었다.
"유리는?"
"안에 있어요. 그리고 당신도 알 거예요. 이제 기억해야 할 시간이 왔어요."
"기억?"
"네. 당신이 왜 저를 불 속으로 밀어냈는지. 왜 이 병원이 화재에 휩싸였는지.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이준희가 내 손을 잡았다. 왼손. 손가락 자국이 있는 손.
"당신의 손을 기억해요."
그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으로 가득 찼다.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상(像)이었다.
불이 타오르는 병원.
누군가의 비명.
작은 아이의 울음.
내 손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모습.
하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누구죠?"
"당신이 밀어낸 사람이 누구냐고요?"
"아직 모르세요?"
이준희가 웃었다.
"그 사람이 바로..."
병원 깊숙한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유리의 비명이었다.
이준희의 손을 뿌리쳤다. 병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준!"
김태훈이 뒤를 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달렸다. 벽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10년 전 화재의 흔적들이 모두 남아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발이 계단을 세지 않았다. 마치 이 길을 몇 번이나 걸어본 것처럼.
지하는 더 어두웠다. 손전등도 없이 어둠 속을 헤맸다. 하지만 발이 길을 알고 있었다.
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는 길.
지하 깊숙한 곳에 문이 있었다. 금속 문. 그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폐기'
문을 밀었다.
안에는 침대들이 있었다. 낡은 침대들. 그 침대 위에는...
"유리?"
외쳤다.
침대 위의 형체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리가 아니었다.
침대 위에는 어린 아이가 누워있었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랫동안 누워있던 몸이 처음 움직이는 것처럼. 숨도 얕았다. 마치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이.
눈이 어두움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윤곽이 보였다. 마른 팔. 창백한 피부. 그리고 그 얼굴.
맥박이 폭주했다. 호흡이 끊어졌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다. 이건 불가능하다.
침대 위의 아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입 안에서 단어들이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1초, 아니 그보다 짧은 시간 동안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당신이 저를 여기에 남겨두셨어요."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박준호'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이미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
수신 버튼을 눌렀다.
"시준."
목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
"저는 당신의 아버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