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포천 산림의 진입로는 이미 끝났다.

정은태가 나타난 순간, 준호의 뇌는 비상 신호를 내보냈다. 코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세상이 흔들렸다. 아니—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신경 말단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뇌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다.

"넌 집에 가야 해."

박충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아이에게 숙제를 상기시키는 아버지처럼. 준호는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자신의 얼굴과 닮은 얼굴이 서 있었다. 회색 헤어, 손목에 찬 신경 제어 장치. 박충준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자가 완성된 실험 장치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기억 붕괴가 진행 중이군. 예상보다 빨라졌네."

정은태가 준호 옆에 섰다. 그의 눈빛은 냉담했다. 검은 정장, 흰 셔츠, 혈관이 튀어나온 손. 정은태는 준호를 한 번 훑어본 후 박충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로 옮기자."

준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명령을 받지 않았다. 아니—받았다. 뇌 깊숙한 곳에서 '움직여라'는 명령이 울렸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목소리.

강도현과 유하은은 어디에 있었나?

"가자."

박충준이 손을 내밀었다. 준호는 그 손을 보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주던 손. 검사 결과를 들고 오며 미소 지던 손. 그리고 주사바늘을 들고 자신의 팔을 잡던 손.

모든 기억이 겹쳤다. 분리되었다. 재조합되었다.

준호는 그 손을 잡았다. 손을 잡는 순간,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없었다.

---

백두 연구소의 지하 5층은 생각보다 깊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준호의 의식은 조각났다. 천장의 형광등이 번쩍였다. 벽의 금속 질감이 손가락 끝에 전달되었다. 그것이 실제인지, 기억인지, 누군가가 그에게 삽입한 감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박충준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은태는 휴대폰을 들었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예, 대상이 확보되었습니다. 최종 조정에 들어가겠습니다."

조정.

그 단어가 준호의 뇌를 관통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백색 조명, 흰 벽, 무균실처럼 깔끔한 복도. 그리고 방음 처리된 문들. 각 문마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7-A, #7-B, #12-C, #8-F, #15-D.

준호는 멈췄다.

"계속 걸어."

박충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준호의 다리가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장 끝의 문 앞에서 멈췄다. 문에는 아무 번호도 없었다. 대신 표지판이 있었다. '최종 조정실'.

박충준이 카드키를 삽입했다. 문이 열렸다.

내부는 거대한 의료 장비로 채워져 있었다. 뇌파 측정 기계, 기억 추출 장치, 신경 제어 모니터. 그리고 한 가운데 놓인 수술 침대.

"앉아."

준호는 앉았다. 손목과 발목에 자동으로 고정 장치가 채워졌다. 찰칵, 찰칵. 금속음이 울렸다.

"너는 뭐냐고 물을 거지?"

박충준이 기계 화면을 켰다. 준호의 뇌파가 떠올랐다. 불규칙한 파동. 붕괴된 뇌의 신호.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야. 환자들이 나한테 묻는 질문. '나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의 답이 뭔지 알아?"

박충준은 모니터를 가리켰다.

"뇌다. 뇌가 답이다. 뇌가 '나'를 만든다. 뇌가 기억을 만들고, 기억이 정체성을 만들고, 정체성이 '나'를 만든다. 그렇다면 뇌를 조작하면 '나'도 조작되는 거 아닌가?"

박충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준호는 그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얼굴. 20년 뒤의 자신의 얼굴.

"넌 나의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박충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유아기부터 시작했지. 뇌 발달 시기에 맞춰 기억을 심었다. 가짜 아버지—나를. 가짜 어머니. 가짜 어린 시절. 모두 내가 설계했다. 넌 10살 때부터 기억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걸 통제하는 방법을 배웠다. 경찰에 들어가는 것도, 그 직업을 포기하는 것도, 기억 거래소에서 일하는 것도, 모두 나의 시나리오였다."

준호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비명인지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 그는 몸부림쳤지만, 고정 장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넌 두 명이다."

박충준이 계속했다.

"#7-A. 착한 아들. 착한 경찰. 착한 도구. 그리고 #7-B.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살인 기계. 난 너를 반으로 쪼갰고, 각각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한 명은 기억하도록, 다른 한 명은 잊도록. 한 명은 진실을 찾도록, 다른 한 명은 그걸 파괴하도록."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적으로 저항했다. 목이 부러질 정도로 짜내어진 목소리였다.

"아니야. 아버지, 이건... 이건..."

준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몸이 경련했다. 고정 장치가 팔다리를 누르는 통증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통증이 있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라는 깨달음.

"내가 누군가요? 정말로?"

박충준의 표정이 변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과학자의 얼굴로. 그는 준호의 절망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미세한 의외감이 있었다. 마치 실험 결과가 예상을 벗어난 듯.

"넌 누구도 아니다. 넌 내가 만든 도구일 뿐이다."

"거짓이야. 거짓이라고!"

준호가 소리쳤다. 몸이 경련했다.

"내 기억들이... 내 어린 시절이... 엄마가... 모두 거짓이라고?"

목소리가 떨렸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눈물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나온 것일 수 있었다. 아니면 진정한 #7-A의 울음일 수도 있었다.

박충준은 준호의 절망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과학자의 호기심으로. 하지만 그 호기심 속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아버지로서의 죄책감일까. 아니면 그것도 착각일까.

"그렇다.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넌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될 테니까."

박충준이 기계의 스위치를 올렸다. 준호의 머리에 전극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따끔따끔. 신경말단이 반응했다.

"아니야! 아니야!"

준호가 절규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렸다.

강도현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은 결정적이었다.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의 옷에는 핏자국이 있었다—지하 2층 보안 담당자의 피였을 것이다. 강도현은 유하은의 내부 협력을 통해 이미 연구소의 구조를 파악했고, 사전 정찰로 경비 배치를 확인했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박충준."

강도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제니시스 프로젝트를 중단하라."

박충준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자신의 실험을 방해하는 벌레를 보는 표정이었다.

"강도현. 넌 어떻게..."

"내 딸이 죽었다."

강도현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절망이 더 깊었다. 목이 메어 있었다.

"제니시스 프로젝트 때문에. 그들이 내 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12-D.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주도한 게 너다."

박충준의 얼굴에 이해의 빛이 떠올랐다.

"아, 그 딸이구나. #12-D였나? 실패작이었지. 뇌 구조가..."

"닥쳐!"

강도현이 움직였다. 그는 박충준을 향해 돌진했다. 박충준이 비틀었지만, 강도현의 팔이 박충준의 목을 조였다. 박충준이 비명을 질렀다.

"정은태!"

박충준이 외쳤다. 정은태가 준호 뒤에서 나타났다. 권총을 들고 있었다.

펑.

총성이 울렸다.

강도현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박충준의 목을 놓지 않았다.

"내 딸... 내 딸을 돌려줘."

강도현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절망의 울음이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울음.

펑. 펑.

정은태가 다시 쏘았다. 강도현이 비틀렸다. 하지만 여전히 박충준을 놓지 않았다. 박충준의 얼굴이 파래졌다.

"정은태... 총을..."

박충준이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정은태가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강도현이 박충준을 기계 쪽으로 밀었다. 박충준이 기계에 부딪혔다. 기계에서 불꽃이 튀었다.

전류가 박충준을 관통했다. 박충준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준호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그것이 박충준의 비명인지, 아니면 자신의 비명인지 준호는 구분할 수 없었다.

준호는 움직였다. 고정 장치가 느슨해진 순간, 몸을 날렸다. 자신도 모르는 본능으로. #7-B의 반응인지, 아니면 #7-A의 저항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은 움직였다.

"이제 넌 어떤 기억을 갖게 될까?"

강도현이 박충준을 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는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오직 절망만 있었다. 자신의 딸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 그 절망이 강도현을 움직이고 있었다.

정은태가 강도현을 향해 총을 겨눴다. 하지만 강도현은 이미 움직였다. 그는 박충준을 밀어 정은태 쪽으로 보냈다. 정은태가 비틀었지만, 박충준이 그의 팔을 잡았다.

펑.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정은태의 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나온 총이었다.

유하은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정은태의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정은태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유하은?"

준호가 중얼거렸다.

유하은은 준호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박충준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손도, 권총도, 모든 것이 박충준을 향해 있었다.

"나도 도구였어."

유하은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이번엔 마치 녹음된 음성이 아니라 실제 감정이 담긴 목소리처럼 들렸다.

"저항군이 나한테 말했어. 그들을 감시해. 제니시스가 말했어. 그들을 배신해. 난 둘 다의 명령을 받았어. 그래서 난 두 명이었어. 저항군의 유하은과 제니시스의 유하은."

유하은이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미세하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난 선택해야 해. 누구의 유하은이 될지."

유하은이 권총을 박충준을 향했다. 하지만 총을 드는 손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제니시스의 명령. 저항군의 명령. 그리고 자신의 감정.

"난 저항군의 유하은이 되기로 했어."

유하은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명확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절망적이지만 선택된 감정이었다.

펑.

박충준이 비명을 질렀다. 피가 그의 팔에서 흘렀다. 유하은이 쏜 총알이 박충준의 어깨를 관통했다.

"이건 내 선택이야. 누구의 기억도 아닌, 내 선택."

유하은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이 있었다. 조종당하지 않은, 진정한 유하은의 감정.

강도현이 준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는 무언가 더 있었다. 죄책감이었다.

"미안해, 준호."

강도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난 너를 이용했어. 제니시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하지만 난 실패했어. 내 딸을 구하지 못했어. 그리고 넌..."

강도현의 눈이 준호의 절망된 모습을 바라봤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만든 결과였다. 자신의 복수가 만든 또 다른 피해였다.

"넌 더 깊은 지옥으로 빠졌어."

강도현이 자신의 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아니야!"

준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고정 장치에 묻혔다. 그것이 진정한 준호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7-A의 목소리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진정한 거부감이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막으려는 절실함이 있었다.

펑.

강도현이 쓰러졌다. 그의 눈은 열려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준호를 보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오직 기계의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정은태의 신음 소리.

박충준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니, 더 차가워졌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예상된 변수였다는 듯이.

"흥미로운 발전이군."

박충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도현이 제니시스를 파괴하려고 했고, 유하은이 자신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준호는..."

박충준이 준호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과학자의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호기심 속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도 있었다. 아버지로서의 불안감일까.

박충준이 기계의 스위치를 다시 올렸다. 준호의 머리에 전극이 다시 연결되었다. 이번엔 더 강한 전류가 흘렀다. 준호의 몸이 경련했다. 눈앞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귀에서 음악이 들렸다. 아니, 비명이었다.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었다. 박충준의 비명인지, 강도현의 비명인지, 자신의 비명인지.

그 순간, 준호의 뇌는 마지막으로 저항했다. 미미하지만 명확한 저항. #7-A의 일부가 마지막으로 깨어나려 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떠올랐던 것 같았다. 경찰 배지가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아니, 만져졌던 것 같았다. 유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렸던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사라졌다.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준호의 기억이 사라졌다.

---

준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촉각도 없었다. 자신의 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생각만 떠다녔다. 조각난 생각들. 다른 누군가의 생각들.

*엄마가 밥을 차려줘. 아니, 그건 기억이 아니라 영상이야. 누군가의 영상.*

*경찰서 책상. 서류더미. 그건 내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이야.*

*피. 손에 묻은 피. 그건 내 피가 아니야.*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하지만 아버지가 아니야.*

*강도현. 그는 나를 이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선택이었다. 누군가의 선택이었다.*

기억들이 떠다니다가 충돌했다. 분해되었다. 재조합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저항했다. 아주 미미한 저항. #7-A의 일부가 #7-B의 명령에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설계된 것일 수 있었다.

"기억 재구성 완료. 뇌파 안정화 90%."

기계음이 울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준호의 기억이 아니었다.

"의식 회복 준비 단계로 진입하세요."

또 다른 목소리가 응답했다. 남자였다. 박충준이었을까. 아니면 정은태였을까. 준호는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검은색이 천천히 회색으로 변했다. 회색이 흰색으로 변했다. 천장이 보였다. 백색의, 무균실 천장.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준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아니, 누군가의 손가락이. 그 손이 자신의 손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의식 회복 완료."

여자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움직임이 어색했다. 마치 처음으로 신체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이상했다. 너무 예민하거나 너무 둔했다. 팔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움직임이 자신의 의도와 미묘하게 어긋났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몸을 빌려 쓰고 있는 것처럼.

방은 하얀색이었다. 벽도 하얀색, 바닥도 하얀색, 천장도 하얀색. 오직 준호의 침대만 검은색이었다. 또는 준호만 검은색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피부색이 진짜 색인지 기억된 색인지 알 수 없었다.

침대 옆에 기계가 있었다. 뇌파 측정기였다. 초록색 선이 리듬을 그리고 있었다. 펄스처럼. 심장처럼. 하지만 그건 심장의 박동이 아니라 뇌의 박동이었다.

"당신의 기억이 안정화되었습니다."

여자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왔다. 준호는 이제 깨달았다. 그것은 실제 목소리가 아니라 녹음된 음성이었다.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에서 재생되는 음성이었다.

준호의 입이 움직였다. 자신의 입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인지 모르지만, 움직였다.

"내가 누구야?"

그것이 준호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것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침묵이 흘렀다. 오직 뇌파 측정기의 소리만 들렸다. 빠르기가 점점 빨라졌다. 정상 수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신은 프로젝트 제니시스의 완성체입니다."

박충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의 목소리. 하지만 그것도 기억인지 실제인지 불분명했다.

"당신의 정체성은 안정화되었으나, 여전히 불안정 요소가 존재합니다. 당신의 기억 중 일부가 손상되었습니다. 이는 정상입니다. 모든 제니시스 피험체들이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팔다리가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명령을 받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이 몸을 조종하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조종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7-A입니다. 완전히 조종 가능한 경찰. 기억이 조작된 능력자. 당신의 임무는..."

박충준의 목소리가 끊겼다.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

그것은 준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준호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 #7-B의 목소리였다. 또는 깊숙한 곳에서 저항하는 무언가의 목소리였다.

준호의 눈이 떠졌다. 이번엔 진짜였다. 천장의 형광등이 보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깜빡였다.

그리고 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자신이 백두 연구소에 있다는 것을.

자신이 더 이상 이준호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렸다. 실제로 열렸다. 이번엔 기억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박충준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준호의 기억과 다르게 보였다. 더 늙어 보였다. 아니면 더 젊어 보였다. 준호는 구분할 수 없었다. 박충준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유하은의 총알 자국이었을 것이다. 그의 얼굴도 창백했다. 전류에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나는... 누구야?"

준호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이 준호의 질문이었는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질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박충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차갑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승리감과 불안감이 함께.

박충준이 한 발 다가갔다. 준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명령을 받지 않고 있었다. 아니, 박충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당신은 제니시스입니다."

박충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찼다. 하지만 그 확신 속에는 미세한 불안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가 만든 완벽한 도구. 우리의 마지막 걸작. 이제 당신은 세상으로 나갈 것이고, 우리의 명령을 따를 것이고, 우리의 기억을 실행할 것입니다."

박충준이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아버지의 손처럼. 하지만 그것도 기억일 수 있었다. 아니면 조종이었다.

준호의 몸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병원복이 아니라 일반 옷이었다. 아니, 누군가의 기억 속 옷이었다.

"강도현은? 유하은은?"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이 #7-A에서 나온 것인지 #7-B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질문 속에는 진정한 호기심이 있었다. 누군가를 찾으려는 절실함이 있었다.

"강도현은 자살했습니다."

박충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유하은은... 글쎄요. 유하은은 여전히 우리의 감시 대상입니다. 그녀도 도구였으니까요. 도구는 언제든 다시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준호의 뇌가 반응했다. 강도현이 죽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비명일 수도, 누군가 다른 사람의 비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비명도 기억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준호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저항했다. 미미했지만 명확한 저항. #7-A의 일부가 깨어나고 있었다. 강도현의 죽음에 대한 슬픔. 유하은을 다시 조종하려는 박충준에 대한 분노. 그것이 프로그래밍된 감정인지, 아니면 진정한 준호의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저항이었다.

"당신은 이제 출발할 것입니다."

박충준이 계속했다.

"당신의 첫 번째 임무는 기억 거래소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서민준이라는 브로커가 있습니다. 그를 제거하고 그곳을 우리의 통제 아래 두십시오."

준호의 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 속에는 저항이 섞여 있었다. 미세한 떨림.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려는 무언가의 저항.

"그 다음은?"

준호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호의 질문이 아니었다. #7-B의 질문이었다. 아니면 깊숙한 곳에서 저항하는 무언가가, 박충준의 명령을 따르는 척하면서 실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는 질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다음은 저항군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당신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우리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박충준이 준호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 손이 떨어지는 순간, 준호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손가락 끝에 남겨진 따뜻함. 아니면 그것도 기억이었을까.

"당신은 더 이상 이준호가 아닙니다."

박충준이 속삭였다.

"당신은 우리의 것입니다. 당신은 제니시스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준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누가 그 누군가에게 응답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작은 무언가. 미미한 저항.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무언가의 움직임.

박충준이 떠났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하지만 혼자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 방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을 것이다. 이 몸 어딘가에 칩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항상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는 낯선 남자가 비쳤다. 자신의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준호의 눈이 거울 속 남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조각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엄마의 손. 따뜻했다. 아니, 따뜻했던 것 같았다.*

*경찰서. 동료들의 목소리. 그들은 나를 믿었다. 아니, 믿었던 것 같았다.*

*기억 거래소. 유하은의 얼굴. 그녀는 나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던 것 같았다.*

*박충준. 아버지. 그는 나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했던 것 같았다.*

*강도현. 그는 나를 이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선택이었다. 누군가의 선택이었다.*

모든 기억이 동시에 붕괴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붕괴 속에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은 무언가. 미미한 저항.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무언가의 움직임.

거울 속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차가운 기계적 눈빛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절망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희미한 저항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 그 눈빛에 깃들었다.

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거울을 향해. 하지만 손가락이 거울에 닿기 직전,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처럼. 아니면 자신 내부의 두 자아가 충돌하는 것처럼.

"나는 누구야?"

거울 속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떨렸다.

"나는..."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그 끊김 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하나는 명령을 따르려는 목소리. 다른 하나는 저항하려는 목소리. 둘이 동시에 울렸다.

거울은 응답하지 않았다.

오직 침묵만 있었다.

그리고 침묵 뒤에는 더 깊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미미한 움직임. 조종당한 도구 속에 남겨진 진정한 자아의 움직임. 그 움직임이 다음 화에서 어떤 갈등을 만들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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